레오나르도는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의 유명한 공증인인 세르 피에르의 아들이었지만 적자가 아닌 사생아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다른 나라들 보다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귀족 가문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일반 사생아들은 의사도 약사도 될 수 없었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역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 세르 피에르는 어렸을 적부터 데생에 소질을 보이던 아들 레오나르도를 안드레아 델 벨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보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합법적인 아들이었다면 아버지는 그를 공증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의사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와 같은 출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화가는 그나마 나은 직종이었을 것이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다른 견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바닥 청소나 잔심부름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붓을 닦고 안료를 빻는 일 등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배웠다. 레오나르도는 열심히 그림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승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스승과 동등하게 짝을 이뤄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스승이 그리다 만 그림의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려 넣었다. 제자의 솜씨는 스승을 놀라게 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승은 나이 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날 이후로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훗날 레오나르도는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무능하다”라고 말했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는 스승인 베로키오 말고도 보티첼리를 비롯해 유명한 여러 예술가들을 곁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단지 그들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해 나갔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술은 자연의 딸이다. …… 다른 예술가의 방식을 흉내내지 말라. 그렇다면 예술은 자연의 딸이 아니라 자연의 손녀가 되고 말테니까.”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 조합에 가입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472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다. 이제 자신의 공방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실력을 더 키우기 위해 스승 베로키오의 조수로 남았다.
이 시절 레오나르도의 그림 실력은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점이 있었다. 주문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시키지 않는 일이 잦았다. 1478년 처음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단독으로 맡았을 때도 밑그림만 겨우 그리고 그만 두었다. 1481년에 주문 받은 제단화인 <동방 박사의 경배> 역시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런 습관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그가 그린 것이 분명한 완성작의 수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점을 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걸작, <모나 리자(La Joconde, portrait de Monna Lisa)>(15세기경)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이지만, 언제, 누구를 모델로 하여 그려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는 레오나르도가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고, 기록들, 예를 들어 주문서와 같은 것도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인 바자리(Giorgio Vasari, 1511- 1574)의 저작, 『미술가 열전 (Le Vite de Piu Eccelenti Pittori. Scultori et Architeili Italiani)』(1550)에 근거하여 작품 속 여인의 신원을 추정했다.
이 책에서 바자리는 시터(sitter), 즉 초상화의 모델이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 1465-1538)의 부인 리자(Lisa del Giocondo, 1479-1551 또는 1552년경)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이 작품은 ‘리자 부인’이라는 뜻의 <모나 리자(Monna Lisa, 여기서 ‘모나’는 ‘마돈나(Madonna)’의 준말로, ‘부인’을 뜻함)>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왜 주문자에게 인도되지 않고 작가의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가 후일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작품 속 여인의 신비로움은 그의 미소에 의해 더욱 고조된다. 여인의 미소를 묘사하기 위해 레오나르도는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스푸마토’란 이탈리아어로 ‘흐릿한’ 또는 ‘자욱한’을 뜻하는 말로, 인물의 윤곽선을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해 경계를 없애는 방법이다. 레오나르도는 특히 여인의 입 가장자리와 눈 꼬리를 스푸마토 기법으로 묘사함으로써 여인의 미소를 모호하지만 부드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모호함과 신비로움은 여인의 미소뿐만 아니라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레오나르도는 인물 뒤 풍경을 묘사하면서 대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을 사용하고 있는데, 대기원근법이란 사물들 간의 관계를 기하학적으로 계산해 배치하는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과 달리, 색채의 조정을 통해 대기의 효과를 묘사함으로써 공간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는 가까운 곳의 풍경은 붉은 색조를 사용해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한 반면, 먼 곳의 풍경은 청색조를 사용하고 윤곽선을 흐릿하게 묘사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공간이 뒤로 물러나는 듯 보이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화면 밖을 주시하고 있는 여인의 상체는 화면에서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인의 몸은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어서 관람자가 보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배경에 묘사된 풍경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데, 이는 인물 좌우의 풍경 속 지평선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졌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강이 흘러나가는 물길을 표현하면서 마치 인물 오른쪽의 지평선이 더 높은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도록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왼편에서 인물을 관찰할 때와 오른편에서 인물을 관찰할 때의 느낌이 다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풍경은 이상화된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자연에서 관찰되는 지리학적인 특징들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머리카락과 의복의 선과 같은 인물을 묘사하는 요소들을 서로 조화되도록 배치함으로써 배경과 인물을 통합하고 있다.
모나리자는 15세기경 시대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미술계에서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거의 모두들 알고있다. 모나리자는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을 이용하여 특히 여인의 입 가장자리와 눈 꼬리를 스푸마토 기법으로 묘사함으로써 여인의 미소를 모호하지만 부드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모나리자라는 모델의 이름은 1세기 바사리에서 비롯 되었다.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란체스코 조콘도의 아내 몬나 리사(Monna Lisa)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나리자의 원래 발음은 몬나리사였다. 몬나는 마돈나(madonna)의 의미로 귀부인에게 붙여주는 칭호이고 리사는 엘리사벳의 약자다. 그래서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모나리자'를 남편의 성인 '조콘도(혹은 지오콘도)'를 쫓아서 여성형이 '라 조콘다(라 지오콘다)'라고 부른다. 또한 모나리자의 오묘한 미소로, 그안에는 모든것을(생각과 감정) 그리고자 했던 영원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신비가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