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경》(茶經) <칠지사>(七之事)에는 검소와 청렴을 즐기는 다인들의 일화가 몇몇 소개되어 있다.
육우(陸羽)는 《안자춘추》(晏子春秋)의 기록을 인용하여 안영(晏嬰)의 검소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을 지낼 적에 식사는 겉껍질 벗긴 쌀로 지은 밥에 고기 구이 세 꼬치와 알 다섯 개, 그리고 차와 나물이 고작이었다.”(嬰相齊景公時 食脫粟之飯 炙三弋五卵茗萊而已)
일국의 재상의 식사로는 매우 검소하다.
또 《진서》(晉書)의 기사를 인용하여 육납(陸納)의 검소함을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육납이 오흥태수로 있을 때에 위장군 사안이 늘 한번 예방하고 싶어했다. 납의 조카 숙은 손님이 온다는데도 삼촌이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감히 그 이유를 묻지는 못하고 가만히 수십 명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장만해 두었다. 사안이 도착하자 과연 음식 차림이 차와 과일뿐인 걸 보고 숙이 드디어 성찬을 차려 내 놓았는데 진기한 음식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사안이 돌아가고 나자 육납은 조카에게 매를 마흔 대나 때리고 말했다. ‘너는 일찌기 숙부의 명예를 빛나게 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나의 평소의 업을 더럽히는고.’”(陸納爲吳興太守時 衛將軍謝安常欲詣納 (晉書 以納爲吏部尙書) 納兄子俶怪納無所備 不敢問之 乃私蓄數十人饌 安旣至 所設唯茶果而已 俶遂陳盛饌 珍羞必具 及安去 納杖俶四十云: 汝旣不能光益叔父 奈何穢吾素業)
두 일화 모두 참으로 검소함의 극치들이다. 정말로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 높으면 쉬 교만하고, 조금 있으면 쉬 사치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 기사들을 보면 다성(茶聖)이 청의 정신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가를 넉넉히 알 수 있다.
청의 정신은 인생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의 소산이다. 청의 정신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의 경험이 있는 사람 아니고는 절대로 갖기 어렵다.
고대 서양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청의 정신을 자신의 몸으로 체현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아시아 지방(지금의 터어키 지방)의 어느 폴리스 출신이었으나 날 때부터 늘 병약한 몸이었고 어떤 정치적 사유로 말미암아 자신의 고향에서 추방까지 된 사람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복이라고 할 때 일차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부와 건강이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하겠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점에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병약한 몸에 고향에서 추방된 그로서는 사랑이나 존경 같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역만리 아테네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참으로 궁핍하기 그지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행복에 이르는 묘리를 터득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지극히 불행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 불행한 삶을 그대로 지극한 정복(淨福)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일반적으로 행복에 대한 지수는 ‘달성(達成)/욕망(慾望)’이라는 함수관계쯤에 해당된다. 여기서 보통 사람들은 분자인 달성의 수치가 올라가면 행복의 정도도 더해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부나 건강, 사랑과 존경을 얻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뼈저리게 겪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설혹 어렵사리 쾌락이나 욕망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결코 그쯤에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욕망의 달성은 반드시 또 다른 욕망을 향한 시발점에 서게 되는 불쾌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쾌락의 역리(逆理)’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진정한 행복을 얻는 데에는 분자인 달성을 높이려는 방법으로서는 어렵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가 발견한 방법은 분모인 욕망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가 발견한 청의 정신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수신서로 오래동안 사랑받아 온 《명심보감》(明心寶鑑)이라는 책에도 청의 정신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안분편>(安分篇)에 보면 “넉넉함을 알면 즐거울 것이요, 욕심이 많으면 곧 근심이 있느니라.”(知足可樂, 務貪則憂)라든지, “만족함을 아는 자는 빈천해도 즐거울 것이요, 만족함을 모르는 자는 부귀해도 역시 근심하느니라.”(知足者貧賤可樂, 不知足者富貴亦憂)고 하여 청의 정신을 ‘넉넉함을 아는 것’(知足)이라 여기고 있다. 이것은 바로 에피쿠로스의 청의 정신과 똑 같다.
《채근담》(菜根談)의 첫머리에는 “도덕을 지키며 사는 자는 한 때 적막하나 권세에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하다. 달인은 사물 바깥의 사물을 보고 몸 뒤의 몸을 생각한다. 차라리 한 때의 적막함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함을 취하지 말라.”(棲守道德者寂寞一時, 依阿權勢者萬古凄凉. 達人觀物外之物, 思身後之身. 寧受一時之寂寞, 無取萬古之凄凉)고 시작한다.
동양의 고전들은 대부분 이런 청의 정신을 담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안분자족(安分自足)의 태도를 삶에 있어서의 능동성이 결여된 은자(隱者)의 도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욕망을 달성하려는 씩씩함이 없다는 뜻일게다.
인생에 있어서 실은 삶을 씩씩하게 꾸려가려는 적극성도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욕망이나 꿈은 바로 삶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미국 연예계의 어떤 원로는 “내 인생에서 꿈꾸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인생은 어쩌면 꿈 싸움인지도 모른다. 누가 큰 꿈을 가졌느냐, 그리고 그 꿈이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발분하느냐의 게임인지도 모른다.
몇해 전 비너스 윌리엄스라는 미국의 흑인 여자 테니스 선수가 윔블던 대회 여자부 단식에서 우승했을 때 그 다음 날 신문에서 비너스의 어릴 적의 일화를 소개한 것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일곱 살 쯤 이제 막 라켓을 잡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당시 윔블던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하던 크리스 에버트의 집을 방문했다. 우승 트로피인 은(銀) 접시를 구경하고 에버트와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때부터 비너스 윌리엄스는 다른 대회 보다 윔블던에서 꼭 우승하고 싶다는 강렬한 꿈을 가졌다 한다. 드디어 그녀는 세계 랭킹 10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실력으로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것도 개인의 강렬한 날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왕실 아카데미의 공식적인 견해는 ‘공기보다 무거운 것은 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의 강렬한 욕망은 ‘공기보다 무거운’ 날틀을 기어이 날게 하고야 말았고 그것은 인류가 공중으로 빛나는 첫걸음을 떼게 한 쾌거였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문명 그 자체가 바로 우리들 욕망과 꿈의 결실이라고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중요한 것은 이런 욕망이나 욕망의 성취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이런 욕망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욕망이란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좀처럼 성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하나의 욕망이 이루어져도 곧바로 우리는 '쾌락의 역리'에 휘말리는 상태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다람쥐가 챗바퀴 속에서 열심히 달리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비감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하여 인류 문명이 곧 다람쥐 챗바퀴라는 것은 아니다. 인류 문명은 위대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노자》(老子)에는 “여러 가지 영롱한 색깔들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소리들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며, 여러 가지 맛 좋은 음식들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말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하고, 얻기 어려운 물건들은 사람의 행동을 방해한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는 말이 있다. 대상에 눈이 멀어 있을 때는 자아를 잊게 된다는 말이다. 자아를 잊고서 외물을 얻었다고 하여 무엇이 행복하겠는가.
“핵시대에 있어서의 진정한 적은 전쟁 그 자체이다.”
미국 영화 《크림슨 타이드》에서의 핵잠수함 부함장 헌트 소령(댄젤 워싱턴 粉)의 말이다. 인류의 역사 동안에 언제나 인류 최대의 적은 실로 우리의 욕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이루거나 얻고자 할 때 그 욕망의 대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를 늘 성찰해야 한다. 나아가 대상도 대상이지만 혹 우리의 욕망 그 자체에 매달리고 있지는 않은가도 잘 살펴야 한다.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오히려 소박하고 적은 것에 더 행복할 수 있다. 적은 것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그럴 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같은 삶에서라도 더 진하게 인생을 누릴 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바로 청의 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욕망하는 이러저러한 조건이 이루어지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행복을 바라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게 되려면 지금 이 상태 바로 여기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청의 정신이다.
청의 정신은 단지 적은 것에 만족하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들이 삶을 기탁하고 있는 이 세계의 가치와 의미를 지극히 능동적으로 음미하고 누리겠다는 마음이다. 《중용》에도 “누구나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 없지만 진정 그 맛을 아는 자 드물다.”(莫不飮食者, 鮮能其味)고 했지만, 참으로 인생을 곡진하고 성실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의 정신은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삶의 태도라고 하겠다.
차인(茶人)들은 차 한 잔을 앞에 하는 순간 마음이 깨끗해진다. 청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많은 것을 원한다. 그런데 실은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일수록 참으로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것들 가운데 정말로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참으로 소중한 것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도 정말로 소중한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누리는 자유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정(情)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차 한 잔을 앞에 했을 때 그 차 한 잔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