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가 삐쳐서 이 번회는 제가 진행합니다. 제가 누구냐구요? 이 글의 여자 주인
공 홍은정입니다.
계절은 가을로 물들고 있습니다. 꽃같은 햇살은 이내 푸르게 하늘 속에 퍼져 버
리네요. 승주와는 여름부터 좋지 못했습니다. 그가 나를 피하는 인상은 나를 짜
증나게 만들었고, 그를 못나 보이게 했습니다. 그의 제대를 기다리며 자주 만날
것을 꿈 꿔 왔지만, 그가 제대하면서 자주 하게 된 것은 다툼이었지요.
그를 좋아하는 내 맘은 변함이 없는데, 그는 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내
마음을 의심할까요.
그냥 풋풋하게 좋아하는 마음 가지고 친구일 때가 좋았다. 그의 말은 소극적인
그를 변명하는 것에 불과 했습니다. 내게서 한 발짝 물러서 나와 친한 사람들에
게 느끼는 그의 약한 감정을 변명하는 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는 사
람들에게 빨리 싫증을 느낀다. 그리고 사람을 잘 잊는 것 같다. 그의 말은 나를
슬프게 했지요. 그것이 누구 때문이었는데, 늘 생각나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
들을 잊어 가며 실증을 내었던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을 고백한 것
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늘상 하는 것처럼 그는 받아 들였습니다. 내가 가장 오래
가슴에 묻은 남자. 승주는 지금 애처롭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잊혀 지는 게 싫다. 너에게 사랑하는 마음 가지는 것이 두렵다. 간혹 생각
이 나면 예전처럼 친구로 만나자. 그는 그 말을 하고 돌아 선 뒤 지금까지 연락
이 없습니다. 난 만나고 싶어도 연락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를 통
해 배웠습니다. 간혹 생각이 나면 친구처럼 만나자. 마음을 털어 놓은 상대에게
그가 남긴 말은 자기를 잊어라는 말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그가 어색합니다. 내
잘못일까요.
그가 요즘 애틋하게 그립습니다. 하늘에 그려지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청아하
여 보고 싶네요. 그러나 가을 하늘은 알고 있습니다. 높고 푸른 그 하늘 끝에는
이별이 있다는 것을... 이별을 준비하기에 가을 하늘은 구름 하나 반기지 않고
홀로 곱다는 것을... 그의 모습이 곱게 그리운 것은 곧 잊혀 진다는 것을 가을
하늘처럼 나도 알고 있습니다.
정희는 요즘 졸업 준비로 바쁘더군요.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또한
마음이 아플 겁니다. 서운한 감정이 하나 둘 쌓이면 엉어리 되어 아플때가 오지
요. 정희에게는 지금이 그때인가 봅니다. 바쁘고 힘든 시기 사랑하는 사람이 있
다면 곁에서 위로 받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정희가 사랑하는 사람
은 너무나 개인적이며 정희에게 무관심 해 보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할지라
도 분명 정희에게 무관심해 보였습니다. 정희는 그 사람을 이해한다 하면서도 서
운한 감정이 하나 둘 쌓이고 있지요. 나는 정희처럼 그렇게 서운한 감정 쌓아 두
고 살지는 않을 겁니다. 밋밋하게 유지되는 관계도 싫구요. 그래서 난 승주를 오
랫동안 그리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번 가을이 끝나기 전 그가 내 사랑을 믿
는다 말하지 않으면 잊을 겁니다. 그가 요즘 많이 보고 싶지만 내가 먼저 연락하
지는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이가 되느냐, 잊혀 지느냐,는 이제 그의 몫입니
다. 나는 그에게 분명 사랑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쉬울 게 없어요. 제가
사귄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비록 난 친구라 생각하며 사귄 것이지만, 마음
만 먹으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쯤 못 만들겠어요. 요즘들어 많은 사람들이 그립
더군요. 승주 그 사람 때문이겠지요. 잊혀지는 모든 사람들이 지위지면서 그립습
니다. 어떤 녀석의 말처럼 잠시 스친 인연이라도 그 스친 시간 만큼은 그리울 때
가 있더군요. 그 말을 한 녀석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당구장에서 자기
친구들과 한 게임 하고 있겠지요 뭐. 말만 잘하는 녀석이지요. 어디서 그런 말들
을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오늘은 실험이 늦게 끝이 나 집에 가려면 서둘러야 겠어요. 벌써 열시가 넘었습
니다. 약대 앞에 바로 차를 주차시켜 놓기가 눈치가 보여 농대 뒷 쪽에다 차를
주차시켰지요. 밤이 되니까 그 곳이 조금 무섭습니다. 기숙사에서 오는 시크먼
남학생의 모습도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주기도 했습
니다. 그래도 무사히 차 앞까지 왔습니다.
"아앙!"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눈물까지 질끔 쏟아 졌습니다. 키를 문에다 갖다 대는
순간 누군가 내 다리를 덜컥 붙잡았습니다. 주위는 깜깜하고 보이는 사람도 없는
데 누군가 내 종아리를 꽉 잡았습니다. 덜썩 주저 앉았습니다.
"무섭지?"
내 뒤에서 누군가 있습니다. 이 번엔 어깨까지 잡았습니다. 비명이 나오다가 목
에 떡 걸려 아무말 할 수 없었습니다. 위축된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살며시 돌려
봤습니다. 손가락으로 내 볼을 찌르네요.
"누구?"
"누나 아직 집에 안 갔어요?"
낯이 익은 목소리네요. 그래서 힘껏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키
득 되고 있는 녀석을 보았습니다. 치마만 입고 있지 않았어도 바로 다리로 목을
감아 졸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얼굴입니다.
"너 뭐야, 놀랐잖아."
"복수야, 복수. 그때 나도 이 만큼 놀랐어. 누나는 쪽팔리지는 않잖아. 헤헤,
많이 놀랐어요?"
내 뒤에 있는 녀석은 박철수 그 녀석이었어요. 내 모습이 그럼 장난으로 놀란
표정이니? 한 대 때려 줄려다 웃는 얼굴이라 양 주먹으로 죠 패 주었습니다.
"이 여자가 진짜. 졸라 아프네."
"넌 집에 안가고 뭐 했어?"
"나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오는 길이잖습니까. 나도 도서관을 갑니다. 누나 차
가 보이길래 복수할 기회다 하고 숨어 있었지요. 장장 삼십분이나 차 뒤에서 숨
어 있었습니다. 다리가 다 저리네."
제 정신 가진 녀석은 아닌 것 같네요. 진짜 한심한 녀석입니다. 그래도 귀여운
녀석입니다. 순진하구요.
"다음 부턴 이러지마. 다음에 이러면 죽을 줄 알어."
"누나 하는 거 봐서. 늦게 가네요?"
"오늘 실험 때문에."
"참! 누나 참한 후배는 언제 소개시켜 줄거에요? 가을이 되니까 참 허전하네
요."
"잠시 잊고 있었네. 곧 소개 시켜 줄게. 내 고등학교 후배 중에 예쁜 애들이 많
아. 니가 확실히 딸리지만 내가 광고 잘해 줄게."
"저도 따지고 보면 못난거 없어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래. 누나 이제 가 봐야 겠다. 밥은 꼭꼭 챙겨 먹어라."
"흑흑, 오늘 저녁 굶었어요. 당구 실력 나만 는게 아니었어요."
녀석의 표정이 불쌍하네요. 시간만 이렇게 늦지 않았어도 밥 사주고 가고 싶을
정도로... 불쌍한 얼굴도 무기가 되네요.
제목 연하가 뭐 어때. 14회
가을의 향기 짙은 10월이 중순을 넘어 섰습니다. 하늘은 더욱 높아 고왔고, 그
에 반한 초목의 색깔은 울긋 불긋 해 졌지요. 승주는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한 주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 주라 맘 편하게 등교를 했지
요. 나처럼 착한 선배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그냥 지나치는 후배 하나를
뛰어 가 붙잡고서는 밥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감사 할 줄도 모르는 나쁜 놈이지
만 녀석하고 밥을 먹으면 그냥 재밌어요.
"아, 올해도 눈오는 마로니에 거리를 나 혼자 걸어야 하는구나. 어떤 여자는 후
배하나 소개시켜 준다더니 여태 깜깜 무소식이다. 아마 후배를 만들어서 소개시
켜 주려나 보다. 아,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이라더니 나는 홀로 가슴만 태우는
구나."
"궁시렁 거리지 말고 밥이나 먹어."
철수 녀석은 내가 후배 소개시켜 준다는 말을 뱉은 후로 계속 후배 언제 소개시
켜 주냐고 치근됩니다. 말을 했으니까 소개 시켜주어야 겠죠. 시험도 끝이 났는
데, 이 번 주말에 녀석에게 소개팅이나 주선해야 겠네요. 녀석이 좋아할 만한 예
쁜 후배가 하나 있긴 하지요. 근데 저 녀석이 걔의 눈에 찰까요? 시간이 갈 수
록 정이 가는 녀석이니까, 첫인상만 잘 심어 주면 후배가 녀석에게 호감을 가질
수도 있겠군요. 앞에 나같이 예쁜 숙녀를 앉혀 놓고 저기 미니 스컷 입고 가는
여학생을 쳐다 보는 녀석에게 소개팅 시켜 주기가 꺼림직 하기 하지만요.
"그럼 너, 이번 주말 오후에 시간 비워 놔."
"저 항상 시간 비워 놨었어요. 왜? 진짜 소개팅 시켜 주게?"
"그래. 예쁘게 꾸미고 나와."
"사내에게 예쁘단 말이 뭡니까? 멋있게, 쌈박하게, 섹쉬하게... 가만, 섹쉬하게
는 좀 그렇다."
"알았어. 멋있고 쌈박하며 섹쉬하게 꾸미고 나 와. 만날 장소로 어디가 좋을
까?"
"섹쉬하게는 빼요. 플라타너스 마른 잎이 날리고, 무명 가수의 기타 소리가 좋
은 곳.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죠."
"엉? 공원에서 만나게?"
"그 근처 커피 숖 말이죠. 공대생도 아닌데, 꼭 끝까지 설명을 해야 알아 들어
요? 케에프씨 뒤편에 세커피숖에서 만나죠. 저녁 다섯 시 정각 작전을 수행합시
다."
"후후, 그래. 그 시간, 그 장소로 약속을 잡으마."
"꼭 약속 지켜요. 근데, 누나도 나올 거에요?"
"그럼, 내가 소개 시켜 주는건데."
"예전부터 내려 오는 정설이 있지요. 소개팅이나 미팅에서 주선자는 항상 자기
보다 미모가 떨어지는 애들을 데리고 나온다."
"나는 어쩔 수 없잖아. 나 보다 예쁜 여자를 아직 못 봤거든."
"그렇게 한 평생 살다 가세요. 우리 뒷 집 쌈쟁이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
았을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시비 걸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지."
"치, 한번 더 너네 뒷집 할머니 얘기하면 소개팅이고 뭐고 없다? 그리고 내가
소개시켜 주는 걔 예뻐. 그러니까 많은 기대하고 나와도 돼. 쯧쯧, 니가 좀 많
이 딸리겠다."
"이 봐요 홍은정씨. 제가 진짜 여자 애들에게 인기가 없게 생겼나요? 왜 미팅
나가서 계속 죽을 쑤는 지 모르겠어요."
녀석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보네요. 아픔이 있나 보지요? 철수는 생긴
거 뭐 그렇게 나무랄 데 없고, 키도 그런대로 작은 편은 아니고, 하는 짓도 귀여
운 구석이 많지요. 그리고 글도 잘 쓰는 것 같고, 또 순진한 것도 맘에 드는 괜
찮은 애지요. 내가 느낀 녀석에 대한 평가는 좋은 쪽이에요. 근데 뭐, 홍은정
씨? 맞먹어라 짜샤.
"이 봐요. 박철수군."
"네, 제 앞이라 거짓말 하지 말구요.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제가 진짜 인기 없
게 생겨 먹었어요?"
"응. 생긴 거 떨어지지. 키 작지. 이상한 말들 잘 하지. 너 잘하는 건 있니? 여
자에게 매일 밥이나 얻어 먹는 주제에."
"밥 사준게 아까웠어요? 매일은 아니잖아요."
"누가 아깝대? 그래 하는 짓도 얄밉잖아. 나에게 하는 짓 보면 미팅 나가서 죽
쑬만 해."
"그렇군요. 밥 잘 먹었습니다."
철수는 밥 숟가락을 턱 내려 놓았습니다. 불쌍한 표정을 짓고선 고개를 푹 숙이
고 일어 났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군요.
"왜 그래? 밥 그만 먹을거야?"
"누나에게 진실을 듣고 나니 밥 맛이 없네요. 나 먼저 갈게요."
"야, 같이 가. 소개팅은 어떡 할거야?"
"당연히 해야지요.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잊어 버릴 거에요."
"뭘?"
"누나가 나 씹은 말이요. 누나는 잘나서 좋겠수."
상당히 속이 좁은 녀석이네요. 내가 한 말을 모두 그대로 받아 들였나 보네요.
어떤 때는 상당히 똑똑해 보이다가도, 녀석은 자주 상당히 바보스럽습니다. 녀석
은 어깨가 쳐진 초라한 모습을 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생 식당을 나갔습니
다.
"야, 박철수."
"왜요?"
"어디가?"
"누나는 수업 들어 가세요. 나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너 그렇게 인기 없게 생기지 않았어."
"한 번 내뱉은 말은 줏어 담을 수가 없지요. 밥 잘먹었어요."
"어디가? 나 수업 시작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된다 말이야. 자판기에서 커피 뽑
아 줄까?"
"당구장에도 커피는 줘요."
"뭐?"
"밥을 먹었으니께, 한 게임 해야지요."
철수는 어깨가 쳐진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당구장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으
로 저 녀석 불쌍한 표정에 넘어 가지 말아야 겠다는 각오를 해 봅니다.
이번 주도 목요일까지 생각없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시월달도 얼마 남지 않았어
요. 녀석이 시험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
녁 시간 열람실을 가 보았지요. 철수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엎어져 자고 있었거
든요. 저럴 걸 왜 열람실에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녀석의 등뒤에 서서 그가 연습장에 적어 놓은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내가 가을이 되고, 가을이 내가 되니
가을 속에 내가 있고, 가을 또한 내 마음 같다.
그리움을 잡고자 내가 그리움이 되니
그리움이 내 곁에 있어 나는 행복하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뭘까요. 전공 책 옆으로 연습장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습니다.
"은정아."
누군가 내 등을 쳤습니다.
"어? 정희구나. 약사 고시 때문에 바쁘지?"
"응, 도서관에는 어쩐 일이야?"
"응? 이 녀석 보러 왔지. 동아리방에 갔더니 요즘 얘가 계속 도서관 나 간다고
해서."
녀석이 엎드려 자는 좌석의 옆자리는 정희의 자리였습니다. 그럼 아까 철수가
적어 놓았던 시는 정희를 위한 시였나요. 이 녀석 연상은 싫다더니, 정희를 흠모
하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기분이 좀 나쁘네요.
"커피 한 잔 할래?"
정희가 나를 보자 다시 밖으로 나가자 하는군요. 철수야 침은 흘리지 말고 자
라.
"저 녀석 깨워서 갈까?"
"얘는 놔 둬. 나오기 싫은 도서관 나 때문에 억지로 나오고 있는데."
"왜?"
"요즘 내가 좀 외롭다 했거든."
"그 좀 조용히 합시다."
어머, 내게 조용히 하라고 하는 남학생도 있네요. 남자들은 나에게 저런 말 잘
못하는데. 도서관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바깥 공기가 제법 쌀쌀하네요.
"나, 당분간 그 사람 잊을거야."
"누구? 철규씨."
"응. 저번 주에 싸웠어. 투정을 좀 부렸더니 나보고 너는 왜 네 생각만 하니,
그러더라. 그 사람도 요즘 힘든가봐. 편해질 때까지 잠시 잊기로 했어."
"그게 무슨 잊는거니? 아예 헤어져라."
"넌 친구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니?"
"아휴, 그렇게 유지되는게 좋니?"
"몰라. 이렇게 사귀어도 없는 것 보단 나아."
"그건 그렇고 철수 쟤는 왜 도서관에 나오는 거야?"
"저 녀석이 월요일 밤에 내 방을 찾아 왔었어. 내가 녀석에게 넋두리를 좀 늘
어 놨었지. 훗훗, 자기가 곁에 있어 주겠다더군. 너무 외로워 하지 말라면서 말
이야. 그리고서는 자주 날 찾아 왔어. 저렇게 도서관에서도 내 옆에 앉아 자다
가곤 해."
"시를 하나 적어 놨던데?"
"심심하니까 그랬겠지. 레포트 있으면 레포트 쓰다 가고, 그렇지 않으면 연습장
에 시를 쓰거나 당구대 그려 놓고 이론 연습을 하기도 하지. 날 배웅해 주기 위
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 날 때까지 도서관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
"그 녀석 참... 혹시 널 좋아하는 거 아냐?"
"모르지 뭐. 쟤가 내 입술을 처음 뺏은 애야."
"엉?"
"장난으로 한 입맛춤. 녀석은 그게 내 첫 입맞춤인 걸 모를거야. 너한테도 혹
시 눈감아 보라고 그러면 눈 감지 마."
"엉?"
"눈감아 보라기에 눈 감았다가 당했어."
"너하고는 오랫동안 친했나 보다?"
"어릴 때 같은 동네서 살았댔잖아. 녀석이 개구장이였거든. 옷이 헝클어져 있으
면 내가 바로 잡아주기도 했고, 코를 흘리고 얼굴이 지저분하면 씻어 주기도 했
지. 녀석은 날 친누나처럼 생각했을거야."
"너 그러다 연하 사귀게 되는 거 아냐?"
"훗, 남자같은 느낌이 들어야 사귀지."
"하여튼 챙겨 주는 사람 있어서 좋겠다?"
"응, 저 녀석 때문에 마음에 위로가 되긴 해. 참, 넌 어때? 승주씨와는 깨진거
야?"
"좀 더 기다려 봐야지."
"너 요즘엔 같이 다니는 남학생이 없다? 승주씨 제대할 때만 기다리면서도 남학
생 하나는 꼭 붙이고 다니던 너였잖아. 승주씨가 한 말 때문에 그러니?"
"아니야, 나 남학생 하나 달고 다니잖아."
"누구? 못봤는데?"
"철수 있잖아. 걔는 남학생 아니니? 걔 깨워서 밥이나 먹으러 가야 겠다."
"그러다 니가 연하 사귀는 거 아냐?"
"그 녀석이 연상은 죽어도 싫다는 데 뭘."
"나는 예외적으로 고려해 볼 맘이 있다던데?"
"내가 녀석에게 너만큼 고운 존재는 아닌가 보지 뭐."
솔직히 정희에게 질투가 나긴 했습니다. 내가 정희보다 예쁘고, 세련되고, 맘씨
도 곱고. 맘씨 고운 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잘하는 것도 많은데, 철수 고것
이 나보다 정희를 더 좋아하고 있단 말이지요? 확 진짜 연하고 나발이고, 그냥
철수를 꼬셔 버릴까? 에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은 아마 승주 때문에 내 마음이 공허해 졌기 때문일겁니다. 저녁 가을도 한 몫
거드네요.
"뭐해요? 출발 합시다."
"오늘은 바로 앞으로 와서 앉네?"
"누나 운전하는 거 잘 봐야지요. 곧 주행 시험이 있는데."
"엿 사줘야 되니?"
"당연하죠. 그게 이만 저만 어려운 시험이 아니잖습니까. 참, 누나 면허증 잠
깐 줘 봐요."
"왜?"
"줘봐요 좀."
백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면허증을 빼 주었습니다.
"푸헬헬, 뭐야 이거? 이종 보통이잖아. 푸하핫, 전 일종 보통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 누나 맞아요?"
"그렇다."
"푸헬헬, 누나 성형 수술 했어요? 아니면 화장발인가? 이 사진 대학 갓들어 갔
을 때 찍은 사진이죠? 누나도 이때는 뭐 별로 예쁘지 않았네요."
"그때는 급히 찍은 사진이라 그래. 내 주민등록증 보여줄까?"
"됐어요. 출발 합시다 이종 기사."
"아직 면허증도 없는게."
"곧 생깁니다. 일종 보통으로 말이지요. 출발해요, 이종 보통 홍기사."
"너 자꾸 날 그런식으로 부를래? 확, 내일 소개팅 취소 시킨다?"
"쩝! 출발하세요 예쁜 누나님."
짜식이 말이야. 면허증에 붙은 사진도 그런대로 예뻐 보이는데... 면허증 다시
만들어야 겠네요.
철수에게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후배에겐 괜찮은 놈이라 해 주었죠. 솔직히 철
수 자랑을 좀 많이 했죠. 그랬다고 후배 이 기집애가 이런 예쁜 모습으로 나올
줄이야. 나는 그냥 청바지에 스웨터 하나 걸치고, 화장도 하지 않고 나왔는데 후
배는 미니 스컷 세미 정장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드라이를 곱게 했는지 긴 머리
칼이 여린 바람에도 찰랑찰랑 흔들리네요. 제가 좀 위축되는군요. 하기야 뭐 전
주선일뿐인데요. 근데 이 자식은 왜 안나오는거야. 후배와 마주 앉아 십여분 이
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얘도 상당히 공주네요.
철수는 지딴에는 아주 꾸미고 나왔습니다. 그런대로 봐 줄만 하네요. 나와 내
후배를 보고 나서 이 녀석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뻣뻣하게 서서 인사를 하
더니 수줍게 내 옆으로 와 앉았습니다.
"누나, 정설을 깨셨군요."
뭐야 임마? 내가 꾸미면 어디 얘 정도겠냐. 녀석이 내 외모를 몰라 주네요.
"서로 소개들 해."
"아, 안녕하세요. 참 예쁘시네요. 전 섹스바이러스하우스 유니버시티 정보 공학
과 93학번이구요. 박철수입니다."
어이가 없다. 딱딱하게 굳어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한테 학교 이름가지고 유
머랍시고 말하는 철수가 어이가 없다. 후배에게 내가 대신 미안하다는 웃음을 던
져 주었다.
"안녕하세요. 전 명륜동에 있어요. 국문학과 93학번이구요. 이름은 송춘옥이에
요."
"아 네, 이름도 참 예쁘시네요."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내 뱉었을까요. 철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주
었습니다. 후배가 자기 이름에 대해 컴플렉스가 많아요.
철수가 오고 난 뒤 십 여분 동안 엄청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됐습니
다.
"전 콜라요."
메뉴판을 갖다 준 서빙 아가씨가 왔을 때, 후배는 콜라를 시켰어요. 철수는 후
배를 빼꼼히 쳐다 보다가 넌지시 말을 뱉었습니다.
"코,콜라는 상대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시키는 건데요. 다른 거 시키시면 안될까
요?"
"네? 전 모르고 시킨건데, 그냥 갈증이 나서요. 그럼 닥터 페퍼로 할게요."
"그것도 콜라거든요?"
"네?
나는 또 후배에게 웃음을 띄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수의 허리를 쿡 찔렀지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게, 후배에게는 발음도 제대로 못하며 떨고 있는 주제에. 내게는 큰 소리를
치는군요. 내 앞에서 식은 땀을 흘리던 남자들이 다 그립네요. 내가 가 봐라,
이 어색한 분위기 완전 파토나지.
주문 할 때 오고 갔던 말들은 참 재미난 말들이었군요. 철수 녀석은 아주 썰렁
했습니다. 지나간 농담 어쩌다 한 마디 뱉고선 혼자 웃었습니다. 그리고 후배 가
족 조사 할 일 있습니까? 보약 얘기는 왜 했을까요? 취미는? 당구는 쳐요? 소용
없는 질문만 던지는 철수가 무척이나 안탔갑습니다. 또 왜 저리 떤 답니까? 후배
는 답만 간단히 하고 자꾸 저만 쳐다 봅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후배가 대견스
럽습니다. 철수는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골똘히 머리를 굴리다
가 십초동안 말을 하고 간단히만 답을 하는 후배를 보고 웃습니다. 그리고 삼분
정도 침묵하는 군요. 십초 정도 말을 걸고, 이 삼분 침묵하고... 내가 만약 철
수 같은 애와 소개팅을 했다면, 난 그냥 아무 말없이 나가 버립니다. 저 녀석이
왜 미팅에서 죽만 쑤는지 이해가 되네요. 재미 진짜 없는 놈이에요. 가만 나랑
있을 때는 재밌는데?
"저 담배 펴도 돼죠?"
어머 얘 좀 봐. 언제 담배를 배웠지? 후배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자세를 고쳐 앉
고서는 다리를 꼬았습니다. 참, 섹쉬하네요. 그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
다. 철수는 정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담배는 몸에 좋지 않은데..."
"야아."
허리 찌르는 것만으로는 이제 안되겠더군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런 분위기 만들어 놓고선 나보고 집에 가라구?"
"처음엔 다 이런 거죠 뭐."
"처음에 이러면 누가 다시 만나 주니?"
"나보고 어떡하라구요?"
후배가 담배 피는 동안 철수는 나와 얘기했습니다. 나한테는 얘기 잘 하네요.
"뭘 어떡해? 재밌게 좀 해 봐. 어색하고 따분해서 앉아 있기 진짜 싫다."
"하, 그럼 가세요."
"이 자리 파토나게?"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저 분도 별로 말을 안해요."
"니가 그렇게 형식적인 질문만 하니까 그렇지. 서로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뭔지
알아보고 그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야지. 그리고 넌 유머 감각도 없니?"
"아, 내가 말을 많이 하면요. 싸가지 없다 그래요. 상대도 뭔가 내 관심사에 대
해서 물어 보면 좋잖아요. 말을 않고 가만히 있어도 뭐라 그러고, 말은 많이 하
면 촉새같다 그러며 촐랑되지 말아라 하고.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데?"
후배는 둘이서 잘 논다는 식으로 쳐다 보네요.
"말도 더듬고, 재미 없는 질문만 하고 그렇다고 매너가 좋냐? 쯧쯧, 넌 여자 사
귀기 진짜 힘들겠다."
"재수 없는 말 하지 마요. 안 그래도 뼈아픈 현실 때문에 고민이 쌓여 가는데.
누나는 이제 집에 가요. 주선이 염치도 없이 끝까지 개기고 있어 씨."
"뭐야?"
"왜 자꾸 허리를 찔렀냔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더 소극적으로 되잖아요."
"니가 점수 깍이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게 배워가는 거 아닙니까. 저 아가씨
예쁘긴 한데 너무 고자세에요.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서, 왜 내가 분위기를 맞춰
야 돼요?"
후배는 물고 있던 담배를 끄고 철수를 꼬아 보더니 다시 담배 하나를 물었습니
다.
"그건 그렇네."
그래, 따지고 보니 그렇네요. 철수는 어색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고 노
력했습니다. 근데 후배는 고자세로 앉아 답을 제외하곤 거의 말이 없었어요. 분
위기를 썰렁하게 만든 건 춘옥이 잘못도 있네요.
"춘옥씨?"
어쭈 나하고 말을 좀 나누었다고 자신감을 얻었을까요? 철수가 과감히 후배의 이
름을 불렀습니다.
"말씀하세요."
"술 좋아하고 나이트 가는 거 좋아하죠? 그리고 친구들 만나면 생각없이 떠들
죠?"
"어떻게 알았어요?"
이 녀석 갑자기 말을 잘하네요.
"우리 또래 여학생들 놀면 대부분 그렇게 놀죠? 노래방은 좋아해요?"
"간혹 가요."
"저는 그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근데 여자분이 그걸 좋아하면 나도 그
런 걸 좋아하도록 강요 받아요. 미팅 나가면 전부 여자들 비위에 맞추고 말이
야. 그리고 하는 것도 꼭 같아요. 인사 나누고 술먹고 노래방 가고. 맨날 그거
야. 낙엽지는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그냥 손잡고 서서 어느 화가의 그림
도 구경하며, 솜사탕 가지고 벤취에 앉아 비둘기를 반겨도 보는 그런 것도 한번
해 보면 좋잖아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어요. 상대방 표
정이 저런데 내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겠어요?"
"바보야, 그런 건 연인들이 하는 거지.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남,녀가 어딨냐?"
"못할 건 또 뭐 있어요. 서로 관심사가 다르면 하나는 포기하고 하나는 받아 들
이고 해야지요. 왜 저 여자에게 내가 전적으로 맞추어야 되는데?"
"넌 여자 친구가 없잖아. 잘 보여야 쟤가 네게 호감을 가질 거 아냐."
"나 안해 씨. 나 담배 피는 여자 싫어. 예뻐서 참을려고 했는데 자기는 내게 전
혀 말을 하지 않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다 나 때문이래."
"전 그런 말 안했어요. 처음부터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말을 아꼈던 것 뿐이에
요."
역시 후배는 공주 다웠어요.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철수에게 잘라 말하네요.
쟤 나보다 더 공주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춘옥씨 태도 보고 나도 알았어요. 그리고 이 여자가 자꾸 내게 무안을 주었단
말이에요."
철수 녀석이 내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뭐 이 여자?
"너 죽을래?"
"누나. 저 고등학교 때 쌈 잘했습니다. 나보다 한 뼘도 더 큰 놈들이 내 앞에
서 벌벌 기었어요.
그런 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되어 보이는 누나가 지금 겁주는 거에요?"
"너 쌈 못한다 그랬잖아."
"잘 합니다. 누나 집 앞에서 만났던 그 놈에게 했던 짓 보면 모르겠습니까? 자
신이 있었으니까 대들었던 거 아닙니까."
"너 요즘 나하고 많이 맞 먹는다?"
"그 한 학년 차이 가지고 너무 재지 맙시다."
"얘 좀 봐. 학번으로 따져야지."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너무 그런 거 따지지 말자구요."
"같이 늙어 가? 나 한창 때야. 그리고 연상이라서 싫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
제 같이 늙어 가는 처지라고라?"
"헤, 누나하고 친하니까 그러는 거지. 한 마디만 더해도 돼요?"
"뭐?"
"곱게 늙어요. 누나 이런 모습 보니까 우리 뒷집 쌈쟁이 할머니가 생각이 나네
요."
"이게 진짜."
"잘못했어요. 누나."
한대 죠패 버릴까?
"맞먹을 때 맞먹더라도 이 여자, 저 여자라는 말은 하지 마라."
"응?"
"왜?"
내가 철수랑 싸우는 동안 후배는 집에 가버렸네요.
"누나 때문에 갔잖아요."
"처음부터 텄었어."
"잘 할 수 있었는데..."
"뭘 잘해. 넌 소개팅이나 미팅 타입은 아니다."
"진짜 갔을까요?"
"걔 보니까 완전 공주로 변했더라. 미련 갖지 마."
"나는 그럼 이제 뭐해요?"
"나랑 놀지 뭐."
"에이, 연상은 싫다니까."
"그럼 아까 잘 하지."
녀석과 난 낙엽지는 마로니에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벤취에 앉아 솜사탕
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역술하는 아저씨께 사주도 봐 보구요.
"누나 생일이 참 늦네요. 나랑 꼴랑 1년 하고 5개월 차이 밖에는 나지 않아요."
"그래서 맞먹을려구?"
"11월 14일이라."
"그 날은 신경 꺼. 만날 사람 따로 있으니까."
"앞서 가지 마요."
철수의 팔짱을 끼고 그림 그리는 거 쳐다 보다가 모델도 서 봤죠.
"팔짱 끼지 마요. 오해 받아요."
"왜? 연인처럼 보일까 봐? 넌 오히려 영광이잖아."
"제가 연하잖아요. 21살이 23살 보다는 엄연히 비싼 나이에요."
"넌 항상 미팅 나가서 깨지는 별 볼일 없는 애고, 나는 인기있는 미모의 여대생
인데?"
"함 봐준다. 십분당 밥 한끼씩."
"뭐?"
"아까 그림 구경하면서 한 삼십분 끼고 있었으니까 세 끼는 사줘야 겠네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소개팅도 이상하게 시켜줘 놓고선. 차 값만 14000원이 나갔어요. 당구를 쳤으
면 세시간은 쳤다. 짜장면도 시켜 먹으면서 말이야."
"이 그림 너 줄려고 했는데. 그만 둬야 겠다."
"그걸 왜 나 줘요?"
"예쁜 얼굴 그린거잖아."
"아주 상공주네요."
"그거 이제 알았니? 아까 걔도 내 적수가 못되지. 나는 너 같은 애 만났으면 그
렇게 오래 앉아 있지도 않아."
"그런데 왜 앉아 있었어요?"
"나는 주선이었잖아."
"주선이 한 시간도 더 앉아 있었어요? 어느 나라 주선이 그런데요?"
"니가 불쌍해서 그랬다 왜."
"아휴, 그나저나 오늘도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하고 깨지고 돌아 가는구나."
"나하고 데이트 했으면 됐지 뭐."
"연상은 관심 없다니까..."
"관심이 없어도 내 얼굴 가져다 니 방에 걸어 놔. 다음에 확인하러 간다?"
"진짜 나 주는 거에요?"
"응."
"배 고플 때마다 한 번씩 쳐다 봐야지."
"무슨 말이야 그건?"
"누나를 생각하면 밥이란 단어가 떠 오르거든요. 내 밥 줄."
쪼로로 도망가는 녀석이 제법 귀엽네요.
철수 녀석하고 이렇게 공원을 놀러 나가는 것도 괜찮네요. 앞으로 학교에서 뿐
만 아니라 서울 와서도 자주 데려다녀야 겠어요. 후훗, 박철수는 오늘 고소하게
내 후배에게 깨졌습니다.
제목 연하가 뭐 어때. 15회
밤에 무서움을 참고 강냉이 두개를 서리해 왔다. 그런대로 맛 있다. 밤에 배고
플 때마다 서리해 먹어야 겠다.
은정이 누나가 가을을 타는 관계로 당분간 철수가 진행합니다.
시월도 마지막 밤을 향해서 빠르게 흘러 가고 있다. 밤에 당구장을 갔다가 어색
하게 웃고 있는 승헌이를 만났다. 그 녀석이 지금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잠에 빠
져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방바닥을 쓸 고 닦았다. 나는 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커다란 인형을 베고 잠을 청하고 있다. 노랗고 귀여운 호랑이 인형이다. 그 사자
머리가 승헌이에게 사 준 것이다. 승헌이가 내 베개를 가로 챘기 때문에 난 뭔
가 베고 잘 물건을 찾아야 했었다. 나는 가급적 내 방에 친구를 재우지 않는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자던 습성이 있어 누가 내 옆에 있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근데 이 녀석은 어쩔 수 없이 재워야 했다. 녀석이 입대 날짜가 정해졌
다고 말했다. 한달 보름이 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 인형을 준 여자친구에게
는 차마 그 말을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안고 당구장으로 왔다고 했다. 녀석의 표
정이 불쌍해서 술까지 사주고 내 방으로 데리고 왔다. 내 년이면 내 많은 동기들
이 군대를 갈 것이다. 신난다.
나? 나는 중간에 군대를 가지 않을 것이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병역 특례 업
체에 취직할 것이다. 나 군대 못간다. 고무신 거꾸로 신을 여자친구도 만들지 못
하고 군대 가기는 싫다. 그거 만들 때까지는 절대 못간다. 설사 헌병들이 날 잡
으러 와, 내 배에 총구를 들이 밀어도 못간다. 공대 보다 더 삭막한 군대를 여자
친구 하나 못 만들어 놓고 가 버리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졸라 눈 쌓인 전방
지역을 군발이들과 총 메고 거니는 것은 내 즐거운 상상과는 너무 상반되는 것이
다. 난 마후라를 휘날리며 고운 눈 쌓이는 마로니에 공원을 내 여자친구와 팔짱
끼고 거닐어야 한다.
호랑이 배가 제법 푹씬하다. 내일 녀석을 정신없이 내 쫓고 이 걸 내 것으로 만
들어야 겠다.
녀석은 진짜 호랑이를 놔 두고 내 방을 떠났다.
"철수야?"
내일 중대한 일이 있어 화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가기위해 교문을 나서는
데 은정이 누나가 날 불렀다. 아마 동아리 방을 갔었나 보다. 누나는 동아리 선
배 형과 같이 있었다. 나에게 밥을 잘 사주는 누나지만, 그녀 역시 동아리 선배
오빠들에게 밥을 잘 얻어 먹는다. 저 형은 동아리 방에 잘 있다가 누나에게 걸
려 밥을 사주러 가는 모양이다. 누나가 밥 얻어 먹을 땐 학생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다.
"어디 가는 거에요?"
"수원. 나 지금 저녁 먹으러 가."
"형이 누나 밥 사줄거죠?"
누나 옆에 서 있던 예비역 선배가 머리를 긁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 거렸다.
"은정이가 밥 사달라고 해서..."
"형은 학생 식당에서도 가급적 분식으로 때우면서 저 여자 밥을 사 줘요? 뭐 먹
을건데요?"
"응? 은정이가 초밥 잘 하는 일식점을 알고 있다 해서."
"그럼, 형 일주일 밥 값 다 날리겠네요. 쯔쯧."
선배 형은 약간 부끄러운 표정이다. 누나는 나를 보고 불만스럽다.
"너, 또 나보고 저 여자라는 말 했어?"
"그럼 누나가 여자지, 남자여?"
"넌 어디 가는데?"
"서울이요. 참, 누나 빨리 엿 사줘요. 나 내일 주행 시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서울 가는거야?"
"응."
누나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현철이 오빠! 밥은 다음에 얻어 먹을게요."
고개를 푹 숙이는 선배를 보았다. 비참해 보였다. 그리고 누나는 나를 보고 빤
히 웃더니 내 팔을 잡았다.
"같이 서울 가자."
누나와 함께 선배형에게 인사를 하며 난 씩 웃었다.
"형, 내가 형 돈 안쓰게 했으니까 다음에 나 보면 밥 한끼 사줘요."
그 형이 날아차기 하는 모습은 상당히 날카롭고 멋있어 보였다. 맞다, 저 형 특
전사 출신이다. 전철비가 굳어 좋았지만 뭔가 뒤가 꺼림찍하다.
"너 주행에서만 두번 떨어 졌다고 했지?"
자기가 운전 하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누나는 내게 질문을 던
졌다.
"네. 처음엔 출발이 어색해서 떨어졌고, 두 번째는 트럭이 꼬물이라 시간내에
못 들어 왔지요."
"바보구나?"
누나는 자랑스럽게 경운기를 추월 하고선 웃는다.
"이 차는 오토잖아요. 이런 건 두 손 놓고도 운전하겠다."
"치, 두 손 놓으면 뭘로 운전하게?"
"발 하나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너 면허증 받으면 도로 주행 시켜 줄테니까 어디 한 번 보자."
"차 긁으면 물어 줄 돈 없다니까."
"금방은 발 하나로도 몰 수 있겠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공대생도 아닌데 꼭 끝까지 설명하게 만드네."
내 이런 말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지금 운전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생긋 웃고
있다. 아무도 건너지 않는 국도 작은 길의 건널목 앞에 정차를 하고 선 또 자랑
스럽게 웃는다.
"모범 운전자는 건널목 정지선을 넘어 가지 않는거야. 나처럼 말이지."
못 들은 척 해야 겠다.
도심으로 들어 섰을 때는 더했다. 뒤에서 경적을 울려 되던 말던 신호등 노란
불이 켜지면 그대로 서 버렸다.
"노란 불이 켜졌을 때는 급히 지나기 보다는 정지하는거야."
교차로는 한 참 남았는데 일찍 깜박이를 켜 고선 또 가증스런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잠이나 자야겠다.
"갈 방향을 알리기 위해서 턴하기 150미터 전부터 시그널을 해 주어야 돼. 어
머, 저기 저 사람 봐. 저 사람처럼 방향을 바꾸면서 깜박이를 켜는 저런 무식한
행동을 해선 안된다는 거지."
서울 청담동 쪽으로 들어 섰다. 건널목이 있는 교차로 앞에 차가 정차했다. 누
나는 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난 보조석 창 문으로 바로 옆에 정차한 차의 어떤 아가씨만 쳐다 보았다. 멋있
다. 새로 나온 감청색 소나타 투 승용차의 스티어링을 여유롭게 잡고있는 긴머
리 연한 선글라스, 과하지 않은 화장 발, 예쁜 얼굴, 고급스런 옷차림의 아가
씨다. 옆에 앉은 얼빵하게 생긴 놈은 참 좋겠다. 둘이 연인 사인가 보다. 둘이
서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부럽다. 나처럼 일방적으로 잼없는 말들
듣지도 않고 말이다. 옆에 앉은 놈이 날 쳐다 보았다. 내가 씩 웃어주자, 그 놈
도 날 보고 씩 웃었다. 저 놈도 아마 면허증이 없나 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누나는 아직도 중얼거리고 있었다.
"건널목 앞에서는 신호등을 주시하기 보단 건너는 보행자에 신경을 써야 하는거
야."
니 혼자 다해라 씨.
잠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동을 해서 아까 철수가 쳐다 본 승용차 안의 대화
를 들어 보겠다.
"차 긁으면 죽을 줄 알어? 니가 누나면 다냐? 이 차 뽑은 지 겨우 두 달 된 새
차인데 면허증 받은 지 겨우 이틀 된 사람 도로 주행이나 시켜 줘야 되고 진
짜."
"조용히 안 해? 옆 차에서 누가 보잖아."
"어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도심으로 도로 주행으로 나가자고 했냐? 그렇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고 완전 초짜가 베테랑 되냐? 제발 뒤에 초보 운전
이라고 좀 붙여 놓자."
"야!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옆 차에 앉은 놈은 좋겠다. 연인 사인가 보네? 비엠더블유 승용차에 누나보다
백배는 예쁜 아가씨가 운전도 해주고 말이야.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을까? 여자
가 운전을 잘 하나 봐. 그러니까 저 놈이 저렇게 웃으며 편히 앉아 있지."
"그럼 너도 빨리 웃어. 그리고 니가 친누나라서 잘 못느끼나 본데, 나 나가면
미인이란 소리 들어 이사람아."
"그런 소리 듣고 웃어야 돼?"
"그럼. 나도 빨리 저렇게 되야지. 그래서 옆 차의 풍경처럼 치완씨 태우고 다녀
야지."
"너 내차 끌고 나가면 죽을 줄 알어."
"이게 어디 너 혼자만의 차니?"
다시 철수 시점으로 갑니다.
"초컬릿도 괜찮아."
"엿 사줘요."
"안 파는 걸 내가 어떻게 사주니?"
"내일 시험 떨어지면 누나 때문이라고 생각 하겠어."
"치, 누나가 내일 같이 가줄까?"
"누나 내일 수업은 어떡하구?"
"오전에는 좀 여유가 있는데..."
"그래요? 내일 몇 시에 학교 갈건데요?"
"한 시 정도?"
"그럼 시험 끝나고 누나에게 연락해 볼게요."
"같이 가서 응원해 줄까?"
"됐어요. 무슨 대단한 시험이라고 응원까지 나와요?"
"그럼 엿 사달라는 말은 뭐야?"
"태워줘서 고맙습니다."
"그래, 잘 들어가."
좀 시끄러웠지만 누나 때문에 서울 잘 왔다. 그리고 고급스런 초컬릿도 선물 받
았다. 하나만 빼 먹고 발렌타인 데이 때까지 가지고 있다가 나도 초컬릿 받았다
고 자랑해야지.
늦게까지 끼어 있는 안개 때문에 고전을 했지만 난 무사히 주행 시험을 마쳤다.
"얏호! 나 드디어 해 냈어."
"자기 축하 해."
나는 세번 만에 붙었지만 그래도 씩 웃고만 말았는데, 도대체 저 사람들은 뭐
야? 쪽 팔리게 큰 함성을 지르고 응원 나온 마누라인지, 애인인지 모르는 여자
와 서로 부등켜 안은 채 눈물까지 글썽인다.
면허증 나오는 수속 까지 마쳤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내 이름 적힌 면허증이 나
올 것이다. 신난다.
요즘들어 신나는 일이 많다.
"진짜 합격 했어?"
"네."
"한 세 네번 더 보게 될 줄 알았는데?"
"무슨 그런 악담을..."
"실제 운전은 틀리다 너?"
"다 아니까 오늘은 조용히 갑시다."
누나에게 초컬릿 받아 먹은 게 효과가 있었나? 누나 생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선물이나 하나 해야 겠다.
내 방에 싱싱한 강냉이가 한 이십개 있다. 어제 그제 새벽에 날 잡고 서리를 했
다. 오늘부터는 자제를 할 것이다. 수수 밭 주인이 오늘부터는 대비책을 세웠을
것 같다. 강냉이 두개를 가슴에 숨기고 정희네 누나 방을 찾았다. 일주일 누나
곁에 붙어 다니고 난 뒤 또 한 동안 정희 누나를 보지 못했다. 밤 열한시를 넘었
지만 누나는 요즘 공부하느라 분명 잠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배가 고플텐데 강냉
이라도 하나 삶아 줄 요량으로 정희네 누나 방을 찾았다.
"어! 은정이 누나도 있었네요."
"그래, 너 전화기를 놓던지 삐삐를 사던지 좀 해. 연락할 길이 없잖아."
"오늘 자고 갈거에요?"
"응."
"추리닝 입고, 화장 지우고 나니까 누나도 별 수 없네요."
예전 당구장 갔을 때 본 모습이다. 방금 세수를 했는지 물기가 묻은 얼굴이 뽀
얗게 보기 좋았지만 좋은 말 해 줄수 없다. 정희 누나는 잠옷으로 쓰기에 손색
이 없는 추리닝이지만 은정이 누나의 그것은 새마을 운동 한 창 할 때의 복장 같
다. 실컷 비웃어 줘야지.
"얘는 피부가 고와서 화장을 지워도 뽀얗게 예뻐 보이잖아."
"그건 누나들 생각이지."
"어떻게 왔어?"
"정희 누나 보러 왔지요. 누나는 있을 줄 몰랐는데?"
"널 보니까, 갑자기 니 방가서 자고 싶다."
"우쒸, 또 그런 장난 하면 진짜 같이 자 버릴거다."
정희 누나는 그 사건 전모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강냉이 두개를
꺼 내었다.
"왠 옥수수?"
"정희 누나와 단 둘이 옥수수나 삶아 먹으려고 했는데... 은정이 누나도 먹을거
죠?"
"응."
"나는 집에 가서 먹지 뭐."
밤 늦은 시간 누나 둘이와 강냉이를 먹으며 커피 한 잔 괜찮네요.
"너 내 생일 그냥 지나쳤다?"
"아, 정희 누나 생일이 시월달이었지 참. 미안해요."
"괜찮아. 나 그때 좋은 시간 보냈어."
정희 누나의 말에 은정이 누나가 약간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얘, 지 애인에게 장미 백송이랑 반지 선물 받았대."
"진짜요? 외롭다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좀 다른가 보지 뭐. 정희 쟤 표정에 웃음이 가득하지 않니?"
"그렇네요."
"철수 너, 작년 생일 때 정희에게 키스 해 주었다며?"
무슨 소리야 이거.
"그게 무슨. 그냥 살짝 입술 닿은 것 뿐인데..."
"정희는 당했다고 하던데?"
"좋아서 살핏하게 웃을 때는 언제고. 여자들은 믿을 동물이 못되는구만."
은정이 누나 저거, 질투하는 거 아냐? 은정이 누나에게도 함 해줄까? 그러고 보
니 은정이 누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정희 누나하고 틀려서 은정이 누
나는 나 말고도 챙겨 줄 사람이 많다. 그리고 만날 사람 따로 있고. 그래도 선물
하난 해야 겠지? 쯔쯧, 입고 있는 옷차림 봐라. 집에서도 저렇게 입고 자는 거
아닐까?
"철수 이제 가야지?"
정희 누나의 저 냉정한 목소리. 음, 12시가 훨씬 넘었구나.
"네, 가야지요. 은정이 누나?"
"왜?"
"여자에게 잠 옷 선물해도 오해 안 받죠?"
"그게 뭐라고 오해를 받니? 근데 무슨 오해?"
"뭐 그대를 사랑하오. 받는 사람이 이런 오해는 하지 않지요?"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 참 별 생각을 다 하는 구나."
"음. 누나는 무슨 색을 좋아해요?"
"나? 밝은 색. 가을 하늘색이 특히 좋아."
"정희 누나는요?"
"나는 핑크색."
"의외네요. 둘이 바꿔야 되는 거 아닌가? 핑크색은 보통 상공주들이 좋아하는
색인데... 분홍색도 아니고 말이야."
"나둬라. 정희가 요즘 지 애인이 잘해 준다고 공주가 되어 있으니까."
"음. 잘 자요. 나 갑니다."
푸른 색 여자 잠옷 하나를 샀다. 일주일 용돈, 밥 값 다 날아 갔다. 상당히 섹
쉬한 걸로 살려다가 누나가 오해 할까봐 상당히 귀여운 걸로 바꿨다. 이 걸 건
네 줘야 하는데, 꼭 찾을 때는 눈에 안 띈다고, 누나는 한 동안 내 시야에서 사
라졌다. 어쩌다 봤을 때는 분위기가 많이 어두워 있었다. 누나의 생일이 있는
그 주에는 진짜 누나 보기가 힘들었다. 인기인이 맞나 보다. 하여간 생일이 내일
로 다가 왔는데도 난 누나에게 잠 옷을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