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임권조(林權助) 사이에 강제로 체결된 문건이다.
을사늑약은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체결된 문건으로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이 조약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각 열강과의 협약에 따라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는 한편, 쉴새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만들었다. 이 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당하게 되었으며, 국내외 한국외교기관과 각국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머리에 조약의 명칭이 없으며, 이로 말미암아 늑약 체결의 강제성이 입증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일본 정부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지지한다는 것이나, 이는 공염불이었고 결국 조선의 외교권이 이 늑약으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1895년 명성황후가 ‘삼국간섭(三國干涉)’을 기화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써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일본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등장케 하자 러시아와 즉각 결판을 낼 수 없었던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굴복, 이미 수중에 넣었던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자 이를 본 명성황후는 재빨리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의 위치를 대신 이어받게 된 강대국 러시아와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던 바,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무엇보다도 시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청일전쟁을 끝낸 직후여서 러시아와 당장에 일전을 결할 수 없었던 일본은 황후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전권공사 미우라고로가 정규군, 영사경찰 등 일본의 공권력을 구사하여 자행하였다. 미우라는 우선 결행 날짜를 10월 10일로 정한 후 각기 책임자를 정해 역할을 분담시키고 행동지침을 시달하였다. 그런데 풍문으로 나돌던 훈련대 해산이 예상보다 앞당겨져 7일 오전 9시경에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가 이를 정식 통고해 오자 결행일은 8일 새벽으로 수정되었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이들을 동원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려던 미우라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기 때문이어다. 왕궁 침입에 있어서도 일인들은 그들 계획의 성패가 달렸다고 판단하였던 대원군 끌어내기에 시간이 늦어져 서대문에서 수비대와의 합류에 차질이 빚어짐으로써 새벽 5시 30분에야 겨우 광화문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홍계훈(洪啓薰, 훈련대 연대장)이 거느리는 훈련대와 총격전이 벌어져 그를 살해하고 광화문을 통과한 시간이 5시 50분이었다(영·미 자료에 의하면 5시 15분). 대원군을 6시 10분경에 근정전 옆의 강령전에 내려놓고 나서 한 무리는 왕의 거처로, 다른 한 무리(20~25명의 일인)는 왕후의 건청궁으로 달려가 명성황후와 3명의 궁녀를 살해하였다.
전기의병
을미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 봉기하여 1896년간에 걸쳐 전개된 항일의병의 반침략 무장투쟁이다. 을미의병이 봉기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으로서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을 들 수 있다. 이는 국제적 범죄행위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전국민을 분기시켜 의병의 봉기를 촉진시켰다. 을미변복령도 을미의병을 일으키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말 의복제도는 수차에 걸친 개정을 거쳐 점차 서양식 복제로 바뀌어 갔다. 즉 1895년 3월에 내려진 칙령에서 관민이 다같이 흑색의 주의(周衣)를 입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조선의 문화적 긍지의 한 척도로 인식하고 있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의 반포로 인해 심각한 문화적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1월 14일 발포된 단발령은 그동안 점차적으로 솟구쳐온 한민족의 반일감정을 비등하게 함으로써 의병봉기를 전국 각지로 확대하게 되었다. 유교 윤리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 내리던 조선사회에서는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단발령이 내리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을미의병의 참여층은 지휘부와 병사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지휘부는 주로 관료출신의 양반유생 또는 재지유생들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화서학파(華西學派)·노사학파(盧沙學派)·정재학파(定齋學派)·남당학파(南塘學派) 등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다. 이들 척사계열의 의병 중 다수는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의 정치사상적인 차이를 실감나게 한다. 그러나 의병 지휘부에는 유생만이 아닌 이족이나 평민들도 다수(전체의 약 14%)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심지어 나주의병의 경우는 이족출신이 지휘부의 55%나 차지하고 있으며, 해주의병의 경우는 전원이 포수출신인 것으로 보아 전기의병의 지휘부에 평민 출신의 참여율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생이라 할지라도 선대중에 현직을 역임한 의병장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몰락한 양반층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의병의 경제적 취약점이기도 하였다. 병사층에는 일부의 유생도 포함되었으나 주로 평민층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포수가 주요 전투력이었으며, 그 외에 소작농민을 비롯하여 보부상과 해산군인 그리고 소수의 청군과 점적성이 강한 동학교도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전기의병의 지휘부와 병사층간에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전기의병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띤다. 첫째, 존화양이론에 철저한 척사적 성격을 띤다. 전기의병의 지휘부를 이룬 인물들은 존화양이론에 입각하여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에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반침략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둘째, 전기의병은 근왕적인 성격을 띤다. 전기의병의 주요 이념에서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정신으로써 임금에 충성하고자 하는 근왕적인 성격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왕적 내지는 충군애국적 국가관은 국왕을 전제로 한 국가의 독립, 즉 왕조의 복구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할 것이다. 셋째, 전기의병은 반개화적인 성격을 띤다. 척사유생들은 개화는 곧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인륜을 파괴하여 금수로 만듦은 물론 국가마저 멸망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척사유생들은 이와 같은 반개화론, 나아가 개화망국론에 입각하여 중화질서의 회복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거의한 것이다. 넷째, 전기의병은 반침략성을 강하게 띤다. 의병들은 1894년 갑오변란을 일제의 침략행위로 규정하였다. 을미의병은 친일적인 갑오정권을 타도하고 일본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축출하여 민족의 자주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들은 단일부대로 혹은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지방 관청을 공격하였으며,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아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을미의병의 무장투쟁은 갑오정권과 일제 침략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단발령은 철회되었으며 아관파천이 단행되어 일제의 침략정책에 타격을 주었다.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과 어윤중 같은 개화파 관리들은 처단되었으며 치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개화정책은 비판되어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또한 전기의병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지만 광무황제의 해산조칙을 거부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의 항전을 주비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의병장들 1905년 을사5조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전국적으로 민족수호를 위한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을사의병
1904~1905년 러일전쟁·한일의정서·을사늑약 등 일련의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 1907년 7월 이전까지 전개된 항일의병을 을사의병이라 한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에 의해 한일의정서·한일협약 등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준식민지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반일감정은 극도에 이르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처음으로 봉기한 지역은 원주·제천·단양에서 을미의병 때 유인석(柳麟錫) 부대에서 활약한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이며, 다음으로 홍주의 안병찬(安炳瓚)·민종식(閔宗植) 등이 봉기하였고, 전라북도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이 거의(擧義)하였다. 영남 지역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의 의병부대와 정환직(鄭煥直)·용기(鏞基) 부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봉기하였다. 원용석의 의병부대는 원주진위대와 일진회(一進會)의 급습으로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고 말았으나 홍주의 민종식·안병찬 부대는 초기의 홍주성 공략에는 실패하였지만 민종식이 재조직한 의병부대는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이를 근거지로 성이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최익현 부대는 무력활동면에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지만, 그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신돌석의 부대는 규율이 엄하고 유격전술에 뛰어나 많은 전적을 올렸으며, 정환직 부자도 계속적인 항쟁을 벌였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없는 훈련받지 못한 민병을 주축으로 하였기 때문에 항전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후 의병다운 의병으로서 활동하게 되는 것은 군대해산에 따른 정식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을사의병은 1907년 군대해상 이후에 정미의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을사의병은 유림들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비록 양반유생이기는 하지만 위정척사적 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구하려는 구국의 이념을 가지고 거병하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을사의병은 화적이나 활빈당과 같은 계층과도 연대하였으며 신돌석 의병진과 같이 평민의병이 독자적으로 봉기하기도 하였다. 홍주의병의 민종식, 태인의병의 최익현·임병찬, 산남의진의 정환직 등 관리출신 의병장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던 것으로 볼 때 을사의병 단계에 들어서면 을미의병 단계까지 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던 지역성·학통성·혈연성이 극복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을사의병은 단절 없이 바로 정미의병으로 발전하여 1908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헤이그 특사
광무황제(光武皇帝)가 1907년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Hague)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한국의 주권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활동을 이른다.
1905년 일제는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하여 외국에 나가 있는 사신(使臣)을 소환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조선의 실권을 하나하나 강탈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는데, 1906년 4월에 파나마 등 남미의 몇몇 나라와 함께 대한제국황제에게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광무황제는 이 초청장을 받고 구미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기반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겨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을 비밀리에 특사로 임명하였다. 세 특사는 일제의 감시를 감쪽같이 속이고 6월 24~25이경 헤이그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여 황제의 친서를 갖고 회의에 참여하려 했으나,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신문인 W.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의 전문(全文)은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특사 가운데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그러나 이상설과 이위종 등 남은 대표들은 좌절하지 않고 구미열강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열강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만국평화회의의 성격상 일제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대한제국의 특사일행이 그 사행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특사파견은 실질적인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일제의 한국침략을 촉진시키는 구실을 주고 말았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를 서울로 불러들여 그와 함께 광무황제에게 사행의 책임을 추궁, 강제로 퇴위시켰다. 또한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한 뒤 31일에는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다.
을사오적
을사늑약 체결 당시 찬성을 표시했던 정부 대신 이근택·이지용·박제순·이완용·권중현 등 5명을 일컫는다. 이 중 이근택과 권중현이 피격당하는가 하면, 이완용과 박제순의 집은 분격한 민중에 의해 불살라졌다.
대종교 초대 교주인 나인영(나철) 등은 을사늑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1907년 1월부터 을사오적을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3월 25일 오적의 주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창보 등이 체포되자, 나철·오기호 등은 평리원에 자수하여 나철은 10년 유배형을 받아 무안군 지도로 갔었으나, 그 해 광무황제의 특사로 풀려났다.
김석항·김일제·기산도(奇山度)·박경하·박종섭·이종대·안한주·손성원·송효철·정재헌·현학표 등 11명은 직업상 전연감 전주사로부터 농민·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연령도 25세부터 51세까지 포함되어 있다. 광무10년(1906) 5월 13일자로 평리원 재판장 이윤용 등의 판결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유인석
유인석은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유중곤과 고령 신씨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유중의 양자로 들어간 이후 양가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잠강에 은거하고 있던 당대의 거유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 - 1868)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던 덕택으로, 유인석은 입양되던 그해에 화서 문하에 나아갈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화서의 정통 도맥을 이어받은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양인으로부터 직접 수업을 받음으로써 당대 최고의 학문적 분위기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유인석은 화서학파의 핵심 사상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존화양이(尊華攘夷)정신에 철저히 경도되어, 서양과 일본을 과거의 어떤 오랑캐보다도 교활한 국가라고 혹독히 비판하였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 체결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유인석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을미사변)단발령을 공포(1895)하자, 이에 대한 대처방안인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거의소청(擧義掃淸: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안), 거지수구(去之守舊:국외로 망명해서 중화의 정통성을 지키자는 안), 자정치명(自靖致命:의리를 간직한 채 자결하는 안)의 세 가지였다.
유인석은 처음에 적극적인 행동방안인 거의나 자정을 택하지 않고 거수를 결심하였다. 그것은 거의나 자정이 당시 상황에서는 실현성이나 큰 효과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인석은 곧 이필희, 인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 여러 의병장의 간청을 받아들여 호좌창의진(湖左創意陳)의 대장으로 취임하였다.(1896. 2. 3 음력 1895.12.20) 이 호좌창의진은 지평 의병 4백여 명을 주축으로 하고 화서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 단위의 소규모 의병진들이 연결된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유인석은 먼저 호서의 중심부인 충주성과 제천성을 점령하면서 친일 개화파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전력의 소모와 함께 보급로를 차단당한 유인석은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기 위하여 서북행을 단행하였지만, 서북지역 관리들이 의병진을 핍박하는 바람에 재기항쟁의 준비를 할 생각으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 현을 다스리는 서본우에게 무장해제를 당함으로써 유인석의 을미의병항쟁은 종말을 맞았다.
의병해산 후 유인석은 이주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통화현 오도구로 가서 정착하였다. 유인석은 그곳에서 효제(孝悌)와 충순(忠順)을 덕목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해 이주한인들의 교화에 힘썼다.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귀국한 유인석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제자를 양성하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기여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이어서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유인석은 1908년 7월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유인석은 이곳에서 이상설(李相卨), 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연해주를 중심으로 국외에서 활동하던 항일세력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코자 1910년 6월 10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고, 그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십삼도의군은 국내외를 망라하여 계몽운동자와 의병운동자 모두가 합류한 조직이었다. 십삼도의군은 고종황제에게 상소문은 보내 러시아로 망명해 올 것을 건의하고, 그 군비를 정식으로 요청함으로써 본격적인 의병전쟁을 수행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의군이 미처 항일무력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910년 8월 23일 하오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지자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韓民學敎)에 모여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회(聲名會)를 조직하였다.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 (聲彼之罪 明俄之寃)는 말에서 이름을 딴 성명회에서 유인석은 다시 총대에 추대되었다. 유인석은 즉시 강제합병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 원근에 산재해 있던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가 망라된 8천 6백 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서명을 받아냈다. 유인석을 대표로 하는 이 서명록은 성명회 선언서의 부본으로 첨부되어 각국 정부 및 신문사에 발송되었다.
1910년 8월 중순 이후 노령지역에서는 일제의 위협을 받은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이 피체되는 등 국권회복운동이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1911년 러시아 당국에 구금되었던 성명회 및 십삼도의군 간부들이 석방되자 이들은 1911년 5월20일 한인의 실업을 권장하고 친목을 다진다는 목적으로 권업회(勸業會)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실상은 국권회복운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활동하였던 권업회는 한인 자치단체로서 러시아 당국의 공식 승인을 얻고 유인석을 수총재로 추대하였다.
권업회 수총재를 마지막으로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중국 서간도로 이거한 유인석은 1915년 1월 29일 74세를 일기로 손에 의자기(義字旗)를 들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유인석은 보수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혼신을 다바친 애국자였다. 계몽운동적인 성격이 강한 성명회의 회장에 무력항쟁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던 십삼도의군 도총재인 유인석이 다시 추대된 것은 일제강점 초기 민족항쟁사에서 차지하는 유인석의 상징적인 입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돌석
신돌석은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해군 남면 북평리(현재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순경(舜卿)이며, 이명으로는 대호(大浩)·태호(泰浩)·태을(泰乙)·돌석(乭錫)·돌석(突石) 등이 있다.
신돌석(1878~1908) 의병장은 일제가 우리 국토를 침략하고, 주권을 유린하자 의병 봉기를 주도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신돌석은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년 3월 13일 영해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기의하였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선생은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특히 1907년 8월 군대 해산 후에는 해산 군대까지 휘하에 들어와 막강한 병력으로 경상북도 북동부 지역에서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신돌석은 한말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기병하여 민중적 기반위에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일제는 신돌석의 의병부대에 대한 탄압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돌석을 회유하기 위한 수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관찰사의 서약서, 통감의 편지 등을 보내 귀순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신돌석의 불같은 항전의지를 꺾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제의 귀순 권유서를 불살라 버리고 신명이 다할 때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에 따라 신돌석은 의병을 이끌고 9월 영해 희암에서, 10월 영양 금정여점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영해와 평해를 중심으로 흥안·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와 안동·영양 등 경북 내륙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뒤 겨울이 다가오자 그 동안의 전력 손실을 보충하여 다음해 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하였다. 이후 가족들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명년의 재기를 위해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던 중, 11월 중순 영덕 눌곡(訥谷)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신돌석은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金相烈)을 만나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게 선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하게 한 뒤,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들은 일본이 신돌석을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신돌석은 자신이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 독립협회
- 1896 4월 독립신문 발간
- 1896 11월 독립문의 정초식 거행
- 1898 2월 독립협회 회원의 구국운동 결의
- 1898 2월 절영도 조차 반대
- 1898 3월 1차 만민공동회 개최
- 1898 5월 러시아의 토지매수 요구를 좌절시킴.
- 1898 9월 외국인 용병 고용 반대 운동
- 1898 10월 개혁파 내각의 수립을 위한 운동 개재
- 1898 12월 정부, 민회 금압령을 내림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1898년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과 침략정책에 대항하여 대한제국의 서울 시민들이 자주독립의 수호와 자유민권의 신장을 위하여 조직·개최하였던 시민궐기대회 또는 민중대회라고 할 수 있다.
[전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가 개최한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에는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에 해당하는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를 반대 결의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의 철수와 한러은행의 철폐도 결의하였다. 독립협회 제1차 만민공동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기대 이상으로 1만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석했으며,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만민공동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중집회가 생기고 시민들이 자주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만민공동회를 관람한 러시아공사는 물론이요 다수의 외국 공·영사들과 외국인들은 한국민중의 정치의식의 성장에 모두 큰 충격을 받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3월 12일에 독립협회와 직접 관계없는 서울 남촌에 거주하는 평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이다. 이 만민공동회에는 이틀 전보다 더 많은 수만 명의 서울시민들이 운집하여 러시아와 모든 외국의 간섭을 규탄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절규하였다. 러시아는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 결의와 각국의 반응을 고려하여 한반도에서의 부동항과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우선 포기하고 3월 27일 청국으로부터 랴오둥반도를 조차한 다음 부동항과 군사기지를 랴오둥반도의 따리엔(大連)과 뤼순(旅順)에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대한제국으로부터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하고 한러은행을 폐쇄했으며 절영도 조차요구도 철회하였다.
일본도 독립협회의 강경한 요구에 응하여 할 수 없이 그들의 원미도 석탄고기지를 대한제국에 반환하였다. 한반도가 완전히 열강의 힘의 진공상태가 되자 러시아와 일본은 상호견제를 위하여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협정(Rosen-Nish Agreement」을 체결하여 양국이 대한제국의 주권과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함과 동시에 대한제국이 군사교관이나 재정고문을 초빙하는 경우에도 양국의 사전동의 없이는 응낙할 수 없도록 협약하였다. 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균형이 성립되었으며 이 균형이 1904년 1월까지 약 6년간 지속된 것이었다.
[후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의 방법으로 러시아의 침략 시도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자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서울시민들이 애용하는 민족운동방법으로 정립되었다. 1898년 여름 독립협회와 서울시민들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의 기초강화와 민권신장을 위한 수많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독립협회각 1898년 10월 1~12일 철야 상소시위운동 끝에 개혁파정부의 수립에 성공하고 이어서 독립협회와 개혁파정부가 협동하여 의회설립을 위한 중추원 신관제를 11월4일 공포하여 한국역사상 최초로 의회설립을 보게 된 것을 황제가 수구파의 모략전술로 취소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긴급체포하며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에는 서울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상설기구로 조직하여 투쟁하였다. 후기 만민공동회는 만 42일간 철야 상소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협회의 지도자 17명의 석방을 요구하고 독립협회 복설과 수구파 5대신 규탄,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헌의6조의 실행과 황국협회(皇國協會)의 공격 분쇄와 규탄, 의회의 재설립 요구, 대신후보 인물 11명을 천거하는 등 맹렬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설기구로서 후기 만민공동회의 운동은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 독립협회 복설, 황국협회의 공격 분쇄와 규탄에는 성공하였으나 그 밖의 요구사항은 황제와 수구파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광무황제는 군대를 동원해서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킬 경우의 각국 반응을 타진하였다. 러시아측은 군대 사용을 권하였고, 다른 외국공사들은 언급을 회피하였다. 오직 일본공사만이 명치유신(明治維新) 초기에 군대를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민회를 해산시킨 전례가 있음을 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일거에 탄압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일본공사가 노린 것은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세력의 붕괴였다. 일본측은 그들의 한국침략정책에 대한 한국내의 궁극적 저항 세력을 만민공동회 · 독립협회 세력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광무황제는 마침내 군대를 동원하여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898년 12월 23일 시위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만민공동회 회중은 시위대의 총검에 쫓기어 해산하였다. 광무황제는 12월 24일 11가지 불복종의 죄목을 들어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산령을 포고했으며 430명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간부들을 일거에 체포 · 구금하였다. 이에 황제와 수구파정부의 일본과 내통한 무력탄압에 의해 만민공동회는 강제해산당하였다.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서재필(徐載弼)과 개화파가 합작하여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10여 년 전 갑신정변의 실패의 주요 요인으로 민중의 지지결여 때문이었다고 보았고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면 국민의 애국심과 자주 정신이 필요하며 이런 정신은 신문을 이용하여 깨우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서재필의 제안에 개화파 정부 내부협판 유길준은 1896년 1월 하순 새로운 신문사의 설립과 국문판 및 영문판을 동시에 창간하여 1896년 3월 1일부터 발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서재필은 정부가 지출해 준 이 자금으로 일본에서 인쇄기와 활자 등을 구입하고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하고 1896년 4월 7일『독립신문』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독립신문』은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모두 4면이며 제3면까지는 국문판으로 하고 제4면은 The Independent라는 제호로 영문판을 편집하여 격일간으로 발행하였다.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로 있으면서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사설을 맡았으며 주시경(周時經)은 국문판 편집과 교정을 담당하였다.
『독립신문』의 사장 겸 책임자는 서재필이었고, 부책임자는 주시경이었으며 그 아래 탐방원(探訪員)이라고 부르는 기자를 두었다. 영문판 편지에는 서재필의 조수로 헐버트(H. B. Hullbert)의 도움을 받았다. 창간 당시는 서울 정동의 본사 이외에 인천·원산·부산·파주·개성·평양·수원·강화 등지에 지국을 두었다. 그 후 신문이 발전하면서 지방지국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다. 외국 통신으로는 중국 텐진(天津)을 통하여 로이터통신을 직접 전신으로 받았다.『독립신문』의 구독방식은 오늘날과 같이 한 사람이 1부를 읽고 접어 두는 것이 아니라 돌려가며 읽고 때로는 시장에서 낭독도 했으므로 실제로 『독립신문』을 읽거나 낭독을 들은 사람의 수는 발행부수의 수십 배나 수백 배가 되었다. 서재필은 1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고 기록하였다.
『독립신문』은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직후부터 친러수구파 정권에 의해 매수가 추진되다가 정부가 1899년 11월 27일 독립신문사의 사옥의 반환을 재촉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899년 12월 4일 정부에 의해 매수당하였다. 친러수구파 정권도 『독립신문』매수 당시에는 아일랜드인을 주필로 하여 일간으로 속간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매수 이후에는 속간하지 않고 영구히 폐간시켰다. 이 신문은 여러 가지로 한국 신문사상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문과 영은문
독립문은 독립협회(獨立協會)에서 1897년 11월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건립한 석조문이다.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새로이 독립문을 건립하여 한국인의 자주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와 자손만대에 보여야한다고 판단하여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결의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하기로 하고 성금을 모집하였다. 당시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팽배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독립협회의 목적을 지지하고 독립문 건립을 위한 성금을 냈다.
독립협회는 창립 3개월 후인 1896년 9월 6일 서재필(徐載弼)로 하여금 독립문 건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독립문의 설계는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하여 비용관계로 축소해서 기본 스케치를 하고 독일영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을 도와서 세부설계를 작성했으며 공역(工役)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였다. 석공은 한국인 고급 석재기술자들이 담당하고 역사(役事)는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11월 21일 오후 2시 반에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독립문은 정초한 지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 준공되었다. 독립문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석재인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높이가 42척, 폭이 22척, 깊이가 21척, 터널의 폭이 17척이나 된다. 탑의 서쪽에는 독립문의 지붕위로 나선형의 층계를 만들었다. 또한 독립문의 남쪽 서울 시내를 향한 머리에는 국문으로 독립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중국을 향한 북쪽에는 한자로 독립문(獨立門)이라고 하였다. 문 이름 좌우에는 태극기를 넣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함과 동시에 그 부근 일대가 공지였으므로 이 지역에 나무를 심고 공원을 꾸며 독립공원(獨立公園)을 만들었다. 또한 독립협회는 중국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관인 모화관(摹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을 만들어서 독립협회의 사무소와 회의장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립된 독립문은 화강암의 견고한 건축물로서 19세기말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의 기념물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하여 한국인의 자주독립의 결의를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자각과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또한 장구하게 보존 가능한 석조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독립의지를 각성시켜 주었다.
광복 후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독립문의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자 서울시는 그 자리에 독립문이 있었던 터라는 기념동판을 묻고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독립문을 이전시켰다.
독립관
독립관(獨立館)은 독립협회에서 1897년 개수(改修)·건립한 회관이다. 1896년 7월 2일 창립된 독립협회는 영은문(迎恩門)을 철거한 차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새로 건립하기로 결정할 때에 버려진 모화관(慕華館)을 전면 개수하여 독립관을 만들기로 하였다. 모화관은 중국사신단 일행을 영접하여 연회를 베푸는 영빈관이었는데, 갑오경장 이후로 개화당정부가 1895년 영은문을 철거할 때 ‘모화관’도 폐쇄하여 방치하였다. 독립협회는 모화관 건물을 전면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 The Independence Pavilion)이라 새로 이름을 짓고 독립협회의 사무소 및 집회장소와 강연회 장소로 사용키로 하였다. 독립관은 1897년 5월 23일 개수가 완료되었다. 이에 독립협회는 왕태자(王太子)가 국문으로 독립관이라고 친서한 현판을 거는 현판식을 1897년 5월 23일 오후에 개최하고 독립관을 개관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협회 사무소를 독립관 안에 두고,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서 강연회를 갖기로 하였다. 독립협회는 1897년 8월 8일 회의에서 매주 토론회를 독립관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부터 시작되어 모두 34회로 개최되었다. 이 독립관에는 평균 500명씩 모여 시민과 회원 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다. 독립관은 국민들로부터 독립문에 버금가는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써 간주되었다. 안중근(安重根)의사가 1908년 3월 21일자 『해조신문(海朝新聞)』에 기고한 글에 “속히 국권을 회복한 뒤에 태극기를 높이 달고 처자권속과 독립관에서 서로 모여 일심단체로 육대주(六大洲)가 진동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고 쓴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독립관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현재 서대문 독립공원의 독립관은 옛 독립관의 원형을 추적해서 자리를 옮겨 1996년 12월 28일 복원한 것이다.
독립관은 한말 열강의 침투 속에서 이룩하고자한 독립협회의 활동의 근거지이자 자주독립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서재필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서광언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성장하였고, 그 후 자식이 없던 7촌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가 대덕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7세경 서울에 있는 외숙부인 김성근의 집에서 공부하여, 1882년에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 3등에 급제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개화파의 거두인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에 눈을 떴다. 과거 합격 후 서재필은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1883년 5월 도일, 동경의 호산(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이듬에 7월까지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웠다.
1884년 7월 귀국 후 서재필은 급진적인 개화·혁신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을 앞세운 수구파의 무력공격으로 3일천하에 끝나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그 후 미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다시 일본을 떠나, 188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이후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전개하였다.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는데, 이 때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 홀렌백을 알게 되어 그의 호의로 윌커스 베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졸업 후 미육군 총감실 소속 도서관에 취직하여 중국어 및 일본어로 된 의학관련 책을 번역·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1889년 콜럼비아대학 의학부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하여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학사(M.D)가 되었다.
1895년 국내에서 갑오개혁이 일어나면서 서재필에게 씌워졌던 역적의 죄명은 벗겨지고, 박영효의 귀국제의가 있자, 서재필은 한국에 민주주의의 도입과 사회개혁의 실천을 목적으로 1895년 12월 26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공식적으로 중추원의 고문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개화운동의 선구자로서 국민계몽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먼저 배재학당을 통해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간행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또한 협성회를 조직하여 토론회를 지도하고, 건양협회의 결성을 추진하였으며, 독립협회와 독립관을 설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독립사상을 내외에 선양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의 민중계몽활동이 점차 확대되어 당시 제국주의 일본과 러시아의 한국침투에 방해를 주자 이들 국가는 한국 정부의 수구세력을 움직여 서재필 추방공작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그는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은 도미 후 외견상 1904년부터 1924년까지 인쇄 및 문방구 사업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였으나, 3ㆍ1운동이전부터 이승만·윤병구· 여운홍· 안창호 등 국내외 애국지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사정을 교감하며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독립운동의 일선에 뛰어들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사조와 평화의 기운이 국제정세를 지배하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후부터 1922년까지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의 독립열망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알렸고, 한국통신부를 조직하여 『KOREA REVIEW』등 수많은 선전책자를 발간하였으며, 또 미전역에 21개지부의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미국민에게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활발한 대외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은 1921년 11월에 시작된 워싱톤군축회의에 대한 준비를 직접 담당하면서, 당시 한인들간 분열되어 독립운동이 침체되어 있던 미주한인사회와 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외의 모든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서재필은 1926년 7월 하와이에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해외한인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위상을 떨쳤으며, 대부분 『신한민보』 등을 통한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생계를 위해 62세가 되던 1926년부터 다시 의사로서의 수업과 활동에 주력하였다.
해방 후 서재필은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초빙으로 1947년 7월 83세의 나이로 미군정최고고문으로 귀국하여 이듬해 9월까지 한국에서 머물렀다. 그는 라디오방송과 강연 및 저술활동을 통해 참된 민주주의국가의 길을 제시하고, 사분오열된 해방정국정돈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러던 중 백인제를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통령후보로 추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으로 인해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의 생을 마쳤다
- 애국계몽운동
- 1906 대한 자강회 발족
- 1907 1월 국채보상운동 시작
- 1907 4월 신민회 조직
- 1909 8월 청년 학우회 조직
- 1911 일제가 1월 105인 사건 조작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에서 김광제(金光劑)·서상돈(徐相燉)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민간에서 이 같은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1904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었던 한일협정서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이 임명된 이래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 급격히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1906년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자 한국의 시정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한국침략에 소요되는 경비를 고율의 국채를 기채하여 일본차관으로 조달하였던 것이다. 1907년 초 한국정부의 대일차관은 1,300만 원에 이르렀는데 그 액수는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정도였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국채보상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김광제와 서상돈 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2천만 동포가 담배를 3개월 동안 끊어 모금한 돈으로 민간에서 국채를 보상하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곧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갔다. 2월 22일에 서울에서 김성희(金成喜)·유문상(劉文相)·오영근(吳榮根) 등의 주도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조직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에 국채보상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민의 전폭적인 호응으로 모금이 시작된 지 3개월 뒤인 5월에는 모금액이 20만 원에 달하였다. 1907년에 불같이 일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그밖에도 참가세력의 조직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지도논리와 구체적 발전전망이 모자랐던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도층은 분열되었을 뿐 아니라, 모금 자체에만 주목하였고 보상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이 전개되던 시기에 대중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애국심의 고취와 항일의식의 고조는 충분히 의의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하겠다.
신민회
신민회는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安昌浩) 등 7인의 노력으로 조직되었다. 이 조직의 핵심은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양기탁·윤치호·이승훈 등과 의논하여 단체의 조직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창건위원을 선정하고, 총감독으로 양기탁, 총서기로 이동녕, 재무 전덕기 등의 임원을 정하였으며 안창호는 집행원이 되었다. 안창호가 맡았던 집행원은 회원의 입회를 관장하여 사실상의 조직 및 회원을 관리하던 핵심적인 자리였다.
신민회는 그 취지서에서 “본회의 목적은 아한(我韓)의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 문명국을 성립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하였다.
즉 부패한 사상과 습관의 혁신, 교육과 산업의 발달 등을 통하여 새로운 국민〔新民〕이 되고, 또한 유신한 자유 문명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국민의 창출이었다. 이것은 나라의 부강이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판단에서 신국민을 창출하고자 한 것이다.
신민회가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채택한 것은 당시 계몽운동에서 일반화되고 있었던 실력양성론이었다. ①신문·잡지 및 서적을 간행하여 백성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각곳에 권유원(勸諭員)을 파건하여 권유문(勸諭文)을 전파하여 백성의 정신을 각성케 할 것, ③정미(精美)한 학교를 건설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④각 곳의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할 것, ⑤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할 것, ⑥신민회원의 합자(合資)로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신민회에서 강조한 것은 신사상 고취를 통해 국민들의 습관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하에 신민회는 비밀결사로 조직되었다. 안창호는 당시 인민의 정도가 유치하여 이를 표면단체로 하면 사회의 반감을 사서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또 입회 희망자를 전부 참가시키면 회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불가능하다는 점, 또 정치적으로 자립자존을 목적으로 하므로 통감부에서 해산을 당하여서는 안되겠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비밀결사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민회는 주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평북은 이승훈, 처음 평남·황해는 최광옥이 관장하였으며, 1908년 경에는 안태국이 평남, 김구가 황해도, 그 뒤 다시 장응진이 평남을 관장하였고, 함경도는 이동휘가 관장하였다. 회원이 되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상공인·교사였으며, ‘합방’후에 학생층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기독교인이었다.
신민회에서는 회원을 모집하는데 매우 신중하였다. 각 책임자는 항상 회원의 모집에 주의하며 회원의 추천이 있을 지라도 길게는 1년여, 짧게는 수 개월 그 행동을 관찰하고, 그 의사가 견고하다고 인정하면 입회시켰다. 입회는 집행원 안창호가 국가사상의 후박(厚薄)을 문답하고, 다시 담력을 시험하여 결정하였다. 신민회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고 단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표면의 회명, 가령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같은 단체 이름으로 회원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신민회는 민족 실력 양성을 위해 신문 · 잡지 등 계몽도서 간행, 강연회 개최, 민족 학교 설립, 민족 산업 진흥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신민회는 국외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일제는 신민회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소위 ‘안악사건(安岳事件)’ ·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 사건’ ·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 암살 음모사건‘ 등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을 검거 탄압하였다.
신민회의 활동은 1910년대 중국 · 러시아 지역 독립 전쟁의 발판이 되었으며 청산리대첩 · 봉오동대첩 등 독립군의 대일 항전으로 계승 발전하였다.
배재학당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서울 정동(貞洞)에 설립한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 다. 1885년 8월 아펜젤러가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 등 두 학생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배재학당은 정동에 있는 민가 몇 채를 사서 1886년 신축·이전하였으며, 이 해 6월 8일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중등과정의 보통과와 대학과정의 본과를 둔 이 학교에서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서구의 각종 근대식 학문을 가르쳐 학생들에게 개화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교과과정은 예비과정부·교양과정부·대학과정부 등이 있었으며, 특히 영어를 배우려고 입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1894년부터는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기도 하였으며, 서재필의 주도로 1896년에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協成會)가 조직되었다. 협성회에서는 매주 토론회를 열고 개화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으며,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주간으로 발행하다 이를 일간으로 바꾸면서 『매일신보』로 게재하였다. 1900년 당시 과목은 영어·한문·지지·역사·산술·이학·화학·문법·독서·작문 등이었다. 관립인 육영공원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침체된 데 비하여 사립인 배재학당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신지식 보급과 지식층 양성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학생들은 독립협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령」에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받았으며, 1912년 6월 연합대학을 학당 안에 특설하였다. 1914년 3월에는 교원양성을 위하여 중등사범전수과(專修科)를 병설하였다. 1909년에 4명의 졸업색(김동혁·임성금·최경희·한익수)을 배출한 이래 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배재학당은 배재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인가 받아 1916년부터는 배재학당과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병설·운영하였다. 이후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은 1925년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육영공원
육영공원은 186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국립교육기관이다.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83년 민영익(閔泳翊)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일행은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고종에게 근대식 학교의 설립을 요청하였으며, 1894년 9월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이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문에 설립계획이 보류되었다가 1886년 7월 헐버트(Homer. B. Hullbert) · 벙커(Delzell. A. Bunker)·길모어(George. W. Gilmore) 등이 교사로 초빙되고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이 제정된 뒤 마침내 9월 23일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육영공원의 관리는 수문사(修文司)의 당상(堂上)과 주사(主事)가, 교육은 3명의 교사가 맡았다. 반(班)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누었는데, 좌원은 젊은 관리들 중에서 뽑아 통학하게 하고, 우원에는 15~20세의 선비들 중에서 뽑아 합숙시켜 교육하였다. 경비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같이 부담하다가 뒤에는 해관세(海關稅)로 충당하였다. 학생은 1886년, 1887년, 1889년 세 차례에 걸쳐 모집하였는데 각각 35명, 20명, 57명 등 총 112명이 입학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양반고관의 자제들이었다. 과목은 영어를 비롯하여 독서 · 습자 · 지리 등이었으며, 특히 영어교육에 교사와 학생 모두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인 관리들과 학생들이 여전히 전통적 사고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길모어를 비롯한 교사들이 계속 사직하고 재정사정도 나빠지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육영공원은 점차 침체되었다. 1894년 벙커마저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뒤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이 새로이 육영공원을 인계받으면서도 교명도 ‘영어학원’으로 바뀌었다. 이 영어학교는 다시 관립외국어학교의 하나로 개편되었다.
원산학사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민간학교이다. 1883년에 서당을 개량하여 설립되었으며 시무에 긴요한 각종 실학과 근대적 학문을 가르침으로써 개항장인 원산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종래 한국최초의 근대학교로 알려진 배재학당보다 2년 앞서 설립되었다. 1880년 4월 원산 개항 후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상인의 침투에 대응하여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할 목적으로 서당을 개량·운영하던 중 1883년 1월 신임 덕원부사 겸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에게 학교 설립기금을 모을 뜻을 밝히고 근대적 학교의 설립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이러한 주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당시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과 원산항 통상담당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정헌시(鄭憲時)의 지원을 받아 그해 8월 정부로의 정식 승인을 받고 원산학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설립 초기에는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편성하였다. 문예반은 정원이 없었으나 약 50명의 학생을 입학시켰고, 무예반은 정원 200명으로 출신과 한량을 뽑아서 교육하여 별군관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특히 무예반을 함께 둔 것은 동래(東萊)의 예를 따라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대응책은 당시 일본의 무력위협이 수시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매우 시기적절한 조치였다. 입학자격은 덕원·원산지방의 연소하고 재주 있는 자제로, 학교설립에 기금을 내지 못한 지방민의 자제도 차별 없이 입학을 허가하였으며, 다른 읍의 사람이라도 입학금을 내는 자는 거절하지 않으며, 무사로서 무예반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입학금 없이 입학을 허가하도록 하였다. 설립 당시의 교과과목은 공통과목과 특수과목으로 분류하였다. 문무의 공통과목은 시무의 긴용한 과목으로서 산수·격치(물리)로부터 기기·농업·양잠·광채 등에 이르기까지 실학을 가르쳤다. 특수과목으로서 문예반은 경의(經義)를, 무예반은 벙서를 가르쳤다. 이러한 교과목의 교재로 처음 사용하고 비치한 도서는 『영지(瀛志』,『연방지(聯邦志』,『기기도설(奇器圖說』,『일본외국어학(日本外國語學』,『법리문(法理文)』,『대학예비문(大學豫備門』,『영환지략(瀛環志略』,『만국공법(萬國公法』,『심사(心史』,『농정신편(農政新編)』등이다. 이로 볼 때 원산학사의 교과목은 일본어 등의 외국어와 법률·만국공법·지리 등 광범위한 근대학문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예반의 최초 교수진은 교수 1명과 조교인 장의(掌議) 2명이었다. 시험방법은 문예반이 매월 초에 월별고사를 부과하여 최우수자 1명을 뽑아 매년 가을 공도회(公都會)에 보내 초시 합격자의 정원명단에 넣도록 하였다. 무예반은 병서를 숙달한 뒤 사격을 익혀 매월 월별고사를 부과하여 연말에 최우수자 2명을 뽑아 병조에 보고하여 출신은 절충(折衝)으로 특별히 승진시키고 한량은 바로 전시에 응시하도록 허가하였다. 학생에 대한 벌칙으로는 태만하여 시작은 있으되 끝을 맺지 못하거나, 술집에 출입하거나, 부랑하여 믿을 수 없거나,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경중에 따라서 벌하거나 제적하도록 하였다.
원산학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특히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기금을 모아서 근대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점엣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또한 외국세력과 직접 부딪히는 지방의 개항장에서 시무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외국의 학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서당을 개랴하여 근대학교로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실학자들이 애독하였던 책들과 외국의 새로운 서적들을 교육함으로써 전통과 근대의 조화와 융합을 도모하였다. 원산학사는 1894년 갑오개혁 무렵 원래의 소학교와 중학교 기능이 분화되어 원산학사는 문예반만 갖춘 원산소학교로 되었고, 원산감리서에서 역학당(譯學堂)을 세워 중학교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소학교 졸업생들에게 외국어와 고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원산소학교는 남산동의 같은 자리에 교사를 증축하고 크게 발전하다가 일제 치하에서는 ‘원산보통학교’·‘원산제일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1945년까지 존속하였다고 한다.
이화학당
이화학당은 1886년 5월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M.F)이 설립한 이래 1910년에 이르기까지 초등부터 고등 교육과정을 둔 기독교계 사립여학교이다.
이화학당의 교명은 1887년 명성황후가 하사하였는데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1908년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같은 해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하였다.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며, 이를 계승한 이화여자고등학교는 1986년에 한국여성 신교육 100주년의 전통을 세웠다. 설립 당시에는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사회통념과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 때문에 학생 수용에 어려움을 겪어, 단 한 명의 여학생으로써 개교하여 영어를 가르쳤는데 1887년 학생수가 7명으로 늘었고 교과목도 성경과 국어가 추가되었다.
1892년에는 반절(反切:국어)·한문·영어·성경·수학·역사·지리·과학 등을 가르쳤으며 1909년에는 음악이 정식 과목으로 추가되었다. 1904년에 4년제 중등과를 설치하여 1908년 중등과 제1회졸업생을 냈고, 같은 해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립하였다. 1910년 4월에는 4년 과정의 대학과를 신설함으로써 초등·중등·고등교육을 모두 실시하게 되었다. 1918년에 고등과와 보통과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각각 개편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이화여자대학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운영진은 초기 미감리교회 조선부인선교부 유지재단에서 1921년 조선인 이사진이 참가한 이화학당이사회로 바뀐 뒤 1935년 신흥우가 한국인 최초로 이사장에 취임한 후 1943년 김활란이 뒤를 이었다. 교육목적은 한국여성을 기독교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 양성이었다.
1922년 이화 YMCA가 조직되어 학내외 종교활동, 『이화』의 발간, 부녀자 한글강습회와 농촌강연회 등을 중심으로 학생자치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계 교육기관으로 총독부 제약을 덜 받았기에 학생들의 민족의식도 남달랐다. 3·1운동은 물론 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1929년말~1930년 초 서울학생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의 상징적인 여성운동가 유관순은 바로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 일제강점
- 1910 한일합병조약을 공포.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 설치.
- 1911 경무총감부, 안명근의 체포를 계기로 황해도 일대의 민족주의자 총검거를 시작(신민회 사건 · 안악 사건 · 105인 사건).
- 1915 사립학교에 일본 국가를 부를 것을 지시.
- 1917 간도지방의 한국인에 대한 경찰권이 중국관헌으로부터 일본관헌으로 이관됨.
조선총독부
1910년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각지에서 지속되는 한국민의 저항을 근절시키고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전제적(傳制的) 군국통치체제(軍國統治體制)인 무단통치(武斷統治)란 식민지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무단통치 지배의 핵심 기구는 조선총독부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화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 총독을 두어 식민통치를 담당케 하였다. 조선총독은 일본관제 내에서 최고의 친임관(親任官)으로 일본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어 일본국왕에게 직속되므로 일본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일본국왕에게만 책임을 지며 위임된 범위내에서 육해군까지 통솔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총독은 조선에서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및 군대통수권을 장악하였다. 게다가 법률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권한으로 총독의 법률효과를 가진 명령을 특별히 ‘제령(制令)’이라 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총독에게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하여 식민통치의 무단성을 강화시킨 것이다. 총독은 직속문관 보좌관으로 정무총감(政務總監)을 두었으며 그 밑에 중앙 및 지방행정기관이 편성되었다. 중앙행정기관은 총독관방(總督官房)·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를 비롯하여 소속관서로 정경무총감부(政警務總監部), 각 도청·재판소·감옥·전매소·철도국·통신국·임시토지조사국·세관·영림창·인쇄국·취조국·중추원 등의 행정·사법기관이 설치되었으며 중앙의 요직은 일본인 관료가 장악하였다.
지방관제도 크게 바뀌어 전국의 행정조직을 13도(道) 11부(府) 317군(郡)으로 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 전의 이사청·재무감독국·재무서 등은 일반 지방관청에 통폐합되어 중앙의 조선총독부와 함께 각급 지방관청이 체계적인 통치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1914년 3월부터 부·군을 개편하여 부는 지역을 축소해서 12부로, 군은 220군으로 정리하고 면(面)을 2,522면을 두었는데 기존의 지방행정의 기본단위이던 군을 대신하여 면을 중요한 한국인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로 삼아 과거의 지방행정체계를 붕괴시키고자 의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수의 권한은 박탈하여 부수적인 존재로 만들고 면을 실질행정의 말단기구화하는 조치를 시행하여 친일적인 조선인 유력자를 면장으로 앉혀 식민지의 제반시책 및 식민지 농정추진의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케 하였다. 1917년 조선면제의 시행과 더불어 법제화되어 그 기능이 강화되었으니 당시 면장은 헌병경찰의 물리적인 비호하에 법령의 주지·징수금의 납입고지·징수독려, 민적의 이동보고 제 청원서류의 전달·면내 정황보고·통계자료조사, 동장의 감독업무를 수행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총독부의 관료행정기구는 본질적으로 식민지 민중의 억압과 수탈을 수행하는 물리적 폭력기구였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45년 까지 35년간 존속된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나라에 대한 수탈기관이었다. 1995년 8월 15일 일제잔재청산의 일환으로 철거되어 현재 그 부산물들이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05인 사건
105인 사건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신민회(新民會)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배일(排日)운동을 전개하자 일제가 민족운동을 근절시키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105인사건’이라 지칭함은 이 사건에 강제 연루되었던 700여 명의 피의자 가운데 제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기 때문이다. 105인 사건이 일어난 시기(1911~1912)는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포악한 무단통치를 자행하던 때이자, 국권 강탈에 대한 한인들의 분노와 반일감정이 고양되던 시기였다.
1910년 평북 선천(宣川)에서 안명근(安明根)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하여 기독교 신자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마치 안명근 사건을 신민회원 등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처럼 조작하여,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이동휘(李東輝) 등 6백여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신민회원이나 기독교 신자들은 총독처단 의거를 꾸민 사실이 없으므로 그 사실을 부인하자, 일본 경찰은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의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明石元二郞]의 지시로 이들에게 72가지의 반인륜적인 가혹한 고문방법을 동원해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이를 유일한 근거로 사건을 조작하여 700여 명의 피의자 가운데 ‘주모자’로 지목한 123명을 기소·재판에 회부하였다. 연루자들은 대부분 서북지방 출신으로 기독교인이었다.
1심(審)에서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제출한 각종 증인신청과 증거물 요구를 기각하고 몇 번에 걸친 일방적 재판을 거쳐 21회 공판에서 기소자 중 이창식 등 18인을 제외한 105인에게 검사측이 구형한 형량 그대로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토지수탈사업
일본은 명치시대부터 항상 식량이 모자라는 나라였다. 따라서 1876년 2월의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에 대한 한국의 수출품 중에 쌀과 콩이 항상 수위를 차지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한국을 안정된 식량공급지로 만들고자 획책하였고, 헌병경찰력을 배경으로 해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당시 근대산업이 거의 발전되지 못했던 한국으로서는 토지야말로 기본적인 생산수단이었다.
원래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①토지소유권의 확정, ②총독부 예산의 재원으로 되는 지세 및 지세부가세의 부과 기준이 될 토지가격의 사정, ③측량에 의한 지형(地形)·지모(地貌)의 조사 등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매매와 저당 등에 의한 토지이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소유권 조사이다. 그리하여 1918년 마무리된 토지조사 사업의 결과를 보면, 토지경작자가 아닌 전 농가 호수의 3.3%에 불과한 지주가(9만 386호) 전경지면적의 50.4%를 소유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물론 지주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있으나 100만 정보 이상의 대지주일수록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토지회사나 개인지주가 많았다.
자작농은 전 농가의 19.6%에 지나지 않고 소작농이 37.6%(100만호 남짓), 자작겸소작농이 39.3%(104만 5천여 호), 합계 76.9%의 농가가 토지가 없거나 모자란 농가이었다. 글을 모르고 법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다수의 농민들은 신고를 못했기 때문에 봉건 통치하에서의 연고를 신청한 자가 지주가 되었고, 신고가 없는 토지는 국유화되어 일본 지주에게 불하되었다.
농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은 지주에게 6~7할의 소작료 및 일부 지역에서는 지주가 부담해야 할 지세공과(地稅公課)까지 바쳐야 했다. 한국농촌에서 이와 같은 토지소유관계의 빈곤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농촌으로부터 공업에 흡수된 노동자의 저임금과 노동조건의 악화, 화전민(火田民)과 도시빈민의 증가, 해외로의 유출민을 파생케하는 근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주에게 집중된 소작료는 미곡상을 통하여 일본에 수출되기 마련이니 이것이 바로 ‘기아수출’을 가능케 한 시스템이다.
서대문형무소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했을 무렵, 독립운동에 몸 바친 애국선열들이 옥고를 치른 감옥이다.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처음으로 감옥이 설치된 것은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으로 세워졌다. 1904년 7월 14일 종로에 있던 전옥서(典獄署)가 경무청 감옥서로 개칭되었고, 그 뒤 국권이 피탈되면서 항일투사들이 늘어나자 일제가 새로이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을 짓게 되었다. 이어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그 명칭을 개칭하였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란 명칭을 거쳐 1946년에 경성형무소, 1950년에 서울형무소, 1961년에 서울교도소로 바뀌었다가 다시 1967년 7월 7일 서울 구치소로 개명되었다.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시흥군청계산 기슭의 새 건물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감에 따라 서울시가 이를 법무부로부터 매입하여 1988년 12월 공원조성공사를 시작하여 3년만인 1992년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이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현재는 2만여 평에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9,000여 평 내에 옥사 3동(10사, 11사, 12사)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으며, 역사성과 보존가치가 있는 다른 옥사 4동(9사, 13사, 중앙사, 나병사)과 보안과 청사, 사형장, 담장, 망루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였다. 한편 구(舊)여사(女舍) 지하감방(유관순굴)은 매몰되어 없어졌던 것을 복원시켜 놓았다. 서대문감옥에는 1916년에 여사(女舍)가 신축되고, 1923년에는 새청사 및 사형장이 세워졌으며, 1935년에는 제1~6사(현존)가 신축됨으로써 수용인원도 3,000명 정도로 늘어났다. 1907년 7월 통감부 칙령 제1호로서 경시청관제가 공포되어, 경무청을 대신하여 경시청이 설치되고 감옥업무가 경찰업무에서 분리되었다. 본격적인 감옥업무는 1907년 12월 칙령 제 52호로 감옥서의 관할이 내부(內部)에서 법부(法部)로 옮겨지고 감옥관제가 새로 제정되면서 시작되었다. 즉 1907년 이완용(李完用)과 부통감인 소네가 사법·감옥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를 조인하고, 이어 12월 27일 법부령 제1호로 「경성감옥서를 설치하는 건」을 반포하였으며, 1908년 4월 11일 법령 제2호로 전국 8개 감옥의 명칭과 위치를 정해 공포하였다. 1908년 지어진 옥사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국권을 강탈한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처음 건축당시에는 허술한 목조건물이었으나 지금의 건물들은 후에 개축한 것으로 제10·11·12옥사는 초기에 지어졌고, 제13옥사는 1923년에 지어졌다. 특히 1929년에 지은 제9옥사는 당시 수감 중에 있던 독립투사들을 강제동원하여 구워낸 벽돌로 지었으며, 부채꼴로 펼쳐진 옥사는 2층 중앙에서 1층과 2층을 동시에 감시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이곳에서 처형된 애국지사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다 미수로 피체된 강우규 의사를 비롯하여 김동삼·유관순·송학선·이재명·김학섭 외 100여 명에 이르고 투옥된 인사들은 김구·이승만·손병희·안창호·여운형·한용운·김마리아 등 4만여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