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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로 직조한 수평의 집
- 유영숙의 시집 『비가 오면 나를 씻는다』를 읽고
김영(시인, 문학평론가)
1. 체크무늬와 화광동진
어찌어찌해서 유영숙 시인의 원고가 내 손에 들어왔다. 그날 저녁에 읽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시인이 아니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아무 기대나 의도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 유 시인의 작품 속으로 점점 끌려들어 가고 말았다. 40여 편의 시가 귀퉁이가 접혀 원고가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원고를 읽는 저녁의 기쁨이 컸다.
유 시인의 시는 진솔하고 순순하다. 화려한 기교를 부리다 딴 길로 새지 않고 지적 유희를 부리다 변형되지 않아서 이 작품집을 읽는 독자는 유 시인에게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의 감성에 공감할 것이다.
작품 속의 서정적 자아가 ‘시인 자신’이라는 오독에 기대며 유영숙 시인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한다.
꽃무늬 보다 체크무늬가 더 좋다
굵거나 가늘거나 진하거나 엷거나
수평과 수평을 이루는 선과 선들 사이로 생겨난
작고 네모난 방이 좋다
쉼 없이 달그락거리는 세상 숨소리
작고 네모난 방에는
다 자란 나무도 덜 자란 나무도 갈증이 없다
햇볕에 찻잔을 씻어 찻물을 우리는 날
방과 방 사이의 문을 열면
이름 모를 새들
네모난 방의 벽 작은 부리로 쪼개
어제와 오늘 소통의 바다에 이른다
꽃 향 대신 고른 숨소리 편안한 네모
체크무늬 셔츠 단추를 채우며
반듯한 하루를 입는다
- 「나는 체크무늬를 좋아한다」 전문
이 작품은 유영숙 시인의 고백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적 자아가 실제 작가를 잘 반영하고 있다. 시적 자아는 “꽃무늬 보다 체크무늬가 더 좋”아 한다. 꽃무늬는 화려하지만 홀로 존재하고 홀로 피어난다. 그래서 화려함도 오로지 꽃의 것이다. 그러나 “체크무늬”는 일단 바둑판처럼 가로세로로 줄이 그어진다. 두 가지 이상의 선이 함께 무늬를 만드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두 줄 이상의 직선으로 서로 얽혀서 만든 무늬다.
시적 자아가 체크무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다음 행에 있다. “수평과 수평을 이루는 선과 선들”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선이 서로 엉켜있어도 체크무늬에는 수직이나 서열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평등하고 모두 같기 때문이다. 이 선들이 만든 “작고 네모난 방”에서는“다 자란 나무도 덜 자란 나무도 갈증이 없”는 때문이다.
유 시인의 다른 작품 「짚라인을 타다」의 “낮은 세상으로 동행하는”, 「비가 오면 나를 씻는다」의 “강바닥을 걷는 물고기들의 가슴을 쓸어 줄”, 「혼자인 날」의 “무릎담요 끌어다 앞마당 산 그림자에 덮어주고”에 도 같은 서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구절들을 읽는 독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 즉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섞여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의 객체가 되어 함께 씨실과 날실로 얽혀 더 좋은 세상을 직조한다는 시적 자아의 삶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렇게 낮고 온유하고 포근한 시적 자아의 사유 공간은 사각이다. 이 사각의 공간은 평범한 공간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는 공간이다. 유 시인의 다른 작품 한 편을 더 살펴보자.
햇살이 반듯한 버티칼로
나누어지는 오후
한 층 한 층 탑을 쌓듯 몰려드는 나른함
잘 맞추어진 문장을 건너 건너 읽다가
글자들을 뭉개고 누워
네모반듯한 햇살 그림자를 본다
틈이 많아 덜컹거리는 나는
반듯한 네모인 적이 없다
유년에 본 다랑이 무논처럼
구불구불한 논길
척박하지만 나름의 그대로가 편안한
음표보다 쉼표가 많은 나
하루 밥값을 다하는지 모르겠지만
뭉개진 글자를 매만지며
갯벌 속 알찬 바지락이 생각나는
입맛 살아있는 오늘 오후가
행복한 느림보
- 「네모난 오후」 전문
이 작품 안에는 시적 자아가 좋아하는 체크무늬가 만든 “작고 네모난 방”이 어떤 역할을 하는 공간인지가 잘 나타나 있다. “틈이 많아 덜컹거리는 나는/반듯한 네모인 적이 없다”라고 말하듯이 시적 자아의 지향점은 “반듯한 네모”로 사는 것이다. 아귀가 잘 맞고 사개가 꼭 들어맞는 삶이다.
이런 삶은 이론과 논리가 정연하고 이론과 행실이 부합하는 삶이다. “잘 맞추어진 문장을 건너 건너 읽다가/글자들을 뭉개”라는 구절에서 이론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가 어려워 차라리 그 이론을 “뭉개”버리는 서정적 자아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뭉개진 글자를 매만지”는 것이다.
서정적 자아의 이런 행위는 유 시인의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다.
빛을 삼킨 신호등 앞에 섰다
일러주던 지침의 색은 사라지고
네 귀퉁이 안에 동그라미 형체를 잃고
흐물거리는 바닥 열기는 텁텁한데
방금까지 오가던 법규는
길 건너로 유유히 달아난다
궁핍한 호주머니 밤바람만 가득하다
- 「방황」 전문
현실과 이론 사이에서 “방황”하는 서정적 자아는 “빛을 삼킨 신호등 앞에”서 지금까지 절대적이라 여겼던 이론이나 질서를 잃어버리고 만다. “방금까지 오가던 법규”는 이미 사라졌다. 신호등이 색을 구분할 필요 없이 아무 때고 건너면 되는 때가 온 것이다. 더는 법규대로 세상이 진행되지 않을 때 서정적 자아는 “방황”하는 것이다. 사각으로 대변되는 “네 귀퉁이”는 효용가치를 잃어버리고 시적 자아는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2. 비와 비빔과 죽비와 씻김 그리고 공진화
유영숙 시인의 이번 작품집 제목은 『비가 오면 나를 씻는다』 이다. 제목처럼 이번 작품집 원고에는 비에 관한 작품이 많고 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잘 드러낸 작품이 많다. ‘비’는 유 시인이 지난날의 후회나 잘못 등을 씻어내고, 다시 새로운 일상을 꾸리는 도구가 된다. 일종의 수행 도구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사람
되돌아 멀리 간 사람을 생각하면
스스로 죄인이 된다
박제된 시간을 깨우는 낡은 괘종시계 울리면
옛날 집 벽장문이 열린다
아주 맑은 아침이거나 따뜻하거나
조금 뜨거운 한낮의
온기 가득한 그곳에 들어서면
바람 부는 날
은사시나무 등허리 깊은 곳을 보이듯
쉬이 가슴의 응어리를 꺼내고 만다
철썩이는 파도 토닥여
바다로 내보내는 갯바위
벽장 속 하늘은 마냥 말이 없다
시큰거리는 통증에 가슴이 울컥
한바탕 소나기가 내린다
온몸 가득 적신 빗물에 죄를 씻고 나서야
벽장문을 닫는다
- 「그리움」 전문
위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자아의 죄는 현실적인 법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되돌아 멀리 간 사람을 생각하면/스스로 죄인이”되는 것이다. 일종의 죄의식 내지는 죄책감이다. 시적 자아에게 “옛날 집 벽장”은 고해소이면서 감정을 맘껏 풀어놓는 해방공간이다. “옛날 집 벽장” 속에서 “되돌아 멀리 간 사람”에게 송구하고 미안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후회와 자책으로 실컷 운다. 그러면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고 “온몸 가득 적신 빗물에 죄를 씻고 나서야” 비로소 “벽장문을 닫는다”. 비에 죄를 씻는 행위는 성글어진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유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는 동안 여러 작품에서 나타난다.
책장 한 장 넘어가는 사이
빗줄기 거세지고
빗줄기 거세지는 창밖에는
어둠 짙어가고
어둠이 짙어가는 길목에서는
비워내야 하는
내 속 사정이 씻기고 있다
- 「장마」 전문
글을 쓰는 일은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위의 작품에는 책을 읽는 짧은 시간에 “어둠이 짙어가고” 비가 내리는 실제가 담겨있다.
여기서 어둠은 앞의 작품 「그리움」에서 “벽장”으로 대치한 공간이다. 다시 말하면 “벽장”과 짙은 “어둠”은 시적 자아가 자신을 풀어놓고 자책감이나 회한을 고백하는 고해소가 된다. 또한 이런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시적 자아에게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공간이다. 「그리움」에서 “소나기”에 해당하는 거센 “빗줄기” 역시 시적 자아가 죄의식 씻어내는 도구이자 자신을 정화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유영숙 시인의 시가 가독성이 좋고 공감대 형성이 잘 된다면 이는 유 시인이 생활 속에서 건져낸 시의 소재를 진술의 형식으로 써 내려갔기 때문일 것이다. 유 시인이 작품에 자주 거론하는 ‘비’는 다음 작품들에서는 ‘비빔밥’으로 변주된다.
신랑이랑 첫 데이트 후에도
늦은 저녁 열무김치로 밥을 비볐고
둘째 아이 임신해서도
시댁 어른들 눈치까지 비벼
열 달을 비빔밥으로 태교를 해서인지
양푼처럼 넉넉하고
맘 씀씀이 또한 동그랗게 어우러진
아들이 든든하다
오늘도 내려놓지 못한 습성에
옥상 한편
오그라지고 뻣뻣한 상추 오이 따다가
여름 한낮 뙤약볕을 비비고 있다
- 「비빔밥」 부분
시적 자아는 기쁜 때나 그렇지 못한 때에 자주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시적 자아의 헛헛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비비는 ‘비빔밥’은 섞는다는 뜻이며 포만감을 얻기 위해서 비빔밥을 만든다. 그런데 “시댁 어른들 눈치”를 비비는 날의 비빔밥은 여기서는 ‘비비다’가 ‘빌다’와 같은 의미의 맥락으로 읽힌다. 특히, “오늘도 내려놓지 못한 습성에”라는 구절에 이르면 시적 화자의 비비는 행위는 ‘섞다’와 ‘빌다’가 함께 들어있는 언술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비’를 ‘비빔밥’으로 변주한 작품 외에 ‘비’를 ‘죽비’로 변주한 작품도 있다.
오늘은 비를 데려왔다
절 마당 모래알 사이사이로
비 스며드는 소리 깊고
스르르 내려앉는 눈꺼풀 무겁다
쫘악~
스님의 죽비 소리
고요가 물러나고 다시
생각이 생각을 밀고 당긴다
- 「법당에서」 부분
시적 화자는 법당에서 참선하다 수마에 잡힌다. 이 작품에서도 ‘비’가 배경으로 사용된다. 시적 화자에게 졸음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스님의 죽비 소리”에 정신을 화들짝 차리게 된다. 앞의 작품들에서 동원한 ‘비’의 역할을 이 작품에서는 ‘죽비’가 하고 있다. ‘비’와 ‘죽비’ 둘 다 시적 자아가 다시 제자리 내지는 새로운 자리로 들어서게 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유영숙 시인의 ‘비’에 대한 변주는 이 작품집을 읽는 동안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다. 나머지는 독자 제현께 맡기고 유 시인이 ‘비’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 닿고자 하는 세계를 시적 자아의 고백을 통해 들어보자.
버릇이 생겼어요
마른 잎을 보면 가만히 들춰 보아요
천변을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서서
땅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당신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나의 기다림 따위는 상관없이
제시간에 맞추어 오겠지요
변함없는 예전의 모습으로
하지만 내게 있어 당신은
같은 모습인 적이 없습니다
굵은 장대로 바람을 동반하여 놀란 적 있고요
당신은 오기 전 미리 기별을 주긴 하지요
살아 있을까 싶은 것들 안주머니에서
잠든 생명을 깨워 밖으로 내보내지요
당신이 오기까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요
혼자 기다리기엔 억울하단 생각이 들어
안으로 들여 놓았던 화분 몇 개를 내놓습니다
- 「비를 기다리며」 전문
위 작품의 시적 자아는 비를 간절히 기다린다. 시적 자아의 “기다림 따위는 상관없이” 비는 “제시간에 맞추어 오겠지요” ‘비’가 내릴 것이라는 “기별”이 오면 “살아 있을까 싶은 것들 안주머니에서/잠든 생명을 깨워 밖으로 내보”낸다. “안으로 들여 놓았던 화분 몇 개를 내놓”기도 한다. 일종의 의례처럼 비를 기다리는 시적 자아의 단순한 행위이기도 하고 기원적 의식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유영숙 시인이 ‘비’를 기다리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마른 잎” 갈라진 “땅바닥” 그리고 “잠든 생명” “화분”. 이런 것들과 함께 ‘비’가 내린 후에 “서로 다른 빛으로 섞이는/초록이 화려”(「법당에서」)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서로 다른 빛으로 섞”인다는 것은 한 그릇에 함께 비빈다는 ‘비빔밥’과 상통한다. “초록이 화려”하다는 것은 온 세상 만물이 모두 소생하고 활기차게 생명력을 영위하는 세상이다. 이처럼 유영숙 시인의 작품 속의 ‘비’는 유 시인의 작품세계를 표방하는 아주 중요한 시적 기제이면서 유 시인이 문학과 삶을 통해 궁극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다.
‘비빔’은 하나의 재료가 아니듯 사람들도 하나의 색이 아니다. ‘비빔’이 서로 다른 것이 섞여 하나의 맛을 내듯 사람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사물과 사람 사이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하며 공진화해가는 세상이 유 시인의 작품 속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비’는 ‘눈물’과 ‘씻김’과 ‘소생’이며, ‘성장’과 ‘비빔’과 ‘공생’ 내지는 ‘공진화’까지를 함의하고 있다. 특히, ‘공진화’의 함의는 계절을 읽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3. 계절 속의 자리이타
몸 안의 혈관 모두 꺼내어
베란다 창가에 서고 싶은 날
볕 기운 돋은 화분 모두 깨어서
갑갑한 뿌리를 숨 쉬게 하고 싶은 날
봉인된 오월의 입술이 열리고
버드나무 새잎 숨소리 짙어지는 날
내가 나를 볼 수 없는
내가 보이지 않는 날
병이 깊어지는 걸까
병이 나아지는 걸까
쑥부쟁이 지천으로 널린 한 낮
세상 모든 줄기
수맥이 통통 튀는 날
안과 밖이 대등한 날
- 「햇빛 좋은 날」 전문
공진화라는 말은 ‘함께 나아간다’ 혹은 ‘함께 발전한다’는 말로 관련이 있는 둘 이상의 종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로운 관계다. 나도 이롭고 남 혹은 자연도 이로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말한다.
「햇빛 좋은 날」은 작가의 이런 성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햇빛 좋은 날”에 자리이타의 ‘나’에 해당하는 내 “몸 안의 혈관”과 ‘타’에 해당하는 “화분”을 비롯한 자연과의 교감과 북돋움을 시도한다. 이 과정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면서 또 나를 돌아보는 과정이 함께 수반된다. 이런 과정의 궁극은 “안과 밖이 대등한” 경지다. 안과 밖이 대등하다는 구절의 뜻은 마음과 말, 마음과 행동, 자연과 내가 서로에게 어긋나지 않는 수평의 경지를 말한다. 어긋나지 않고 하나의 공진화 내지는 자리이타 경지에 놓이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성정은 다음에 인용하는 「솟아오르는 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촉수를 다듬은 구름
몽긋몽긋 부풀어 오르면
덩달아 속치마 날리는 봄
보리밭 숨은 이랑 사이로
자잘한 냉이꽃 터지는 소리에
요양병원 창문이 열리면
낡은 환자복 사이로 얼굴 내미는 손목
고사리 홀씨
죽은 자의 무덤가에서 일어서는 봄
날리는, 내미는,
솟아오르는 봄
- 「솟아오르는 봄」 전문
이 작품은 제목에 사용한 ‘솟아오른다’라는 시어 자체가 이미 활기 내지는 생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활달한 기운 혹은 생명의 기운을 말한다. 더는 뻗어보려는 욕심이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이 없는 상태의 구름은 “촉수를 다듬은 구름”이다. 구름은 아무 욕심이 없다. 더 나아가 아무 근심도 없다. 구름이 “부풀어 오르면” 시적 자아의 “속치마”도 부풀어 오른다. 시적 자아의 “속치마”가 부풀어 오르면 “보리밭” “이랑”의 “냉이꽃 터”진다. “냉이꽃 터지”면 “요양병원 창문이 열”린다. “요양병원 창문이 열리면” “낡은 환자복 사이로” “손목”이 드러난다. 그때 “무덤가에서” “고사리”는 새순으로 “일어”선다. 이렇게 봄이 오면 사람과 자연은 모두 “솟아오르는” 것이다.
봄이 오면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뜨고 서정적 자아도 봄바람을 탄다. 어디 서정적 자아뿐이랴, 보리밭에 냉이꽃도 피기 시작하고, 겨울 추위에 꼭꼭 닫아걸었던 요양병원의 창문도 슬그머니 열린다. 이때 “낡은 환자복”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랫동안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의 가냘픈 손목에도 힘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죽은 사람의 영토인 무덤가에서도 고사리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봄이 생과 죽음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정적 자아의 시선을 따라 읽는 독자에게도 팔팔 뛰는 봄이 코앞에 배달되는 듯하다.
시인은 이 작품의 주된 서정을 “날리는, 내미는”이라는 압축하고 있다. “날리는, 내미는”이라는 단어는 밖으로 드러나거나 표현하거나 상승하는 양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비교적 짧은 이 작품에서 “날리는, 내미는”과 등가의 시어들이 “부풀어”, “날리면” “터지는” “열리면” “내미는” “일어서는”과 같이 변용되고 있다. 한 작품 안에서 이렇게 시어를 변용하는 효과는 차별이나 구별을 두지 않고 함께 나아가서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 대등함으로 작용하는 기제로 사용된다. 이 작품 역시도 나와 자연의 공진화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자리이타의 서정도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런 시인의 마음은 다음에 인용하는 작품에도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봄을 일찍 불러
일복이 많아 지친다는 그녀의 손등 꺼내 주고 싶다
산수유 생강꽃 피고 냉이꽃 지천인
새봄이 그녀의 명약이 아닐까
- 「봄이 빨리 와야 하는 이유」 부분
「봄이 빨리 와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 생기 내지는 활기를 불어넣는 봄을 기다리는 이유를 표현한 작품이다. 시적 자아는 “찬바람 불면 사지에 바늘이 찔린다는 친구” ‘입맛조차 없는’ 그 친구를 위해서 따뜻한 바람이 부는 봄을 기다린다. 할 수만 있다면, “봄을 일찍 불러” “일복” 많은 “그녀의 손등”을 고쳐주고 싶은 것이다.
일복이 많으면 일도 많고, 일이 많으면 몸이 고단할 것이다. 그런 친구를 위해 봄이 오면 산수유 생강꽃 냉이꽃을 구경하러 다니고 “얼굴만 한 삽을 들고” 캐서 입맛도 돋우고 약에 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새봄”이라는 계절 자체가 “그녀의 명약”일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시적 자아의 넓고 따뜻한 품과 인간애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내 안의 겨울, 담벼락 실금 사이
푸른 듯 붉은, 꽃그늘 비집어드는 봄
봄은 오고 있다
- 「봄은 오고 있다」 부분
시인이 ‘봄은 오고 있다’라는 선언적 언술로 제목을 뽑은 이유가 분명하다. 앞서 인용한 작품 「봄이 빨리 와야 하는 이유」라는 작품 속의 시적 자아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친구를 위한 봄, 즉 이타적利他的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 「봄은 오고 있다」라는 작품 속의 시적 자아는 자신을 위한 봄, 즉 자리적自利的이다. 봄은 “내 안의 겨울”에 “실금”을 낼 것이다. 시적 자아의 마음 안에 들어있는 차갑고 수동적이고 어두운 시간을 작가는 “겨울”이라고 언술하고 있다. 이 마음에 어느 순간 “푸른 듯 붉은, 꽃그늘”이 들어오고 있다. 시적 자아의 마음속 겨울에 “꽃그늘 비집어드는 봄”이 오고 담벼락 같이 불통이거나 무감정이었던 곳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징후를 가장 빨리 알아채는 사람은 시적 자아다. 자기 안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봄은 오고 있다」라는 선언적이고 확정적인 언술은 마음의 변화를 확신한 시적 자아의 선언이다. 이 작품에서 ‘봄이’라고 하지 않고 ‘봄은’이라고 언술했다. 우리가 흔히 혼용해서 사용하는 ‘이’와 ‘은’은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이’는 주격조사고 ‘은’은 보조사라고 한다. ‘봄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에서는 주어인 ‘봄’에 문장의 축이 기울어져 있고 ‘봄은 오고 있다’라는 문장에서는 술어인 ‘오고 있다’에 문장의 힘이 실리는 것이다. 시인은 의도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봄은 오고 있다」라는 제목은 ‘봄’이라는 시어보다는 ‘오고 있다’라는 시어에 선언의 무게가 더 실리고 있다. 아무리 겨울이 추워도, 아무리 어둠이 짙어도, 아무리 담벼락이 완강해도, 오는 봄은 오고야 만다는 시인의 생각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4. 다시 연필심을 깎는 겨울 강가
대개, 시인의 기억이나 추억은 인간적인 근원이나 정신적인 원형을 지향하고 있다. 일부러 짜 맞추거나 억지로 지어낸 시가 아니라, 생활하면서 조용히 묻혀있던 것들, 살면서 무심히 스쳤던 것들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부모나 형제 그리고 고향에 대한 기록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다.
유영숙 시인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유 시인의 이번 시집 『비가 오면 나를 씻는다』에서는 부모나 형제, 고향에 기댄 시가 많지 않다. 물론 이 시집에는 “삭은 지게와 아버지 곁에/나란히 앉는다”라는 간결하면서도 은근하고 은근하면서도 곡진한 서정이 깃든 「아버지의 가을」과 같은 좋은 시가 제법 들어있다. 그러나 이런 서정을 지닌 시편들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집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분량은 아니다.
유영숙 시인이 시집에는 ‘봄’이나 ‘비’ 등의 자연물이나 계절에 관련된 작품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가을에는」, 「우려낸 찻잎을 버리며」, 「가을이 가네」, 「가는 손님」, 「국화 피는 질마재」 등 가을이라는 계절을 소재로 하는 작품도 많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며 조락의 계절이다. 추수는 거두어들인다는 말이며 조락은 이제까지의 것을 버린다는 말이다. ‘가을’이라는 말의 어원은 ‘끊어내다’에서 나온 말이니 결국은 거두어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이 한가지라는 말이다. 또한 ‘가을’이라는 단어는 ‘여물다’, ‘저물다’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이는 ‘가을’이라는 시어가 배태하고 있는 뜻이 유 시인이 자주 작품의 소재로 사용한 ‘비’의 함의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계절에 유난히 애정을 들이는 유영숙 시인은 ‘겨울’이라는 계절에 대해서도 깊은 사유를 동반한 작품을 여러 편 썼다. ‘겨울’과 연관된 작품을 여기에 몇 편 소개한다.
물속에 산이 있다
살갗 떨군 수척한 산 엎드려 있다
물속에 하늘이 있다
후 불면 쪼그라들 것 같은 하늘
발아래 마주한다
물에 잠시 기대던 바람은
울렁이는 그림자를 새기며 달아나고
물길 따라 보름달이 내려오면
달빛으로 물든 겨울 물속에 잠든다
상하의 그늘과 좌우 저울질로 엮어진 허물
손끝이 찢기고 겨울 적막이 깨어진다
깨어진 조각들 하늘로 뛰어드는데
뛰어들지 못한 미숙한 파편들
실핏줄을 파고들며
내 심장 안에서 잠을 청한다
겨울 강가 고요 속에서
헐거워진 코트 깃 바로 세우고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 「겨울 강가에서」 전문
「겨울 강가에서」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눈길이 머무는 곳은 “상하의 그늘과 좌우 저울질로 엮어진 허물”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는 작가가 좋아한다는 “체크무늬”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상하”와 “좌우”로 “엮”은 공간이 “체크무늬”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공간은 유 시인의 사유의 원천적인 출발의 공간이다. 또한 “그늘과” “허물”로 직조된 수평의 공간이다. 여기서 “그늘”과 “허물”은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지만, 같은 뜻으로 변용된다.
위 작품은 “상하의 그늘과 좌우 저울질로 엮어진 허물”이라는 행을 축으로 하여 작품의 앞부분은 정적이다. 그래서 앞부분의 마지막 시어는 “달빛”, “겨울” “물” “잠든다”라는 잠재적이고 정적이고 음성적인 어휘들로 쓰여있다. 그러나 “상하의 그늘과 좌우 저울질로 엮어진 허물”이라는 행 이후의 작품 뒷부분은 ‘찢다’ ‘깨어지다’ ‘뛰어들다’ ‘핏줄’ 등의 활동적이고 양성적인 어휘들로 쓰인다.
“실핏줄을 파고들며/내 심장 안에서 잠을 청한다”라는 구절부터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일어나는 여러 감정과 변화가, 시적 자아인 “내”게로 수납되고 수렴되는 과정이다. 시적 자아는 겨울을 “심장 안에” 수렴하고 난 후 “바로 세우고” “하나로 묶는” 행위를 한다. 이 행위는 시적 자아의 결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시적 자아가 자신을 다시 다듬고 밖으로 향하거나 갈구하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일종의 종교적인 의식으로까지 읽힌다.
서랍 안
봄풀 건드리는 농염한 햇살로 지은 옷 한 벌
찬장 유리병 속
땀에 젖은 목덜미 식혀주던 바람 한 줌
석류나무 새순 붉게 물들이던
봄볕은 어디에 두었더라
마음의 곁가지를 잘라
찬바람 가는 길 우편으로 보내려 하는데
지워진 주소록
살다 간 흔적 하얀 눈이 지우고 있다
- 「겨울, 그 중간에서」 전문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겨울의 중간쯤이다. 시적 자아의 구도적인 겨울나기는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곁가지”가 자꾸 자란다. 한참 겨울 속을 통과하고 있는 시간에 시적 자아가 하는 일은 “봄볕”을 찾는 일이다. “마음의 곁가지를 잘라” “보내려 하는데”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 “봄볕”을 찾는 일 역시 일종의 구도적인 행위다. 삶의 길을 찾거나 삶의 지표 내지는 좌표를 돌아보고 점검해보는 행위다. 다음의 작품에서는 시적 자아의 이런 행위가 좀 더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연필심 꾹꾹 눌러
편평히 고른 지면 위에
너를 심는다
당연한 듯 비스듬히 쓰러지는 너
마음의 문을 열어
토닥이고 상처도 내보지만
너는 항상 비스듬하다
쓰러진 심지
지면의 숨소리 이해할 때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오늘도 맨바닥의 단어들 쓸어 모으며
다시 연필심을 깎는다
- 「시」 전문
‘겨울’을 건너 ‘봄’에 도달했다는 암시가 여기저기에 보이는 작품이다. “심는다”라는 행위는 시적 자아의 ‘사유’가 ‘행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토닥이고 상처도 내”는 행위는 시를 쓰기 위한 시적 자아의 노력이다. 그래도 마음에 딱! 드는 시가 나올 리 없다. (이는 거의 모든 시인이 그럴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매만져도 시적 자아가 완성한 시는 언제나 “비스듬히 쓰러”져 있을 뿐이다. 시를 쓰는 과정도 구도적 과정이다. 왜냐면 문학이란 우리 생활과 연관된 것들은 물론 무관하게 여겼던 것들까지도 사랑하게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오늘도 맨바닥의 단어들 쓸어 모으며/다시 연필심을 깎는” 행위를 날마다 반복할 것이다. 시적 자아가 시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기에 유영숙 시인도 이런 작업을 날마다 반복할 것이다. 반복은 완성을 향해 가는 첫걸음이자 완성에 도달하는 전부다. “다시 연필심을 깎”는 행위는 내 마음을 깎는 행위고 나를 돌아보고 다시 발견하는 행위다. 이는 분주한 일상으로 나타나는 나(아我)를 “깎”아내고 보다 근원적이고 진실한 나(오吾)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앞에 인용한 작품에서 시적 자아가 찾는 “봄볕”은 유영숙 시인이 찾아가는 ‘진리’이며 참된 ‘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유영숙 시인의 시집은 사물을 관통하는 사유를 씨실로 하고 자연의 섭리를 통찰하는 혜안을 날실로 하여 잘 직조해 낸 수평의 집이다. 사물과 사물이 서로 스며드는 유 시인의 시적 작업은 자신만의 독특한 하나의 세계를 건설한다. 특히 계절을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아 계절과 시인의 사유가 이물감 없게 잘 교직하여 구도적인 무늬를 짜고 있다. 이번 작품집으로 미루어 볼 때, 유영숙 시인은 “봄볕”을 너무 늦지 않게 찾아낼 기량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