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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이 살아가는 길
설교일 : 2009년 10월 11일
본 문 : 로마서8:1-11
설교자 : 조재진목사
여러분들은 예수 믿는 성도가 누리는 최고의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물질의 축복이나 명예를 얻는 것, 그리고 건강의 복을 누리는 것 역시 다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가장 최고의 축복은 ‘성령의 내주하심’인 것 같습니다. ‘성령의 내주’란 우리 몸을 지성소로 삼고 하나님이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한번은 제가 일산지방에서 지방연합집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의 내주에 대해 설교했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 한분이 대단히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집회를 인도하려고 교회 현관을 막 들어섰는데, 이 분이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니까 제 손을 잡고는 너무 기뻐하면서 자신은 성령님이 자신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평생 처음 듣는 말씀이었다고, 나 같은 사람에게도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밤에 한숨도 못잤는데, 혹시 잠을 자면 성령님이 떠나가실까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죄와 죽음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마음에 영접할 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령의 내주 정도가 아니라 ‘성령의 영주’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이 세상 한가운데서 승리하며 살도록 함께 하시는 방법 역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면 성도들은 어떤 일을 당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내주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고, 최고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본문 1절, 2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로마서 8장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고 결론으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로마서3:24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 로마서5:1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이 아니요 율법의 정죄에서도 벗어났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오호라’라는 탄식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우리 영혼을 다시 지옥으로 끌고 갈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바로 이런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그러므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소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더 이상 정죄당하지 않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성령님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모든 정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다시 말한다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생명의 성령님께서 율법의 정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죄수를 석방시키려면 판사가 석방서를 써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도소 소장이 그것을 가지고 옥문을 열어줍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마치 하나님이 내어놓으신 석방서와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이 석방서를 근거로 해서 죄와 사망의 옥문을 열고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모든 근거입니다. 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그것을 근거로 실제로 우리를 해방시키신 분이십니다. 마치 교도소 소장이 판사가 써준 석방서를 가지고 옥문을 열어주듯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모든 정죄, 죄책감을 몰아내고 우리를 자유하게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이천년 전의 사건이 지금 우리 안에 일어나는 사건이 되도록 실제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시간차이는 있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 일어난, 우리 자신의 사건이 된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천년 전에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분명히 아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성령으로 지금 저와 여러분 안에 내주하십니다. 할렐루야!!
성령님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과거에 우리 힘으로 율법의 요구대로 살 수 없었지만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분문 3,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육신의 부패성과 연약함 때문에 이 율법의 요구대로 살 수 없었습니다. 하나를 지키면 두 개를 범하고, 두 개를 지키면 열 개를 범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아무런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따르지 않도록, 부패한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냥 살았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저 육신의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입니다. 본문 7절과 8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니까 원수가 될 수밖에 없지요. 밤낮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고, 무엇이든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5:19 이하에 보면 육체의 일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육체를 따라 살아가면 결국에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분열함... 등등 이런 죄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육체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주하면서부터 달라졌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까?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거룩한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성결한 삶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결국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자리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5-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기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이 생각이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이 생명과 평안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성령이 없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매사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있고 사회적인 기반도 있는데, 항상 불안해합니다. 곧 망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서 지방에도 집을 하나 더 사두어야 되겠다고 분주하고 돌아다닙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없는 사람은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스스로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해야 하니까 얼마나 피곤하지 모릅니다. 평안이 없는 피곤한 삶, 이것이야 말로 성령님이 없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처럼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피곤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오래전에 어느 TV를 보니까 한 아나운서가 유치원 아이들에게 이것 저것 묻는데, 한 꼬마가 ‘요즘엔 배우는 것이 많아서 피곤해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아니 유치원생들도 피곤하답니다. 다 피곤한 삶입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약이 피로회복제라고 하지요. 어느 유명제약회사는 피로회복용 드링크를 1년에 2억병이나 팔았다고 합니다. 그거 마신다고 피곤이 풀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피로회복제가 없으면 못사는 것이 요즘 우리들의 모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고 사는데도 평안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령의 생각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께서 말씀하는 것이 아닌 육체를 따라 살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서 성령이 탄식하십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평안은 없고 대신 신앙의 갈등만 커갑니다.
언젠가 저는 정부 요직에 있는 어느 장로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이 분은 주일날 오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골프장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과거에는 여러 번 주일 오전 예배 빠지고 골프치러 간 모양입니다. 사실 골프장에 안가면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분이 주일에는 골프장에 안가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생각을 따르지 않으니까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뜻을 거역하고 예배 빠지고 등산하고 낚시가고 가족들끼리 모여서 놀러 다니고... 그렇게 해 보십시오. 성령님이 얼마나 탄식하겠습니까? 성령님이 탄식하는데 마음이 평안이 있겠습니까? 놀면서도 불안하고, 겉으로는 웃지만 마음 한 구석은 얼마나 찜찜합니까?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육체를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는 예외 없이 성령님이 내주해 계십니다. 본문 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보십시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조건이 다른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가를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까?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삶을 가리켜 성령을 따라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본문 12-1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에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앞의 말은 이런 말씀입니다. ‘성령이 너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성령이 너희 생각을 바꾸어서 영의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너희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육신대로 살면 안된다’
무슨 말입니까? 옛날에는 육신에게 빚지고 살았지만 이제 우리는 성령님께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빚진다는 것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게 끌려 다니는 빚쟁이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말을 한마디 해도 이제는 육신에게 빚진 자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죄 안짖고 어떻게 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다 육신에게 빚져서 끌려 다니는 사람의 말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단호하게 영으로써 몸이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던 육신적인 일들을 단호하게 무너뜨리고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13절에서는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죽인다는 말은 ‘꼼짝못하게 한다’ 혹은 ‘끊어버린다’라는 뜻입니다. 또 여기서 죽여야 한다는 말은 현재 동사입니다. 한번 죽이고 끝나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죽이는 반복행위를 의미합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의 몸은 죄에 약해서 잘 넘어지고 죄에 끌려 다닙니다. 몸을 따라 살면 몸의 행실이 나타납니다. 곧 죄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고개를 들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일어나는 몸의 행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육신적인 생각이 일어나고, 몸의 행실이 고개를 쳐들 때, 그 때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몸의 행실에 대해 ‘NO'라고 거절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14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에서 ‘인도받는다’ 라는 말은 희랍어로 ‘아고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강제로 끌고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던 시절에 잘 가던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반면 꼭 가야할 곳은 싫어해도 기어이 데리고 가실 만큼 강력하게 우리의 행동을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끄는 힘이 굉장히 강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버티어도 이길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거기에 ‘육체의 소욕’, ‘성령의 소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소욕이라는 말은 영어로 ‘desires'라는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배고 고플 때 밥을 먹고 싶지요. 그때 일어나는 것이 소욕입니다. 그 소욕은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성령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강력하게 우리를 이끌어 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만 주시고 수수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그 진리까지 우리를 기어이 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말로 해서 안되면 멱살을 잡고, 멱살을 잡았는데도 안가면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끌고 가시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들은 죄를 짓고는 그냥 못삽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기어이 죄를 회개하도록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또 성령의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못살고, 예배에 빠지면 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그냥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알고 있습니까? 이웃과 싸우고도 잠만 잘 잔다고요?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거룩한 삶, 성결과 화해의 삶을 살도록 만드십니다.
성령님은 아들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기가 막힌 행복이 따라오는 데, 바로 그 행복이 본문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할렐루야!!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고, 양자의 영, 곧 아들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무서워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종의 영의 받은 것이 아니고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받는 아들이 하듯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중학교를 다녔을 때, 저희 학교에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런 선생님을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하지요. 학생 주임을 맡고 계셨는데 어쩌다가 이 분한테 걸리면 무섭도록 얻어맞았습니다. 한 친구가 그 선생님에게 원한이 사무쳐서 칠판에다가 욕을 써놓았습니다. 선생님이 그걸 보고는 ‘누구냐?’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안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화가 나니까 반 학생 전부를 대걸레 자루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때리다가 대걸레 자루가 부러지니까 다른 것을 가지고 또 때렸습니다. 무지하게 맞았지요. 그때부터 이 선생님 주변에는 아무도 안갔습니다. 저 멀리서 보이기만 다 도망칩니다. 그 선생님을 다 무서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아니 그 무서운 선생님 품에 안겨서 그 선생님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아빠 아빠’ 하고 애교를 부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종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그 분이 무섭기만 했지만 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에게는 호랑이 선생님이 아니라 그저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일 뿐이었습니다.
사실 ‘아빠’라는 말은 아이가 아버지를 향해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기에는 체면이나 품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마냥 좋아서 아버지에게 안기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아이들을 키워본 부모는 다 압니다.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고 품에 안길 때, 그 때가 좋지요. 어느 날 훌쩍 커 버린 아들이 ‘아버지’ ‘혹은 아버님’ 이러면 징그럽게 느껴집니다.
누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바로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있었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했었습니다.(막14:15)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의 나이가 어떠하든,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쑥스럽고 어색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행복을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의 뿌리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는 느낌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성령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기 위해 세 가지 사실을 꼭 기억하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꼭 믿으십시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확신하는 것이 성령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사는 제 일 단계 작업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로얄 패밀리입니다. 우리 안에 계셔서 순간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확인시켜 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이 다가 올 때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래도 괜찮을까?’ ‘꼭 죄라고 할 수 없잖아’ 라는 애매한 태도를 버리고, 단호하게 ‘안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육체를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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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