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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개를 찾아서/추풍령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고
세상의 삶에는 두루 저마다의 길이 있다. 산다는 게 또한 아주 먼길 가는 일이라고 버릇처럼 주억거리면서 오늘도 사람들은 쉴 틈 없이 저마다의 길을 간다. 멀리 떠나도 길이요, 멀리서 돌아와도 길이다. 떠난 사람만이 머물 수 있고 머문 사람만이 떠날 수 있으니 장차는 떠남도 머무름도 모두 길이다. 아, 마침내 세상에 길 아닌 것이 없으니 천지간의 그 많은 행차들은 도대체 어느 곳에 닿아 쉬는가. 저 하늘 어디에는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어가서 가면 다시 오지 않는 목숨들도 있다 하니 참 부러워라.
지금 또 길 떠나는 이들은 다시 오는가, 아니면 영영 안 오고 마는가? 때때로 거기,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으로 가자. 가서 한 세상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이나 되고, 솔가지 무성한 숲을 헤치는 바람이나 되어 쉬어 가자. 하룻밤쯤 자 고 가자. 본래 온 바 없어 이내 갈 곳 없는 구름처럼. 때때로 그와 같이 와서 그와 같이 가는 바람처럼. 몇 날이 지나가도 헛헛하여 돌아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매양 그 길 어디쯤을 시작이라 하고 내내 그 길 어디쯤을 끝이라 하면서 정녕 우리 지난날 수없이 매듭지은 그 허다한 마디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송천 강변의 천년 옛절 반야사
상주 땅 모동에서 오도치(吾道峙)를 넘어 영동의 황간에 닿기 전에 백화산을 휘돌 아 흐르는 송천에 기대어 앉은 옛 절이 반야사다. 원효의 제자 상원이 창건한 반야 사는 백두대간의 봉황산과 국수봉에서 갈래 친 두 산줄기가 각각 송천에 막혀 이마 를 맞대는 협곡에 자리잡은 천변(川邊) 도량이다. 남한강의 신륵사나 소양강의 청평사가 강언덕에 있으나 물에서 제법 멀고, 포항의 오어사가 비록 물가에 있으나 호반인 것에 견주면, 반야사는 금강의 물줄기 송천의 여울로 바투 바깥 마당을 삼는 절이다. 행여 장마에 큰물이라도 지면 제 아무리 고승이라도 절간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겠다 싶을 만큼 위태롭다.
산천이 두루 위험하니 절집의 아름다움이야 새삼 들먹일 일이 아니다. 수리의 둥지같이 오만한 벼랑 끝의 암자가 때로 그 어질증으로 아름답듯, 강변의 위태로운 옛 절이 어찌 수려한 풍광을 뽐내지 않았으랴. 다만 얼마 전 시멘트로 지은 요사채가 옛집으로 남은 불당 한 채와 천년 묵은 삼층 석탑을 무안하게 하더니, 이제는 대웅전도 새로 짓고 전에는 없던 큼지막한 시비(詩碑) 하나가 산문의 옛 부도 곁에 놓였다. 게다가 시비와 더불어 세운, 시비를 세운 후손의 공덕비가 참으로 볼썽사납다. 조상의 시비를 세우는데 공덕이라니, 어느덧 반야사도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절이 되고 말았다.
寄宿僧房久 절에 와 묵은 지 오랜데
心無顧草廬 집 생각이 전혀 안 나네
山光侵座碧 산빛에 물든 자리 푸르고
竹影入簾疎 대그림자 성글게 발에 어렸다
靑磵響幽谷 맑은 물소리 골짜기에 그윽하고
白雲行太虛 푸른 하늘엔 흰구름이 두둥실
居僧紊已罷 스님은 이미 공부를 끝냈는데
床在讀殘書 읽던 책이 상 위에 남았구나
시비에 실린 국당 박흥생(1374-1446)의 시 <반야사>다. 시비보다 큰 공덕비를 세우는 후손과는 달리 국당의 시는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읽게 만드는 깊이가 있었다. 그의 시집에 발문을 썼다는 서거정이 “티끌 먼지를 벗어나 참으로 도가 있고 덕이 있는 시”라 했다는데 고개를 끄덕일만 하다. <반야사>의 마지막 구절은, “따슨볕 등에 지고 유마경을 읽노라니/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구태여 꽃밑 글자를 읽어 무엇하리오”로 끝나는 만해의 <오세암>을 떠올리게 한다. 공덕비만 아니라면 반야사의 명물이 될 법도 한 시비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황간의 애향비 회도석(回櫂石)
황간(黃澗)은 본래 신라의 소라현이다가 지금의 이름을 경덕왕 때 얻었다. 민주지산 (해발 1242)에서 발원하는 물한계곡의 물과 삼봉산(해발 930)에서 발원하는 고자리의 물이 장교천을 이루며 황간을 지나 달도 쉬어 간다는 명승 월류봉에서 송천에 몸을 싣는다. 그 장교천의 물빛이 누렇다 하여 예로부터 황간이라 하였으니 황계 (黃溪)와 더불어 모두 이미 신라 적 이름이다.
장교천이 반야사를 지나 흘러온 송천과 만나기를 저만치 앞두고 희한한 푯돌이 하나 서 있으니 이름하여 회도석이다. 말 그대로 풀어 ‘뱃머리를 돌리라’는 뜻이다. 『영동군지』를 보니 황간 현감 이운영이 18세기 무렵에 세우고 글씨는 충주 사람 박시화가 썼다. 여느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비석도 그렇거니와 전서 또한 까막눈으로 보아도 아주 잘 쓴 글씨다. 회도석의 사연인즉, 광교천에 배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배가 내처 하류로 흘러가니 황간의 기운을 밖으로 실어내는 꼴이다. 또한 풍수의 눈으로 보면 황간 땅이 이미 떠나가는 배의 형국이라 회도석을 세워 그 뱃머리를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회도석은 근처에 버려져 있다가 얼마 전에 제 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흘러가는 산 천의 배를 비석의 주술로 돌린다는 옛이야기도 그럴 듯 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너나 없이 대처로 떠난 고향의 젊은이들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정성스레 회도석을 복원했다 한다. 덕분인지 한 동안 늘어만 가던 버려진 논밭이 차츰 줄어들고 있단다. 그리 하여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귀향을 두고 황간 사람들은 꼭 시절 탓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먼길 떠나간 이들이여! 부디 뱃머리를 돌리시길.
4번 국도에 비는 내리고
황간을 떠날 무렵 개였던 빗방울이 다시 듣는다. 추풍령이 나누어 금강에 보태는 골물이 광교천으로 흘러드는 어름의 동산 위에는 조선 태조 무렵에 처음 지었다는 가학루(駕鶴樓)가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 추녀깃을 세웠다. 황간에서 추풍령 고갯마루는 20리 길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골짜기 논밭은 거의 대부분이 포도밭이고, 그 포도밭 틈새로 부르면 들릴 듯 사이좋게 경부선 철길과 고속도로가 국도와 함께 나란히 달린다. 그 모든 부산한 풍경 위로 바야흐로 우거진 녹음이 봄비에 더욱 짙어 사방은 사뭇 깨끗하고 정갈하다.
황간을 떠나 시오리 남짓한 길섶에 자리잡은 사당은 임진왜란 때에 추풍령을 넘어 오는 왜적과 싸우다 죽은 의병장 장지현(1536-1593)을 기리는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추풍령 오룡동에서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4만의 왜군과 싸우다가 2천의 의병과 함께 죽었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뜨락의 오랑캐꽃을 들여다보다가 사당을 떠나 산모롱이 하나를 돌아서니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추풍령의 명물인 할매 갈비로 점심을 먹고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노래비가 서 있는 고갯마루로 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집 뒤안의 뽕나무가 그 경계이고 텃밭의 두둑이 또한 그 경계이다. 마을은 하나 인데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내륙 한양 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재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 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경상 우도의 과거길, 괘방령(掛榜嶺)
추풍령 고갯길 남쪽은 지금은 김천시가 된 봉산면이다. 봉산면에서 김천길을 버리고 백두대간과 나란히 서면 길은 외줄기로 천년 옛절 직지사로 간다. 워낙 찾는 이가 많아 이제는 ‘일방통행’이 되어버린 직지사 길에서 문득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백두대간을 향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로부터 황악산(해발 1111) 발치를 타 고 넘는 고개가 괘방령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듯 사람 발길로 친다면 괘방령은 추풍 령보다도 한결 부산했던 고개이다. 방(榜)이란 본래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나 붙는 것이니까.
추풍령은 관로였다. ‘되도록이면 포도청 앞은 피해 가는 게 상책’인 풍습은 예로부터 이어진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폐습이다. 별 켕길 게 없는 나그네도 으레 관리들이 들끓는 역로를 피해 한가한 샛길을 찾기 마련이다. 늘 구린 게 많아 부러 트집을 잡는다면 ‘털어 먼지 안 날 리 없는’ 장사꾼들이 그랬고, 구태여 역졸들의 농짓거리가 되기 싫은 천한 백성들이 그랬다. 또 있다. 이름도 하필이면 추풍이라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은 모두 추풍령을 마다하고 한사코 괘방령을 넘었다. 과거길 에 ‘방에 붙는다’는 말은 얼마나 반가운가. 사위(taboo)란 본래 갈수록 태산이라 나중에는 인근에 부임하는 관리까지도 관직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추풍령 을 피하고 괘방령을 넘었다.
괘방령은 그렇게 추풍령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고개였다. 지금은 그 괘방령에도 포장길이 뚫렸다. 고갯마루에는 흔히 추풍령의 장지현과 함께 이야기되는 박이룡 장군의 사당이 있고, 더 내려가면 참 아름다운 숲속의 천덕 분교가 있다. 박이룡은 퇴각하는 왜군을 맞아 수 없이 많은 승전보를 남긴 황간 출신의 의병장이다.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할 적에는 추풍령을 넘었지만 퇴각로는 괘방령이었고, 한국전쟁 때에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으로 진격했던 북군의 퇴각로 또한 괘방령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덥고 배부를 적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춥고 배고픈 시절이 오면 문득 생각나는 고개, 괘방령은 그런 고개였다.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