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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사임당 외에도 시임당·임사제라고도 하였다. 사임당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는 태임(太任)을 본받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신사임당의 롤모델(role model)이었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아버지 신명화 보다는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때로 남편은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기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주로 살았다고 한다. 아들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어 시집인 서울에 가서 살지 않고 친정인 강릉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살기도 했다. 때로는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 아들인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재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간혹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부군인 이원수의 나이가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부인을 잃은 후 이원수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 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조모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조모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율곡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