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내 마음의 엽서
89년 말 리영희 선생님을 처음 뵙고 하룻밤 말씀을 들었던 우연이 계기가 되어 90년대 중반 나는 선생님이 젊은 연구자들을 향해 자신의 사상적 전환을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나도 그 극적 장면의 연출에 한몫한 것이 있고 이 또한 한국 지성사의 ‘사건’이기도 했으니 거기에 이르는 도정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라는 주변의 권유를 더는 물리칠 수 없었다. 주제를 마르크스의 인간관으로 잡았다. 국내에서는 자료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직접 독일에 가서 자료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90년 1학기 서둘러 성적 처리를 마치는 대로 출국했다가 2학기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에 돌아오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베이스캠프랄까 주로 머무는 곳은 브레멘에 정했다. 나는 브레멘대학도서관에서 자료를 대출받아 복사하고 없는 자료는 어떤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지를 검색하여 해당 대학도서관을 돌아다녔다.
브레멘에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 동독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이때가 90년 여름이었는데, 독일이 통일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통독 이전 동독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차에 올라 기차표를 확인하는 역무원에게 열차가 과거 동독지역을 지나면 알려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자 역무원은 다소 사무적으로 말했다. “차창을 보고 있으면 풍경이 달라질 것이다. 거기서부터 동독지역이다.”
역무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차창을 통해 눈에 보이는 풍경이 어느 순간 확연히 달라졌다. 숲은 울창하고 강은 잘 정비되어 풍요롭던 풍경이 한순간 숲에는 나무들이 드문드문 꺾여 있고 강변은 지저분한 모습으로 변했다. 단박에 동독지역에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철학교정에서 자본주의는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으므로 환경 파괴적이지만, 사회주의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이롭게 하는 체제여서 환경친화적이라는 주장을 보고 감명받은 적이 있다. 자연이 흉측하게 파괴된 사회주의의 민낯에 내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구 동베를린 지역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번창한 선진국의 도심에서 갑자기 망해버린 부잣집 골목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그 자리에 있었으나 허름한 태를 벗지 못한 채였다. 훔볼트대학도서관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전년도 동베를린 시민혁명 당시 ‘폭도’들이 난입해 도서관을 파괴했던 까닭이다. 유서 깊은 훔볼트대학도서관의 장서들은 대부분 ‘폭도’들이 훔쳐가 중고 서점에 팔고 없다고 한다. 훔볼트대학 맞은편 골목에 늘어서 있는 헌책방에는 마르크스주의 서적이 넘쳐나고 있었다. 거의 버려지다시피 서점 바깥에 쌓여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버림받은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논문 작성에 매진했다. 그리고 2년 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에서 나는 자본론에 등장하는 인간형을 유형별로 정리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거의 다루지 않던 인간관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새로웠으나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논문이었다. 그해 가을 최재근 교수님이 돌아가셨다. 지도교수 부재 상태에서 내가 대학에 자리 잡기는 더욱 난망이었다. 나는 대학에 자리를 잡기 위한 길을 찾지도 못하고 사회운동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정쩡하게 1년여를 보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분들을 선정해서 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인데, 한 꼭지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김지하, 백낙청, 한용운, 리영희 네 분 중에서 어떤 분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리영희 선생님이라면 해보겠노라고 답했다. 학술대회는 96년 겨울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우선 리영희 선생님의 저술과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단편 글들까지 모두 수집했다. 그것들을 연대기적으로 통독하면서 나는 89년 경북대 학술대회의 기조 발제를 기점으로 선생님의 사상적 경향과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발견했다. 自由人, 자유인에 실린 짧은 수필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글에서 선생님은 1990년 초 휴양차 내려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머물면서 한학자 최준기를 만나 친교를 맺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최준기 선생님은 “장수와 명성과 관직 등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은 다 누린” 퇴계와 “세상사를 너무 지나치게 선악으로 대치시켜 타협을 용납지 않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사회를 자신의 당대에 실현하려 하다” 화를 입은 정암 조광조를 비교하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 선생의 글은 너무 곧습니다. 사화도 많이 겪었으니 앞으로는 퇴계의 긍정적인 면을 배우고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할까 합니다.” 선생님은 이 충고를 “교훈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나는 이 “교훈적 가치”를 내 논문의 단서로 삼기로 했다.
나는 “교훈적 가치”를 명시적으로 정리한 선생님의 글이 있는지 조사했으나 찾지 못했다.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 가서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통해 나는 선생님이 깨달은 새로운 가치가 무엇이고 사상적 전환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최준기 선생님에게서 얻은 교훈적 가치는 단순한 처세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당장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실천 활동에 나섰던 삶의 태도를 성찰하라는 충고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이론적 실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리영희 선생님의 성찰은 우선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이성을 무한히 신뢰했던 계몽주의자들에게서 감화받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군 통역장교 시절 젊음의 열정으로 몰래 읽었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 영어본과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지내며 탐독했던 마르크스의 원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성으로 파악한 역사의 필연적 법칙을 믿고 역사 진보를 위한 실천에 나서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계획해서 운용한 현실 사회주의의 실상은 이성에 대한 신뢰 역시 무너뜨렸다. 선생님은 이제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이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과거에 자신이 선과 악을 구분하여 악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나 정치세력 혹은 사상까지도 미워하고 공격하던 일을 후회하셨다. 선과 악은 그렇게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굳어있는 실체가 아니다. 천사가 따로 있고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선이든 악이든 일정한 맥락에서 행해진 인간의 행위에 대한 사후적 평가일 뿐이다. 인간 행위를 선악으로 가르는 보편적 기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서 있는 지점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행위를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행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멀리 서서 자신이 서 있는 지점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지점도 살펴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게 70이 다 돼서야 깨달은 삶의 지혜입니다.”
선생님은 멀리서 살펴보는 여유를 얻는 데 필요한 것으로 고전 읽기를 강조하셨다. 우리 현실의 문제를 당장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고전은 그 가치가 있다. 독재를 찬양하고 왕 한 사람의 지배를 전제하는 플라톤의 국가나 공자의 논어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나 플라톤이나 공자는 사안(事案)을 거리를 두고 살펴보는 사유의 힘을 길러준다.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고전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거기에 있다.
나는 그 무렵 지방 사립대학의 출판부장으로부터 헤겔 원전을 한 권 번역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있었다. 아직 답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께 내 고민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망설이지 말고 번역을 수락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것이 기화가 되어 나는 헤겔 원전 번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각설하고 나는 인터뷰에서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발표문을 작성했다. 우선 선생님의 생애를 성장기, 이론 형성기, 이론 실천기, 완숙기로 나누어 정리했다. 나는 이론 형성기와 실천기의 리영희를 계몽주의적 이성을 무기로 시대의 우상(이데올로기)을 비판하여 휴머니즘을 실현하려는 비판적 휴머니스트로 규정했다. 그리고 완숙기에 들어 사상적 전환을 하는데, 그 특징을 몇 가지 제시한 다음, 그러한 전환이 어떻게 결실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결론 맺었다. 나는 이것을 1996년 11월 30일 한국방송대학교 대강당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주최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발표했다.
발표회 날 서울에는 폭설이 내렸다. 발표회는 오후에 시작되었다. 고속버스가 연착하는 바람에 미쳐 점심을 하지 못하여 발표회장 구석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채웠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논문에서는 각주로 처리한 최준기 선생님의 충고를 중심으로 리영희 선생님이 어떤 사상적 전환을 보여주는가를 중심으로 구술했다. 내 발표 후에 반대 토론이 있었다. 나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논평자는 최준기 선생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사상적 전환을 감행했다는 내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주장은 리영희 선생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했다. 논평자의 논평에서인지 플로어 청중의 발언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누군가 그 사례에서 최준기가 리영희 선생님을 정암 조광조에 비유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반박했다. 리영희 선생님은 조광조보다는 남명 조식에 비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비유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가 중요하다고 재반박했다.
설왕설래가 오가던 중 발표회장 뒤편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천천히 걸어 나오시는 것이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카리스마 있는 걸음걸이로 나오시면서 사회자를 향해 말씀하셨다. “한마디 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자는 선생님을 연단으로 안내했다. 선생님은 마이크를 잡으시더니 카랑카랑한 함경도 사투리로 말씀하셨다. “발표자 평가가 다 옳습니다. 발표자는 내 심경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 설왕설래는 그것으로 끝났다. 발표회가 끝나고 리영희 선생님은 함께 가시자는 백낙청 교수의 권유에도 댁으로 바로 들어가셨다. 내게는 서울 올라오면 식사나 하게 연락하라고 말씀하셨다. 뒤풀이하는 식당에서 아무도 리영희 선생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백낙청 교수가 시종 좌중을 휘어잡고 술자리를 이끌었다. 좀 아쉬웠다.
나는 선생님의 조언대로 번역에 착수하여 2년 후에 내 명의로 된 최초 번역본을 출판했다. 그것이 출판사 UUP에서 나온 헤겔의 정신철학이다. 정신철학은 오역이 군데군데 눈에 띄지만, 서양철학사에서 빠짐없이 소개되는 철학의 주요 원전 중 하나라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 않았다. 이 번역본은 내 손으로 주요 철학자의 주저(主著)를 한국어로 옮겼다는 자부심을 주었다. 고전을 읽고 문장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어로 표현하는 일이 보람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었지만 제 길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늦다’, ‘더디다’를 의미하는 ‘지(遲)’를 써서 ‘지암(遲庵)’이라고 스스로 호를 붙였다.
나는 출판사에 책이 나오는 대로 직접 우송해 달라고 리영희 선생님의 주소를 보냈다. 며칠 후 내 앞으로 엽서 한 장이 배달되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보내신 것이었다. 엽서에는 한자가 섞인 문장이 세로쓰기 달필로 적혀 있었다. “廣場의 촛불만 世上을 이끌어가는 횃불은 아닙니다. 古典을 밝히는 촛불 하나도 世上의 빛이 됩니다. 朴 博士의 勞力이 世上을 밝게 할 것이니 精進하기를.” 나는 이 엽서를 소중하게 간직한답시고 선생님의 저서 어느 것엔가 꽂아두었다. 그런데 그 책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몇 차례의 이사로 분실했는지 나는 아직껏 그 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엽서는 내 마음에 꽂혀있다.
다음 해 선생님은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특임교수로 임명되셨다. 두 달에 한 번씩 내려오셔서 특강을 하셨다. 선생님은 내려오실 때면 저녁 뒤풀이 자리에 나를 부르시곤 하셨다. 99년 말 선생님이 출간하신 책을 한 권 보내오셨다. 반세기의 신화(삼인. 1999년)였다. 책 마지막 장에 내가 발표한 논문 「휴머니즘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2~3년 후 선생님은 더 내려오시지 못했다. 선생님의 와병 소식이 들렸다. 몇 년이 흘러 나는 헤겔의 자연철학 번역을 마치고 해남 땅끝을 걸어서 다녀왔다. 출판된 헤겔 자연철학 1, 2을 선생님께 보내드렸다.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다. 지인에게 연락하여 알아보니 선생님의 병이 위중하다는 회답이 왔다. 며칠 후 부음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