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기간 동안 나도 산하기관장을 임명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해양수산연수원장 자리가 그것이었는데, 3년 임기의 연수원장 자리는 이제껏 행정공무원들이 퇴직하면서 거쳐가는 자리로 활용되고 있었다.
어느날 나는 이와 관련하여 한국해양수산연수원의 유 교수라는 분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에서 그는 먼저 연수원 창설 때부터 지금까지 교수로 있으면서 기관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실을 나열한 후, 연수원에 대한 애정도 없고 의욕도 없는 사람이 원장으로 왔다갔다 하다 보니 연수원 발전이 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향후 연수원 발전 방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이번에는 교수출신 중에서 연수원장이 나오게 해달라고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는 자신의 경력도 덧붙였다. 말하자면 자기를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객관성에 의심이 가기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지만 논리도 정연하고, 상당히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드니 고심이 되었다.
사정을 알 만한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해 보니, 일을 열심히 하느냐의 여부는 개인의 성격차이로 봐야 하고, 3년이면 충분히 업무를 파악하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이 대세였다. 업무의 유형과 관련해서도 교수는 내부교육을 잘 하면 되는 것이고, 원장은 조직 관리와 기획을 담당함과 아울러 현실적으로 해양수산부, 기획예산처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예산도 확보하고 정책결정도 받아내야 하므로 아무래도 행정직이 더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대학에서도 교수 출신이 총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이고, 일반 국민들의 인식도 비슷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니 유사 교육기관에서 교수가 연수원장을 하겠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조직에서 20년 간이나 일을 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을 사람이 더 큰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사실 기관장을 전문가가 맡아야 하느냐 아니면 일반 관리자가 맡아야 하느냐는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이공계 출신이라도 오랜 경륜이나 공부를 통해서 유능한 경영자로 우뚝 선 사람들이 많다는 걸 보면 이 문제를 일률적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주로 내가 경험한 분야는 법조계인데, 그곳에서는 법원장이든 검찰총장이든 모두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맡는다. 얼마 전까지는 검사 출신이 맡던 법무부 교정국장 자리도 최근에는 교정직 공무원이 맡게 되었다.
상반된 두 개의 논리를 두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나의 판단은 퇴직 공무원을 내려보내는 것은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었고, 절대적인 기준은 없지만 교육기관의 장은 역시 교육자가 맡는 것이 공정하고 일반인의 정서에 부합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교수 출신이 한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결론이었다.
내 판단의 이유 중에는 지금까지 연수원이 행정직의 관점에서 운영되어 왔고, 원장이 짧은 임기 후에 떠나는 문화가 계속되었기에 한번쯤은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를 발굴하고 비전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 새 바람을 불어넣자. 어차피 행정공무원이 5년, 10년 계속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용납되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기관장 자리가 행정공무원의 밥그릇이라는 관념을 이 참에 깨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는 담당국장을 불러 내 생각을 얘기하면서 교수 중에서 연수원장을 임명하자고 했다. 국장은 이사회에 그 뜻을 전해서 추천토록 하겠다고 했다. "연수원장을 내가 바로 임명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국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절차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형식상으로는 이사회에서 후보를 추천하고 장관은 승인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주협회, 원양어업협회 등 관련단체 6명, 공무원 3명, 선원노조 1명 등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이사회가 해양수산부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지금까지는 장관이 인사권을 행사해 왔던 것이었다.
규정상으로만 보자면 내가 나서서 누구를 원장으로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월권행위였다. 관행적으로 그렇게 해 왔지만, 사실을 안 이상 규정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나는 보았다. 그래서 국장에게 아예 원장 후보를 공개 모집하는 방향으로 정관을 개정하자고 했다. 후보의 자격요건도 연수원 교수, 동일 분야의 경력이 있는 공무원 외에 대학과 같은 외부 교수진까지 범위를 넓게 잡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 실력 있는 사람만이 경쟁을 통해 기관장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모 결과 현직 원장과 내게 편지를 보낸 유 교수, 그리고 현직 부원장 등 세 명이 원서를 냈다.
세 사람 모두 열심히 이사회의 추천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다. 교원노조는 유 교수를 지지했지만, 직원노조는 완강하진 않았지만 반대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될지는 정말 이사회를 열어봐야 알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 교수가 됐으면 하고 바랐는데, 추천 받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해서 하루는 전화를 걸어 유 교수를 채근하였다.
"지금 열심히 이사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해야지 뭐하고 있어요? 예전처럼 학연, 혈연, 연고 끌어다 붙이지 말고 당신이 보낸 그 편지처럼 연수원의 비전을 잘 정리해서 그것으로 설득하세요. 그리고 장관 백 믿지 마십시오. 믿을 건 당신이 갖고 있는 경력과 비전 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유 교수는 열심히 뛰었고, 그 결과 이사회의 추천을 받아 연수원장에 취임했다. 나는 부산에 내려가는 길에 유 교수를 불러서 당부의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보낸 편지 한 장 달랑 믿고 공개경쟁으로 바꿨어요. 이제 유 원장이 잘못하면 이 제도도 비난 받고, 이렇게 바꾼 나도 비난 받아요. 후배 교수들도 길이 막힐 거예요. 그러니 각별히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세요. 교수라고 무게잡지 말고 유연하게 대외교섭도 하고, 정치력도 발휘해서 당신이 말한 대로 연수원도 발전시키고, 유 원장도 성공한 원장이 되세요."
내가 있는 동안에 유 원장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나는 유 원장이 성공적으로 직무를 수행해서 이제는 공무원이든, 교수든 당당한 실력자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