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三條 논박(論駁)》
<갑진보 변설13조 ; 甲辰譜辨說十三條> 중 제 13조를 보면, 하원(夏源) 公은 公의 “재종대부(再從大父) 진사
(進士) 公이 옮겨 쓴 별보초본(別譜草本)을 거론하며 이르기를, ‘지금 생원 이명징(李明徵) 씨의 집에 보관 중인 여러 집안의 족보를 보건대, 廣州李氏에 관한 내용에 이르면 한희(漢希)의 윗대에 자성(自成). 군린(君隣).용수
(龍壽)의 3대가 있다.
그리고 문(文)에 이르러 또 말하길, 염주(塩州) 서자번(徐自蕃)의 딸을 배필로 삼았고, 울(蔚)은 강주(江州) 이지효(李之孝)의 딸을 배필로 삼았다고 하는데, - 중 략 - 서천(西川) 정곤수(鄭崑壽) 집안의 족보에 기록된 것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면서 염주(塩州)는 연안의 별호인데 <여지승람>의 성씨 아래에 ‘서(徐) 자가 없으며, 강주(江州) 이씨의 경우에는 그 출처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결국 염주(塩州)를 본관으로 하는 서(徐)씨와 강주(江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李)씨 또한 없으므로,
하원 본인의 재종대부(再從大父)이신 진사 공이 옮겨 쓴 별보초본(別譜草本)의 내용 또한 믿을 수 없다고 주장
하고 있다.
그러나 진사(進士) 公이 옮겨 쓴 별보초본(別譜草本)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한희(漢希) 이하 4대’는 물론 ‘한희(漢希) 이상 선대’ 기록이 廣州李氏 율정공·석탄공 문중뿐만 아니라 姓氏를 달리하는 타 문중에서조차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명징(李明徵)은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수광주부윤(守廣州府尹)인 문과 급제자 이회(李禬)다.
정곤수(鄭崑壽)는 본관은 청주(淸州)로,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별시 문과(別試文科) 장원(壯元)이다.
관직은 좌찬성(左贊成)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봉호되었다.
아버지는 대호군 정승문(鄭承門)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형이다.
이명징(李明徵) 집안과 정곤수(鄭崑壽) 집안과 같은 명문가에 존재하는 족보 기록에 廣州李氏 관련 기록이 존재하였고, 그 기록이 율정공·석탄공 등 둔촌공 계통을 제외한 廣州李氏 모든 문중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변설 13조>에서 하원(夏源)은 이렇게 출처가 분명한 글을 접하고도, “위 기록을 아직까지 구해 보지
못했으니, 분명하고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라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하원(夏源)은 또한 “염주(塩州)를 본관으로 하는 서(徐)씨와 강주(江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李)씨 또한 없으므로, 본인의 재종대부(再從大父)이신 진사 공이 옮겨 쓴 별보초본(別譜草本)의 내용인 ‘문(文)은 염주(塩州) 서자번
(徐自蕃)의 딸을 배필로 삼았고, 울(蔚)은 강주(江州) 이지효(李之孝)의 딸을 배필로 삼았다.’라는 기록 또한 믿을 수 없다고 강변(强辯)하고 있다.
상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성씨와 본관’ 관련 자료이다.
한국학 관련 최고 권위를 갖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성씨와 본관’ 분야에 “염주서씨(鹽州徐氏)”는 이렇듯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휘 문(文)의 장인(丈人)이신 서자번(徐自蕃) 公이 시조(始祖)로 또한 등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씨편람(姓氏便覽)> 등 ‘성씨와 본관’ 관련 서적에는 어김없이 “염주서씨(鹽州徐氏)”는 또한 출전되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도 분명하게 ‘염주(塩州)를 본관으로 하는 서(徐)씨’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5월 21일 “각도의 병마 도절제사를 파하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두다.”라는 기사를 보면 강주(江州)라는 지명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각도의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파하고 각진(各鎭)의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어 - 중 략 - 경상도는 4진(鎭)인데, 합포(合浦)·강주(江州)·영해(寧海)·동래(東萊)이다.”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3일 기사에서도 ‘강주진 첨절제사(江州鎭僉節制使)’라고 강주(江州)라는 지명이
또한 출전한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3월 21일 “사헌부에서 판진주목사 유염의 죄를 청하다.”라는 기사를 보면 “판진주목사 유염이 진주(晉州)에 있을 때에 강주진(江州鎭)이 이미 혁파되었으나 오히려 진무(鎭撫)의 취라치(吹螺赤)를 정(定)하여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았습니다.
함부로 軍人을 뽑고 또 진주(晉州)·합천(陜川)·함안(咸安) 등지의 취적인(吹笛人)과 창기(倡妓)를 거느리고
-하 략 -” 라는 기록에서도 강주(江州)라는 지명이 출전하는데, 이미 혁파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강주(江州)라는 지명(地名)은 조선 조 초까지도 존재하였으나, 태종 18년 전 어느 때인가에 혁파되어 다른 지역에 통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거해 보면, 경상도 지역은 분명하고, 아마도 진주 인근으로 합천(陜川)·함안(咸安)과 연한 지역인 오늘 날의 사천(泗川) 부근으로 추정된다.
분명한 것은 조선 초까지도 강주(江州)라는 지명은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것이며, 그럼으로 강주 이씨(江州李氏) 역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변설 13조>의 13조에서의 하원(夏源)의 주장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거짓되고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 실증 자료로서 입증된 것이다.
<갑진보 변설13조 ; 甲辰譜辨說十三條> 중 제 13조에서의 하원(夏源) 公의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료 등에 출전하는 확고한 거증자료와 그에 따른 논리적 반박으로써 상기와 같이 명백하게
논박(論駁)되었다.
《맺는말》
순암(順庵) 안정복 선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순암은 고려 말까지 우리 역사를 강목체로 정리한 『동사강목』을 저술한 데 이어, 조선 초부터 영조 때까지를 담은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지어, 우리 역사의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하셨다.
순암은 역사가의 제일의 임무로 계통을 명확히 세울 것, 찬역(簒逆), 충절, 시비(是非)를 똑바로 가릴 것, 또 제도, 문물을 상세히 기록할 것 등을 주장했는데, 특히 그 과정에서 ‘고증’을 중시하여 과거의 역사 기록을 단순히 취사하여 조술(祖述)하는 데 그치지 않으셨다.
아래는 안정복(安鼎福) 선생이 지으신 『동사강목(東史綱目)』 서문 중에 나오는 문구(文句)이다.
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계통(系統)을 밝히고,
찬역(簒逆)을 엄히 하고,
시비(是非)를 바로잡고,
충절(忠節)을 포양하고,
전장(典章)을 자세히 하는 것이다.
史家大法, 明統系也, 嚴簒逆也, 正是非也, 褒忠節也, 詳典章也.
사가대법, 명통계야, 엄찬역야, 정시비야, 포충절야, 상전장야.
안정복(安鼎福) 선생은 숙종(肅宗) 38년인 1712년에 태어나시어 정조(正祖) 15년인 1791년에 몰(歿)하셨다.
안정복(安鼎福) 선생은 <변설 13조>를 쓴 하원(夏源) 公과 同時代人이시다.
정녕 문중사(門中史) 또한 역사일 진대 ........... !!!
2017년 12월 15일
栗亭先生의 후손이며,
廣州李氏栗亭公大宗會 都有司인 根守가
歲一祀를 마치고 忙中閑에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