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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9일 살림교회 주일예배(성령강림 후 열 두 번째 주일)
고요하고 잠잠하라
시편118:5~9/ 막4:35~41
요즘 우리 사회엔 힐링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힐링 캠프, 힐링 콘서트, 힐링 랜드... 힐링이라는 말이 붙는 책이나 프로그램이나 모임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이런 추세로 보면 한동안 힐링 산업이 대세를 이룰 것 같습니다. 여름휴가 때면 카톨릭의 피정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의 템플 스테이에는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히말리야 트레킹도 힐링의 좋은 프로그램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 올레길, 둘레길 열풍도 불었습니다.
혜민 스님이 올해 초에 내놓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도 힐링에 한 몫을 한 책입니다. 나오자마자 몇 달을 계속해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습니다. 버클리, 하버드,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현재 미국에 있는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면서, 20만명 이상의 팔로워를 가진 파워 트위터리안에다, 웬만한 탈랜트 뺨치게 생긴 스님이 들려주는 힐링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제목만 보아도, 책의 내용은 알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잠깐 멈추고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에필로그-나 자신의 온전함과 존귀함을 알아차리시길.. 이 스님이 트위터에 계속해서 올리는 글들을 보면,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따듯한 이야기들입니다. 어제는 트위터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속으로 따라해 보세요.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사람들한테 치이고 남들과 비교당하면서 아팠던 나를 사랑합니다. 남들 보기에 좀 부족해 보일 수 있어도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나를 너무도 사랑합니다.’”
아마도 이런 모든 힐링의 열풍들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살기 힘들어지고 버티기 힘들어 졌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힐링 열풍’도 붐으로 끝나고 말 가능성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제 한 일간지에서 본 힐링 기사의 한 구절입니다.
“10년 전, 한국사회는 '웰빙'(심신의 행복 추구)을 꿈꿨다. 미디어, 광고, 산업계 등은 발 빠르게 웰빙을 강요했다. 각종 서적과 관광 상품에 웰빙이 범람했고,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 웰빙 라이프를 위해 노력했다. 강산이 변했다. 한국사회에서 웰빙은 실패한 결과물로 남았다. 이제는 몸과 마음의 행복은 차치하고, 너도나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겠다고 난리다. 대세는 10년 만에 웰빙에서 '힐링'(몸과 마음의 치유)으로 옮겨졌다. 10년 전처럼 모든 분야에서 힐링을 강요하는 모양새다.”(서울신문)
한동안 명상 열풍이 분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이런 저런 명상이 우후죽순 식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붐이 불면 장사 속이 보이더라고요. 명상의 본질은 뒤로 가고 이렇게 하면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저렇게 하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명상이 상품으로 팔리는 것입니다. 향심기도도 우리나라에 소개된 2002년 이후 몇 년 동안 붐이 일었습니다. 지금은 향심기도 모임도 거품이 많이 빠졌습니다.
열풍, 붐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저 얄팍한 위로만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아까 말한 한 일간지의 힐링 기사에서 한 심리학 교수는 힐링 열풍의 일면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치유에 집중하는 데에는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심리적 피폐함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면서 인터넷 발달로 세계적으로 성공한 1% 사람들의 삶의 정보가 쉽게 노출됬고 이를 접한 많은 사람의 꿈과 이상이 커지면서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이 깊어진 것으로 분석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이렇게 쓴 소리를 합니다. "한 때 젊은 세대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됐다. 하지만 그만 아픈 척해야 할 시점이 왔다. 어느 세대나 힘들고 시련은 있다."
그저 여기에 뭐가 있다 싶으면 우르르 몰려가고 저기서 뭐가 유행한다 하면 우르르 몰려가는 그런 태도로는 진정한 힐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힐링을 상업화 하는 사람들에게만 ‘힐링’이 됩니다. 진정한 힐링은 붐이나 장사 속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정말 직면해야 할 아픔에서는 다 도망가고 단물만 쏙쏙 빼먹으려는 태도는 진정 힐링 받으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중심을 잃은 태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유대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갈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힐링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라고 질타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백성들에게 지금 샬롬, 샬롬 해서는 안되고 자신들의 현 주소를 직면하고 가슴을 치는 회개를 통해 야훼께 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수도원의 기본 규칙서가 되었던 베네딕토 수도원 규칙서에 세 가지 수도 서원이 있었습니다. 정주, 정진, 순명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도피하지 말 것, 정직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중심을 향해 나아갈 것,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만의 규칙이 돼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슴 깊이 새길 서원입니다. 정주, 정진, 순명! 이게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진정한 힐링을 얻으려면, 끊임없이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토머스 머튼이나 노리치의 줄리안이나 마더 테레사나 떼제 공동체를 세운 로제 수사님과 같은 분들의 글을 읽다보면, 이들에게서 그 중심으로 돌아가는 끊임없는 돌아섬(회개)을 보게 됩니다. 그 중심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정주하고 끊임없이 정진하고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힐링의 길입니다. 이 길은 쉽고 달콤하고 평안하기만 한 길이 아니라, 끊임없는 내적 투쟁의 길입니다.
마가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는 모습이 세 번 나옵니다. 바다를 건너는 그때마다 제자들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 먼 상태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예수와 함께 바다를 건너가는 사건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노저어 가는 배는 연약하고 위태로운 인간의 삶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거센 풍랑이 이는 삶의 호수를 건너가는 우리의 여정에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건너편 항구, 곧 영적 여정의 종착지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늘 다시금 위기에 빠지지만, 우리가 예수를 향하기만 하면 이런 위기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들은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바닷가 배에 올라 많은 무리들에게 비유를 가르쳐 주신 다음, 무리들과 헤어져 바다 건너편, 곧 이방인 지역으로 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는 저녁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저녁이나 밤은 악마가 괴롭히는 밤을 뜻합니다. 그 밤에 악마는 제자들을 괴롭히는 자연의 힘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가득 찼다.”(37절)
그런데 여기서 마가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소동에도 아랑곳없이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깊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워 떨고 불안해하는 모습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이런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께 굳건한 신뢰를 두고 있는 이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잠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누리는 평온을 상징합니다. 시편에도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을 주신다”(127편) 풍랑 한 가운데서도 예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쉬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삶의 거센 풍랑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거나 내가 결코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사업에서 아무런 실패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경박함이나 순진함이 아닙니다. 나는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업은 안될 수도 있고,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병에 걸리든 사고를 당하든 사업에 실패하든 관계없이, 나의 가장 내밀한 중심, 나의 참된 자기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장 내밀한 영역은 하나님 손 안에 있다, 그곳은 하나님의 좋으신 손길로 보호받고 있다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풍랑 가운데서도 잠자고 있는 예수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다 사라진 고요한 바다에서 잠을 잔 것이 아니었고, 풍랑 속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풍랑과 파도를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풍랑과 파도에 따라 출렁입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삶이 중심 안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든든히 선다는 말과 같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계속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그분 안에 뿌리 내릴 때, 우리는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에서 예수께서 자고 계시는 것은 또 다른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곁에 계시지만, 제자들은 오직 자기들끼리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무심으로써 제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곤경에 빠질 때, 삶의 거센 바람과 폭풍이 우리에게 휘몰아칠 때, 우리의 영혼이 무의식적인 물 속에 잠겨 죽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거의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단절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배 안에서 자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서 아무런 힘도 미치질 못합니다. 우리는 예배도 참석하고 성만찬도 행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영혼의 내면에 거세게 이는 풍랑을 잠재우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며 이렇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이것은 직역하면, “우리가 없어지는데도/소멸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깊이 주무시는 모습에서 자기들을 구하지 않고 사라지게 놔둔다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깊이 주무시는 모습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수의 믿음을 보지 못하고, 예수께서 자신들을 모른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주무시는 이유가 자기네들에게 대한 무관심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배에 계시고 또 필요한 때에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고요하고 잠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옛날 사람들은 아주 심한 자연재해에 악의 세력이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내어 쫓듯이 악의 세력을 향해 잠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악령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 미칩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깊은 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온갖 세상의 풍랑과 파도로 흔들릴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손상받지 않으신 예수께서 우리 중심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조용히 말씀드리면, 그분은 우리를 어지럽히는 우리의 온갖 내적 풍랑을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우리 안에 중심에 계신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온갖 내적 혼란 속에서 고요하고 잠잠하라는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가 자라면서 더 깊이 경험되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 보다는 풍랑과 파도만 보일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믿음 없음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키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심을 향해 돌아가는 돌아섬이 있다면 말입니다. 신뢰는 한꺼번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키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성장하는 것과 함께 갑니다. 믿음 따로 삶 따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되돌아가는 싸인으로서 만트라와 같은 시편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 내 안의 두려움에게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뢰, 우리 안에 있는 주님과 서서히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중심에서 우리의 흔들리는 삶을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갑자기 비교되고 있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며 내 자신이 작아졌습니다.
작아진 나를 보고 있자니 앞으로 나는 이들보다 잘할 수 잇을 까/ 하며 두려움이 슬금슬금 올라옵니다.
아 !! 비교하니 그렇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거는 뭘까/
내가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건 뭘까?
어떻게 하면 나는 불안함을 만날 수 있을 까/
ㅎㅎㅎㅎ
읽고 쓰고 있으니 평정한 마음이 생겼어요....^^
호흡으로 다시 !! 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