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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국 권영호
[대구문단일화]- 60,70 여성문인의 등장 | |
대구·경북지역 여성문인하면 먼저 식민지 시절 영천에서 태어나 서른둘의 짧은 삶을 마감한 소설가 백신애와 한국전쟁기 종군작가로 향촌동시대를 강단있게 살았던 경산 출생의 작가 장덕조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숭자,오란사,석계향의 이름과 문화예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50,60년대의 대구 골목을 지켰던 수필가 이화진, 그리고 핏빛 꽃처럼 살다간 여류시인 서정희에 이어 60,70년대 대구 여성문단의 주인공이었던 최선영 시인과 수필가 임도순,정혜옥 등을 꼽을 수 있다.
1960년대는 사실상 대구 여성문학의 태동기였다. 대구의 초창기 여성문학을 거론하면서 먼저 생각나는 이름이 서정희(徐貞喜.1924~1967) 시인이다. 61년 겨울 시집 ‘배암’을 출간한 서정희는 가난과 고독과 병마와 싸우고 있어서 더 가련한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문우들과의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애처롭게 읊조리곤 했다. 64년 1월 동성로 은다방에서 ‘서정희 시화전’이 마련되고, 포항에서도 임도순의 주도로 시화전이 열렸지만, 서정희는 시인의 무게같은 폐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여수 신월동 요양소에서 43세의 애잔한 삶을 마감했다.
수필가 이화진(李華眞.86)은 다방을 경영하며 문인들의 쉼터를 제공했다. 그는 가난한 문화예술인을 아끼고 이해할 줄 알았던 여인이었다. 임도순은 “개화기의 신여성같은 분위기의 이화진은 퇴계 집안의 후손답게 늘 한복차림의 고전적인 몸가짐에 가체머리를 올린 단아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화진은 ‘도정월보’ 시절의 서정희 시인과도 친분이 두터워 자주 글을 교환했고 일간지에 작품을 싣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남편의 정치적인 이력으로 겪는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이화진은 한문에 조예가 있어 명사들과 교류하는 고상한 품격도 지녔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인생역정 때문에 동문다방을 운영하던 어느날 대구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화진은 오늘날 영남수필의 효시인 ‘경북수필’의 창립동인으로 초창기 수필문학의 씨앗을 뿌렸으며, 윤길수·정혜옥·임도순 등 신인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후일 55~70년대에 발표한 글을 모아 고희 기념문집 ‘잔화(殘火)의 장(章)’을 상재했다.
‘열화가 되어 치닫지도 못하면서 또한 만사에 담담히 체념도 못하면서 그저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는 묵은 잿속의 작은 불씨하나...’ 70년 12월 매일신문에 소개된 ‘잔화의 장’ 끝 부분이다.
59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한 최선영(崔鮮玲.73) 시인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이지적인 심성을 갖춘 여류문인이었다. 20대 학창 시절에는 용모도 출중했으며, 학처럼 고고한 품성도 지녔다.
최선영은 임도순·서정희(徐正姬)와 함께 효성여대 국문과 1회 졸업생이다. 최선영은 대학 학보에 시를 썼고, 임도순은 처음에는 콩트를 실었다. 서정희는 학보사 주간을 맡았다. 여대생이 참으로 희귀하던 시절인데다 문학을 지향하고 있어서 이들은 단연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여대생이란 신분 하나로 버스비가 없을 때는 무임승차가 가능했고, 만경관에서 보다 만 영화를 다음날 다시와서 감상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영천군수를 지낸 가문의 딸이었던 최선영은 친구들과 영천다리를 건너 강가로 이어진 들길을 걷기도 했고, 달빛 푸른 밤이면 냇물을 몸을 담그고 멱을 감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최선영의 제6시집 ‘오래된 그 꽃밭’은 온실 화단이 있던 그 고향집의 추억을 싱징적 공간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선영은 거추장스러운 삶을 거부하고 오랜 독신생활을 누려온 모더니스트로 초월적인 사랑을 추구해 왔다.
첫시집 ‘램프를 끌 무렵’(64년)에서 네 번째 시집 ‘벽과 나비’에 이르는 그녀의 시는 방황과 갈등과 고뇌를 통해 삶에 대한 지혜와 예지에 이르는 순례자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김광림 시인은 그녀를 “신선한 감각으로 사상(사물)을 표출시켜 서정을 지성적으로 조각하는 시인”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친구이자 대학 동기생인 수필가 임도순은 최선영을 ‘에스프리(영감)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60년대 초 남산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최선영은 6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88년 모교인 효성여대에 교수로 부임했다. 대학에서 정년 퇴직 후 98년부터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그는 이제 고향으로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래된 그 꽃밭’으로....
수필가 임도순(林道順)은 이화진의 추천으로 ‘경북수필’에 들어가 71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해왔다. 후일 ‘풀각시와 꼭두놀이’란 수필집을 출간했을때, 평론가 윤재천은 “임도순은 평생을 소녀처럼 산 사람이고, 소녀이기를 고집한 사람”이라면서도 “대개의 여류 수필가들과는 달리 그의 글에는 굵은 선이 존재한다”고 했다. 문학을 풀각시처럼 사랑하며 간직했고, 친구처럼 늘 가까이 하면서 살아왔다는 임도순은 대구여성문학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현재 대구수필문학회장을 맡고 있는 정혜옥(鄭惠玉.71)은 70년대 중반 대구 제일여중 교사로 부임하면서 ‘경북수필’의 동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부산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일찍이 이영도 시인과 청마 유치환과 교류가 있었으며 “수필은 시를 펼쳐놓은 것 같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미술을 전공해서인지 정혜옥은 ‘대숲에는 바람소리가’ 등의 수필집에서 색채감이 뛰어나면서 잔잔한 물이 흐르는 듯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 또한 인간의 진실과 사랑의 추구 그리고 좌절과 고뇌와 무상과 허무를 극복해 가는 염원의 한 과정이었다.
이설주 시인의 딸인 이일향(李一香) 시조시인도 최선영·임도순과 국문과 동기였다. 비록 늦깍이로 등단했지만, 많은 시집을 내며 대구출신 여류문인으로는 최고의 상복을 누렸다. 아버지의 권유로 문학에 입문한 그는 딸 주연아 또한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어 3대에 걸친 문인이라는 특이한 가계를 이루고 있다.
석계향 시인은 5.16후 문단의 대부였다. 대신동 부잣집 딸로 애주가요 애연가였던 그는 여장부다운 기질로 군 장성들과 교류가 두터워 군 간부들에게는 ‘누님’으로 통할 정도였다.
서정희(徐貞喜) 시인의 처지가 안타까워 5.16 직후 당시 시장이던 강모 대령을 서정희의 봉덕동 비탈집까지 데려와서 도움을 요청할 만큼 정도 많았던 석계향. 그도 한때 대구문단을 풍미했던 여류문인의 한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