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년(숙종 28) 11월 10일, 대정현성의 성정군 조련과 대정현의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대정현성의 내부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정현성은 성곽이 둘러쳐진 타원형의 성이다.
성벽 위에는 여장(성 위에 있는 낮은 담으로 총구와 타구가 있는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고, 회곽도를 오르기 위한 돌계단이 성문 옆에 축조되어 있다. 북성 가까이 정청(正廳)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마다 향궐만배(向闕萬拜)하는 곳인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남문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 한 가운데 두 기둥을 세우고 지붕 없이 홍살을 세워 댄 홍살문에 이른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객사로 출입하는 문이 가운데 있고 좌우로 익랑을 둔 솟을대문에 이른다.
이 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객사가 자리 잡고, 객사 앞쪽 좌우측에 객사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현관의 집무소인 관아는 객사 서쪽에 성벽과 함께 하여 ‘ㄷ’자를 형성하고 있고 객사와 관아 사이에는 군관의 처소인 관청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객사 동측에는 군기를 보관하는 군기고가 있으며, 군기고 남쪽에는 좌수와 별감이 근무하던 향청, 육방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작청 등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관아 남쪽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성 밖의 민가들은 성의 동쪽에 밀집되어 있다. 당시 대정현의 편제는 읍내 1리, 동면 9리, 서면 2리로 모두 12리에 민호는 797호이며, 전답은 149결이다. 성장 2인, 치총 4인, 성정군 224명, 군기, 문묘의 제기·제복·서책, 목자와 보인 123명, 말 849필, 흑우 228수, 창고의 곡식 1,950여 석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지도는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점에서 제작된 경우가 많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역시 마찬가지여서, 현재지도와는 달리 남과 북의 방향이 거꾸로 제작되어 있다.
유배 이야기
제주섬은 절망과 비탄의 한숨으로 얼룩진 유배지였다. 임금이 사는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험한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 유배지로는 최적지였던 것이다.
제주섬으로의 유배 역사는 고려 말, 제주도를 직속령으로 삼았던 몽골이 왕족이나 왕권을 위협할 만한 신하 등 170여 명을 유배시킨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추사적거지 )
조선시대 초기에는 정치적 망명객들이 많이 모여들기도 했다. 그들은 사면 뒤에도 제주에 그대로 정착해 입도조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한 한천과 김만희가 있다. 이들은 청주한씨와 김해김씨의 제주도 입도 중시조가 된다.
제주가 본격적인 유배지로 이용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였다. 광해군을 비롯한 왕족뿐 아니라 유명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정치싸움에 휘말려 한을 품은 채 제주섬으로 귀양 왔다.
조선시대 제주도 유배는 사형을 면한 중죄인에게 가해진 최고 형벌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제주 삼읍 가운데 대정현은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악의 유배지였다. 원래 ‘제주목에는 특별한 교지가 없으면 정배되지 않는다’고 법전에 규정해 제주도로의 유배를 신중하게 다루었지만 당쟁이 격화되던 조선 중기부터 남발되어 갔다.
조선사 500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된 이는 대략 200명이다. 84세의 고령자가 유배됐는가 하면 소현세자의 3남 석견처럼 4세로 유배된 이도 있다.
제주에서는 유배인들을 ‘귀양다리’라고 불렀다. 유배인들은 제주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전달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또한 저명한 학자들도 적지 않아서 제주사람들은 그들로부터 깊은 학문적 영향을 받기도 했다.
많은 신하들을 유배시켰던 광해군, 중종 때의 명신 김정, 숙종조의 대유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구한말의 박영효도 제주를 거쳐 갔다. 특히 김정은 제주에서 후학 육성에 전념해 제주 유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추사는 유배기간 동안 그의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렸으며 제주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주의 유배 역사는 1911년 민족교육가 남강 이승훈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추사 김정희와 제주도
제주 유배인 가운데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제주문화에 영향을 끼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추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도 죄의 경중에 따라 종류가 있었다. 비교적 가벼운 죄인은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도록 하는 본향안치(本鄕安置)가 있고, 중죄인의 유배로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가시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가극안치(加棘安置) 또는 위리안치(圍籬安置)와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형생활을 치르도록 하는 절도안치(絶島安置)가 있었다.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받은 형벌이었다.
출세가도를 달리며 병조참판을 지내던 추사가 안동김씨의 견제로 역모죄로 몰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오래된 벗이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조인영의 상소로 죽음만은 면한 채 쓸쓸하게 제주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1840년,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였다.
추사 김정희 작품
1840년 9월 27일 완도를 출발한 추사는 하루 만에 제주 화북포구에 도착한다. 보통 3일쯤 걸리던 뱃길인데 강하고 빠른 바람이 부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화북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제주읍성까지 갔지만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 성안의 고성익 집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관도(官道)를 통해 대정으로 간다. 그 길이 지금은 서부관광도로가 됐다. 당시의 길 모습과 사정은 추사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대정으로 가는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人馬)가 발을 붙이기 어려웠으나 절반을 지난 뒤부터는 약간 평탄하였다. 그리고 밀림의 그늘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빛이 겨우 실낱만큼 통했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들로 겨울에도 푸르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또 육지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운치가 있었겠는가.”
대정에 도착한 추사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얼마 후에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추사가 받은 유배형이 거주지를 제한하고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위리안치’였으니 제주에서의 생활은 지독한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유배 기간 동안 추사는 오로지 책을 읽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학문에 열중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추사적거지, 초가마당)
(추사적거지, 칙간)
그러는 동안 ‘세한도’가 탄생했고, ‘추사체’가 완성되었다. 추사에게 제주 유배생활은 자신의 삶과 예술을 되돌아보며 비로소 독자적인 사상과 예술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추사가 워낙에 대학자여서였는지 위리안치라는 유배형을 받았음에도 대정향교를 자주 드나들며 제주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그때 향교 기숙사에 “항상 의문을 가지고 공부하라”는 뜻의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추사는 또 산방산을 자주 찾아 답답한 심사를 달래며 수양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1848년 12월, 만8년 3개월간의 유배를 끝낸 추사는 대정을 나와 바닷가를 따라 도는 길(지금의 일주도로)을 통해 명월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고 다시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를 떠났다.
화북포구를 떠나면서 추사는 화북포구에 있는 해신당에서 해신제를 올렸는데, 그때 추사가 지은 두 편의 제문이 남아있다.
추사가 살았던 강도순의 집은 추사가 떠난 뒤에도 남아있었는데 4·3사건 시기에 군경토벌대가 중산간 마을의 집들을 무작위로 태워버릴 때 함께 불타버려 빈터만 남았었다. 지금의 ‘추사적거지’는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제주 대정 추사적거지에서 김정희 선생 유배행렬 재현 모습
歲寒圖
국보 제180호
지정연월일 : 1974년 12월 31일
시 대 : 조선 헌종 10년(1844)
크기/양식 : 세로 23㎝ 가로 69.2㎝ 횡축
재 료 : 종이 바탕에 수묵
소 유 자 : 손창근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09
완당세한도는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寫意體)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尹尙道) 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章岳鎭)ㆍ조진조(趙振祚) 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석준(金奭準)의 글과 오세창(吳世昌)ㆍ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화제와 우선(藕船) 이상적이 완상하라는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완당'이란 관지(款識)가 적혀있고, '정희(正喜)'와 '완당'이라는 도인(陶印)이 찍혀 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까칠한 마른 붓질과 고담한 필선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졌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으로,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를 부정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자연의 근원적인 창생력과 합일된 작가의 농축된 마음에서 표출된 필선과 먹빛에 의해 조성된 담박하면서도 고졸한 분위기는 문기(文氣) 또는 문자향을 비롯하여 문인화가 지향했던 형식보다는 내용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선 말기를 풍미하였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집약된 경지와 함께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秋史體
추사체(秋史體)는 김정희(金正喜)의 서체이다. 추사라는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종래의 조선시대의 관파(官派) 글씨가 갖는 숙폐(宿弊)를 통감하고 그것을 배격하여 일어난 것이 이른바 추사체이다.
추사는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하기를 <但以筆法 擧擬良可槪耳>라고 개탄하며 조선의 서예를 망친 것은 바로 이광사(李匡師)라고 갈파한 것은 그의 심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추사의 글씨는 예서(隸書)에서 출발하고 있으면서 예서의 변형인 한대(漢代)의 필사체(筆寫體)를 충분히 익혀 부조화스러운 듯하면서 조화되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천성(天成)으로 터득하고 있다. 즉 선의 태세(太細)와 곡직(曲直), 묵(墨)의 농담(濃淡) 등으로 글자 하나 하나에 구성과 역학적인 조화를 주었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서축(書軸)을 이룬다. 이것은 획(劃)과 선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한 예술로서 추상(抽象)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예술이다.
추사의 서체는 권돈인(權敦仁), 허유(許維), 신관호(申觀浩), 대원군(大院君) 같은 추종자들을 보았으나 그 진수(眞髓)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단명(短命)으로 끝났다.
殘書頑石樓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첫댓글 아!할말은 많은데???,
가심에만 담지마랑...
홀말이시민 다 해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