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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서울시에 2007년 7월 16일자로 사육신묘의 성승장군 묘 복원을 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고 이의 부당함을 고증문헌을 제시하여 수호회 게시판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거짓말이란 제하로 올렸었다. (사육신 수호회 게시판 68번)
이에 사육신 유응부 후손 유형섭씨가 지난 8월 25일자 우편으로 이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입장을 물었다.
답변이 무려 50일 걸려서야 왔는데 (2010.10.15.) 그 변조한 답변의 전문을 공개하여 일일이 짚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수신자: 유형섭님 귀하
제목: 국사청원 (유형섭님)에 대한 회신
1,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2, 사육신 묘역 내에 성승묘의 복원에 대해서는 이미 서울시 문화재위원회(4분과)심의에서2005년 3월 11일, ‘성승장군 묘의 존재 여부 및 위치 등에 대해 여러 이설이 존재하여 확실한 고증자료가 없는 현 시점에서 복원은 곤란함, 사육신 묘 이므로 그와 관련 없는 인물의 묘를 조성하는 것은 곤란함’ 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3, 2007년 7월 우리 위원회의 회신은 성승장군 묘 복원에 대해 주무기관인 서울시의 결정에 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4, 성승장군 묘에 대한 이설을 제시할 요구하셨는데 아래에 첨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 남구만 약천집 제 19권 「노량육신 묘비」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묘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나,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 인조조에 장릉을 발인할 때에 길을 닦는 관원이 다섯 신하 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하고 그 앞에 세웠던 돌까지 무너뜨렸는데 효종 경인에 박팽년의 후손 숭고가 다시 분묘를 봉축하고 그 돌을 세웠다,.... 숭고가 묘를 수축할 때에는 성씨의 한 무덤은 비갈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었다...‘
위 내용을 기록을 당시에 이미 성씨의 묘 하나는 있었다는 전언은 있지만 찾기 힘든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지봉유설 권 19
노량의 남쪽에 세 묘가 나란히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육신묘라고 하는데 모두 표석이 있어 성씨지묘, 박씨지묘, 유씨지묘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 하곡 허봉이 말하기를 ‘ 당시 의사가 세 사람을 이곳에 장사지내면서 감히 새기지 못하고 이로써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의 묘인 것은 의심이 없다고 하였다. 임란후에 그곳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는데 각석은 그대로 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어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다.
위 기록은 임란 이전 기록으로 민원인이 제시한 기록보다 앞선 시기의 것입니다 이수광, 허봉 등 당대의 최고 지식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노량에는 사육신중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의 묘만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씨의 묘가 둘이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끝
국사편찬위원장 도장 꽝
편사연구사 양정필 편사연구관 구선희 편사부장 박홍갑 전결 10/15
협조자
시행 편사기획실-1182
이것이 50일 만에 온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 내용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국사편찬위원회가 보내온 변조한 답변 내용을 분쇄하겠습니다
먼저
가, 남구만 약천집 제 19권 노량육신묘비에 대한 해석부터 분석해 보겠습니다.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
해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묘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 문헌은 핵심 포인트가 잘못 해석되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성승묘가 실재하지 않았다고 하기위하여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50일 동안 찾고 찾은 것이 남구만의 육신묘비명 중 이 고증문헌을 발췌하여 답변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나 남구만의 육신묘비명이 어찌 국사편찬위원회가 답변하여 보낸 이런 뜻이겠는가?
이글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且此地,成墓之有二,近古耆舊,耳目相接,傳說可据,而不知何年,有權貴人,築庄江上,其近地丘墓之有碑碣者,悉去之,權貴人敗後,有人收拾舊碣於(仆)碎之餘,復竪之,然,其未及竪也,多有,追瘞之塚間,於其間,成氏一墓,混不可辨,且失其一碣故,今之可認爲成墓者,只存其一,以此推之,當初四氏之葬也,河柳之墓,安知不在此中而歲遠失處,亦或,如成氏一墓耶
또한 이곳 육신묘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었다. 근래 사람이나 옛날 사람이나 노인들이 귀로 전해 오는 말을 듣고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이기 때문에 전해 오는 말이 믿을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권귀인 (후궁) 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강위에다 별장을 지으면서 그 부근의 묘 비석들을 전부 제거시키는 것이었다. 권귀인이 패한후에 어떤 사람이 쓰러지고 부서진 옛 비석을 수습하여 다시 세우긴 했으나 그러나 미처 세우지 못한 것이 많이 있었는데 쓰러진 비석을 따라 무덤사이에다 묻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성씨의 한 묘가
(비갈 묻느라고 파낸 흙으로 더불어 묘인지 흙무덤인지)
혼재하여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비갈 하나를 잃어버린 까닭으로 지금은 성씨 묘가 됨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성씨) 비석 하나가 보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당초에
네 신하를 묻을 적에 하위지, 유성원 묘가 이 가운데 있지 않았는데
(하위지의 시신과 유성원의 시신)
이 실처한 세월이 너무 흘러 어찌 또한, 혹시 성씨 한 사람의 묘와 같음을 알리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이다 권귀인이 노량진 강상에다 별장을 지으려고 육신의 비석을 쓰러뜨리고 부수어 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비석을 세우고 흙무덤을 파 헤쳐 묘옆에 쌓아 놓으니 묘인지 흙무덤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런 가운데 에서도 성씨의 한 비석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只存其一) 비석을 잃어버린 성씨 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씨의 한 비석이 보존 되어 있었다는 말은(只存其一) 비석을 잃어버린 성씨 묘를 말한 것이다 즉 성씨 비석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의 성씨 비석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비석을 잃어버린 성씨의 묘를 쉽게 알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이 成, 李, 兪, 朴 네 성씨(姓氏)의 사람을 묻을 당시에 이 네 사람 속에 끼어 있지도 않은 하위지와 유성원은 시신 자체가 처소를 잃은 세월이 너무 흘러 성씨의 한 무덤처럼 쉽게 찾을 수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잠시 묘와 비석의 성격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당시의 사육신묘나 비석을 지금의 상태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지 않다. 김시습이 이른바 육신의 시신을 묻을 당시는 온전한 시신을 짊어지고 와서 묻은 것이 아니다 그 시신의 일부인 사지 중 지체 하나씩 만을 보자기에 담아 와서 약간의 땅을 파고 대략 두어 뼘 정도 높이로 무덤을 써 놓고 비석도 지금의 형태처럼 큰 것이 아니다 기록에서도 밝혔다시피 소석(小石) 한뼘 남짓한 돌 조각만한 것이고 또 단갈 (短碣) 이라 했지 않는가? 이 역시 한 두어 뼘 남짓한 비갈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땅을 조금만 파서 묘 옆에다 뭉쳐 놓으면 묘인지 흙무덤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봐야 남구만의 이 육신 묘비명을 제대로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여기에서 핵심 포인트는
且此地,成墓之有二,近古耆舊,耳目相接,傳說可据,而不知何年,有權貴人,築庄江上,其近地丘墓之有碑碣者,悉去之,權貴人敗後,有人收拾舊碣於(仆)碎之餘,復竪之,然,其未及竪也,多有,追瘞之塚間,於其間,成氏一墓,混不可辨,且失其一碣故,今之可認爲成墓者,只存其一,以此推之,當初四氏之葬也,河柳之墓,安知不在此中而歲遠失處,亦或如成氏一墓耶
국사편찬위원회가 이 원문을 어떻게 해서든 비틀고 변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성승묘의 존재를 알 수 없게 하고 또, 그 존재를 호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어떻게 비틑고 변조를 했는지 국사편찬위원회가 보내온 답변을 근거로 하나씩 하나씩 짚어가면서 바로 잡아 보겠다.
且此地成墓之有二
이글 첫 머리에서도 분명히 이곳 사육신묘에 성씨묘가 둘이 있다고 못 박고 있다. 이 해석은 너무도 간단한 것이다.
성 : 또한 이곳(사육신 묘)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었다. (성삼문묘와 성승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고 명료한 것이다 그런데 국편의 답변은
국 : ...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하고 이 글의 본뜻을 오도하기 위해서 비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近古耆舊,耳目相接,傳說可据
성 : 근래 사람이나 옛날 사람이나 전해 듣고 (耳), 눈으로(目) 직접 목격한 것이기 때문에 전해 오는 말이 믿을 만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고 명료한 것이다 그런데 국편의 답변은 이 원문 역시 여지없이 비틀어 글의 원 뜻을 오도하고 있다
국: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하고 계속적으로 여운을 남겨 이 원문의 본뜻을 흐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애처롭기 까지 하다.
而不知何年,有權貴人,築庄江上,其近地,丘墓之有碑碣者,失去之
성: 그런데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권귀인(후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강위(사육신 묘역)에다 별장을 지으면서 그 부근의 묘 비석들을 전부 제거 시키는 것이었다.
국: 어느 해 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묘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이 해석에선 나는 권귀인을 후궁으로 보고 해석했고 국편은 권세 있는 사람으로 해석했다 국편도 이 부분 만큼은 무난하게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權貴人敗後,有人,收拾舊碣於(仆)碎之餘,復豎之,然,其未及豎也多有,追瘞之塚間.於其間.成氏一墓,混不可辨
성: 권귀인이 패한후에 어떤 사람이 비석이 쓰러지고 부서진 나머지를 수습하여 다시 세우긴 하였으나 그러나 그 미처 세우지 못한 비석들이 많이 있었는데 쓰러진 비석을 따라 무덤과 무덤 사이에 묻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성씨 한기의 묘가
(비석 묻느라 파낸 흙으로 더불어 흙무덤인지 묘인지)
혼동이 되어 분별이 쉽지 않았다.
나처럼 이렇게 해석해야 이 원문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럼, 국편은 어떻게 해석을 했는지 보기로 하자.
국: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국편의 이 해석은 참으로 엉뚱하다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까지는 해석이 제대로 됐는데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는 원문의 글 내용에는 없는 말이다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는 무엇을 다시 세우기 전 이란 말인지 이해가 안 되고,
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분별할 수가 없다)
고 했는데 나중에 쓴 무덤들이라면 어떤 무덤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내용의 원문이 없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본시 역사 날조기관이기 때문에 원문에 없는 글도 지금과 같이 자기들 멋대로 글을 꾸며 답변을 보내는 것은 이미 상투적이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다
且失其一碣故,今之可認爲成墓者,只存其一,以此推之,當初四氏葬也,河柳之墓,安知不在此中而歲遠失處,,亦或,如成氏之一墓耶
성: 또한 그 하나의 비석을 잃어버린 까닭으로 지금은 가히 성씨 묘가 됨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성씨)비석 하하나가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당초에의 네 성씨(姓氏)의 충신을 묻을 적에 하위지, 유성원의 묘가 이 가운데 (사육신묘)에 있지도 않았는데 (하위지의 시신과 유성원의 시신)이 실처 한 세월이 너무 흘러 어찌 또한, 혹시 성씨 의 한 기의 묘와 같음을 어찌 알리오?
* 이 글 내용에서 ( 당초에 네 충신을 묻을 적에 하위지, 유성원의 묘가 이곳 사육신묘에 있지도 않았는데 하위지와 유성원의 시신을 실처한 세월이 너무 흘러 어찌또한, 혹시 성씨 한기의 묘와 같음을 어찌 알리오의 이 말은 비석을 잃어버린 성씨묘는 다른 성씨의 묘비석이 보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석을 잃어버린 성씨묘를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는 말이고, 하위지와 유성원의 묘는 네 성씨를 사육신묘에 묻을 적에 처음부터 시신이 없었기 때문에 성씨의 묘처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이 글 내용에는 혼재한 묘가 성씨묘라고만 되어있고, 혼재한 묘가 성승묘라고 명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성씨묘는 쉽게 찾아 다시 원상대로 복원 해 놓았다는 남구만의 이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는 어떻게 변조하여 답변을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국: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 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답변을 보낸 국사편찬위원회의 직원 나으리들! ( 편사연구사: 양정필씨, 편사연구관: 구선희씨. 편사부장: 박홍갑씨)
물어 봅시다!
남구만의 이 기록이 어떻게 해서 정 반대의 해석이 나왔는지 답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의 육신묘비명은 그 원문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부인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을 임의대로 변조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거짓과 꾸밈없이 성심, 성의를 다하여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것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문서는 그 자체로 공신력을 갖는다. 지금과 같이 이런 원문의 기록을 직원들 마음대로 원 뜻을 훼손하여 정 반대의 뜻으로 변조하여 답변을 보냈을 때 국민이 받는 피해는 회복할 길이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직원 나으리들!
어이없고, 황당합니다.
이 세분 중에 이 육신묘비명의 본뜻을 어느 분이 변조 하셨습니까?
아무리 역사 날조기관의 직원들이라 해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아예 고증 문헌 해석 능력이 없으면 국사편찬위원회를 떠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고 도리 아닙니까?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자, 따져 봅시다.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에서 단지 무엇이 하나 남아 있어서 성씨의 묘소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까?
다음 해석이 더욱 기가 막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에서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사육신 묘소 가운데) 있다라고 했는데 원문 어느 문구가 하씨와 유씨가 이 사육신 묘소 가운데 있다는 것인지 원문을 지적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에서
이런 해석이 나올만한 원문의 문구가 없는데 당신네들은 원문 어느 곳을 해석하여 이런 답변을 보냈는지 역시 그 원문을 지적하여 답변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원문의 본뜻을 왜곡하고 변조하여 답변을 보내는데 무려 50여일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국사를 담당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직원들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이 육신묘비명의 본뜻을 몰라 이런 엉터리 답변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직원들이 이 내용을 왜곡, 변조하여 답변을 보낸 것은 그것은 국사편찬위원회가 2007.7.16. 서울시에 회신한
“성승묘의 존재여부 및 위치 등에 대하여 관련기록들이 서로 다르고 확실한 고증 자료가 없어 현 시점에서 복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사료됨”
이라고 보낸 이 답변 내용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참으로 엉뚱하게도 남구만의 육신묘비명 중
且此地,成墓之有二,近古耆舊,耳目相接,傳說可据,而不知何年,有權貴人,築庄江上,其近地丘墓之有碑碣者,悉去之,權貴人敗後,有人收拾舊碣於(仆)碎之餘,復竪之,然,其未及竪也,多有,追瘞之塚間,於其間,成氏一墓,混不可辨,且失其一碣故,今之可認爲成墓者,只存其一,以此推之,當初四氏之葬也,河柳之墓,安知不在此中而歲遠失處,亦或如成氏一墓耶
이 원문을 발췌하여 이 원문이 갖고 있는 본뜻을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
해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묘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왜곡, 변조하여 답변을 보낸 것이다.
이 원문의 본뜻을 윗글에 상세하게 밝혀 놨지만 직접 비교하기위해서 아래에 원문의 본뜻을 옮긴다.
또한 이곳 (사육신묘)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었다. 근래 사람이나 옛날 사람이나 노인들이 전해오는 말을 듣고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이기 때문에 전해 오는 말이 믿을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권귀인 (후궁) 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강위에다 별장을 지으면서 그 부근의 묘 비석들을 전부 제거시키는 것이었다. 권귀인이 패한후에 어떤 사람이 쓰러지고 부서진 옛 비석을 수습하여 다시 세우긴 했으나 그러나 미처 세우지 못한 것이 많이 있었는데 쓰러진 비석을 따라 무덤사이에다 묻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성씨의 한 묘가
(비갈 묻느라고 파낸 흙으로 더불어 묘인지 흙무덤인지)
혼재하여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비갈 하나를 잃어버린 까닭으로 지금은 성씨 묘가 되는 줄 알지만 단지 그 묘 한기가 보존 되어 있어서(성삼문 묘)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당초에
(김시습이 성삼문, 이개, 유응부, 박팽년 등)
네 신하를 묻을 적에 하위지, 유성원 묘가 이 가운데 있지 않았는데
(하위지의 시신과 유성원의 시신)
이 실처한 세월이 너무 흘러 또한 혹시 성씨 한 사람의 묘와 같음을 어찌 알리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이다 권귀인이 노량진 강상에다 별장을 지으려고 육신의 비석을 쓰러뜨리고 부수어 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비석을 세우고 흙무덤을 파 헤쳐 묘 옆에 쌓아 놓으니 묘인지 흙무덤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런 가운데 에서도 성씨의 한 묘가 보존 되어 있어서(只存其一) 성승의 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씨의 한 묘가 보존 되어 있었다는 말은(只存其一) 성삼문의 묘를 말한 것이다 즉 성씨 묘가 둘 있었는데 성삼문의 묘가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한 묘는 자연적으로 성승의 묘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이 성삼문 이개 유응부 박팽년의 네 시신을 묻을 당시에 이 네 사람 속에 끼어 있지도 않은 하위지와 유성원은 더군다나 시신 자체가 처소를 잃은 세월이 너무 흘러 성씨의 한 무덤처럼 쉽게 찾을 수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가 극명하게 뒤집어 변조한 부분이 원문의 바로 이 부분이다
當初四氏之葬也,河柳之墓,安知不在此中而歲遠失處,亦或如成氏一墓耶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원문을 이렇게 해석하여 변조해 놓으니
이 글만 보면 틀림없이 성승의 묘를 잃어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이 원문의 본뜻을 절대 모를리 없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는 20007.7.16에 서울시에 회신하여 보낸
“성승묘의 존재여부 및 위치 등에 대하여 관련기록들이 서로 다르고 확실한 고증 자료가 없어 현 시점에서 복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사료됨”
이라는 바로 이 문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구만의 육신묘비명 원문 중 이 부분을 50여일 동안 머리 싸매고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이렇게 변조하여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뜻으로 답변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나
當初四氏之葬也,河柳之墓,安知不在此中而歲遠失處,亦或如成氏一墓耶
이 원문의 뜻이 어찌 국사편찬위원회가 해석하여 보낸 이런 뜻이 겠는가?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가
아니고,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가 이 가운데 있지 않았는데”가
맞는 맞는 뜻이다.
“연도가 오래 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고
(하위지와 유성원의 시신) 이 실처한 세월이 너무 흘러 또한 혹, 성씨(성승) 한기의 묘와 같 음을 어찌 알리오? 즉, 성승묘와 같이 쉽게 찾을 수 있음을 어찌 알리오? 가 맞는 뜻이다.
* 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실록에 있는 것도 그런 기록 없다고 거짓말 답변으로 일관하다 끝내는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의 양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사표를 내 던지고 말았다.
편사연구사: 양정필씨. 편사연구관: 구선희씨. 편사부장: 박홍갑씨.는 사학자로서의 자질부족의 책임을 지고 학자답게 정옥자 전 위원장처럼 깨긋이 국사편찬위원회 직무에서 물러남은 물론이요 일체의 공직에서 용퇴할 의사는 없는가?
내가 보기에는 이 세 사람은 국사편찬위원회에 나가 직무를 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기초 공부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책가방 들고 학교에 가서 학문을 다시 연마해야 할 사람들이 국사편찬위원회가 어디라고 감히 직무를 본단 말인가?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가?
단순히 직장 개념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갔다면 충고 하건대 아서요? 아서?
대한민국 역사가 아프다고 통곡합니다.
보지 않았습니까?
사학자로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사학을 맡았다가 반만년 유구한 역사에 사육신 날조극이라는 큰 상처를 남기고
최영희 전 국사편찬위원장, 허명, 구석봉 , 이병도 서울대 사학과 교수. 이현희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등은 하나와 같이 자기명대로 살지 못하고 역사날조의 추악한 이름만을 남기고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4, 성승장군 묘에 대한 이설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셨는데 아래에 첨부하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그 이설의 근거로
그 첫 번째가 남구만의 약천집 제19권 노량육신묘비를 들어 답변을 보내 왔습니다.
그러나
국편 직원 나으리들!
어쩌죠?
당신네들이 이설의 근거로 제시한 남구만의 이 육신묘비명은 안타깝게도 권귀인이 별장을
지으면서 사육신묘에 있는 비석들을 모두 제거시켜 내 버리긴 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비석들을 다시 세워 원상회복을 했다는 내용 아닙니까?
더욱이 성승묘는 그 회복과정이 문자 그대로 드라마틱하게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습니다.
다시 한 번 짚어 볼까요?
성씨(성승)의 한 묘가 비석 묻느라 파낸 흙으로 인해서 흙무덤인지 성승의 묘인지 혼동이 되어서 분별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드라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죠?
묘도 분별하기도 어려운 판에 글쎄 묘 앞에 새겨 놓은 성씨지묘란 비석 마저도 분실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되면 성승의 묘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라마는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남구만은 분명 최고의 극작가임엔 틀림 없습니다. 남구만은 성승장군 묘에 대해서 이렇게 써 놨습니다. 지금, 성승장군 묘가 되는 줄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바로 성삼문의 묘가 보존 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한기의 성씨묘가 성승의 묘가 된다고 이 육신묘비명은 설파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성승묘를 미루어 김시습이 성삼문, 이개, 유응부, 박팽년 등 네 충신들을 묻을 적에 하위지, 유성원의 묘는 처음부터 이곳 사육신 묘 속에 있지도 않았고, 또한 하위지, 유성원의 시신이 실처한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성승의 묘와 같이 쉽게 찾을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50일 동안 찾고 찾아 성승장군 묘의 이설의 근거로 제시한 남구만의 육신 묘비명 중의 이 문헌은 성승장군 묘를 다시 찾아 묘 봉분을 원상회복 했다는 내용인데 이 내용을 변조하여 국편에서 성승장군 묘 이설로 제시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자기들 마음대로 문헌의 내용을 변조하여 답변을 보내도 우리 사육신 후손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여겨 이렇게 변조하여 답변으로 보낸 것이다.
이 원문의 내용을 왜곡하고 변조하여 답변을 보낸 직원들은 법적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원 뜻을 왜곡하고 변조하여 거짓 답변을 보낸 이태진 신임 위원장을 비롯 그 직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 육신묘비명은 이처럼 성승장군 묘를 찾아 복원 해 놓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박팽년선생의 후손인 익찬과 숭고가 사육신묘 묘지기를 하면서 옛 봉분을 다시 증축을 하면서 비석도 새로운 비석으로 바꿔 묘 주변을 새롭게 일신하여 단장해 놨다는 것을 기록해 놓았다.(이게시판 68번 국사편찬위원회의 거짓말 남구만 편 참고 )
나, 연려실 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국사편찬위원회는 성승장군 묘 이설로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에서 발췌하여 그 특유의 궤변으로 그 이설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럼, 그들이 보낸 답변을 따라 한 번 여행하여 보실까요?
‘...... 인조조에 장릉을 발인할 때에 길을 닦는 관원이 다섯 신하 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하고 그 앞에 세웠던 돌까지 무너뜨렸는데 효종 경인년에 박팽년의 후손 숭고가 다시 묘를 봉축하고 그 돌을 세웠다.... 숭고가 묘를 수축할 때에는 성씨의 한 무덤은 비갈이 없어서 분별할 수가 없었다.....’
* 이 연려실기술에서 성승묘가 성삼문 묘 뒤 10 보쯤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왜, 그 기록은 뺐는가?
이 내용은 연려실 기술 747쪽에 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박숭고가 성승의 묘를 다시 봉축을 해 주었고 또 묘의 비석도 새로운 것으로 세워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종 경인년에 박숭고가 성승 묘를 복원한 이래 1978년 5월 18일 밤 김문기 허묘 쓰기 전까지는 성승 묘가 아무런 탈 없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종 고전 문헌에서도 성승 묘가 성삼문 묘 뒤 10여보 경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는 자신들이 2007년 7월 16일자로 서울시에 회신하면서 성승 묘 복원을 하지 말라고, 이렇게 써서 보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승묘의 존재여부 및 위치등에 대하여 관련 기록들이 서로 다르고,
확실한 고증자료가 없어 현 시점에서 복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사료됨』
이라고 답변을 보내어 성승장군 묘 복원을 막아 놓고는 우리 수호회가 이에 대한 확실한 고증 자료를 제시하여 국편에다 우리가 보낸 고증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더니
무려 50일이 넘어서야 보내온 답변이 위에서 밝힌대로 남구만의 육신묘비명의 원문의 뜻을 왜곡하고 변조하고 조작하여 이것을 성승묘의 이설로 답변하면서
성승묘의 존재가 기록된 것에 대한 기록에 대해선 일체 답변을 회피하고 고증기록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변조하고 조작하고 거짓말로 고증기록을 호도하고 희석하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고의적 범죄다
* 위 내용을 기록할 당시에 이미 성씨의 묘 하나는 있었다는 전언은 있지만 찾기 힘든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도 거짓말이다.
이 말은 남구만의 육신묘비명을 놓고 자기네들이 원문의 본뜻을 왜곡시켜 변조해 놓고는 이것을 핑계로 마치 성승묘가 찾기 힘든 상태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은 자기네들의 거짓말 답변을 합리화 하기위한 변명과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시하여 답변한 남구만의 육신묘비명의 그 문헌은 절대로 찾기 힘든 상태가 아니고 너무 찾기가 쉬워서 김시습이 성삼문, 이개, 유응부, 박팽년을 육신묘에 묻을 적에 비록, 하위지와 유성원의 시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성승묘와 같이 이렇게 빨리 찾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애석해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성승 묘는 너무도 쉽게 찾아 봉분과 묘비석을 복원할 수 있었다고 육신묘비명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 지봉유설 권 19
노량의 남쪽에 세 묘가 나란히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육신묘라고 하는데 모두 표석이 있어 성씨지묘, 박씨지묘, 유씨지묘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하곡 허봉이 말하기를 ‘ 당시 의사가 세 사람을 이곳에 장사 지내면서 감히 드러내 새기지 못하고 이로써 일컬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의 묘인 것은 의심이 없다’ 고 하였다.
임란후에 그 곳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는데 각석은 그대로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어 거의 분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지봉유설 권 19의 책을 직접 보지 못해 직설적으로 이 글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수 없으나 이 내용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책은 보았다.
그러나
위의 이 글은 유형섭씨가 보낸 질문을 호도하기 위해서 그 기록의 핵심은 제껴 두고 자신들한테 유리한 구절만 따서 답변한 것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노량의 남쪽에 세 묘가 나란히 있다.
이 말은 노량 남쪽언덕 길옆에 다섯기의 무덤이 있다.(露梁南岸路傍有五塚) 이 말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노량진 언덕에 다섯기의 묘가 나린히 있다는 것은 각종 고증문헌이 똑 같이 전하고 있는데 유독 지봉유설만 세묘만 나란히 있다는 것은 이 고증문헌으로 더불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1978.5.18.밤 서울시 공원과장 김의재씨가 성승 묘 파내기 전까지만 해도 성승,성삼문,이개,유응부,박팽년 등의 다섯기의 무덤이 사육신묘에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이 지봉유설이란 책이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 위의 기록은 임란 이전의 기록으로 민원인이 제시한 기록보다 앞선 시기의 것입니다 이수광, 허봉 등 당대의 최고 지식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노량에는 사육신 중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의 묘만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씨의 묘가 둘이라는 언급은 없었습니다,
위의 이 글은 문제가 크다.
이글을 쓴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양정필씨 입니까? 박홍갑씨 입니까? 남구만의 육신묘비명도 제대로 해석 못하는 실력으로 감히 임란 이전의 기록은 무엇이며 이수광, 허봉이 당대의 최고지식인이라고 어떤 잣대를 들이대어 재단을 합니까?
우선 당대 최고 지식인이라고 평가를 하려면 이수광, 허봉이 남긴 저서라든가 문헌이 그 시대를 압도하고 후세에 유파되어 세간의 입줄에 오르내려야 하고 또 내 자신이 그가 남긴 문헌에 상응한 실력이 갖춰져 있어서 이수광이나 허봉의 문헌을 보고 그 고하를 평할 수 있는 실력과 자질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이수광, 허봉 등을 지칭하여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논할 자격이 없다. 남구만의 이 육신묘비명의 원문도 제대로 해석 못하면서.......
이수광이 썼다는 지봉유설이 뭐 그리 대단한 책이라고 이것을 인용하여 이 성승묘의 존재 여부를 재단하고 또. 상대의 기를 꺾어 자신이 말한 주장을 공인시키려고 하고 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촌스럽고 유치하다.
“위의 기록은 임란이전의 기록으로 민원인이 제시한 기록보다 앞선 시기의 것입니다”
이 말이 성승묘 존재 여부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어이없고 황당하다. 임란이전의 기록이고 이후의 기록이고 간에 지봉유설이란 책이 역사를 평가하는 절대적 판결권을 가진 책이라도 되는 모양같이 답변하여 보냈는데 이 답변을 편사 연구사 양정필씨가 쓴 것 맞죠? 대단히 미안하지만 제가 보기엔 문자로 쓰면 구상유취(口尙乳臭)이고 속된 말로는 애송내기의 식견으로 어디다 대고 지봉유설이란 꼴같지 않은 책을 가지고 문자를 씁니까?
양정필씨가 기안한 이글만 봐도 지봉유설이란 책이 형편없는 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 이수광, 허봉 등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노량에는 사육신 중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의 묘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글 때문에 이 책이 형편없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개가 빠졌습니까? 양정필씨가 절대적 역사평가 책으로 생각하는 이 책에 이개가 빠졌다면 지봉유설은 사료(史料)로써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만약, 양정필씨가 이 지봉유설이란 책을 절대적인 사료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허목의 육신 의총비, 남구만의 육신 묘비명, 조관빈의 사육신 신도비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아무런 사료적 가치가 없는 책이 된다는 뜻 아닙니까? 어느 누가 양정필씨에게 이런 역사 평가와 재단의 권한을 부여했습니까?
양정필씨는 실제로 이 답변에서 지봉유설을 지목하여
“ 위 기록은 임란 이전 기록으로 민원인이 제시한 기록보다 앞선 시기의 것입니다”
고 우리가 제시한 책은 무시하고 지봉유설의 기록이 절대적인 냥 말했습니다. 이개는 우리가 제시한 책에는 빠짐없이 사육신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사육신묘에 일관되게 묻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양정필씨가 제시한 지봉유설에만 이개의 기록이 빠져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어느 책이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개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책입니까?
이개가 빠진 책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책입니까?
양정필씨는 또 지봉유설에는 성씨의 묘가 둘이라는 언급은 없습니다.고 큰 소리 쳐 이 답변을 마감했습니다.
좋습니다
지봉유설에는 이개도 빠져 있고, 성승의 묘도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 지봉유설이야 말로 사료적 가치가 없는 책인 것입니다. 이런 책을 가지고 성승장군 존재여부의 답변으로 제시 했으니 국가의 역사를 관장하는 국가기관 국사편찬위원회가 국민을 상대로 성승묘가 있다고 기록한 문헌은 폐기시켜 답변을 회피하고 이개의 묘도 기록이 안 되어 있고, 성승의 묘도 기록이 안 된 듣도 보도 못한 아무런 사료적 가치가 없는 지봉유설이란 괴이한 책의 기록을 가지고 국민의 민원을 어찌 이렇게 조롱하여 장난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민원에 장난으로 답변한 이태진 위원장은 부하직원의 거짓 답변을 방기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하라! 아니면 거짓 답변을 기안 한 부하직원을 사퇴시켜라!
만약, 이 남구만의 육신묘비명을 왜곡, 변조하여 답변을 보낸데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면 우린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77.9,22. 김문기 사육신 날조극 이래 2010. 10.30. 이날 까지 거짓말하기, 실록부정하기, 역사 비틀기, 변조하기, 왜곡하기 등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유린하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더 이상 국가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이제는 오욕으로 점철된 역사날조의 본산 국사편찬위원회는 해체하고 새로운 이름의 국사담당 기관을 만들어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 새로 신설될 국사담당기관 만큼은 권력이 집중된 행정부 소관이 아닌 민의의 전당 국회산하에 둘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고싶은 분은
이 게시판 136번
2010.10. 30.
사육신 수호회장 성원규
첫댓글 국사편찬위원회 직원들의 망언
<지봉 유설 권 19>등 荷谷 許 封(1551-1639)문신이며 저서로는 荷谷朝天記,海東野言 등이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였다는 기록은 들어보지도 못하고 처음 접 하지만 왜 지금 이글을 소개 하는지 그 의도가 의심 스럽다 그리고 지방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 묘와 묘갈명 입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원장은 중대한 문제이니 만큼 책임지고 발의한자을 확인하고 문책 하여야 합니다 사육신 을 부정하고 이간질 시키는 아주 못된 인간이라 생각되며 이런자가 국사위원회 직원이라고 생각하니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제는 노량진 사육신 공원내에 있는 조선국육신묘비명(사육신 신도비명)에 기록된 내용까지 부정 한다는 뜻인지 정말 기가찰 노릇이다 조관빈( 1691-1757)은 大宗伯 太學士 입니다 나라에 역사을 송두리체 뒤 흔드는 매국놈의 짖이다 반듯히 찾아서 문책하여야 합니다
李晬光(1563-1628)은 문신이며 학자이다 저서로는 芝峰類說,采薪雜錄 등이 있다 인종 원년4월 신축년(1545)특강관 한수의 조강기사 에서 사육신의 충절을 거론을 함으로써 마침내 왕조실록에도 수록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허목(1593-1682)의 육신의총비 와 남구만(1629-1711)의 육신묘비명이 있지 안는가? 이미 한수의 조강기사에서 사육신을 거론 한지가 수년(허봉이 출생하기6년전)이 지난 후 허봉 말이라며 전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직원과 위원장은 정신이 나간 인간들인 모양입니다 허봉이 출생하고 교육을 받는과정에서 사육신묘에 관하여 모르겠습니까?
허봉의 <海東野言>은 조선태조부터 명종에 이르는 200 여년간의 野史를 기록한 책이며 이수광의 <芝峰類設>은 천주교의 서구 문물을 소개한점 類書는 선구자 적인 책으로 의의가 있다 또한 천문,지리,병정,관직 문학,인물 등에 관하여 설명한 백과사전적 저서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어느책 어느부문에 어떤식으로 기재되 있는지 밝혀야 하고 한나라의 歷史을 다루는 기관이 지나간 野史 기록을 찾자내 성승 장군 묘하고 무슨관계가 있는지 묻고싶다
<야사란 ? 민간에서 私私로이 기록한 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