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해 심호흡하려면
싫든 좋든 우리 땅에서 재배한 유전자 조작 벼를 먹어야한다는 걸까? 농업을 진흥하겠다고 모인 연구자들은 그리하라고 우리를 조인다. 농업이라. 그들이 염두에 둔 농업은 무엇일까? 유전자 조작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먼저 생각하는 농업은 농민의 이익과 무관한 게 분명하다. 누가 그들에게 왜 연구비를 주었나? 흔히 ‘삼농’이라고 말한다. 농업 뿐 아니라 농민과 농촌을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거. 연구비의 향방에 화답하는 과학자는 삼농에 관심이 없을 터. 자본과 권력에 충성하는 과학자는 자신이 납품해야 할 정답을 잘 안다. 청부과학에 종사하는 말단이므로. 거리에 나가 GMO 반대운동을 시작할 때 지나가는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처음 듣는 말이므로. 호기심이 작동했는지 언론이 잠시 주목했다. 덕분에 관심 갖는 시민이 다소 늘었지만 거기까지다. GMO는 우리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았고 어느새 식용으로 세계 최대로 수입하는 국가가 되고 말았다. 먹는 식량의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에서 자본력이 큰 수입업자의 논리에 우리 정부는 무장해제한 걸까? 물론 그럴 텐데, 그보다 소비자들의 거센 행동이 없기 때문이리라. 우리 언론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겐가? 전두환 정권부터였을까? 언론은 4부의 역할을 버렸다. 한때 언론계 종사자들의 신념과 긍지였던 감시 기능은 무뎌진지 오래다. 군홧발에도 견디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건만 이제는 왜 아닌 건가? 전두환 정권부터 돈으로 길들여지더니 이명박 정권 이후 사찰에 몸을 떨기 시작한 걸까? 두둑한 월급을 보장하는 광고와 상관이 없는 시민과 농민, 사찰을 할 능력도 자격도 의지도 없는 시민단체와 노동계에 관심이 멀어졌는지 모른다. 위축될 직업군 목록에 올라 그러는지, 돈과 권력의 향배에 촉각을 세우다 자신의 본분과 자부심을 내팽개쳤다. 유전자 조작은 자본이 주도하고 정권이 뒷받침한다. 그들은 광고의 큰손이고 정보를 배타적으로 독점한다. 자본과 권력에 길든 언론은 행동하지 않는 시민을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언론만이 아니다. 자본과 권력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할 제도를 만드는 의원들을 좌지우지한다. 대의제에서 의원은 시민의 행동에 주목해야 하건만, 행동하지 않는 유권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의원의 집무실을 문턱 닳게 드나드는 이 누구일까? 시민을 옥죄는 제도가 제안되고 통과되는 걸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반도체의 한계를 생명산업으로 극복하려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악명을 떨치는 다국적기업이 손잡고 새만금 간척지에 GMO 씨앗을 뿌리려 한다는 의혹이 점점 짙어지건만 그 내말의 진위를 파헤치는 언론은 여태 나타나지 않는다. 정부가 그 내용을 확인하지 않으니 국회의원이라도 관심을 보여야하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다. GMO는 피해가 끔찍한 핵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용케 핵을 피하면 다음세대가 살아남을 궁리를 할 수 있지만 스멀스멀 생태계에 퍼지고 몸에 들어온 GMO는 돌이킬 방법이 없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문제를 정부와 언론이 외면하는 가운데 거대자본이 다음세대의 생명을 담보로 돈벌이에 나섰건만 국회는 침묵한다. 아니 길들어진 걸까? 당론에 떠밀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는 의원은 대의제의 본분을 애써 무시한다. 계파가 당론을 주도하는 의회에서 유권자의 의견이 반영될 틈이 없다. 언론이 제4부의 역할을 포기한 상황에서 자본과 권력은 쾌재를 부른다. 자본과 권력의 의지에 감응하는 당론의 장단에 따라 제도가 칼춤을 출 따름이다. 언론에 광고라는 재갈을 씌우는 자본은 희희낙락이고 권력은 사찰의 칼날을 여보란 듯 벼른다. 이웃 국가의 핵발전소가 폭발되어도, 자국의 전기가 남아돌아도, 발전소에 들어가는 유연탄이 초미세먼지를 풀풀 날리고 온난화를 부추겨도, 그 화석연료가 바닥을 드러내도, 재앙의 신호탄인 발전소는 추가되고 초고압송전탑은 민중의 삶을 짓밟는다. 4대강 사업이 지구온난화를 대비하는 시설이라는 권력의 비전문적 언설은 전문가의 침묵과 언론의 왜곡에 힘입어 기정사실이 되고 완공 이후 숱한 문제를 심각하게 드러내지만 국회는 4대강 사업이 가능하도록 뒤튼 제도를 돌이키는데 별 관심이 없다. 기존 거대 정당의 당론은 자본과 권력에 주파수가 맞춰 있지 않은가. 미세먼지가 허파를 자극해 수명이 단축되는 시민들은 핵발전소가 싫다. 화력발전보다 태양과 바람으로 만든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유전자가 조작된 쌀로 밥을 짓고 유전자가 조작된 감자와 콩과 옥수수와 유채로 만든 반찬을 식탁에 올리기 꺼리지만 우리 국회의원의 안테나에 잡히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의 이해에 조응하며 제도를 발의하는 의원들은 여간 바쁜 게 아니다. 계파의 장에 충성하지 않으면 다음 공천에 지장을 받으니 법안을 심의하는데 허락된 시간은 매우 짧다. 심의? 심의라기보다 계파의 이익을 염두에 두는 타협이나 거래를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회의장보다 분위기가 은근한 밀실이 훨씬 낫다. 쏟아지는 법안을 감당하지 못하는 위원회는 소위원회에 권한을 넘기지만 소위원회 소속 의원도 통 시간이 없다. 정족수를 겨우 넘겨 개회를 선언하면 뭐하나. 의장이 개회를 선언하자마자 빠져나간 의원이 회의장에 들어오지 않으니 남은 의원 몇 명이 귀엣말을 나누며 밀실에서 조율한 거래와 타협을 확인할 따름이다. 우리 국회의 일상이다. 소위원회에 끝까지 남아 유권자의 처지에서 열렬하게 논의에 참여하는 의원이 한 사람이라도 우리 국회에 있다면? 법안은 달라진다. 초고압송전탑이 함부로 경작지를 짓밟지 못한다. 유전자 조작 벼를 심어 소비자의 식탁에 올리겠다는 발상은 불가능하다. 비리와 무능으로 사고 확률을 높이는 핵발전소를 함부로 추가하거나 수명을 연장하지 못한다. 초미세먼지 풀풀 내뿜는 화력발전소에 이익이 집중되도록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 발굴을 봉쇄하는 정책을 세울 수 없다. 장애인들의 자유로운 이동수단 확보를 지체하게 하는 법안이 상정될 수 없다. 녹색당과 같은 정당이 법과 제도 마련에 참석한다면 자본과 권력을 위한 법안보다 정의가 살아나는 제도가 세상을 다채롭게 밝힐 수 있다. 꽉 막혔던 숨통이 드디어 틜 텐데. 진심이든 아니든, 세상을 밝히겠다는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안다. 사회정의, 경제정의에 반하는 제도를 비난하지만 대개 거기까지다. 다음세대를 생각하는 생태정의에 도무지 무감각하다. 로드킬로 자연의 이웃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우리 다음세대의 삶은 적막할 수밖에 없다. 동물원이 아니라면 호랑이를 볼 수 없는 세상이다. 동물원 밖에서 제비와 나비 한 마리 볼 수 없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할까? 농약뿐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 사료와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은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한다. 기형이 된 가축의 고기를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섞어 먹는 우리는 어떤 후손을 기대하는가? 다채로운 자연의 이웃에 대한 애틋함을 모르는 자가 입안하는 법과 제도는 ‘비인간 동물’의 아픈 현실을 헤아리지 않는다. 학교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학생들을 키우려던 교사는 왜 학교를 등져야 했을까? 자본과 권력이 만든 강고한 틀에 끼어맞추기 위해 자신의 개성과 끼를 일찌감치 내버리고, 진학과 취업의 진입장벽 앞에서 좌절하는 제자를 바라보는 선생의 마음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스스로 자라도록 학생을 돕는 교육은 획일적 기준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건강하다. 교사가 교육의 주체가 되면 가능한 일인데 우리 사회는 그런 행동을 방종이라며 억압한다. 교육계마저 자본과 권력에 길들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런 상황에서 돋아오른 초고압송전탑은 목소리가 작은 민중의 삶을 당연하다는 듯 짓밟는다. 일할 능력도 자격도 충분한 젊은이들이 오로지 돈이 없어서 좌절하고 진입장벽 앞에서 주눅들어야 한다면 그들의 내일은 건강할 수 없다. 젊은이의 덕목은 야망만이 아니다. 저항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배타적인 진입장벽은 낮아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공장 자동화를 주도하는 자본이 막대한 이익을 일방적으로 편취한 이익은 스스로 분배하지 않는다. 그런 암담한 사회는 행동으로 극복해야 한다. 무엇일까? 돈이 삶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결코 혜택이 아니다. 필수 공공재와 다름이 없다. 기본소득이 제공된다면 재능과 의지가 충분한 젊은이를 춤추게 이끌 테지만, 정작 그 가능성을 젊은이들이 잘 모른다. 그들이 행동하면 달라질 수 있다. 피가 뜨거운 젊은이는 행동할 준비가 이미 돼 있다. 불의의 장면을 보거나 부당한 소식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지 않던가. 젊은이가 행동했기에 이 나라는 독립했고 민주화되었다. 젊은이들이 행동하면 세상은 비로소 달라진다. 시작이 반이건만 두렵다고? 다행히 행동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젊은이의 생각을 능동적으로 반영할 의지가 충분한 정당에 자신의 표를 던지는 소극적 행동으로 시작할 수 있다. 우리의 현 거대정당이 젊은이를 위한 제도에 별 관심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행동하지 않고 투표조차 외면하는 젊은이를 위해 당론을 거부하다 뺨 맞을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자본과 권력이 만든 틀을 어렵사리 통과하면 드디어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대기업에 들어간 젊은이 중 그 기업에 남아 행복을 누리는 이 몇이나 될까?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자식을 다그치며 학원이요 스펙이요 강요했던 가족은 행복할까? 열심히 일해 돈을 벌면 추구했던 행복의 언젠가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천박한 행복도 누리기 몹시 어렵다. 현실의 경험적 사실에 동의한다면, 기성세대여 자본과 권력이 만든 프레임에 몸을 맞추라고 젊은이를 다그치지 말자. 젊은이들도 자신의 행복은 누구나 현재의 자리에서 얼마든지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행동하자. 뜻 맞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다양하게.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돌이키더라도, 의지가 투철한 사람, 신념에 거리낌이 없는 적은 수의 사람이 행동에 나설 때 세상은 바뀌었다. 식민지에서 독립하고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된 우리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시야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피선거권과 소수인종에 대한 편견은 절대 다수의 행진 이전의 소수의 각성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맹아기를 겨우 벗어난 시민운동이 만개하려면 멀었다. 시민의 정치운동은 아직 맹아조차 터뜨리지 못했다. 그에 답답해하던 시민운동가는 정치운동에 나선다. 시민의 다채로운 의지와 행동을 억압하는 현실 제도로 바꾸려면 정치마당에 적극 참여해야하기 때문이리라. 녹색당이 나섰다. 답답한 현실정치에서 숨이 트일 마당을 만들어보자고 유권자에 노크한다. 생태정의를 먼저 생각하는 후보, 진정한 교육을 생각하는 후보, 주눅 들지 말고 젊은이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찾자는 후보, 그를 위한 기본소득을 반드시 실현하자는 후보, 환경운동의 한계를 정치로 극복하겠다는 후보들이 녹색당이 펼칠 현실정치 마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겨운 길로 나섰다. 같은 맘을 가진 이라면 성원할 순간이 온 것이다. 아직도 많은 유권자는 ‘녹색당’을 모른다. 풍문으로 들었더라도 어떤 의지와 신념을 가진 정당인지 모르는 이가 수두룩하다. 언론이 제 역할을 망각했기 때문이지만 유권자들도 기존 거대 정당이 만든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 크리라. 최면은 제정신으로 풀린다. 억압받고 길들어지고 홍보의 대상에 머물던 시민들이 민주화 이후 조금씩 각성하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의 역풍은 강했다. 잠시 트였던 숨통이 다시 갑갑해지지 않았나. 그렇다고 무작정 숨죽일 시민은 이제 없다. 비록 경험이 일천하더라도, 민주화가 보인 가능성은 긍정적이고 넓다. 다채롭고 가슴을 뛰게 한다. 그러므로 다시금 행동해야한다는 명제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녹색당, 우리의 숨통을 트게 하는 녹색당을 알려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명분은 넘친다.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들이 국회에서 펼치려는 포부를 《숨통이 트인다》에서 밝혔다. 기존 거대 정당들의 요란하지만 공허한 ‘출마의 변’과 다른 목소리와 자세를 묶어 펴냈다. 녹색당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들의 다부진 신념과 의지를 가슴 답답해하는 사람들에게 《숨통이 트인다》를 보여주자. 건강하고 행복한 내일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시민들에게 한줄기 햇살 같은 의지가 예 있다는 걸 알리자. 비례대표 후보인 영화감독 황윤, 밀양765kV 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국장 이계삼,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운영위원 김주온, 부산시민햇빛에너지협동조합 이사장 구자상, 오늘공작소 대표 신지예, 그리고 이 다섯 명의 의지와 신념을 뒷받침한 녹색당의 남우근 정책위원, 이유진과 하승수 공동운영위원장, 장서연 소수자인원특별위원, 한재각 공동정책위원장이 마음을 모아 쓴 《숨통이 트인다》를 펼쳐서 유권자 앞에서 크게 읽자.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래디앙, 2015.1.26.) |
출처: 내일을 생각하는 환경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디딤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