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숙 시인의 ‘장독대’ 일부 중 첫 대목이다. 소금과 메주가 만나도 시절인연이 닿아야 간장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한 옹기가 자연을 벗 삼아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었다니 한편의 선시를 보는 듯하다. 이제는 아련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애틋한 정서 하나를 이 세상에 새겨넣고 싶어 이 시를 썼을 터. 통도사 서운암 성파 스님도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김 시인보다 훨씬 오래 전에 그 정서를 새기다 못해 아예 자신의 품으로 안았다.
아파트 건축 붐이 일기 시작하던 1980년대, 사람들은 장독을 버렸다. 급격히 변한 주거문화에 장독대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 때 성파 스님은 깨져 나가기 직전의 장독을 모았다. 단, 50년 이상 된 장독만 모았다. 서운암 장독대에 즐비한 5000여개의 장독, 김 시인의 시상을 빌려 말한다면 연화좌를 튼 지 70년, 80년 된 선기 가득한 장독들이다. 눈 밝은 사람이라면 200년, 300년 된 장독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성파 스님이 걸어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채롭다. 어느날 도예에 관심을 갖더니 1985년부터 3000불상을 구워내 ‘도자삼천불’을 서운암에 봉안했다. 해인사 목판경이 있고, 화엄사에 석경이 있었다면 서운암에는 도자경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앞뒤 판을 분리 제작한 16만 도자대장경은 성파 스님이 1991년부터 2000년까지 꼬박 10년 동안 매진해 일궈낸 대작불사.
이 뿐만이 아니다. 천연염색인 쪽 염색법과 고려시대 전통 한지인 감지를 재현한 당사자도 성파 스님이다. 쪽 염색이 보편화된 지금과는 달리 1980년대 중반에는 염색법에 대한 대중 인식마저도 거의 없었을 때였으니 많은 고초를 겪었을 건 자명하다.
수년 전부터 성파 스님은 옻에 관심을 두었다. 그것도 옻으로 불화를 조성한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옻으로 불화를 조성한다니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성파 스님은 보란 듯이 최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옻칠불화전’을 펼쳐 보였다.
옻이 들어가면 둔탁하고도 어두울 것이라는 색감에 대한 선입견은 단 몇 초 만에 깨졌다. 투명한 색감이 확연하게 표현된 것은 물론이고, 성파 스님만의 기법에 따라 질감과 입체감까지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방습, 살균, 내구성에 강한 옻을 감안하면 성파 스님의 이 불화는 수백 년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을 듯싶다. 성파 스님에 따르면 ‘옻칠 불화는 물에 담가도 변색되지 않는다’고 한다. 명작을 유구히 남기고 싶은 불모, 화가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웬만한 사람은 이 중 단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 벅차다. 도자대장경만 해도 무턱대고 가마에 넣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900도의 불에 초벌구이 한 도판에 팔만대장경 원본을 실크스크린으로 떠 유약을 발라 1200도의 불에 다시 구워 내는 방식인데, 준비기간만 5년을 투자했다 해도 공정 과정에서 발생했을 난관과 시행착오는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성파 스님의 예사롭지 않은 행보가 또 하나 있다. 성파 스님은 사자좌에 올라 전하는 대중법문을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그 연유부터 여쭈어 보았지만 스님은 미소만 보일 뿐이다.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찰나의 정적을 깼다.
“심봉사가 눈을 떴습니다.” 심청전이다.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아시지요?” ‘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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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독대와 어우러진 금낭화가 미소를 보인다.
스님은 이내 차 한 잔 하고는 서운암 야생화로 화제를 돌렸다. 고산 야생화를 제외한 한국 야생화는 거의 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서운암 들꽃 군락지 역시 성파 스님이 조성했다. 매년 4월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는 대축제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건 약 100여종으로 꾸며진 1만여 평의 들꽃길 산책.
“야생화가 내보이는 미소에 반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요? 어떤 시인은 금낭화 곁에서 밤새 친구가 되어 주었을 달빛을 담을 것이고, 어떤 화가는 어느날 할미꽃을 흠뻑 적셔준 소나기를 화폭에 담겠지요. 어떤 음악가는 꽃창포를 스쳐 간 바람들의 하모니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들꽃 속에 파묻혀 있는 동안만이라도 작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면 그만이지요.”
5만평 야산에 야생화군락 조성 ‘작은 것 소중함’ 일깨워 주는 들꽃축제 종교초월 인파 몰려
포교확대 키워드는 문화 속 법음 ‘성파법문’ 깃든 서운암 선기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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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운암은 5000여개의 장독을 품고 있다.
| 심청전과 야생화 사이를 관통하는 그 무엇이 있을 듯싶은데 잡히지 않는다. 마치 바다 속에 흐르는 강을 찾는 묘연함이 전해진다.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야생화에서 무엇을 직시하는지.
“한 줌의 흙!”
순간, 가슴이 탁 트인다.
“들꽃은 자신의 뿌리를 내릴 한 줌의 흙 이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빛과 비, 바람과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미소를 통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지면 이 생애 단 한 번이라도 맑은 미소를 내어 보일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백자, 청자도 아닌 옹기를 모았던 것이다. 4군자나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꽃이 아닌 들꽃을 조성한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청백자가 있는 궁궐도 장독은 있었고, 고관대작이 머무는 길옆에도 어김없이 들꽃은 피어 있었다.
“우리 곁에 늘 있어주는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면, 인생풍파에 수없이 흔들리던 지침도 자리를 잡습니다. 가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곧장 나아가겠지요. 작은 행복 모르고 헛꿈 꾸며 망상만 피우면 옆 사람 말 한마디에도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화려함에만 취해 장미 한송이 보려다 이름 모를 꽃 수십 송이를 함부로 밟았던 우리의 발길이 헛꿈이요, 망상임을 스님은 설하고 있는 것이다. 성파 스님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불교가 이어야 한다는 의지로 사라져가는 옛 것을 찾고 개발해 왔다. 하지만 여기엔 스님만의 또 다른 깊은 뜻이 배어 있다. 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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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의 ‘연화Ⅰ’.
| 누구인들 산에 핀 야생화를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 길목에서 장독대를 보고, 전통 한지에 배인 색채에 빠지다 보면, 도자 3000불을 친견하며 도자팔만대장경을 가슴에 안게 된다. 굳이 ‘불교’라는 깃발을 들지 않더라도 전통문화 속에 담긴 정서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불교 세계로 이끌고 싶은 것이다. 안개 속에 옷이 젖듯이.
들꽃길을 걸은 수많은 사람들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스님이 야생화에서 건져 낸 ‘흙 한줌’의 뜻을 새길 수 있다면, 팔만대장경에 담긴 부처님 법을 가슴에 담은 것과 다름 아니다. 심봉사 눈뜸이 견성이었다는 사실에 무릎을 탁 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서운암 자체에 이미 스님이 전하고 싶은 법문이 모두 담겨있는 듯하다. 스님이 굳이 대중법문을 하지 않는 연유도 이제야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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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에 맡긴 천연염색의 자태.
묵묵히 서있는 옹기가 스님의 심중을 이해하고 있을 터. 그 옹기 하나가 어느 날 깨지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깨지면 흙입니다. 그 위에 들꽃 한 송이 피어나겠지요. 굳이 이름 한다면 서운암 풀꽃!”
성파 스님도 한 떨기 풀꽃이 되고 싶은 것일까?
“조주 스님이 이르셨습니다. ‘나무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진흙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 진불을 찾는다면 연꽃이면 어떻고, 들꽃인들 또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스님이 정진해 온 서운암 무위선원에 앉으면 진불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을까? 성파 스님이 한마디 더 이르신다.
“지금은, 풀꽃이 전하는 미소에 화답할 순간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또 한 번 가슴이 탁 트이는 순간이다.
채한기 위원 penshoot@beopbo.com
성파 스님은
통도사 주지 역임. 학교법인 영축학원 이사장, 한국전통문화연구원 이사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현재 통도사 서운암에 주석하고 있다. ‘옻칠 불화전’, ‘성파산수화전’, ‘천연염색전’, ‘금니사경전시회’ 등 다수 개인전을 통해 한국전통문화의 진면목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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