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중엽 8대 고이왕은 대외적으로는 한 군현과 싸워 영토를 넓혔고, 대내적으로는 16관등제를 시행하는 등 관리제도를 정립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은 정복전쟁에 앞장서 백제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남으로는 마한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여 백제에 복속시켰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해외로 눈을 돌려 중국의 요서, 산둥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七支刀)는 이 무렵 근초고왕이 일본의 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15대 침류왕은 중국에서 들여온 불교를 국교로 삼아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이룩하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5세기 무렵 고구려의 힘이 커지고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로 백제의 국력은 크게 꺾였다. 다급해진 백제는 신라와 손을 잡고 나제동맹을 맺었으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개로왕이 전사하고, 뒤를 이은 문주왕은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천도를 결심하게 된다.
웅진 시절 24대 동성왕과 25대 무령왕이 보여준 일련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백제는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26대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다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게 된다.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정치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하고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되찾고자 전쟁을 벌였지만, 안타깝게도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30대 무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익산으로 천도하고자 하였으나 지방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고,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집권 초기 귀족 세력을 억제함과 동시에 이웃 신라를 공격하는 등 백제 부흥을 위해 힘썼으나 660년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의 역사는 끝이 났다.
백제는 해외 문물 교류에 앞장섰으며 그로 인해 우아하고 세련된 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유교와 도교,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발전시켰으며 이웃나라 일본에 전달해 그들의 고대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반도의 한강 이남을 넘어 멀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동아시아 고대문화 교류에 힘썼던 백제. 역대 백제 왕의 계보를 통해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한 발 더 다가가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