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상인(象仁)이요 자(字)는 성구(聖求)요 성은 송씨(宋氏)인데, 임진왜란 때 동래(東萊)의 수신(守臣)으로 왜적에 항거하다 순절한 상현(象賢)이 그의 형이다.
공은 사람됨이 염직(廉直)하고 성품이 지극하였다.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 타서 올렸는가 하면 상을 당해 너무도 비통한 심경으로 몸을 상한 나머지 하마터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을 아는 이들이 모두 그 절행(節行)을 높이 평가하면서 정말 동래공(東萊公)의 아우답다고 이야기들을 하였다.
만력(萬曆) 신축년에 상사(上舍 성균관)의 선발에 뽑혔다. 그런데 때마침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 성 선생(成先生)이 간인(姦人)의 무함을 당하게 되자 공이 동지들을 창도하여 상소하면서 그 억울함을 변호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은 위대하게 여겼으나 정인(正人)을 헐뜯는 자들은 그 때문에 공을 곁눈질해 보기 시작하였다.
을사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처음에 성균관 학유가 되었다가 천거를 받아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는데,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밀쳐 내는 바람에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광해(光海) 때에 얽어서 꾸며 만든 옥사(獄事)가 일어나면서 공도 체포되어 불측(不測)한 지경에 떨어질 뻔하였는데, 어떤 이가 구해 준 덕택에 다행히 면하고 제주(濟州)에 유배된 뒤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생활을 10년 넘게 하였다.
계해년 봄에 이르러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신 뒤 성균관 직강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돌아와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간원 정언ㆍ헌납과 사헌부 지평과 예조 정랑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서(關西) 지방을 선유(宣諭)하라는 명을 받고 갔다가 일을 제대로 마무리짓고 돌아온 뒤 성균관 사예ㆍ사성과 사헌부 정령ㆍ집의와 홍문관 교리와 사도시ㆍ사복시의 정(正)을 차례로 거치고 나서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좌천되었다.
안동 고을은 호우(豪右)가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영남에서 첫손 꼽히는 지역이었는데, 공이 청렴하고 엄한 자세로 이끌어 나가면서 강퍅한 자들을 통렬하게 법으로 징계시키자 1년이 지나는 사이에 제대로 정사가 행해지고 조세(租稅)를 포흠(逋欠)하는 백성들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교활한 백성들이 다투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바람에 파직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정묘년에 호구(胡寇)가 이르자 상이 강도(江都)로 떠나면서 공에게 어사(御史)를 명하여 호서(湖西)에서 독운(督運)케 하였다.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집의에 임명되었는데, 특별히 비답을 내려 승진 발탁시킨 척리(戚里)에 대해 공이 매우 강력하게 논집(論執)하였다. 이 때문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체직되었다가 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외방에 나가게 되었다.
남원 경내에 극악한 도적들이 횡행하며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는데도 관리들은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부임하자마자 안동에 있을 때처럼 정치를 행하면서 방략(方略)을 세워 잡아 다스리자 도적들이 두려워하며 모두 숨을 죽였다. 어사가 이 사실을 보고하자 상이 가상하게 여겨 통정대부로 품계를 올려 주도록 명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무슨 일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게 되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상이 공의 공효(功效)를 생각하여 특별히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틈을 엿보는 자의 중상 모략에 걸린 나머지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로 누차 병조 참지와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신미면 겨울에 병이 위독해지자 말[馬]을 팔아서 장례를 치를 것과 석회(石灰)를 쓰지 말 것을 유명(遺命)으로 남기고 윤(閏) 11월 모일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때의 나이 63세였다. 그런데 집안이 빈한해 염습(斂襲)할 수도 없었으므로 친척과 고구(古舊)들이 봉수(賵禭 거마(車馬)와 의복을 상주에게 보내는 것)해 주기를 기다려 비로소 상례를 거행할 수 있었다.
송씨(宋氏)는 여산(礪山)의 망족(望族)으로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송례(松禮)가 그 시조(始祖)이다. 공의 증조 모(某)와 조부 모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휘 복흥(復興)은 사헌부 감찰로 병조참판을 증직 받았고, 모친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충의위(忠義衛) 승석(承碩)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명행(名行)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시하며 골육을 돈후하게 보살피는 등 대체로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다. 그리고 관아에 몸을 담고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강어(疆禦)를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안으로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과감하게 말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외방에 나가 수령과 방백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풍채가 엄경(嚴勁)하여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자연히 엄숙하게 된 나머지 명령이 행해지고 폐단이 금지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공은 성격이 굳세어 화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 치조(治朝)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걸핏하면 말살(抹摋)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곤 하였기 때문에 내직(內職)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직 두세 명의 군자만은 공과 뜻이 합치된 나머지 서로들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으면서 종신토록 금석(金石)과 같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였다.
공은 앞서 정씨(鄭氏)에게 장가들었다가 뒤에 신씨(申氏)에게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얻지 못하고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정씨 소생이다. 장녀는 박휴문(朴休文)에게 출가하여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이 순도(舜徒)요, 차녀는 이경선(李慶先)에게 출가하여 3남을 두었으니 흔(惞)과 협(恊)과 한()이다. 공은 아들을 두지 못했으므로 후사를 외손 협에게 부탁하였다. 공은 처음에 양주(楊州) 야목리(野木里)에 안장되었다가 임신년 12월에 이르러 양근군(楊根郡 : 경기도 양평 지역의 옛 지명) 서쪽 정배촌(鼎背村) 곤향(坤向)의 언덕으로 옮겨져 정 부인과 합장되었다.
공의 친구인 조공 정호(趙公廷虎)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구(聖求)의 묘소에 4번이나 해가 바뀌어 풀이 우거졌는데도 지금껏 이렇다 할 묘표 하나 없으니, 백세가 지나고 나면 어떤 사람이 묻혀 있는 곳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마련한 뒤 사위 이경선을 통해 나에게 명(銘)을 부탁해 왔다. 내가 나이로 보면 감히 공을 견수(肩隨 다섯 살 연장자와 동행할 때 조금 뒤에서 걸어가는 것)하지 못할 처지이지만 일찍이 공으로부터 망년(忘年)의 대우를 받았으니, 오늘날 이 일에 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①염결(廉潔)하다 못해 상하게 할 위험도 / 廉或近劌
그래도 한 세상 경각심 일으켰고 / 而可勵世
②곧으면서도 들추어내진 않으면서 / 直不爲訐
③높다랗게 솟은 뿔 분질러 버렸도다 / 嶽嶽是折
차로 깔아뭉갠다면 상하게 할 순 있겠지만 / 轢之可毁
굽히려 한다 해서 꺾일 인물 아니었지 / 撓之不可骫
정배촌 이 언덕 / 鼎背之岡
비석 새겨 세우나니 / 琢石鏤章
오는 세상 영원토록 / 尙令來世
성구씨 묘역임을 알게 함이라 / 知爲聖求甫之藏
① 염결(廉潔)하다 …… 위험 :
《예기(禮記)》 빙의(聘義)와 《공자가어(孔子家語)》 문옥(問玉)에 “염결하게 하되 상하게는 하지 않는 것이 의이다.[廉而不劌]”라고 하였다.
② 곧으면서도 …… 않으면서 :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남의 사생활을 들추어내면서 곧은 체하는 자를 미워한다.[惡訐以爲直者]”라고 하였다.
③ 높다랗게 …… 분질러 버렸도다 :
강퍅한 자들을 여지없이 꺾어 제압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원제(元帝) 때 오록충종(五鹿充宗)이라는 자가 총애를 믿고서 양구역(梁丘易)을 잘 안다고 으스대었는데, 주운(朱雲)이 꼼짝 못하게 제압하자 유자(儒者)들이 “오록의 높다란 뿔, 주운이 분질렀네.[五鹿嶽嶽 朱雲折其角]”라고 하였다. 《漢書 卷67》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계곡선생집 제12권 / 묘갈(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