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월■화요일 밤에는 남성들의 새로운 귀가시계 역할을 하는 드라마 <야인시대>의 활약이 대단하다. 40%대를 넘어서는 시청률이라니 가히 전국민의 눈과 귀를 잡아두는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 '야인시대'라는 단어는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서도 수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각종 언론매체에 특집기사가 넘쳐나는 등 <야인시대> 신드롬의 열풍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전형적인 남성드라마 <야인시대>가 독주하고 있는 이 시간대에 타 채널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고독>의 행보는 독특하다. <야인시대>가 액션을 중시하는 남성적 드라마이자 역사물이라면 <고독>은 감정의 세밀한 부분들을 드러내는 여성적 드라마다. <고독>의 시청률은 <야인시대>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소수의 매니아 층들이 <고독> '본방(재방송이 아닌 본방송) 보기운동'까지 전개할 정도로 강한 지지와 애정을 밝히고 있다.
<야인시대>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역사적 인물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인물의 실제 삶의 궤적에 충실한 전기적 영화는 아니다. 주인공으로 설정된 김두한의 실제 측근들이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픽션의 부분이 많다.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시대를 제대로 다룬 역사물이라고 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일제시대, 암울했던 민족의 수난사가 깡패들의 세력다툼의 장, 더 나아가 멋진 사나이들의 시대로 둔갑하여 각 가정의 안방을 장악하는 현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일제 총독부 건물이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국립박물관의 이름으로 우뚝 서있었던 일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 총리 임명 청문회에서나 대선 후보 검증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친일파 관련 문제는 우리 역사가 일제시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며, 아직도 그 찌꺼기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일제시대가 낭만적 중절모와 호쾌한 발차기, 사나이들의 의리로 표현되는 것은 국민적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것인가.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가름이 중요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진실한 역사, 올바른 가치는 철저한 재미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김두한의 일대기가 새로운 버전으로 변신을 거듭할수록 역사적 고증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이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김두한과 조금도 닮지 않은 꽃미남 배우의 캐스팅과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은 '구마적'의 비중 늘이기 등은 별다른 문제제기도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사실과 진실은 재미를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 바야흐로 포스트모던의 세기인 것이다.
영웅과 악당이 대립하고 흥미진진한 한판 대결이 펼쳐진다. 왜,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깡패들의 세력다툼이었는지 일본세력에 저항한 민족적 저항이었는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악당을 물리치면 더 센 악당이 등장하고, 그 뒤에는 더욱 강력한 악당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단계를 올려가며 싸움하는 <스트리트 파이터>를 보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사실 드라마라기보다 게임에 가깝다. 거기에 '사나이들의 의리'와 깡패들의 그럴 듯한 '후까시', 사나이를 사모하는 어여쁜 여인들까지 갖추어지면 모자람이 없다. <야인시대>에는 서사도 묘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미지와 액션, 말초적 자극뿐이다. 드라마는 게임이나 청룡열차(혹은 바이킹)와 같은 장르로 성공적인 변신을 수행했다.
이러한 <야인시대>의 대대적 공세에 맥을 못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열성적인 팬들의 애정을 과시하는 <고독>은 어떤 드라마인가. 원래가 대개의 드라마는 사람의 관계와 그 갈등을 주요 소재로 하지만 <고독>은 그 감정표현의 극단을 보여주는 조금 독특한, 혹은 드라마의 극단에 서있는 드라마다. <고독>의 제작진 노희경■표민수 콤비의 드라마는 주로 애절한 사랑, 그리고 그 세밀하고 절절한 감정의 조각들을 풍부한 이미지와 아름다운 대사로 표현하기로 유명하다. 표■노 콤비의 이러한 장점들은 좀 더 수준 높은 드라마를 요구하는 시청자들의 요구와 맞물려 드라마 매니아 문화를 만들어냈다. <거짓말(98)>, <바보같은 사랑(2000)>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매니아 층을 처음으로 형성한 드라마로 인정되고 있다.
표■노 콤비의 드라마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이 표면적으로는 불륜에 가깝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 없는 미묘한 경계의 사랑을 다루었다면, <고독>또한 사회적 인식의 경계 사이에 걸린, 그러나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그 내용을 하고 있다. 40세의 미혼모와 25세 청년 사이의 사랑,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회적 관습과 선입관을 대입해본다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요즘은 연상연하 커플이 드물지 않지만 보통 한 두 살, 많아야 서너 살 차이 정도일 때 가능한 것이지 15살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제껏 남자가 15살 연상이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살이면 어떻고 40살이면 어떤가. 80살에 결혼한 피카소와 마지막 아내 자클린 코크는 무려 40살 차이였다. 사실 딸보다 어린 여성과 결혼한 남성의 이야기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을 정도로 흔하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데 여성의 나이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왜일까. <고독>은 이처럼 미처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를 건드리며 사회의 선입관과 편견을 건드린다.
여성이 나이가 15살이나 많다는 것은 그저 익숙하지 못한 문제라고 친다해도 <고독>이 제시하는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 조경민(이미숙)은 첫사랑에 실패한 후 혼자 아이를 기르는 미혼모다. 그녀가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한 회사의 이사 자리에까지 오른다는 설정은 조금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미혼모에 관한 기존의 인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경민이 민영우(류승범)의 계속된 구애에 마음이 움직일 무렵, 15년만에 갑자기 귀국한 첫사랑 강은석(홍요섭)이 딸의 양육권을 무기로 결혼을 요구한다. 딸의 존재도 몰랐던 남자가 양육권을 요구할 수 있다는 설정은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호주제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또한 절친한 친구로 지내다가 감정의 부침을 겪는 영우와 진영(서원)의 관계는 남녀간에 우정이 가능한가라는 오래된 문제를 다시 꺼낸다.
노■표 콤비의 드라마에는 항상 여자들간의 우정이 부각된다. 대개의 드라마에서 여성간의 관계란 남성을 둘러싼 질투와 반목으로 나타나지만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에서는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와 그 부인의 관계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여주인공 곁에는 그녀를 믿고 항상 지지해 주는 여자친구나 선배가 존재한다. 여성 사이의 우정이 남성들의 우정보다 더 중요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고독>에서도 경민의 곁에는 그녀의 친구이자 보호자인 둘도 없는 친구 명희가 있다. 영우를 사랑하는 진영은 경민의 직속 부하직원으로 그녀를 가장 존경한다. 여자들간의 우정, 여자 선후배 사이의 존경과 지도는 드라마에서 무척 생소한 것이다.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방영분만 두고 볼 때, <고독>은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에 비해 단점들이 많아 보인다. 전작들에서는 만남에서 사랑으로 발전되는 과정의 감정의 흔들림이 섬세하게 묘사되었지만 <고독>에서는 경민의 흔들림만 있을 뿐 영우는 경민을 처음 본 순간부터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한 눈에 반하고 프로포즈하고 흔들림 없이 구애하는 영우의 모습은 전작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경민과 영우, 진영, 명희, 재주(명희의 남편)가 모두 한 회사 '휴먼'에 근무하며, 경민의 첫사랑 은석은 제휴를 맺으려는 회사 '컴언'의 제휴 담당이라는 설정은 지나친 우연에 기반하고 있다. 경민과 영우가 우연히 제주도에서 만났다가 다시 우연히 한 회사의 직속 상관과 부하직원이 된다는 설정, 게다가 영우의 전임자는 진영이라는 내용은 현실성이 없다.
경민이 불치병 선고를 받는다는 설정 또한 기존 드라마에서 이미 질리도록 본 전개다. 경민의 불치병 내용이 드러나자 시청자들은 <고독>이 98년 MBC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사랑>의 표절이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하고 있다. <사랑>은 연상의 여자(김미숙)와 연하의 남자(장동건)의 사랑을 그리다가 시청률 저조로 인해 여주인공을 암으로 죽는 것으로 처리하고 그 자리에 젊고 예쁜 새 파트너(최지우)를 투입한 드라마다. 시청률로 인해 전체 내용을 뒤집은 엉터리 드라마로 전반적인 내용을 볼 때 <고독>이 이의 표절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설정에 유사점이 많다. 이는 <고독>의 내용이 그다지 참신하지 못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고독>의 남성판이라고 볼 수 있는 <푸른 안개>(표민수 연출)의 남자 주인공이 유부남이었던 데 반해 경민은 미혼모다. <푸른 안개>의 여주인공이 스물 둘의 어리고 예쁜, 아무리 보아도 딸 같은 모습이었다면 영우는 실력있는 전문직 엘리트이자 그다지 미남이라고 볼 수 없다. 윤리적으로 볼 때 <고독>의 도발 수준은 <푸른 안개>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푸른안개>의 남주인공이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찾는 것으로 결말이 난데 비해 <고독>의 영민은 불치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터부를 건드리는 드라마들이 꼭 죽음이나 화해로 타협하는 결말을 내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시간대에 경쟁하고 있는 <야인시대>, <고독>이 바라보는 세상, 각각의 틀로 포장해 제공하는 세상은 너무나 다르다. 드라마의 질이라는 것은 재미와 교훈, 완성도 등 여러 기준이 있으므로 딱 잘라 어느 것이 낫다고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아무 이유 없이 끝없는 폭력대결을 벌이는 게임'으로 묘사하는 드라마가 사람의 감정 세세한 부분들을 그려내는 드라마보다 압도적인 인기를 얻는 현실은 서글프다.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이들이 모두 중독된 듯이 보는 드라마가 <야인시대>라고 한다. 노스탤지어와 말초적 자극의 성공적 결합은 성인 남성과 어린이 시청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냈다. 진지하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텅 빈 이미지와 기표만이 부유하는 시대, 두 드라마를 보면서 포스트모던의 도래를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