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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우리는 교회를 여러 각도에서 정의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선봉 자였던 마틴 루터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또한 종교개혁 제 2세대인 요한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칼빈은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고 그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참된 교회에서 중요시 해야할 것은 바로 말씀과 성례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거기서 그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들을 수 있으며 성례전이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실행되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고, 그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을 알리기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벧전 2:5-9).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사이에는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배라 불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어왔다. 본 입문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예배에 대한 기본적인 점들에 대해서 기술하여 보고자 한다.
예배에 대한 정의
사전(事典)적인 의미
a. Worship
예배라는 말의 영어단어인 Worship은 원래 앵글로색스어의 weorthscipe, wyrthscipe (worth, weorth, wurth: 가치, 존경 + scipe: 어떤 상황 등을 유발시키다, 만들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것이 Worthship으로 되었다가 다시 Worship이란 단어로 변화되었다. 이 말의 단어적 의미는 "가치를 돌린다, 어떤 사람에게 가치 혹은 존경을 주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간혹 영국에서 여러 시장들이 연설할 때 사용하곤 하였다. 1549년부터 영국국교도의 결혼식에서 "나는 그대를 내 몸으로 존경(worship)합니?quot;라는 맹세를 했다. 이 경우에는 한 사람이 몸으로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가치를 높인다는 의미이다. 이런 맹세를 한국에서는 하지를 않고 있고, 생략되어지고 있다. 어째든 이 worship라는 단어의 기본 개념은 "가치를 드린다, 혹은 존경을 표한다"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린다는 것이다.
b. Gottesdienst
예배라는 말의 독일에 단어는 Gottesdienst인데 이 단어는 Gott와 Dienst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영어로 표현하려면 7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God's service and our service to God(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은혜적 봉사와,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봉사). 그러므로 이 단어는 우리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봉사한다, 드린다, 헌신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즉 이 단어는 예배의 다른 면인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응답, 곧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답변을 나타내고 있다. 곧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대한 인간의 헌신적인 대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의 의미
a."굴복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는 것
엎드린다, 따른다"는 뜻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복종해야할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는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머리를 숙여 경배했다"라든가 "엎드려 경배했다"라고 번역되어져 있다. 성서구절은 창 24:26, 출 4:31, 34:8, 역대하 29장 30절 등이다.
b. (에바드) "봉사, 섬긴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기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영어의 Service가 여가서 유래되었다. 이사야 19장 21절 등에서 이 단어는 나타나고 있다.
이상의 2가지 어휘에서 나타나는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寬@?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 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약에서의 의미
A. (고뉘페테오; kneel down) : 무릎을 꿇을 때나 완전히 부복하여 엎드렸을 때에 사용하는 말인데 겸손과 자기의 부족감과 존경과 복종과 숭배의 표현이다. 이 단어는 마태 17:17, 막 1:40, 10:17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B. (프로스퀴네인; worship of the idol, worship of polytheism) : 어원적인 의미는 우상의 형상에 절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행 7:43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에 나타나고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태 4:10)" 라는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낯선 구절이지만 요한계시록 5장 14절에서 24장로가 엎드려 경배했다는 구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 안에서 24회 정도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서 가장 보편적으로 헬라인들이 사용하였던 말이었다.
C. (라트레아; in religious usage Service of Worship of Gott) : 이 단어는 종교적으로 사용되어서 주로 신에 대한 예배숭배, 제사예배에 사용되었다. 원어적인 의미는 "삶, 일이나 보상, 일반적인 봉사"의 뜻인데 그 일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개념은 전혀 없고 노예의 일에 비하여 보다 포괄적인 뜻을 띠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만 그분만을 섬기라"고 유혹하는 사탄에게 최종적으로 선언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신시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에서 성직자들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하는 표현의 언어적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D. (레이투르기아) : 이 단어의 기원은 일(ergon)과 사람(laos)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식은 도시와 국가의 유익을 위한 공적인 행사였다. 그 원리는 세금을 지불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즉 국민은 세금을 내고 이에 대한 것으로서 국가는 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로마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일군(롬 13:6)"으로 말하고 그 스스로도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군(롬 15:16)"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단어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의미가 나뉘고 있다.
. 제의적이고 제사적인 봉사, 경배를 의미(Of ritual and cultic services). 누가복음 1장 23절에서는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되고 있다.
. 대제사장적인 직무수행(Of the high priest's service)에 관련되고 있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백성이나 국가에 대한 봉사와 관련하고 있다.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데 예배는 전체 회중의 일이요, 회중의 참여와 모인 회중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뜻이다.
E. (호모로기아; confession as an action) : 어원적으로는 행위로서의 고백의 의미하고 있다. 그 예가 고후 9장 13절(the subjection of your confession to the gospel: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에 나타나고 있다. 그 기본적인 뜻이 "똑같은 것을 말하거나 또는 어떤 말에 동의한다"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많이 쓰인 것은 죄의 고백이란 의미이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인정상태로 나아간다. 이때의 고백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고백의 의미가 있다. 그 외에 선포와 기도의 의미를 이 단어는 포함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회중 안에서 하건 세계를 향하여 하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상호관계-상동관계(양쪽 동등한 관계)"로도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다방면에서 하나님께 대한 숭배의 뜻으로 사용된 모든 용어 중 가장 포괄적이고 심각한 의미가 있다.
이상 성서에서 다루어진 예배에 관한 단어들의 공통점은 예배의 대상 앞에서 한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다 버리고 그 대상의 뜻을 따른다는 것과 그를 경외하고 그 앞에 섬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배의 역사
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참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종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예배의 개념은 신을 숭상하는 모든 형태와 관련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자가 있기 이전부터 분명히 예배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의 한 문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볼 수 있다. 이 문장은 창조에 대한 기사 중에서 신의 어머니(G ttermuter) Nammu가 그의 아들 Enki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너 잠자는 아들아, 너는 잠을 극복하였었는데... 그러나 네가 만들어내었던 신들을 사람들이 맨몸으로 도전하고 ..... 신이 할 일을 할 수 있는 이러 저러한 자들을 창조한다. 그래서 부담감을 내던져 버릴 수 있도록 한다." 이 문장에서 보면 신들을 위한 예전적인 행위를 위해서 어떤 인간들이 정하여진다는 것이다. 고대의 이런 한 예전적 행위들은 주로 희생(Opfer)제물을 동반한 제사형식이었던 것을 우리는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기독교예배에 관해서는 우리는 그 근원을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성서시대에서 시작하여 종교개혁시대까지의 예배의 역사적 측면을 간략히 다루어 보고자한다.
구약시대
구약에 나타나는 예배의 역사를 여러 시대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크게 족장시대와 율법시대 그리고 포로기 이후 시대로 나누어 약술하고자 한다.
족장시대의 예배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족장과 그의 가족과 계약을 맺으셨음을 구약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 예를 창세기 18장 19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가장 최초의 집단예배는 가족이나 부족의 대표 - 즉 가장이나 족장 -가 제사장 자격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초기의 예배 형태는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과 함께 제단을 쌓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신을 경험한 장소는 대개 돌이나 나무 또는 샘과 같은 자연물이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의 예배는 나무와 이삭이나 이스마엘의 예배는 우물이나 샘과, 그리고 야곱의 예배는 돌과 관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족장은 예언자, 제사(祭祀), 왕으로 불리었고, 이들이 공적인 예배에서 사회를 담당하였고 예배를 집행하였다. 죤 칼빈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어디든지 다녔다"라고 말하였듯이,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더불어 삶의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음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창 12장 7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 나타나신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의 원리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제단은 제단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자기를 찾으시는 자에게 오시고 예배 드리는 자 마음속에서, 그 자리에 임재 해 계시는 것이다.
이 족장시대의 예배에 있어서의 특징을 간략히 보면 먼저는 인간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고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그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들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창 15장 9-10절). 그리고 이 시대의 예배는 언제나 가족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율법시대의 예배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통해 예배가 지속되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의(cultus)와 도덕법(moral law)을 계시함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예배가 성전중심으로 그 모습을 자리잡게 되었다. 율법시대의 예배는 가족적 예배의 성격을 계속 지속하기는 하였으나 공적 예배의 장소는 성전을 중심하여 거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새대의 공적 예배의 특색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⑴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이외에 어느 곳에서도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⑵ 예배의 규정들이 세부적인 것까지 세칙화 되었다. 즉 성전을 시설하는 방법, 제사(祭司)의 예복, 희생제물의 종류와 방법 등이 자세하게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레위기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⑶ 율법시대의 예배는 대리적, 위탁적이었다. 족장시대는 누구나 제단을 쌓을 수가 있었으나 이 시대의 예배는 제사(祭司)와 특히 레위인들 만이 예배의식을 집행할 수가 있었다. 12세 이상의 남자는 연 3회 -무교절, 맥추절, 장막절(참고, 출 2장 14-17절)-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했었다.
⑷ 이 시대의 예배는 의식적(儀式的)이었다.
⑸ 제단과 기둥, 벽에 장식되어진 주제들과 또한 촛불과 진설병, 물두멍 및 놋바다 등을 통해서 예배는 가시적(可視的)이었으며 상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 시대의 예배는 음악, 축송, 춤, 기도, 행렬, 단순한 설교, 선조들에 대한 회상, 고백 등과 함께 이루어졌다.
포로기 이후시대의 예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던 예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예배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회당에 모여서 나라를 잃은 슬픔을 함께 하며 성전 예배를 대체한 '회당예배'를 갖게 되었다. 이 예배의 중심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었다. 이 말씀 전에 모두가 일어서서 지극한 경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예배에서는 회생 물을 제단에 바치는 의식이 점차 약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집전자의 점유물이 아니라 모든 예배 자들의 참여 속에 경청되어 이해를 가져오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이외에도 성전의 제사 대신에 새벽, 아침, 정오로 드리는 기도가 만연하게 되었고 가정까지도 예배 드리는 성서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전 444년 느헤미야의 인솔로 마지막으로 포로에서 귀환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하여 다시금 성정예배가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더불어 제사법전의 발견과 함께 예언의 전승과 제사예식을 새롭게 다듬고 거룩한 공동체의 새출발을 주도해 나갔다. 이에 따라 포로지에서 행하여지던 회당예배의 새로운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당예배는 폐지가 된 것이 아니라 성전 예배와 더불어 함께 존속하게 되었다.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예배가 집례 되었고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행 15장 21절). 이 회당에서 진행된 안식일 예배의 순서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쉐마 낭독 ⑵ 기도 ⑶ 율법의 낭독 ⑷ 예언서의 낭독 ⑸ 강해와 권면 ⑹ 제사(祭司)가 있을 때는 축도, 축도 후에는 아멘.
정장복교수는 구약의 예배를 다룸에 있어서 위의 사항들 외에 시편에의 강조를 하고 있다. "시편은 집단적인 예배에서 부른 것보다도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역경을 그분께 직접 호소한 것이 많은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과 운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감사하고 호소하는 깊은 신앙의 자세를 볼 수 있으며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찬송을 찾을 수 있다." 계속해서 그는 시편을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찬송과 기도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시편 사용을 신중히 재고해야할 시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약시대
예수의 사역과 예배
예수 당시의 시대에는 회당예배와 동시에 성전예배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신약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는 그의 지상생애 동안에 자신의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만들어 사용하시겠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다. 예수의 관심은 어떤 특정한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데 있어 심령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회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백성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께서 회당예배라든가 성전예배를 부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또한 회당에도 들르셔서 예배에 참예하셨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예수는 성전 예배를 부패시키는 무리들을 향해 노하셨고 채찍을 드신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 절기를 지내시기 위해서 성전에 들리셨던 일들과 그의 생애의 절정을 의미하는 수난주간을 대부분 성전에서 보내신 기록 등은 예수께서 성전예배를 얼마나 중요시하였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는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완성 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주제였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요약된 계명으로 예배중심의 종교성과 실천 중심의 윤리성을 계속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와 관련되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에 함께 하셨던 식탁에서 시작되는 성찬예전과 세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의 성례전은 구약의 성전예배나 회당예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 의식이다. 이 예전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변함없는 예전이 되었고 예배의 구심점으로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사도시대와 그 이후의 예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절과 공포에 휩싸여있던 사도들은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금 확고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 후 이들은 예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중심 하여서 예배 속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또한 이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교회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계승되어 온 성전과 회당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에 참석을 예수께서 허셨듯이 행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의 행위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성전을 중심 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와 기도를 하면서 성전을 교회와 예배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외에 사도행전과 서신서 계시록을 통해서 볼 때에 사도시대의 예배를 추론할 수 있는데 윌리암 맥스웰(William D. Maxwell)은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한다. 첫째로 초대교인들은 한동안 회당이나 성전예배에 참석을 했으며 둘째로 이들은 모임을 자주 가지면서 애찬이라 불리는 공동식사를 하였다. 셋째로 그들은 이식사의 마지막부분에서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부탁했던 명령을 받아 성찬예전을 행하였고, 넷째로 이 예전이 끝날 무렵에는 예언이나 방언을 비롯한 특별은사를 나타냈으나 상당한 조심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성전예배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회당예배 역시 로마의 박해로 인해 지하의 교회로 숨어들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시기가 있게되었다. 이러므로 이 당시의 예배내용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남아있는 몇 개의 자료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예배 내용을 우리들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첫째로, 이 당시의 예배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찬양으로 먼저 예배 자들의 마음을 주님께 드렸다.
둘째로,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한 강해가 있었다.
셋째로, 기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감사, 간구, 타인을 위한 기도, 축도 등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원하는 기도를 드렸고 아멘으로 응답하였다.
넷째로, 예물의 봉헌으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을 하였고, 이것은 주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도들의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섯째로, 이들은 죄인임을 표현하는 고백과 신앙고백을 개인적 또는 공동적으로 행하였고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찬예전과 세례를 행함으로 예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재다짐과 은총의 경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서부터 서서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의 형태가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이런 가운데 예배를 인도하는 집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세교회의 예배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바로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일이다. 이 기독교 공인은 그간 각 개인 가정이나 지하교회(Catacombs)에 숨어 분산되어 모이던 기독교인들을 공개적으로 한곳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전하게 됨으로서 모여드는 성도들을 수용하기 위한 교회의 건물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가 당시의 중요도시인 예루살렘, 베들레헴,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의 집전을 위해서 예전이 점점 더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성직자의 수와 그 위치와 권위가 점점 더 커졌다.
5세기부터 종교개혁까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사항은 미사의 발전이다. 이 미사는 일정한 시간에 드려지는 예배의 형식에 따라 많은 예전들이 첨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미사를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 개신교의 성찬예전이라 할 수 있겠으나 내용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 개신교에서는 성찬예전에 대한 그 중요성이 현대에 많이 강조되고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해서 카톨릭의 예배에서 미사는 매 예배 때마다 행하여지고 있다. 곧 카톨릭에 있어서는 예배가 곧 미사 그자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예배보러갑시다' 혹은 '예배(당)에 갑시다'등의 표현을 아직도 많이 사용하지만 카톨릭 신자들은 '성당에 갑시다'라는 표현보다는 '미사에 참예하십시다'를 많이 하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이 미사예전에는 수많은 성경봉독, 교독과 교창과 더불어 그 출처도 불분명한 많은 기도문이 포함되었고 찬송 및 성자들을 기념하는 축제가 포함되었다. 또한 우리가 이 시대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미수 횟수의 엄청난 증가이다. 마치 미사를 얼마나 많이 행하여졌는가 하는 횟수가 경건의 깊이를 재는 기준처럼 되어서, 가능한 한 최대의 미사 집례가 요구되었다. 심지어는 여행을 떠나는 자들이 여행의 안전과 여행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사제들에게 미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많은 수의 미사를 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만들어졌다. 시편, 교송성가, 찬송가, 성서, 특별 기도문책, 행렬성가, 그리고 집례자를 위해서 집례서, 서품정식서, 성무 안내서 등의 많은 책들이 만들어졌다.
6세기가 지나가면서 다른 지역에서 조금씩 달리 거행되던 예전은 점차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미사예전이 서방예배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Robert Baker는 이 발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이들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피 없는 제사'로서 간주되는 미사의 집례에 다시 집중되었다. 포도주는 아직 일반 성도에게는 허락되지를 않았다. ② 중보적인 성도의 제도가 폭넓게 발전되었다. ③ 성모마리아의 숭배 사상이 널리 퍼졌다. ④ 성자의 유물(遺物)은 종교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⑤ 구체적으로 성례전의 수는 고정되지 않고 있었다. ⑥ 성례전과 외적행위에 대한 강조로 공적사상(功績思想)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런 예배의 발전은 16세기에 와서는 로마에서 행하여지는 미사예전이 일정 불변하게 되었고, 화체설이 확정이 되었다. 이 중세시대의 예배에서 지적될 수 있는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예배에서 사용되는 언어일 것이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 회중들이 듣는 언어는 자신들이 사는 곳의 언어가 아닌 라틴어이었다. 이러하기에 신자들은 예배에 직접 참여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구경꾼으로밖에는 여기지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더불어 종교개혁에의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면죄부'의 판매이었다. 이러므로 서서히 종교개혁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중세기 예배예전의 발전은 흔히 종교와 예술의 투쟁이라고 평하여지고 있다. 영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에 예속되어졌다는 의미이다. 권위의 자리로서 보여지는 교회와 그 건물, 예배의 일정한 시간 및 규격화된 예배의 형태, 그리고 점차적으로 외형적인 의식을 높이려는 경향이 강조되었다.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적인 형식에는 사제들의 화려한 제복(祭服), 여러 가지 사용되는 기구들 -예를 들면 종, 향, 십자가 등- 또한 집례 하는 사제들의 상징적인 행동, 자세의 빈번한 변동 등이 포함되었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일반적으로 우리는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 독일에 있는 도시인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교회 문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 유명한 '95개조 논제(95 Thesen)'를 부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서 개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 종교개혁은 단순히 예전(Liturgy)에 대한 불만과 그 시정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적인 교황이 자리하여서 믿음보다는 만들어진 제도 속에서 인간의 공적(功績)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비성서적(非聖書的)인 사항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세교회의 예배예전에 대한 시정의 필요성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간결하게 위에서 중세시대의 서방교회 예배의 단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었다. 당시의 예배, 특히 미사는 하나의 극적 인 구경거리로 변모하였고, 그 절정을 영성체 시간 자체에 두기보다는 화체의 신비적인 사건에 두었고, 거양성체에 있어서도 미신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반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라틴어로 의식이 진행이 되었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예전, 그리고 수준 높은 음악 등은 일반 성도들이 예배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던 것이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성찬이 일년 1회에 한에 참여하게 함으로서 미사 자체가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 선택되어진 사제직을 위한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설교는 그 위치를 상실하였고 많은 수의 사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들의 지적수준이 이를 따라주지 못함으로서 일부 교구의 사제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상당히 그 수준이 부족하였다. 성경봉독 부분이 정작은 성자들의 생활 담이나 전설로 대신하였고, 성경도 물론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예배예전에 있어서의 개혁 또한 이 시기에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예배의 개혁에 기여한 모든 개혁자들과 그들의 예배에 관해서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는 커다란 3大 흐름인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예배에 관한 입장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루터와 그의 계열에서 행한 개혁은 가장 보수적이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예배예전을 전면 부정하거나 과격한 변화를 원한 것은 아니었고, 그는 부분적으로 수정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카톨릭의 예배예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루터의 예배에 있어서의 공헌은 자국어로 미사예전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예배의 집례시 라틴어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카톨릭과의 차이점이 있는 것은 성만찬에서 화체설을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터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구들, 예를 들면 예배시 사용하는 등불과 향 등을 계속 사용함으로서 그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해석도 있기는 하나, 그가 회중에게 예배를 더욱 알기 쉽게 하여주었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여야 할 점이다.
루터가 예배에 크게 공헌한 부분은 바로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며 나로 하여금 설교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였고 깨우쳐 주었다. ...음악은 마귀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며, 분노와 불결과 거만 등 모든 것을 물리친다. 나는 신학 다음 음악을 손꼽으며 최고의 존경을 돌린다. 비록 내가 가진 음악에 대한 상식이 보잘 것 없이 적은 것이기는 하나 나는 세상의 무엇하고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이같은 표현은 음악에 대한 루터의 열정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음악이 하나님 말씀 다음 갈 수 있는 귀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슬픈 자를 즐겁게 하고 낙망한자를 일으키며, 흥분한자를 조절시키는 데 음악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음악교수를 지냈던 John K. Paine(페인)은 "우리는 현대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자유에 있어서만 종교개혁이 가져온 결실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예술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고상한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헨델은 그가 퍽 많은 것을 루터의 작곡을 통해서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작사 작곡한 찬송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란 찬송일 것이다. 암흑과 마귀의 세력을 힘차게 물리치는 이 종교개혁의 군가는 종교와 자유를 침해하는 불의의 원수들의 세력이 아직도 우는 사자처럼 몰려오는 해인 1527년 여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시편 46편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에 근거하여 그 가운데 나타난 사상을 반영시킨 이 찬양은 현재 많은 교파들의 찬송가 가운데 수록되어 있으며 170여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찬송은 그 가사의 곡에 있어서 루터의 인격과 성품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自身)의 말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 신뢰, 죽음과 사탄을 공격하여 무찌르는 그 용기, 그리스도의 진리의 최종 승리에 대한 불변의 신뢰 등이 이 찬송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바로 루터 자신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마틴 루터는 기존의 예배형식에서 찬송에 관한 부분도 수정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세 부분에 대하여 그러하였다. 즉 사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는 성가, 성가대의 찬양, 회중이 부르는 찬송 부분이다. 루터가 이 모든 것을 다 수정하려고 착수하였다. 첫 번째인 사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는 부분으로서 여기에는 서신과 복음도 포함되었다. 루터가 성서의 단어 하나 하나를 분명히 들리게 하고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그처럼 열성적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왜 음악을 완전히 중단시키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만을 남겨두지 않았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기에 관해서는 건축학적인 구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건물의 구조는 입으로 말하는 말보다 노래하는 말에 더 어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함으로서 그 의미를 전달하려하였다. 한 음절에는 오직 하나의 음만을 사용해야 했으며 오르간 반주로 말소리가 흐려져서는 안 되었다. 예배 전체를 통해서 오르간은 오로지 화성 음으로만 사용되었다. 서신과 복음서에 대한 그레고리안 성가는 단조 음이었으며 끝에 가서만 음성이 낮아졌다. 루터는 복음서 기자의 설명, 그리스도의 말씀, 사도들의 말에 각각 다른 음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의 제안을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집례자에 따라서 자신의 전례음역에 맞는 악보를 발견하고 그것을 채택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에 따라 음계도 달라져야함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더께서는 명랑하셨기에 복음서 낭송에서는 제 6음계를 사용하여야 하고, 바울은 좀 우울한 사람이었기에 제 8음계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둘째 부분인 성가대의 합창부분에 루터는 네덜란드의 대위법적인 종교음악을 도입하였다. 이를 위해서 합창단이 필하게 되었고, 루터는 잘 훈련받은 합창대에 관한 강조는 아주 억척스러웠다. 게오르그 공작의 선창자이자 라이프찌히 논쟁 때 12파트로 부른 노래의 지휘자인 게오르그 라우를 Wittenberg로 데려와 궁중합창단의 선창자와 교회의 지휘자로 일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합창단이 여러 도시에서 생겨났으며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맨 마지막의 그리고 가장 큰 개혁은 회중의 찬송이었다. 중세의 예배는 거의 전부가 집례자와 성가대에게 국한되어있었다. 회중이 자국어로 찬송, 응답하는 부분은 참으로 적었다. 루터는 회중 찬송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이 부분을 발전 시켜놓았다. 예배의식의 부분 부분이 찬송으로 대치되었다.
이에 비해 쯔빙글리는 예배의 개혁에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그는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를 않았다. 또한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횟수를 일년에 4회로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후대에는 마치 장로교의 전통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그가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예배를 과격하게 개혁한 것은 바로 음악에 있다. 그는 공중 예배에서 모든 음악을 철폐하였고 오르간 사용을 금지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것이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에 서있는 개혁자가 바로 칼빈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는 예배예전의 개혁에는 루터보다는 과감하였으나 쯔빙글리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특히 성찬예전이 자주 행하여져야함을 강조하였고, 회중의 시편 찬송이 교회 공중예배의 일부가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찬송의 훈련에 그는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의 이러한 예배에 대한 개혁은 특히 마틴 부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부처는 예배의 용어를 크게 바꾸었다. 예를 들면 '미사'대신에 '주님의 만찬', 그리고 '사제(司祭)' 대신에 '교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제단(Altar)' 대신에 '상(床)'이란 용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영향아래서 칼빈은 거룩함과 질서를 보존하였고, 조직화된 예배 예전 및 쯔빙글리의 극단적인 예배 형태에 결여되어 있는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장식에 불필요한 장식 골동품을 매우 싫어하였기에, 단순성은 바로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즉 칼빈이 예배에 있어서 원했던 것은 중세 예배예전에 포함되어있는 많은 예식주의(Ceremonialism)를 배격하는 데 있었다.
예배의 요소들
우리는 예배에서 지켜져야 할 그 내용들에 관해서는 예배를 전공하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다. 그 이유는 속해있는 교단과 이와 아울러 신학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예배 속에 가지고 있는 요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즉 오르간 혹은 피아노 전주, 예배의 부름, 기원, 성가대의 찬양과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 기도, 성경말씀 봉독, 설교, 봉헌, 성례전, 축복기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모든 것들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초대교회에서부터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교회에서는 그 의미를 크게 가지고 있지 못하는 성만찬에 대한 설명을 중점적으로 하고자 한다.
성만찬
성만찬 -혹은 주의 만찬- 은 초대교회 교인의 삶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억(Erinnerung)으로의 떡과 잔의 먹고 마심은 영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의 실재의 상황적인 再임재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성만찬은 세례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영속되도록 교회에 주신 성례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만찬은 초대 교회로부터 예배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말씀의 예전은 다락방 예전이라고 부르는 성만찬 예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이 성만찬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성만찬이 자주 거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성만찬은 한국의 장로교-소위 칼빈을 따른다고 하는-에서 그 의미를 크게 잃어버렸고 등한시되어져 왔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는 성만찬의 성서적 고찰과 종교개혁 시대의 성만찬 이해를 간략히 기술하고자한다.
유월절?
성만찬에 대한 성서적 고찰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시되고 연구되어 오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이 성례전(Sakrament)이 유월절 식사이었느냐 아니었느냐이다.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식사는 바로 유월절 식사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성서기술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식사를 성만찬의 근원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 왔었다. 성만찬이 유월절식사이었음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가 Joachim Jeremias이다. 그는 저서 Die Abendmahlsworte Jesu 제1장에서 이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J. Jeremias는 유월절 전통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서 주장하고 있다.
a. 예수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관습에 따라 사람들이 가득한 예루살렘 시내에서 행하셨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예수는 베다니로 다시 가시지를 않으셨다.
b. 공관 복음(마가 14:17, 14:30, 마태 26:20)과 요한 복음(요한 13:30) 그리고 바울의 기사(고전 11:23)에 따르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밤에 거행되었다. 이것은 보통의 식사 습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예외로 유월절 식사는 밤에 행하여졌다.
c. 마가 14:26과 마태 26:30에 나타나는 찬양 Passahallel의 후반부로서 식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Jeremias는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두 개의 잔을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4개의 잔 중 2개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만찬의 비교연구를 통하여서 새로운 이론들이 대두하였다. 이중의 하나가 키두시식사라 불리는 유대인들이 매 안식일이나 축제날에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것이다. 이외에도 Dome G. Dix, H. Lietzmann K. G. Goetz 등은 유대교의 우정의 식사였던 Habhuramahl로 보고 있으며 K. G. Kuhn 등은 엣센 공동체에서 해하여지던 식사로 보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 견해로서 성만찬의 기원은 유월절 식사이고 예수께서 최후로 지켰으며 여기서 새로운 성만찬으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공관 복음 기자와 요한 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안식일 전날에 즉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공관 복음 기자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목요일 저녁에 즉 유월절 식사에 행하셨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 유월절 식사는 Nisan월 14일 저녁부터 15일까지 행하여졌다. 이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축제의 첫날인 15일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서(요한 18:28)" 관청에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곧 요한 복음에 의하면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요한 복음 기자의 계산법을 따르게 되면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Nisan월 13일에 거행되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잔치와는 관계가 먼 것이 되게 된다. 이러한 날짜의 상이함을 조정하기 위하여서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다. 아래에서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a. D. Chwolson: 예수께서 죽던 해의 Nisan월 15일은 안식일이었다. 해서 유월절 양을 잡는 것과 안식일과의 겹침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해에는 유월절 양을 목요일인 13일에 잡아야 만했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유월절 잔치는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날에 행해지게 되었다. Chwolson의 주장에 따르면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공관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13일 밤부터 14일까지 유월절 잔치를 행하였으며 이에 반해서 사두개인들은 요한 복음의 기록대로 전통적인 날짜인 14일 밤부터 15일까지 행하였다는 것이다.
b. P. Billerbeck: 당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이에 유월절 잔치의 날짜에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의 두 계층 사이에서는 Nisan월 시작에서부터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 이 결과로서 유월절이 서로 다른 날에 시작되었다는 것.
c. A. Jaubert: 서로 상이한 달력이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달력에 따라서 Nisan 14일이 서로 다르게 계산되어졌다는 것.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쿰란-에센'의 달력을 사용하였으며 이에 반해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기록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던 공식의 달력인 'Lunisola Kalender'의 날짜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주장들은 어떠한 결론이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 논의되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어느 한 견해로 확정되어져야만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의 전통에서 예수의 성만찬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 되어질 것이다. 이상으로 성만찬에 관한 성서 해석적인 문제는 마치고 다음에서는 성만찬 제정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제정사
고전 11:23-26
주의 만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전 11:23-26에 나타나는 바울의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3절에서 바울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문구를 해석하는 데에 논쟁이 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한 것과 같은 신비한 계시인지, 아니면 바울이 하나의 전통 -제자들 사이에서 구두로 전해 오는- 을 알고 있었는지. 이러한 논쟁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짧은 바울의 표현은 그 상황의 실존적 성격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식사는 보통 식사와는 다른 것이며 예수는 이 식사 후 잡히셔서 십자가로 향하게 되며 이것은 죄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정한 양이신 예수께서 모두를 위해서 단 한 번 희생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미 고전 5:7에서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의 양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신령한 음식과 음료가 얼마나 속된 음식 및 음료와 혼동 될 수 있는 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의 떡과 잔 (27절)"이라는 두드러진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음식과 음료는 오직 주님 자신이 그에 효력을 끼치기 때문에 신령한 성격을 띄우고 있고 그래서 주님의 몸과 피와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기 현시를 계산에 두지 아니하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축하하고 있지 않는 예배 자는 누구나 성만찬에 적절하지 못하게 처신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가서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짖는다. 이것이 바울이 그의 기록에서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는 바울의 기록은 "이리하여 지금 높이 우신 그분은 그의 죽음에서 그가 단번에 우리에게 주셨던 것을 주님의 만찬에서 계속하여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잔은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에게 계획되어진 신의 뜻이었으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희생의 잔"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만찬은 희생적인 식사, 주님의 희생적인 삶을 부어 주는 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의 희생적 제공, 즉 세상에서 그의 몸이었던 것에 직접적으로 향하는 제공 안으로의 참여를 포함하고 있다. 이리하여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희생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책임적 존재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대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Wiederholungsbefehl이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다. 곧 성만찬에 거행될 때마다 예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되셨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한 회상(R ckerinnerung)의 의미가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의 Vergegenw rtigung을 의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14:22-24)와 마태(26:26-28)
마태와 마가의 주의 만찬 제정 기사는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학자들은 마가의 기술을 마태가 따랐을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둘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마태 26:28에 추가된 "죄의 용서"부분이다.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 나타나는 단어인 "언약"은 출 24:8에 근거하고 있다. 마가와 마태에 나타나는 성만찬 제정에 관한 모든 기사는 예수가 그의 언약과 관련된 그 자신의 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언약은 주되심에 관련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 자신과 그의 백성 사이에 세우신 것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또한 언약의 피는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마가와 마태에서 발견되는 대명사 "나"에 대한 강조는 예수의 새 언약과 옛 계약 사이의 비교에 관련되는 것이다. 즉 마가와 마태는 예수의 말씀이 새 언약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잘못 이해 되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곧 잔 그 자체도 또는 물질적인 피도 이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힘이 없으며, 십자가도 주님의 만찬 그 어느 것도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존재 형태 또는 새로운 하늘의 뜻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마술이나 마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의 희생적인 삶과 연결시켜야만 한다. 즉 마가 14:24에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이라는 구절은 희생적인 의미를 가진 언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주는 삶(Selbst-Hingabe)에 기인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란 단지 몇 명만이 아닌 모든 인간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마가 14:25에 나타나는 "포도의 열매"에 관한 언급은 세상의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식사를 예견한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현재적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이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라는 사실이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로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써 (히 9:12) 새로운 완전한 계약 (히 9:26)을 맺은 것이다. 잔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흘릴 예수 자신의 피였다. 이 피는 새로운 언약을 맺는 희생의 피였던 것이다.
누가 22:15-20
누가의 성만찬 제정 기사는 일반적으로 15-18절과 19-20절 두 부분이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누가는 독특하게 두 개의 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빵 전의 잔과 빵 후의 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가 성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잔은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네 개의 잔 중 두 개를 언급하는 것이다. 19-20절에서 "너희를 위해 주는"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를 회상(Anamnesis)하면서 성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이며, 그리고 잔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예수의 피안에서 이루어진 새 언약과 관련된다. 이 누가의 기사에서 바울과 같이 회상으로서의 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만찬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메시아적 축제로 보고 있다.
종교 개혁시대의 성만찬이해
예수에서 시작된 성만찬은 초대 교회를 지나 종교개혁 전까지는 그리 큰 신학적 문제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발단으로 해서 로마 카톨릭과 개혁자와의 사이에서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만찬의 현장에 예수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느냐"이었다.
로마 카톨릭교회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집례자인 사제가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Konsekration)을 하는 순간에 이 빵과 포도주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해석 - 즉 화체설(Transsubstantiationslehre) - 이다. 로마교회는 이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믿게 되었고 변할수 없는 교리로서 오랫동안 지속시켜 왔기에 지금도 동.서방교회에 정착되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받으신 육체가 실제적으로 그 현장의 Elemente(빵과 포도주) 속에서 변화하여 성도에게 전달됨을 강조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은 예배나 기도회, 그리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에서 분리시켰다. 이 화체설은 1215년 이노센스(Innozenz) 3세 교황 밑에서 행해진 공의회에서 확고한 교리로 확정되었다. 이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사제와 희생물이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하며, 그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제단의 성례 안에 실제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 능력에 의해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 변화한다." 이에 덧붙여서 공의회는 정당하게 서품 된 사제만이 성체 성사를 축성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당시에 신자의 영성체가 너무나도 드물어졌기 때문에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곧 부활절 때 성체 성사를 받지 않으면 안됨을 교회 법으로 정하였다.
이 화체설은 1551넌 10월 11일 트렌트 공의회 13회기의 제 4장에서 다시 한번 명확히 공포되었다: "제4장 실체 변화에 대하여; 우리의 속죄주 그리스도는 빵의 형태 아래 봉헌된 것을 참으로 그의 몸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언제나 확신되어 온 것을 이제 이 성스런 공의회는 새로이 선언한다. 즉 빵과 포도주의 축성에 의하여 빵의 실체 전부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화하고 또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고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이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부른다." 트렌트 공의회가 이상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가르침을 곡해하는 해석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것은 루터가 명백히 실체변화라는 가르침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가 이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루터의 성만찬 이해
일반적으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성찬이 희생 제사(Opfer)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몹시 반대하였다.
루터는 1520년에 저술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을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성만찬에 관해서 로마 교회가 세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신자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이다. 루터는 고전 11장 25절의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것은 일반 신도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으로 포도주를 일반 신도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성례전을 변질시키는 것이고 다 함께 참여함으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므로 잔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둘째는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의 과오를 지적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마술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루터는 An den christlichen Adel에서 화체설은 신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설(Meinung)일 뿐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카톨릭 교회가 성만찬을 희생 제사로 해석함을 지적한다. 루터는 성만찬이 희생 제사(Opfer)도 인간이 행하는 선업(gutes Werk)도 아니고 만찬이며, 그리스도가 이 만찬을 제정한 것은 믿는 자를 위로하는 신앙을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기 위하여서라도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성찬에 현존(Realpr senz)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을 카톨릭과 같이 문자대로 믿었으나 카톨릭과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성찬 시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서 (in, mit und unter dem Brot und Wein)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소유한?quot;. 이런 루터의 표현은 보통 Konsubstantiaionslehre라 불리지만 루터 자신은 이 용어를 사용치를 않고 있다. 루터는 성만찬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대 요리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빵과 포도주에서 구별시켜 주는 것은 말씀이고, 말씀이 외적인 요소(Elemente)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례전이 된다. 말씀으로 인하여 그 요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하실 수도 없고 속이실 수도 없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무소부재(Ubiquit t)를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몸이 이 영광을 나눠 가짐으로 하ご纛?무소부재 역시 나눠 가지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고 통치하시는 곳에 그리스도도 역시 육체적으로 임재 하신 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그의 기독론이 뒷받침되어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존재하는 곳에는 육적으로도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론은 빵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찬은 절대적 효과가 있어서, 악한 자들이 성찬을 받거나 집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나 신앙 없이 받아진 그리스도의 몸은 독약이며 죽음이다라고 주장되고 있다.
루터는 성찬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이것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새 사람을 강화시키고 영양을 주며, 우리들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강화시켜 주는 양식과 자양물"이라고 하였고, 죽음에 대항하는 힘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능력과 유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
쯔빙글리의 성만찬론은 기념설 또는 상징설로 불려진다. 곧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에서 드려진 몸과 피의 표징들이다. 이 표징들은 몸과 피가 이렇게 드려진다는 것을 상징하며, 그리고 우리에게 구속사역을 회상시켜준다"는 것이다. 그의 성찬론의 중점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 구속의 감사, 영적 연합에 있다.
쯔빙글리는 1523년의 저서 67개 논조에 대한 해설에서 "미사는 희생제사가 될 수가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되새기는 회상(Wiederged chtnis)이며 구속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서 그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고 빵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는 견지하였으나,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부인하고, 믿음 안에서 영적 참여를 가르쳤다.
그가 이같이 주장하는 배경에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에서 "est(ist)"라는 단어를 "significat(bedeutet)"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쯔빙글리는 성서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일곱 염소는 칠 년의 풍년이다" 또는 요한 복음의 "나는 포도나무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등의 표현에서의 "이다"는 "의미한다"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표상은 성찬에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지리적 관념을 가지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지상의 성찬의 자리에 동시에 계실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에 그의 신성으로만 편재하시며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에게 있어서는 세례가 내적인 거듭남의 표시와 상징이듯이 성찬도 역시 한 표시이며 상징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는 성만찬을 그리스도와 그리고 믿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공동 식사(Gemeinschaftmahl)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성찬에 있어서 참여자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성찬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임재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Eucharistie)를" 행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재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das Essen des Glaubens", "geistige Speis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진정으로 임재 한다고 믿는 바 그러한 임재 없이는 영적 교제(Kommunion)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조악하고 육체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경건한 마음에 의한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 먹히운다고 믿는다."
쯔빙글리는 1525년 4월에 Z rich에서 미사를 폐지하고 대신 성찬예배로 대치하였다. 이 예식은 청년들에게는 목요일에, 중년층은 24일에 노년들에게는 부활절 주일에 행하였는데, 이때 누룩이 섞이지 않은 빵과 포도주를 나무그릇에 담아 행하였다. 그는 1년에 네 차례-부활절, 오순절, 가을에 한 번, 크리스마스-성찬식을 행하도록 제안하였다.
Marburg회의
루터 파와 쯔빙글리 파의 양쪽의 신학적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서 필립의 주선으로 자신의 성에서 1529년 10월 1일에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5개 조문에서 14항까지는 커다란 문제없이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15항인 성만찬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이 회답은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표현하기를 "우리는 서로 다른 영을 가졌다"고 하였다.
칼빈의 성만찬 이해와 실제
종교개혁의 제 2세대인 칼빈의 성찬론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의 비성서적인 성찬론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였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찬 논쟁을 거치면서 양자를 조화하려는 마틴 부처의 영향을 받아서 소위 "영적 임재설"로 정착하게 되었다.
성례전
먼저 칼빈은 성례전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례는 약속에 대한 인장이며, 언약의 표징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는 달리 성례전에 참여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설교를 통해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설교를 들을 때 비로소 보이는 표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고 복음이 선행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성례전에는 반드시 성령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성례전이 정말로 자체의 직책을 수행하려면 내적 선생인 성령이 와서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며, 이 성례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 없는 성례전은 아무리 거창하게 거행되어도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성만찬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며,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하는 표징"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빵을 받을 때 빵이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찬의 중요한 기능은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한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한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약속에 대한 '인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은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그는 또한 성서 주석에서 "성찬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려고 준비된 기념물"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1542년의 제네바 신앙 문답서 제 362문에서 성찬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이며 표시이다. 즉 이러한 예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성찬의 목적과 효과
성찬 제정의 목적에 대해 칼빈은 "주님이 그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양육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이를 제정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며 더 나가서는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방법으로 성찬을 제공하셨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자라며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의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빵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그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성찬의 효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신자간의 일치의 효과가 있음을 설명한다. 즉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빵은 이 단결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말씀과 믿음과 성령
칼빈은 우선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고 표현한다. 또한 성령이 동반하지를 않으면 성례는 유익이 없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며,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를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멀리 계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 영의 양식이 되도록 결합시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칼빈은 불신자의 성찬 참여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임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화체설을 반대하며, 쯔빙글리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편재 설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반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만찬에 임재 함을 말한다. 그는 "성찬에 대한 소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거룩한 의식의 효과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하며 이적 적인 능력으로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안에 참예의 띠가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성만찬 실제
칼빈은 "성찬을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집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1537년 제네바의 소 의회의 대표로서 제네바에 있어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대한 문서에서 성만찬을 자주 - 일주일에 한 번씩 - 집행하기를 주장했었으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Stra burg에서는 월 1회씩 성찬식을 집행하였다. 그는 1541년에 재차 제네바의 소 의회에 성만찬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다시금 거절되었고 이에 대해 의회는 일년에 4회의 성만찬 집행을 결정하였다.
한국 교회의 성만찬의 이해와 실제
1885년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에 의해서 시작되어진 한국개신교는 이후 아주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중 특히 장로교는 가장 큰 교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장로교의 예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빠져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만찬 예전이다. 이에 대한 원인은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의 영향이 그 하나이다. 초대 한국교회는 입국한 선교사들 특이나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들의 예배형태들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초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중요 점은 카톨릭과는 달리 예배예식과 교리보다는 이들은 주로 학교교육과 성서번역 특히 복음전파에 있었다. 본 요약에서는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의 성레전의 역사를 잠시 다루어 보겠다.
한국초대 교회에 있어서의 성례전
초기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의 중심점은 바로 성서 그 자체에 있었다. G. H. Jones는 설명하기를 "성서에 대한 강조는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큰 특징"이었다. 성서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행하여져야 할 성례전은 극히 소홀히 되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85년 이전에는 세례는 한국內에서는 이루어지지를 못하였고 단지 한국 外에서 행하여졌다. 이에 대해 민 경배는 "그래도 국내에서도 세례는 비교적 꾸준히 이행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 내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노도사(魯道士)가 1886년 7월 11일에 비밀리에 언더우드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감리교의 아펜셀러 목사 역시 같은 해 6월에 베재학당에서 두 사람의 한국학생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에 이러한 일들은 법을 어기는 것으로서 실로 생명을 걸고서야 가능한 일이어서, 사실 당시의 선교사들은 이러한 위험한 모험을 만류하는 입장에 있었다. 1889년 4월 27일은 소위 한국의 '요단강 세례'가 베풀어진 날이다. 언더우드가 의주(義州)에 갔을 때 33명의 교인이 세례 받기를 원하여서 당시의 국법이 허락치를 아니하므로, 결국은 배를 내어 강을 건너, 중국 땅 안동(安東)에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성찬(聖餐)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이에 상응한 존중을 받아 오지를 않았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1885년 4월에 우리 나라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이 해 6월 28일에 헤론과 스크랜턴이 알렌 내외와 함께 처음 예배를 드리고, 1886년 7월 23일에 공식으로 한국 정부에 통보하고 공관 안에서 영국, 미국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성찬예전이 최초로 집행된 것은 1885년 10월 11일이다. 이때에 한국교인들은 참석하지를 못하였다: "해군 장교 세 사람을 포함한 참석자 12명의 명부에는 한국인의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이후 1887년 9월 새문안 장로교회가 세워지는데 창립예배 시에도 성찬예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성찬예전을 모르고 그 성례의 견고한 짜임새 위에 세워지지 아니한, 그런 한국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우리 나라 교인이 처음으로 성찬예전에 참예한 것은 새문안교회가 세워진 후 3개월이나 지난 1887년 12월 성탄절에 언더우드의 목사의 집에서였다. 이 역사적인 날의 예전에는 선교사를 포함하여 단지 7명만이 참석하였을 뿐이다. 복음의 말씀이 이 땅에 들어온 지 3년 8개월이나 지난 후요, 성서가 우리나라말로 번역된 지 5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참으로 이상한 일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서의 성례의 실천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 권장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례의식이 한국정부의 종교박해를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알렌 의사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즉 세례는 선교사들의 사업이나 증언이 아니고, 바로 기독교 바탕이요, 따라서 성례가 교회의 본질이 되어있다고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며 우리의 초대교회는 참된 의미의 성도의 사귐,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공동성이 결여된 그러한 교회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영향
이러한 예배예전이 소홀하게 된 배경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을 들 수가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배후에는 청교도적 예배가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이주한 이들의 예배는 유럽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파이퍼는 미국 변경개척시대의 예배 발전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당당한 지위를 가졌던 두 교파는 회중교회와 장로교인데, 이 두 교파다 신학은 칼빈주의적이고, 예배는 청교도적이었다. 미국 식민지에서 회중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사이에는 어떤 고정된 예배순서를 배격하였다. 미국 개척시대의 특징은 개인주의와 부흥운동이었다. 미국 개척시대의 이들 교회는 그들의 첫 과업을 "위급한 데에서 건져내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예배를 회심과 구별하여, 아주 중요하게 다루지를 않았다. 당시의 예배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에 일정한 형식이 없었다.
2) 예배의식을 거행할 교역자가 부족하여서 의식은 자주 있지를 못했다.
3) 개척의 회중 편에서는 교육받은 목회를 의심스러워하였다.
4) 설교가 예배에서 가장 중시되었다.
5) 예배순서의 특징은 수많은 찬송에 있었다.
6) 개척시대의 예배의 특징은 즉흥적이었고, 과거와 전통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를 않았다.
7) 예배의 장소는 평평하고 거칠었고, 교회 건물을 의식에 알맞도록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러한 전통 안에서 성장한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예배의 형태에는 성례전에 대한 강조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를 못하였다. 또한 이들이 한국에 소개한 예배는 부흥적인 요소가 강조되어진 감정적이며 신앙 중심적인 것이었다.
성만찬에 대한 현대 한국 장로교회의 이해와 실제
한국 장로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종교개혁시대 중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다. 이 시대에 영국의 국왕은 자신의 교회와 일치하는 예배를 하도록 강요하였고, 이로 인해 찰스 1세 때에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심한 반발과 함께 분쟁의 여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결국 영국의회는 Westminster에 모이게 되었고 여기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독자적 신앙과 예배의 형태와 내용을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장로교회 정치와 예배모범이 나오게 되었고 이를 1645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는 이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으며, 이것은 각국으로 퍼지게 되어 세계 장로교의 소중한 교리 및 예배의 근거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중 성례, 세례 그리고 성만찬에 대한 교리에 대해 Philip Schaff는 "성례, 세례 그리고 성만찬에 대한 교리는 특히 칼빈적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J. B. Marsdon은 "우리는 영국교회의 예배교리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인 A. F. Mitchell 박사는 "성만찬에 대한 교리는 쯔빙글리의 기념설(Ged chtnislehre) 그리고 루터의 실재임재설(Realpr senslehre)과는 다른 것이며, 카톨릭의 화체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웨스트민스터의 예배모범 중 성만찬 예전을 소개하여 본다.
말씀의 예배
예배의 부름
예배기도(경외, 찬양,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는)
구약성서(한 장을 봉독)
신약성서(한 장을 봉독)
운율을 사용한 시편
고백과 중보기도
설교
기도(구속, 복음, 설교에 대한 감사)
주님의 기도
성찬 예배
봉헌(성물을 알맞은 그릇에 넣어 가져다 드리는 것 등)
성찬에의 초대
성물의 성별
성찬 제정사(고전 11장)
교훈
성찬기도(시작기도, 창조 구속 말씀과 성례에 대한 감사기도, 성령의 초대)
성체 분할
분병 / 분잔
성도들의 참여
거룩한 삶에 대한 권면
성찬후 기도(성찬에 대한 감사기도, 거룩한 삶에 대한 기도)
시편에 의한 찬양
축도
한국 예장(통합)은 예식서에서 성찬의 신학과 의미에 대해 5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성찬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 즉 죄로부터 구속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성화 시키시는 은혜에 대하여 감사는 것이다.
(2) 성찬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죽음, 부활, 재림)를 새롭게 회상(anamnesis: 기념, 재현)하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재 하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보증하는 것이다.
(3) 성찬에서 그리스도인은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회상하며, 성령님의 임재를 기원한다. 이는 성령님이 오셔서 성찬을 받는 자를 그리스도 뿐 아니라 역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도록 그의 몸과 피로 양육시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4) 성찬은 그리스도와 화해한 본을 따라 성도의 교제를 이룬다. 그리스도인들간에 갈등과 분쟁을 화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나아가 온 세상의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헌신 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5) 성찬은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잔치의 식사이다. 그리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의와 화평을 이루도록 보냄을 받는다.
그리고 기장은 성례와 성찬을 신앙고백에서는 다루지를 않고 단지 예배 예식서에서 다루고 있다. 기장은 "성례전은 행위로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모는 성도들은 이 성례전에 참예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관련된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예장에서나 기장에서나 큰 범위로 보면 이론적으로는 칼빈의 성례전이론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그러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칼빈은 성만찬을 "자주, 가능한 한 일주일에 한번씩"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장의 예배모범에 따르면 "세계 개혁교회의 예배에서는 매주 성찬 성례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그 횟수는 자율적으로 조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가능한 성찬 성례전은 자주 거행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회상하고 참여하게 해야 한다"라고 새로이 개정된 예식서는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성찬예전은 연 2회 내지 4회가 거행되고 있다. 더군다나 기장의 예배 예식서에는 성찬의 횟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지고 있지를 않고 있다. 그리고 고신의 예배 예식서에서는 성찬의 횟수는 당회에 일임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초대 한국교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현 한국 장로교교회에서도 성만찬 예전은 여전히 경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만찬은 초대교회로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에서는 이 성만찬은 항상 예배의 중심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교회는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볼 수 있으며 거기에 참예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다시금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O. Cullmann은 성만찬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는 새로운 계약의 재확인으로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도들의 메시아적인 하나됨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만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만찬을 세례식후 곧바로 행하였던 것을 우리는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만찬이야말로 깊은 감격과 생명력을 지닌 예전으로 예배의 순서에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예전의 모든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 하시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었으며,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대면이라는 생동적인 신앙을 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예전의 현장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그의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소생한 성도들은 그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사건을 이 예전 안에서 이루게 됨으로서 이 성례전을 가리켜 중심적 행위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추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드리는 매주일 예배 속에서 성만찬예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볼 때, 우리는 과연 초대교회가 행하였던 또한 경험하였던 그러한 감격을 소유하는 가에 대해 질문하여 본다면 그의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일년에 한 두번 혹은 3-4회에 달하는 횟수에서 그리하고, 또한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러하다. 우리교회가 갖는 성찬 예전은 실제 현장에 있어서는 "나를 기념하라"라는 언어적 의미 외에는 그 이상의 신학적 의미 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 성찬예전이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정도로 형식적으로 행하여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오늘의 한국의 장로교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 모두에게 귀중한 성례전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순히 말씀만 듣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닌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 가운데서 경험하고 깊이 깨달은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전이 함께 이상적으로 행하여지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 우리는 보다 관심을 기울여서 성만찬을 다시금 바라보며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설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카톨릭의 미사를 전면 부정하면서 이와 함께 강조하였던 것이 바로 올바른 말씀의 선포이었다. 칼빈은 말씀과 성만찬이 없이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흐름에서 개신교 예배 안에서 말씀의 선포가 강조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실로서 설교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예배와 관련된 설교에 대한 기본적인 점을 제시하여 보고자한다.
첫째로, 설교의 기본목적은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룩하는데 있어야한다.
둘째로,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속에 성도들의 신앙의 초점이 모아지도록 하여야한다.
셋째로, 설교의 내용은 언제나 예배의 내용과 합일되도록 애써야한다.
넷째로, 설교는 바로 은혜의 도구이어야 한다.
다섯째로, 설교자는 설교가 예배의 한 부분임을 인지하여 시간배정도 염두에 두어야한다.
여섯째로, 설교가 끝난 후 설교자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나가는 말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서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도 100년이 지난 한국의 교회 속에서 우리는 이 짧은 지면을 통해서 살펴본 예배에 관해서 다시금 살펴보아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여 본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나라에 관한 복음선포와 교회 성장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지는 않았는지를 한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결과로서 선교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경이적인 양적 부흥을 이루었고, 세계의 관심을 모으는 한국교회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잃어버린 것들도 없지 않음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온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를 부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가 이제 선교 2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동안 큰 비중을 두지 못했던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가 표현된 예배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창조하시고, 말씀을 주시고, 구속의 은혜를 주시는 그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와 찬양과 참회의 응답을 드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학이 어떤 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는가를 아쉽지만 짧은 지면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국내에 소개되어 번역되어진 몇 권의 책을 소개하였다.
<예배학에 관한 참고서적>
정장복 저, 예배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William D. Maxwell,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제임스 F. 화이트, 기독교예배학 입문, 정장복 역, 서울: 엠마오.
일리온 T. 존스, 복음적 예배의 이해, 정장복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로버트 E. 웨버, 예배의 역사와 신학, 정장복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출처:http://www.wp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