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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진로학교의 강사이신 강수돌 교수님의 책을 찾다가 교육과 관련되어 퍼옵니다. ^^
그러고보니 벌써 일곱번째 강의인데요...
한강의 한강의 쉬운게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
강수돌 교수님은 경영학과 교수로서 경제학적인 이야기를 하실지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하실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강의를 며칠 앞두고 책을 사서 읽지는 못하겠지만 출판사에서 쓴 서평을 읽어보는 것도
강사의 관점을 미리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길지만 퍼옵니다...
책소개
성적이 상위권에 들지 못하는 아이는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교육. 이런 각박한 우리의 교육 현실을 비판하며 참교육을 외친다.
그러나 막상 내 아이의 일이라면...
이 책은 참교육을 위해서는 학생인 나부터, 교사인 나부터, 학부모인 나부터 변해야 함을 주장한다.
우리 교육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대안을 제시한다.
거창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행할 수 있는 '민간요법'적 대안 모색을 통해 하나씩 우리 교육의 변화를 모색한다.
저자소개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석사. 독일 브레멘대 노사관계 박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역임. 미국 위스콘신대 객원교수. 현 고려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저서 및 역서로는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살림의 경제학',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일중독 벗어나기', '노사관계와 삶의 질', '노동의 희망', '세계화의 덫' 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5
21세기의 아이들
희망은 있다...24
잘못하면 인새을 헛살기 쉽다!...38
중등 사회교과서 다시 읽기...50
한탕주의, 왕따, 그리고 학교폭력...66
엄마 아빠가 달려져야 교육이 살아요
아이에 대한 두 관점-사랑의 결실이냐 제2세대 노동력이냐...88
이겨야 산다?...98
학부모들의 자화상...111
아이들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131
희망 학교, 꿈 선생님
복잡한 반성, 잃어버린 학교를 찾아서...154
일류주의 강박증의 ?C...182
교육개혁의 물레
다시 생각하는 백년의 큰 설계...204
낡은 패러다임, 뒤틀린 교육 시스템...226
전혀 다른 길...250
나는 어떻게 하고 있나?
불편함 속에 행복함이 함께 있다...280
시골생활과 아이 교육 문제...301
다르게 산다는 것의 의미...318
에필로그-내린천 급류타기...329
출판사 서평
교육 문제의 원인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
경영학 박사이며,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세 학생의 학부모이기도 한 강수돌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강제하는
경쟁 시스템과 '돈벌이 패러다임'이 오늘날 교육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본래 '경제'란 돈벌이, 이윤추구, 부자 되기가 아니라 건강한 살림살이
즉 건강하게 먹고사는 것(경세제민)이며, 돈벌이는 살림살이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수단인 돈벌이를 위해 목적인 살림살이를 희생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효율적인 이윤 추구를 위해 사회의 각 구성원·사회·국가 간 경쟁을 부추기고,
보다 많은 이윤을 창출할수록 '능력 있는' 사람·사회·국가로 대접한다.
보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돈벌이 기계가 되어 이윤추구에 매달리고,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대접받으려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한다.
여기서 '능력 있는 사람'이란 '쓸모 있는 노동력'을 말한다.
아이에 대한, 결국 한 인간에 대한 이런 관점이 교육과 관련된 조직 및 각 개인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강수돌 교수는 학생의 현실, 학부모의 현재 모습, 교사와 학교·교육 관료들의 행동에서
조목조목 찾아낸다
(그러면서 저자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이름부터 고치자고 한다.
'백년대계'인 교육을 주관하는 부서에 사람을 인격체가 아닌 '자원'으로 보는 말을 붙인 발상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비판하며 '지금의 학교는 쓸모 있는 노동력을 양산해내는 공장,
교사는 그 공장에서 우수한 제품과 열등한 제품을 골라내는 노동자,
교장은 그 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감독하는 기업주'라고 단언한다.
다음과 같이 우리의 일생을 분석한 강수돌 교수의 글에서
우리는 그의 단언이 과장이 아니라 현실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탄생과 유아기 성장―눈치보기를 반복 학습하며 터득하는 생존전략
아기를 흔히 '사랑의 결실'이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경제 시스템은 삭막하게도 '제2세대 노동력'이라 부른다.
현재의 1세대 노동력이 수명을 다한 뒤에도 그 노동력 자리를 메워서 생산에 종사할 사람이 대대손손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지면 국가는 제2세대 노동력의 확충 차원에서 출산보조금까지 지원한다).
그런데 과연 '제2세대 노동력'이란 관점은 단지 이 체제만이 강제하는 것이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랑의 결실'로만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가지면 "우리 애는 남 부럽지 않게 키울거야!"
"아가야, 너는 이 부모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식의 생각들을 한다.
바로 이것이 부모들조차 아이를 제2세대 노동력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우다.
아이가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나온 이런 꿈은 사실 아이들이 '제2세대 노동력'으로서
경쟁력 있는 노동력, 취업 잘할 수 있는 노동력,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노동력,
돈 많이 벌 수 있는 노동력으로 경쟁력을 지닌 존재가 되라고 소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체제의 논리를 인간 주체가 굳게 '내면화'한 것, 이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아이는 세상에 나온 뒤에도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처럼
아무것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사랑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아이는 시간이 가면서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어른의 칭찬을 받을 만한 행동만 골라하게 된다.
이때 부모가 아이의 순수한 욕구를 그대로 받아주거나 절대적인 사랑을 주지 않으면
아이는 건전한 인격체가 지녀야 할 '내면적 자율성'을 충실히 기르지 못하고
외적인 상벌 메커니즘에 종속되기 쉽다.
'눈치보기'를 반복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해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실상의 '성과주의'(부모가 원하는 좋은 결과를 내면 칭찬받고, 반대면 벌받는 것)를 체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기의 내면적 욕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에 기초해 생각하고 행위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외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오히려 자기 욕구를 억압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학교 교육 과정―쓸모 있는 노동력을 양산해내는 공장 시스템
이제 아이는 가정을 떠나 학교라는 공간으로 삶의 자리가 이동하게 된다.
앞으로 노동시장에 팔려 나갈 노동력이 체계적으
로
육성되는 과정이다.
현재의 학교는 한마디로 '쓸모' 있는 노동력을 만드는 공장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교육 기 간 동안 다양한 잠재력과 고유의 꿈을 가진 한 인격체가 아니라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 축소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 심 한 마음의 상처(트라우마)를 입게 된다.
그러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건강한 신체, 국어, 수학, 영어, 컴퓨터 등 노동능력과
성실성,
책임감,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자세의 측면이 좋은 노동력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학교 교육 속에서 훈련되는데, 노동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각종 상장 등으로,
노동자세 측면은 개근상, 봉사상, 생활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본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가능성(잠재력)을 가진 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일개 '생산요소'로서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좋은 성적과 결과를 내는 학생은 그런 학생대로, 하찮은 결과를 내는 학생은 그런 학생대로
심대한 정신적·심리적 상처를 받는다.
잘 하는 학생은 잘 하기 위해서,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자신을 갈수록 억압해야 하고,
다른 이들의 정서와 감정, 의견과 주장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다.
모든 경쟁 상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라이벌 의식, 자기억압,
그리고 자신의 억압이 고조되면서 쌓이는 보상심리,
때때로 나타나는 친구나 어머니, 선생님 등에 대한 공격성(왕따, 짜증, 폭력 등)
따위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반대로 공부를 못 하는 학생은, 자신의 다른 소질과 재주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대개 만성적인 열등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학교와 가정, 사회 모두에서 학업 성적을 잣대로 대접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든지
행복이 성적순은 아니라든지 하는 말은 익히 알면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껴안기에는 역부족이다.
세상의 커다란 흐름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은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다른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려 하고
그 결과 돌출 행동이나 문제성 있는 행동을 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의 전형적 특징이라는 식으로
오히려 열등의식을 강제당하는 근거가 되기 십상이다.
결국 이들도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열등감에 시달리며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가 쌓이게 된다.
노동시장 진출과 노동과정 편입―그대 과연 행복한가?
이런 식으로 오로지 훌륭한 노동능력과 노동자세를 갖춘 노동력이 대량으로 학교라는 공장에서 양성되나,
그 과정 자체가 인
간적으로는 일종의 파괴 과정(내면파괴로서의 인간파괴)이다.
이렇게 양성된 노동력은 마침내 취업을 하게 되면 생산과정 에 참여한다.
이 노동력은 노동과정이나 관리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상품, 그것도 경쟁력 있는 상품의 생산과정에 적극적 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는 임금을 받는다.
이제 공장이나 회사에 취직을 한 사람들은, 성장기에 가정과 학교에서 받은 상처들을 보상받거나 치유하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하지만 또다시 성과주의, 생산성주의, 경쟁력주의의 패러다임에 갇힌 채 살아가야만 한다.
자본주의 경쟁 체제가 이런 것들을 강제한다.
이런 것들을 주체적으로 거부할 의사가 없는 한,
그리하여 주어진 체제 속에서 더 높은 곳을 더 빨리 차지하려는 출세 패러다임을 가진 한,
이런 경쟁 체제는 마치 ' 객관적'인 것처럼 모두에게 더욱 강제된다.
물론 사람마다, 업종마다, 자기 직무마다 나름의 유연성과 운신의 폭이 다를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성격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며 살아가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대개 40년 내외의 직장생활 기간 동안, 즉 자신의 노동력을 노동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긴 시간 동안,
효율성 내지 생산성의 패러다임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나가게 된다.
이제 마침내 돈벌이 경제의 패러다임이나 '자원은 유한한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는 엉터리 가설들,
그리고 '경쟁력(또는
일등)만이 살 길이며 생산성 향상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식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내면화하고 또 몸으로 직접 보여주
어야 한다.
이것은 일상적 노동과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강화된다.
이 속에서 설사 임금, 지위, 복지 수준은 향상되더라도 진
정한 삶의 질과 참된 행복은 망가지게 마련이다.
노동력의 효용이 다한 뒤―이렇게 우리는 헛살기 쉽다
그 뒤 60세 전후에 퇴직하면 대개는 마침내 노동시장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지만
이제 남은 것은 병든 몸과 황폐화된 정신뿐이다.
삶의 생동하는 에너지들이 효과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자본에 의해 추출되어졌기에,
이제 '노후의 행복'을 위해 여유롭게 여행을 하거나 창작 활동에 종사할 기력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평생 일만 하며 살아왔기에
정년 이후에는 자아상실감이나 허탈감 속에 방황하기 일쑤다.
나아가 20대, 30대, 40대, 50대 등 각각의 시기에 찾아야 했던 행복을 이제 와서 한꺼번에 찾을 수는 없다.
은행 이자와는 달리 우리의 행복은 삶의 매순간마다 찾으며 일상적으로 느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직 팔십 평생의 고생스런 역정 끝에 남은 것은,
자신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훌륭한 노동력이 되도록)
학교 공부 하나 시켜냈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통 사람들의 삶이자 대중들의 삶이다.
결국 인생의 전 과정에서 한 번도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한 채
허탈감만을 안고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비극적인 현실을
우리는 '어쩔 수 없다'며 아이들에게도 되풀이하려 한다.
아니, 마치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덜 허탈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착각)하고,
비극적 삶을 적극적으로 부추긴다.
그러나 앞의 일생에서도 보았듯 경쟁 시스템이 없어지
지 않는 한,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늘 더 높은 자리가 눈앞에 있고, 내려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밟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타개할 대안은 무엇인가?
교육 문제가 사회의 경제 시스템과 맞물려 있다면 그 해결은 더욱 요원한 것이 아닐까?
강수돌 교수는 의외로 이 문제의 해결은 작은 실천에 있다고 말한다.
바로 '경쟁'이 아닌 '상생'의 원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돈벌이의 패러다임에서 삶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삶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 생태적 삶'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부터의 생태적 삶―교육 문제를 푸는 열쇠
견고한 바위도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 한방울에 뚫리는 법이다.
강수돌 교수는 견고한 경쟁 체제와 거기에서 비롯된 교육 문
제를 뚫기 위해
'나부터'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가자고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 지금의 교육 문제는 '교육'이라는 한 분야
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와 관련된 총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가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치원 서당골에서 직접 귀틀집을 짓고 노모와 아내, 세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저자는
이 책 5부에서 자신의 시골생활을 들려주며 부모들의 실천을 촉구한다.
지금처럼 남보다 높은 지위, 더 많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 서울로, 서울에서도 강남으로 진출하려 하는 한,
교육 문제는 그리고 부모 자신과 아이들의 '형편없는 삶의 질'은
(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엄성과 정서적 풍요로움을 느낄 수 없는 삶)
결코 해결되거나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강수돌 교수의 실천―과천에서 청주로, 청주에서 조치원 서당골로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아이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은
우리나라 부모들에겐 삶의 원칙 같은 것이다.
서울에 가야 최소한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에라도 살아야 아이가 출세할 수 있다!
이렇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서울로 향하는 세태와 반대로
강수돌 교수는 과천에서 살다 청주로, 청주에서 다시 조치원으로 온 가족이 함께 거처를 옮겼다.
물론 강수돌 교수의 거주지가 조치원이 된 것은 그가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의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 교육 때문에 '서울'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많은 사람들은
직장이 충청권이나 강원권만 되어도 통근할 생각부터 하고,
그보다 먼 전라도나 경상도로 발령이 나는 경우 아버지만 내려가고
나머지 가족들은 서울에 남는 것이 보통인 현실을 감안할 때
그의 '결단'을 '당연한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강수돌 교수가 서울 근교에서 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만족과 행복감을 느낀다는 서당골의 시골생활을 잠시 살펴보자.
강수돌 교수가 매일 아침 하는 일은 식구들의 오줌통을 자신이 직접 만든 부춧돌식 뒷간
(일반적인 재래식 화장실인 푸세식과 달리 발 받침으로
적당한 크기의 돌이나 나무를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앉은 뒤
재나 톱밥이 놓여 있는 삽 위에 큰일을 보도록 되어 있는 뒷간.
삽 위의 똥은 그때그때 거름밭으로 보내진다.
앞쪽에는 오줌통이 놓여 있다. 본문 p.298 참조)의 큰 오줌통에 버리는 일이다.
큰 통이 다 차면 거름밭에 뿌리고, 그 거름은 가족들이 손수 일구는 텃밭에 뿌려진다.
중학교 3학년인 큰아이는 자전거로 통학하고,
초등학교 2,3학년인 둘째와 셋째는 등교할 때는 강수돌 교수가 출근길에 내려주고
하교할 때는 자기들끼리 10리 길을 걸어온다.
아이들 모두 공부하는 학원에는 다니지 않고, 자기들이 배우고 싶다고 해서 보내는 무용이나 태권도 학원을 다닌다.
세 아이들 모두에게 집 주변의 자연은 놀이터이자 호기심의 대상이며, 친구이다.
그래서 강수돌 교수의 아이들은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당연히 죽이려 하지도 않는다).
그의 아이들은 땅 밖에 나온 지렁이를 보면 손에 잡고 반갑게 인사한다.
"지렁아 안녕?" 그리고 다시 흙 속으로 돌려준다.
지렁이가 있는 흙을 벗어나면 살 수
없다는 것과 흙에게도 지렁이가 있는 게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강수돌 교수에게 중3인 큰 아이는 이제 도
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겠냐
(여기에는 ' 일류대를 가기 위해서는'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하지만
고등학
교는 대안학교로 보내려는 게 강수돌 교수 부부의 생각이다.
강수돌 교수의 아내 조경선씨는 교사인데, 조치원에 내려올 때 전근 신청을 내어
지금은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그녀는 조치원 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퇴근한다).
아이들에게는 책보다는 자연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백 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1년에 한 번씩 반 아이들과 '선생님 시골집 일일체험'을 한다
(시골집에서 직접 딴 푸성귀로 밥을 먹고, 집 바로 뒤의 산이며
집 앞의 마당과 과수원 등을 신나게 돌아다니며 놀았던 아이들은
남은 학기 내내 그날 얘기를 하며 즐거워한다고 한다).
조경선 선생이 서울 떠나길 두려워하는 어머니들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다음과 같다.
"시골 생활에 대해 미리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가상 경험이나 피상적 이해로는 생태적 시골 생활이 불가능하고 불편할 것 같지만,
실제로 생활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두려움과 불편함이 신기하게도 '깨지고 없어진다'.
직접 살아보는 체험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은 사라지고,
소록소록 피어오르는 행복감이 불편함을 더 이상 불편함으로 느끼지 못하게 한다."
대안학교, 주말농장, 유기 농산물로 밥상 차리기
― 나부터의 작은 실천 문제는 결단이다.
작은 실천이지만 결코 쉬운 실천은 아닌
(쉬운 실천이 아니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방법이 근본적 해결책에 가까움을 반증한다)
생태적 삶을 지금부터 가족과 이웃과 공유하고 하나하나 직접 체험할 준비를 갖춰가자.
여건을 만들어서라도 지금부터 실천하자.
이런 결단이 서 있을 때라야 아버지나 어머니의 직장이 지방으로 발령이 날 때
기꺼이 온 가족이 지방으로 향할 수 있다.
가족의 정이 중요하다고 말만 하지 말고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여건과 시간을 능동적으로 확보해 나가자.
아이들과 함께 주말농장에라도 가자.
상대평가된 성적으로 아이를 억누르기보다 아이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대안학교를 찾아보자.
동네에 사는 엄마들끼리 공동육아를 계획해 보자.
가족의 밥상에 유기 농산물을 올리자.
강수돌 교수는 이 책 말미에 참된 변화를 위한 7가지 지침과
변화를 도와줄 수 있는 단체 및 학교의 사이트를 수록해 작은 실천이라도 함께 해나가길 촉구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달라져야 교육이 살고, 아이들이 살고, 부모 자신이 살 수 있다며 말이다.
♧ 본문 소개
미국의 어느 학교에 인디언 아이들이 전학을 왔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자, 여러분 이제 시험을 칠 터이니 준비하세요" 했다.
백인 아이들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필기 도구를 꺼내고 책상 가운데에 책가방을 올려
짝꿍이 엿보지 못하게 하면서 시험
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인디언 아이들은 마치 게임이라도 하려는 듯 책상을 돌려 둥그렇게 모여 앉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생님은 "얘들아, 시험 칠 준비하라고 그랬잖니?"라고 화를 냈다.
이에 인디언 아이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예전부
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서로 도와가며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 본문 p.152 「백인 아이들의 시험과 인디언 아이들의 시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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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꿈꾸는지현님~ 허락도 없이 우리 지역게시판에 예전 글을 올렸는데...
보통때 님의 맘씨로 보아 오히려 격려해 주시리라 믿고 --감솨~~^0^
이제 3일 뒤인 우리 모임 준비차원에서 약간 편집하여 정리해 봤어요.
책에 집중이 안 되는데 찬찬히 본문을 읽으며 방향을 잡습니다.
익숙한 내용과 새로운 자기성찰의 발견이 묵직합니다.
제가 이글을 보고 책을
했지요


할까봐 노파심에서 그랬답니다.
그런데 왜 이 글을 안갖고 왔을까요
그것은 제가 책을 안 사보고 이 글만 보고 아는척
시기 적절하게 라일락언니께서 올려주셔서 책 읽는 중간 이 요약본을 참고하며 수요일 가겠습니다.
물론 닻님의 얘길 듣고 기억하고 있다가 뒤늦게 옮기며 찬찬히 읽은 거랍니다.
그리고, ㅋㅋㅋ
"책을 안 사보고 이 글만 보고 아는척할까봐" --내 얘기하는 겁니까? ^^;;
ㅎㅎㅎ
그럴리가요....--;;
저 말하는 겁니다. 괜시리 찔려 하시기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