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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6:1-33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
33장부터 37장까지는 네 번에 걸친 엘리후의 하나님 변호의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33장부터 35장에서 세 차례의 변론이 주로 욥이 한 말과 관련하여 욥의 잘못됨을 입증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면 36장과 37정의 네 번째 변론은 엘리후가 고난과 관련한 자신의 철학을 진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완전한 지식을 자랑하는 엘리후 (1-4)
(1-4).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1-4절에서 엘리후는 자신의 마지막 변론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변론을 경청하여 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발언을 제지 당하지 않았던 엘리후가 자신의 말을 경청해 줄 것을 요청하는 말을 왜 하는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지만, 아마도 엘리후는 자신에게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음을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 자신의 말을 경청해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엘리후는 자기 지식이 욥과 친구들이 사는 지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먼 곳에서 온 것이라고 3절 상반절에서 말합니다. “먼 데”가 시간적으로 먼 곳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지리적으로 먼 곳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의미라면 ‘나는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래 지혜에서 지식을 얻었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며, 후자의 의미라면 ‘나는 먼 나라에서부터 유래하는 지혜로부터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3절 하반절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 ‘의를 돌려보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먼 데’라는 것은 ‘하나님’을 에둘러 말한 비유법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엘리후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얻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먼 곳’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의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이 말에는 엘리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오염되지 않은 지식, 온전한 지식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말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자기 도취-나르시즘은 욥의 자기 결백의 확신에 비해 지나치다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마치 엘리후는 자신의 생각은 곧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여러 해 오랜시간 하다보면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은 것 같고, 나의 삶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말씀의 결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러한 착각과 자기 도취적 확신에 점점 빠지게 되면 어느 순간 엘리후처럼 내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각, 말씀에 입각한 생각이라고 하면서 내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욥기서를 묵상하면서 어떻게 보면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모습들을 보았고 그 모습이 굉장히 비호감이라는 것을 생각했었기에 이러한 오류에 우리들도 빠지지 않도록 신앙적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후의 이진법적 신학 (5-14)
(5-14)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5-14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악인고통론과 의인보상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고통론’은 먼저 5절에서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지니셨으며 쉽게 폭력을 행사하실 수도 있지만, 아무도 멸시하지 않는 인자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6절에서 지혜가 무궁하신 하니님께서 악인을 찾아내어 벌을 내리시고 악인을 살려두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무궁하신 지혜로 악인으로 인해 고난받는 자에게는 공의를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6절에서 악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7절에서는 의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7절을 통해 엘리후는 하나님은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혀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의인을 왕처럼 대우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들이” 악인과 의인 중에 누구를 가르키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개역개정성경에서는 7절과 연결되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지만. 8절은 독립적인 문장의 시작으로 9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의 “그들”을 악인과 의인이 아닌 모든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면 9절에서 말씀하는 내용들이 쉽게 이해가 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10절에서는 이런 환난고통을 통해 그들의 귀를 열어 하나님의 교훈을 듣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11절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교훈에 순종할 때 오는 행복한 결과에 대해 말하며 12절 이하의 내용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후는 현재의 인생을 통해 누가 의인이고 악인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의 복종’은 자신의 삶에 이해하기 어려운 재앙이 임할 경우,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때로 항의하고 불평하니 엘리후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그래서 15절에서 엘리후는 욥이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귀를 열어 현명한 조언을 듣고 회개하게 하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연단을 위한 고통도 있다는 엘리후 (16-21)
(16-21)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 그대의 부르짖음이나 그대의 능력이 어찌 능히 그대가 곤고한 가운데에서 그대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 가리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비참한 미래 결과에 무감각해질 수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로 돌아오도록 고난을 사용하신다고 말한 엘리후는 16절에서 욥에게 임한 고난, 아픔을 좋은 소식,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엘리후는 욥이 주님의 심판을 받아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말을 한 뒤에 18절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환란으로 인해 하나님께 분노하거나 뇌물에 마음이 뺐겨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엘리후는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더 큰 분노가 욥을 더 치명적으로 타격할 여지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공할 만한 공포의 대상이 되도록 묘사한 것이며, 두 번째는 아직도 욥이 뇌물을 받아 재판을 받아야 하는 불의한 자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30장에서 욥은 잿더미에 뒹굴며 무덤에 반 이상 몸을 디밀어둔 상태였습니다.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욥이 뇌물로 인해 그릇된 길로 갈 수 있음을 ‘이것, 악을 택하였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입장에서 이 말은 참으로 화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고난을 당한 것도 원통한데 욥이 하나님께 벌을 달게 받지 않고 하나님께 더 반발하고 대들어 더 악으로 치우치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종종 위로를 한다면서 이런 식의 위로를 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남성들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한다며 “그래도 이 정도인 것에 감사하라”라든지 예전에 저도 자주 들었던 말이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신 하신 것 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같이 울어주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예찬하는 엘리후 (22-33)
(22-26)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엘리후는 22절부터 33절까지의 내용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큰 권능과 위엄을 묘사합니다. 엘리후가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묘사하는 이유는 욥이 하나님을 향해 대드는 태도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무력화하고 그것의 무익함을 보이려는 의도에서 입니다.
22절을 시작하며 엘리후는 하나님이 높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가르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엘리후의 이 말은 앞에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고난을 통해 가르친다고 했던 자신의 주장을 보충, 보완하는 것으로 욥이 아직 이 교훈을 배우지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엘리후가 22절에서 하나님의 큰 권능과 위엄을 말한 목적이 드러납니다.
23절을 직역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당신께서 불의를 행하셨습니다’라고 말했는가?”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령할 자는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불의의 길을 가신다고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 같은 사람이 하나님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거나, 억울하고 원통한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이 항변이나 해명 요구를 들어 주시지 않으신다고해서 ‘하나님 당신은 불의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엘리후는 말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후 24절에서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께 묻기보다는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성경에서는 24절의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구문을 오역한 결과입니다. 우선 ‘잊지 말라’는 히브리어 구문에 없는 단어를 추가한 것이며, ‘높이다’라는 동사는 ‘기억하라’는 목적절 안에 있는 동사이기 때문에 개역개정성경처럼 번역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게 되면 “그대는 하나님이 하신 일, 사람들이 찬양했던 그의 행사를 높이는 것을 기억하라”가 됩니다.
엘리후는 26절에서 다시 하나님의 위대함을 말하지만, 인간 피조물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은 너무나도 높고 위대하셔서 인간의 지혜 밖에 게시기에 하나님을 알기 어렵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27절부터 33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일어나게 하시는 기상학적 사역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위엄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정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신비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리고 엘리후의 이런 말 속에는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라, 제단하려 들지 말라는 충고가 담겨 있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욥을 향해 말하고 있는 엘리후가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제단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눈을 보면서 지적하는 그 모습이 엘리후의 말을 통해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나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이웃의 티눈을 찾기 지적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이 말씀은 수많은 종교적 행위를 한다 해도 자신의 혀, 말로 인해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누군가를 실족하게 한다면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그 경건은 자기 기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새벽마다 나와 주님을 만난다고 하면서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말이 10년 전 20년 전과 다르지 않다면 나의 신앙이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의 신앙인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향해 겸손히 나아가 우리 영혼의 창문을 열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나아가 할 것이며, 우리의 신앙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으로 변화되고 자라가고 성숙해 가도록 먼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해질 때 우리들의 머리되신 주님의 크신 능력과 위엄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충만한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말씀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엘리후의 이야기를 통해 저희가 스스로의 지혜와 확신에 도취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찾으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는 저희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의 손길을 신뢰하고, 우리가 드러내야 할 사랑과 자비를 잊지 않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위엄과 능력을 기억하며, 그 신비 안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며 말했지만, 이는 스스로에게 너무 큰 권위를 부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사용해 본 적이 있나요? 이런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2. 신앙의 여정에서 의문이 생길 때 우리는 욥처럼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 나아가 의문을 솔직히 제기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3. 엘리후는 욥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위로를 건넸지만, 그 위로는 오히려 욥에게 고통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4. 엘리후는 욥의 고난에 대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판단적인 접근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엘리후처럼 다른 사람의 상황을 판단하게 될 때, 어떻게 하면 더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며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작성 : 성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