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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3:1절에서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파악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7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2절에서 6절까지는 괄호로 묶어두고 1절과 7절, 8절을 연결해서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17)
2절부터 6절까지는 삽입구로서 사도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설명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다음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여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는’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문구들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을 믿사오며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신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2절에서
6절까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은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말씀하시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계시록 2장, 3장에서 계속 하시는 말씀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는 겁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 오늘날에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늘이 우리 안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함과 같습니다(계21:2) 지금
이 하늘이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 하십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하늘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지금은 하늘이 우리의
심령에 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성령의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장차 천당 가겠다고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은 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8절에 ‘강퍅케 하지 말라’는 말씀은 지금은 말씀을 귀로 듣는 때가 아니고
마음으로 받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강퍅케 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노하게 하듯이 하지 말라 하십니다.
지금도 입으로는 예하면서 마음은 없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속이 상합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제가 그렇습니다. 입으로는 떠들지만 실제로는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시편1편과 같은 악인으로 사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범조와 같습니다. 그 때가 시험의 때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첫째 물이 없습니다. 요4장에서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이 물 때문에
광야에 나왔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0절)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이며 샘물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광야 신앙입니다.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물댄 동산 같이 적셔지지 않으면
나의 신앙이 아직도 광야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광야의 두 번째 문제는 양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 곧 양식입니다(요6:35)
광야의 세 번째 문제는 길이 없습니다.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나 있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새롭고 산 길, 생명길이 보입니다. 이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광야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때문에 아직도 방황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광야 신앙입니다. 이런 요소 때문에 방황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리라”(요7:38) ‘믿는’ 현재분사입니다. 이 시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을 믿는 항상 ‘믿는’입니다. 믿음은 항상 현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생수가 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남편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의 짝이
안 되므로 예배에 실패합니다.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니까 실패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은혜를 받자하는 식으로 얼버무립니다.
사실은 예배 때에 우리 영혼이 소성되고 우리 영혼에 빛이 들어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하는 목표가 없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신앙이란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해야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법, 기도에 성공하는 법, 찬송이 열납 되는 법을 알아야 됩니다.
예배, 기도, 찬송을 성공하면 항상 뛸 듯이 즐거운 겁니다. 이건 도저히 값으로
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귀한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한시 빨리 광야 신앙에서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배우세요.
9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광야는 이스라엘의 열조가 하나님을 시험한 때였습니다.
이걸 원어로 말하면 도키마죠한 일을 페이라죠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을 뻔히 알고도 그걸 배경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약 올리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날 자녀 삼으셨다면서요? 날 사랑한다면서요? 그러므로 주세요.
만약 안 주면 내가 20일 금식 기도할 테니까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깡을 부리는 겁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징징거려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입에 물려놓고 바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담보로 해서 울며 매달리면 주시긴 하지만 철이 들면 두고
보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담보로 떼를 쓰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바로 가르치지 않고 기도를 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까에만 신경 씁니다. 그래서 반포의 P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기도의 종류에 대해서는
계속 말한다. 서원기도, 백일기도, 다니엘기도, 여리고 기도 등. 하나님을 약 올리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을 겁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 길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은 꼭 표적만 바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답답해하십니다.
요즘도 어떤 성도는 표적과 기사는 믿는데 말씀은 안 듣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 텐데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눈에
나타나는 것만 생각하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고난의 수, 사람의 수만큼 뺑뺑 돌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다 죽고 그들의 2세들만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을 계속 시험했습니다.
요5장에 보면 38년 된 환자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앉은뱅이처럼 뱅뱅 돈 시간과 같습니다.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고 하시는
이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표적이나 기사나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서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역사를 담보로 끊임없이 자신의 요구대로 내 놔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광야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는 길들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길들이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 끌고 가기 위해서 율법도 있고 표적도 있고 이적과 기사
그리고 꿈도 환상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예수그리스도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딱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길 “the way”입니다.
그 길을 우리가 듣고 깨달아 보고 굳게 붙잡고 달려가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들 위에 있으면서 늘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 음성을 듣지 않기 때문에 내 길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하십니다. 우리는 길들도 알고 그 길을 알아야 합니다.
11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셨느니라”
유대인의 안식일은 육체의 일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한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수고와 무거운 마음의 짐까지 내려놓은 것입니다. 육체의 노동에서
쉰다고 참 안식이 아닙니다. 마음의 수고와 짐까지 내려져야 안식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자기 마음의 무거운 짐을 자신이 들고 다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사람은 결단코 안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롬5:9)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과연 내가 믿음에 있는가?
증험해 보라고 하시는 이런 시험은 할 수가 있습니다.(고후13:5, 엡5:10)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 증거를 분명히 보여 주셔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음에도
하나님을 시험(페이라조)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시험합니다.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것 이게 바로 사탄이 하는
말과 똑 같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면서요.
이번 사건 한번 해결해 주세요’ 이 말은 사탄이 예수님께 와서 한번 뛰어내려
봐라 그러면 천사가 너를 받아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쪽일까요? 내가 부족하지만 내가 지금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고 자기 자신을 증험해 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직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요. 장차 올 영광을 본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2세들이 가나안 땅으로 묵묵히
따라 가듯이 인내하며 말씀을 이루며 소망가운데 찬송하며 주께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첫댓글 아멘 .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생명의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