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광명사 주지 춘광 스님
“성역화 방점 ‘미륵대범종’ 울려 부산불교 지평 확대할 터!”
상월 대조사 친견 후 감복
하심하고 용맹정진 하라”
은사 스님 당부 잊지 않아
주지 권위 모두 내려놓고
시멘트 손수 나르며 불사
신도조직 활성화에 앞장
천태종 위상 제고에 역점
한중‧남북교류에도 ‘심혈’
‘첨품연화경’ 복각 불사
“한반도 평화‧해탈 염원”
부드러운 미소‧말 한마디
“실천덕목‧전법의 시작”
광명사 주지 춘광 스님은 “불자 모두 ‘자비희사’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해야 한다”며
“부드러운 미소와 말 한마디가 전법의 시작”이라고 전했다.
부산 광명사 미륵대범종각 조감도.
‘새벽 종소리에, 잠이 깼다./ 어둠의 귀가 열려 그 소릴 깊게 빨아들인다. 문득,/
별빛을 덮고 잠들었던 내 안의 애욕과 권태,/ 온갖 허망과 환상들이/
쇠와 나무가 마주쳐 내는 소리에 깜짝깜짝 살아나다/ 산산이 부서진다.’
(고진하 시 ‘새벽, 범종소리’ 중에서)
부산 광명사 주지 춘광(春光) 스님도 ‘쇠와 나무가 마주쳐 내는 소리’에 깨어나곤 한다.
허나 그것은 전법을 향한 간절함이 빚은 ‘상상의 소리’이다.
지난 6월 ‘미륵대범종’ 기공식을 봉행했으니 3300관(1만2375Kg)에서 울려 나올
웅혼한 소리는 일러도 내년에나 들을 수 있다.
금정산을 훑고 내려온 바람에 실린 범종 소리가
부산 전역에 퍼져갈 새벽녘을 떠올리면 미소가 절로 인다.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서원하는
새벽 종송의 지극함이 28번의 타종 음에 고스란히 얹혀 있지 않은가.
‘원컨데 이 종소리 법계에 널리 퍼져(願此鐘聲遍法界)/
철위산의 깊은 어둠 모두 밝게 하고(鐵圍幽暗悉皆明)/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 벗어나고 도산지옥 무너져(三途離苦破刀山)/
모든 중생의 정각 이루어지이다(一切衆生成正覺)’.
중학교 때 부친과 함께 구인사를 참배했다.
초가집처럼 보이는 요사채에서 상월 원각(上月 圓覺‧천태종 초대 종정) 대조사를 처음 친견했다.
한순간에 압도됐다. 환희가 차올랐던 것일까?
4박5일 철야정진을 인광당에서 시작했는데 단숨에 정진의 힘이 붙었다.
한겨울 추위에도 매일 상‧하의가 젖을 정도였다.
‘속이 후련한’, ‘하늘에 닿을 듯한 가벼움’을 느꼈더랬다.
그 감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상월 대조사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수학 공식, 영어 단어가 눈에 안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하루 위에 하루가 쌓일수록 절에 가고픈 마음만 두터워져 갔다.
부모님 반대가 있었지만 끝내 허락을 받아 구인사로 들어가
상월 대조사와 은사 인연을 맺고 삭발염의 했다.(1971)
구인사는 충북 단양 소백산 구봉팔문(九峰八門)의 제4봉인 수리봉 아래
해발 600m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에 자리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건축 불사를 막 시작하던 때여서 수행환경은 열악했다.
물은 부족해 세숫물도 아껴 써야 했다.
노장 스님들의 방이라 해도 목침과 방석 몇 개가 전부였다.
하여 춘광 스님은 맨바닥에서 가부좌 틀거나 무릎 꿇어가며 정진했다.
구인사 주변엔 나무가 거의 없어 ‘벌거숭이 산’이나 다름없었다.
절에서 주문한 묘목이 도착하면 매일 산을 오르내리며 마지막 한 그루까지 심었다.
당시 구인사 대중이 3년 동안 심은 묘목은 200만 그루다.
키 작은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사이 춘광 스님의 수행력은 깊어 갔다.
서울 삼룡사 주지(1983∼1984)를 맡기 전까지 구인사를 떠나지 않고 정진에 매진했다.
은사 상월 대조사와의 강렬했던 첫 만남에 대한 회고를 청했다.
“얼굴에서는 영롱한 빛이 배어 나왔고, 음색은 청아했습니다. 친견 순간 감복되었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인연이 맺어지는 찰나이자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물 한 모금도 귀했던 환경에서 농사짓고 정진해야 했으니
육체적으로는 무척이나 힘겨웠을 터인데 어찌 극복했을까.
“보리밥에 장과 김치, 시래기가 찬의 전부였습니다.
정말이지 공양하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수행 중에 졸음으로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아까워 가슴 아팠습니다.
돌이켜 보면 출가 직후 은사 스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에 의지했기에 정진을 이어간 듯합니다.
‘하심(下心)하고 발심하여 용맹정진 하라!’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부산 삼광사 전경.
삼광사 주지(1988∼1997)를 맡으며 부산의 불교 지형을 완전히 바꿨다.
주지 취임 법회에는 1만명의 신도가 참석했지만
1년 후인 1989년 봉축법요식에는 3만명이 참여했다.
그다음 해인 1990년 봉축 법요식에는 5만명이 운집했다.
주지 스님이 흙과 시멘트를 직접 나르니 신도들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철야 정진을 이끄니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밤이면 불사 기금을 마련하려 먹을 갈아 글씨를 썼다.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0시에서 새벽 3시까지였다.
“저 자신을 행자라 생각했습니다. 머슴이면 또 어떻습니까?
절이 잘 되면 그뿐입니다. 절에 활기가 돈다는 건,
부처님 말씀이 올곧이 전해지고 있음을 뜻하고, 신도님들이 행복해한다는 방증입니다.”
어린이‧청년회, 다도회, 합창단, 교사불자회 등의 신행 단체를 조직 활성화하고,
양로원, 고아원, 군법당 지원 등 복지의 폭을 넓히며 대사찰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특히 1만53 불상을 봉안하고 1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관전 낙성은 삼광사 도약의 초석이었다.(1991)
이 불사를 진행 하며 역점을 둔 건 음향시설과 공간확보였다.
“당시 우리나라 대형 체육관의 음향시설로는 여법한 법회를 봉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온 음이 너무 울려도, 퍼져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 문화관의 음향시설을 살피고 전문가들과 논의하며 설계했습니다.
중국 운강석굴(雲崗石窟)에 착안해 벽을 감실 삼아 1만 부처님을 봉안하니
좀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춘광 스님은 주지 취임 2년 만에 5만 신도를 운집시키며
삼광사를 부산의 대표 사찰로 우뚝 세웠다.
이것은 창건(1986) 4년 만에 이룬 쾌거이기도 했다.
중국 불교의 거목이었던 조박초(趙朴初‧1907∼2000) 거사는
삼광사를 참배한 후 돌아가 전국의 불교 지도자를 초청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1992)
“삼광사 불교는 살아 움직인다. 중국 불교 중흥의 원동력은 삼광사에 있다.”
그 후 중국 불교 지도자들의 발길이 왕성하게 이어졌다.
1997년에 낙성한 53존불 8면 9층 대보탑도 규모가 엄청나다.
기단 폭 14.55m, 전체 높이가 30m로 동양 최대의 석탑이다.
3년 동안의 조사 기간을 거쳐 7년 동안 공사 한 10년 대작불사다.
천태종 소의경전인 ‘법화경’과 함께 53존불을 새긴 이유가 있다.
“고려의 요세 스님(了世‧1163∼1245)은 천태교학을 깨달으신 후
53존불에 각각 12배의 절을 매일 올리셨습니다.
참회의 기도이자 천태종의 중흥을 간절히 바라셨던 겁니다.
실제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전개하며 천태종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천태종과 한국불교 발전에 미력이나마 더하고 싶었습니다.”
1997년 삼광사 신도는 33만명을 기록했다.
부산 시민 10명 중 1명은 삼광사 신도인 셈이다. 현재는 37만명에 이른다.
천태종 17대 총무원장(2014∼2018)을 역임하며 천태종 위상을 더한층 높였다.
내적으로는 대광사 전통명상수련센터, 구인사 국제선원 등을 낙성했고,
외적으로는 한‧중, 천태종‧조선불교도연맹 교류를 증진시켰다.
소장하고 있던 국내외 성보를 종단에 기증하고
기증유물 순회전 ‘시공을 넘어 진리로 소통하다’를 열었다.(2018)
개인적으로 공을 많이 들인 종단 불사 하나를 청하니
‘고려대장경 초조본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복각 불사’를 꼽았다.
7세기 초 인도 고승 사나굴다(闍那崛多)와 급다(笈多)가 공역한 경전으로
총 7권 27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소실됐고
우리나라에는 낱권으로 존재하는데 전권은 없다고 한다.
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남선사가 결권 없이 완벽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천태종과 남선사의 협의에 따라 2016년 8월 복각조성불사 고불법회를 봉행했다.
“고려의 초‧재조대장경 조성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대응책이었으며
또한 민족 자긍심과 기재의 표출이었습니다.
‘첨품묘법연화경’ 복각은 단순히 옛 경판의 재현이 아닙니다.
반세기 넘게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와 국민화합을 염원을 새기는 불사입니다.
또한 일체중생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바라는 지극함이 배어 있습니다.”
이 불사는 고불 법회로부터 3년 7개월 만인 2020년 3월 회향했다.
부산 광명사 전경.
부산지역 포교를 위해 천태종에서 처음 조성한 사찰이 광명사(光明寺)다.
올해로 창건 53주년을 맞는다. 춘광 스님은 2021년 2월 15대 주지로 취임했다.
총무원장을 역임한 종단의 어른으로서 쉴 법도 한데 전혀 아니다.
신도조직을 재점검하고 법회를 활성화했다.
부산 지역 최고의 유치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광명유치원’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260명이 정원인데 1000여명이 모여들어 경찰 참관 속 추첨을 통해 선발한다.
차문화대학과 명상강좌도 열었다.
불자는 물론 일반인 포교를 위한 전략적 문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광명사 1층을 리모델링했는데
신도들이 차담을 나눌 수 있는 제법 큰 공간을 마련했다.
“법회만 보고 돌아서는 발길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법회와 기도를 통해 신심을 돈독히 하고 마음을 정화해 갈 수 있지만
도반들과의 담소를 통해서도 자신을 점검하며 정진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 한 잔 나누며 갖는 여유로움이 지친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합니다.”
광명사 신도 특유의 ‘신심과 멋’이 깃들기를 바라는 듯하다.
“‘저분, 절에 가더니 달라졌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반인이 ‘나도 절에 한 번 가보자’는 마음을 냅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라 했습니다.
불자 모두 ‘자비희사’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해야 합니다. 전법의 시작입니다.”
광명사 창건 52주년을 맞은 지난해 10월 춘광 스님은 ‘미륵대범종’ 조성불사를 서원했다.
그해 12월 ‘한국 범종의 전통과 그 새로운 도상 전개’ 세미나를 열어
전통과 현재의 시대성을 담은 범종 설계를 구상했다.
“아름다운 비천상 무늬가 새겨질 수 있지만
핸드폰이나 노트북, 로봇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과 함께 지금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범종은 국가무형문화재 주철장 원광식 대표가 주조하고
종각은 우림목재 대목장 신응수 도편수가 짓는다.
범종과 종각 불사는 도량의 100년, 1000년을 내다본 광명사 성역화 불사의 일환이기도 하다.
대광명전 삼존불 봉안과 종합불교회관 낙성(2011), 일주문 낙성(2016)에 이어
범종 불사가 원만히 회향하면 광명사는 또 한 번 도약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천태종의 비약이자 한국불교의 흥복이기도 하다.
삼광사에서 그 저력을 증명했던 춘광 스님이다.
‘상상의 소리’에 잠을 깨면서도 미소가 절로 이는 연유이다.
곧, 우아하면서도 청초한 미륵대범종의 울림에 저녁 종송이 얹힐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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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광 스님은
1971년 단양 구인사에서 상월 대조사를 은사로 출가.
부산 삼광사, 서울 관문사 주지, 14‧15대 천태종 감사원장,
17대 총무원장, 천태종 복지재단 대표이사를 역임.
국민훈장 목련장(2001), 대통령 표창장(2006)을 수상.
수상집 ‘행복하고 행복 하여라’,
법문집 ‘허공에 뜬 달이 세상을 비추듯’이 있다.
2022년 7월 27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