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생활생물 연구회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역사 이야기 스크랩 중세 유럽의 변화(3)-용병, 농민, 도시, 대학, 연금술
임광자 추천 0 조회 147 08.05.28 08: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세 유럽의 변화(3)-용병, 농민, 도시, 철학, 대학, 연금술

중세 유럽의 변화(3)                이길 상

가. 중세 유럽의 사회와 경제

(1) 12 ~ 3 세기의 유럽9세기 경의 유럽

(가) 천재(天災)와 인제(人災)

십자군의 원정, 수도원의 개혁운동, 이단(異端)의등장과 이단심문소, 교권과 속권의 대립, 교황파와 황제파, 신앙공동체 등등으로표현되는 12 ~ 3세기의 유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연 재해, 즉 천재지변(天災地變)의연속이었습니다.

한해도 그르지 않고 단골 손님처럼 찾아주는 지진과태풍, 홍수, 화재는 그래도 견딜 만 하지만 역병(疫病)과 기근(饑饉)은 사람들의생명과 직결되고, 이를 조금이라도 피하는 길은 신에게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뿐,다른 어떤 방법이란 생각조차 못했던 당시로서는 교회야 말로 신성불가침의 세계로서그 권위를 더욱 높여 갔습니다.

자연재해 못지 않게 사람들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저지르는재해(災害), 즉 인재(人災) 또한 처참하기란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승리의 정당한 수단으로 불을 지르는것이 통례화되어 화재가 따르기 마련이 였고, 군대 내에는 방화대라는 것이 있어서도시나 마을, 수확 물에도 계획적으로 불을 질렀습니다. 이는 적군의 시설이나 양식을없애는 목적도 있었고, 자기네 편이 버려야 할 물건을 적군이 이용하는 것을 막기위해서도 불을 질렀습니다.

전쟁터가 도시가 될 경우에는 목조건물이 다닥다닥붙은 도시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고, 성문을 찾지 못해 아우성 치는 것은 사람만이아니라 짐승들까지도 한 몫을 거들었습니다. 그리고 도적과 약탈도 큰 재앙에 속했는데,여기에는 용병(傭兵)의 역할(?)이 대단했습니다.

이 시기의 유럽을 집단 발광(發狂)의 시대라고 얘기합니다.전쟁, 약탈, 자연 재앙 등의 연속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이상한 평화운동을 펼치거나, 수많은 이적(異蹟)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마리아가 나타나 크리스트를 안은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그림을 보여주고.....평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단체를 만들어라...어느 성당에 모셔진마리아상에서 팔이 부러지고 거기서 피가 솟아 났다...는 등등의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나오면, 사실의 확인보다는 거기에 빠져, 그 장본인을 찾아 귀족이건 승려건 평민이건줄을 서서 열광하게 되었는데, 듀랑이 평화단체를 만들어(1182-1183) 남 프랑스를중심으로 광적인 활동을 한 것이나, 성자를 보았다는 소년이 소년십자군(1212)을만들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인 배경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군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에 파견된 선동사 들의자격요건에는 이적의 능력이 있어야 되고...마녀, 악마, 마술사 등의 이야기가 흔한만큼이나 이적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 시대의 특이한 현상이라할 수 있습니다.

(나) 성유물 숭배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서 신의 보호를 받는 일은 성자의유물(聖遺物)을 몸에 지니거나 가정에 모시는 일이 최상의 방편이라고 믿었고, 사람들은다투어 성유물을 구하기에 열을 올리다 보니, 성자(聖者)라고 지칭된 사람의 시체와그 유품이 온당할 리 없었습니다. 팔이건 머리건 옷이건 털이건 탁자건 의자건 가리지않고 갈기갈기 찢어서 가져갔고, 이것을 부적(符籍)으로 여겨서, 금은으로 치장된작은 상자에 넣어 몸에 지니고(護符)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성유물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고,가짜 성유물을 만드는 곳까지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가짜건 진짜건 가리지 않고성유물이라는 말만으로 만족했기 때문에 비잔틴제국에서는 성유물 제조사업(?)이대대적으로 활기를 띄었다고 합니다.

제 4회 십자군이 엉뚱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1204)많은 성유물을 약탈하여 유럽에 개선(?) 했을 때, 모두가 흥분했다는 것도 이런 이유들이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 사람들에게 미래는 매우 궁금하고, 그것을알기 위해서 각가지 점(占)을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직업적인 점쟁이는 없었고, 조금이라도이상한 조짐이 일어나면 운명과 연결해서 미래를 판단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점성술(占星術)은고급에 해당하고 대개는 개 짖는 소리, 닭 울음, 소의 걸음... 등으로도 점을 보았으며,교회에서 공인된(?) 것으로는 성경을 폈을 때 눈 앞에 나타나는 구절이 신의 뜻으로판단하여 거기에 따랐습니다.

(2) 농민의 생활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던 이 시기, 유럽인들의 사고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변화를싫어하고 전통과 관습(慣習)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수많은 전쟁, 기근(饑饉),살인, 약탈에도 불구하고 상하(上下) 계급간에 큰 마찰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사회가 일하는 자(농민)와 싸우는 자(기사), 기도하는 자(승려)가 분명하게 구분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사(騎士)는 승려와 농민을 보호해 주기 위한 싸우는자, 승려(僧侶)는 기사와 농민의 영혼을 구제해 주기 위한 기도하는 자, 농민(農民)은기사와 승려의 생활물자를 공급해 주는 일하는 자로 각각 역할(役割)을 분담하고,이들간에 상호 의존적인 보완관계가 전통으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한 농민은 신분의 하위 층에서 피지배계급으로 전락, 승려나 기사(귀족)에게 예속(隸屬)되어 많은 봉건적 부담을 담당하고그들의 생활을 도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농민을 배신자, 또는 비겁한자로, 승려는 무 궤도한 생활과 탐욕 자로, 심지어 도시인들까지도 촌놈, 사팔뜨기등으로 이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의 생활이 고상했다거나, 수준 높은 문화와 접촉했다는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비가 내리면 빗물에 얼굴을 씻는 정도의 세수(洗手) 방법밖에몰랐다고 하니 교육을 받았다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 자신들이남긴 기록은 없고, 다른 계급들이 남긴 자료 속에서 이들에 관한 것을 유추하거나,변별(辨別)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농민들이 토지의 경작자로서 혹은 생산자로서,토지의 주인이 되는 영주에게 부담해야 하는 종류와 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기위해서는 교회나 수도원에서 남긴 자료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 수도원의 연대기(年代記) 등을 중심으로살펴보면, 대다수 농민이 자력구제권(패데)을 영주에게 위임, 포기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자유가 없는 체복(體僕:homme de corps) 상태였습니다. 이들에게는 법적 권리가 없고,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성직(聖職)에 취임할 수 없으며, 법정에서 농노가 아닌자유인에 대한 증언자격(證言資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보통의 농민이 아닌농노(農奴:self)라고 구분해서 부릅니다.

다만 재산의 소유와 가족구성의 능력, 특히 영주에대한 보호와 복종의 쌍무적(雙務的) 관계가 성립되어 있어서, 물건으로서가 아니라사람으로서 취급된다는 점에서 고대 노예(salves)와는 다릅니다. 농노는 영주에게부역과 공납(貢納), 농노신분에 따른 여러 가지를 부담하였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농노가 영주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 대상(代償)으로 지불하는것을 봉건지대라고 합니다. 이 봉건지대의 지불 방법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지대- 수확물의 일부를 바치는 현물지대 - 노동이나 현물을 돈으로 계산해서 바치는 화폐지대로,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불의 방법과 내용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11세기까지는 노동지대가 대표적이 였는데, 농노는영주의 농장에서 주당 3일 정도의 노동을 제공하였습니다. 노동력의 절반(折半)을영주를 위해서 일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무거운 부담인 동시에 영주에 의한 강한인신구속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삼림벌채(森林伐採), 용재(用材)·곡물운송등에도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보호대상(保護代償)으로서 타일유 세(taille 稅), 경미하였다고는하나 정기적으로 바치는 인두세(人頭稅:chevage), 농노가 비 농노 혹은 다른 장원의남자와 결혼할 경우, 이는 노동력의 유출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주의 허가와 함께물어야 하는 결혼세(結婚稅:formariage), 또 사망세(死亡稅:mainmorte),... 교회법에따라 내야 하는 수입의 십분의 일(십일조), 영주의 시설 이용료에 해당하는 방앗간,빵집, 대장간 사용료 등등.....있었습니다.

사망 세의 경우, 두 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하나는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서 해당된 것으로, 농노가 사망하면 모든 재산은 원칙적으로동거하는 그의 아들에게 상속되었으나, 자손 없이 사망할 경우에는 영주에게 귀속되었고,이것을 에슈와트(echoite)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북부 프랑스의 일부 및 독일에서농노 재산을 상속할 때, 영주도 가축 등 동산의 일부를 가족과 함께 취득하였습니다.이것을 우리 식으로 풀어보면, 농노는 일반적으로 보유지(保有地)를 자유로이 양도·매매·대여할수 없었고, 농노의 자손은 나면서부터 농노였으며, 후계자(아들, 손자) 없이 죽으면,그 가족은 사망 세라는 이름의 상속세를 내고 망자(亡者)의 재산을 다시 차지한다고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례가 12~3 세기가 되면 사정이 많이 달라집니다.이 시기에는 많은 개간(開墾)이 이루어 졌고, 새로이 개간된 땅에는 농민이 들어와서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토지의 양에 비해서 농민의 절대 숫자가 부족하게 됩니다.이렇게 되면 농민(농노)들은 영주의 부담이 많거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할 때, 땡땡이를치거나(사보타쥬), 집단적으로 다른 영주에게 옮겨가거나, 도시로의 도주(逃走) 등의방법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봉건 법은 이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합니다.이래서 영주는 다시 농민을 상대로, 수확량의 얼마를 주고받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여훨씬 부담도 가벼워 졌고 인간적인 대우도 달라지게 되었고,... 이것을 현물지대라고합니다. 현물지대 시기가 되면 그 조건을 완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지요. 여기에서농노는 차츰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계약자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고,... 다시14세기에 이르면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인구의 격감, 사치품의 범람등등의 사연으로 생산물과 관계없이 일정량의 화폐를 지불하는 이른바 화폐지대가 등장합니다.

화폐지대의 시기가 되면, 다른 산업의 발달과 함께농노라는 말은 사라지고, 농민으로서, 혹은 생산자로서 주요 사회 구성원이 되지만,이것은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에서의 이야기이고, 아직도 왕권이 발달되지못한 이탈리아와 독일을 포함한 동유럽에서는 오히려 농노제를 강화하여 농노를 교회나영주의 장원에서 이탈하는 것을 폭력으로 철저히 막았고, 서유럽에서조차도 농민이그 역할만큼 대접받기에는 다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아니면 지금 까지도 계속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현재의 우리들이 보는 농민에 대한 인식은 어떻습니까? 지금부터 3 ~ 40 여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들이 였고,...형식면에서 봉건적 지방분권이없었던 우리나라에서, 관료와 지주의 착취, 신분적인 모멸감은 이 11세기 유럽의농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수월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이런 농민들의 서러움을 벗어나는 길,...즉 관료 지주,유산(有産) 계급이 되는, 신분 상승의 절대 요건을 교육이라고 보고,... 주린 배를움켜쥐고 자녀교육에 과감한 투자(?)를 한 결과로서 오늘을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공허가 가슴 한 쪽에 자리잡는 것은 우리들의 전(前) 세대(世代)는 분명히, 노동만을천직으로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았는데, 오늘날 우리의 농촌을 지키는 사람들가운데는 주식투자, 부동산투기, 잘 나가는 유지행세, 고스톱을 비롯한 투전에 몰두했다가가산을 탕진한 사람도 많다니...이것도 공권력(구제권)을 가진 정부(국민)가 책임져야하는지?...옥석을 가리기는 어렵겠으나, 분명한 것은 정도(正道)를 지킨 사람이라면,부채(負債)의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3) 중세 유럽의 도시

(가) 중세도시의 풍경

유럽의 중세도시(Medieval! city)라고 하면, 상공업자들이모인 곳, 길드(Guild)라는 자치조직을 가지고, 도시 법에 따라 도시를 운영하고,국왕이나 영주로부터 독립된 자치도시라는 것 등으로 요약 설명됩니다. 이런 도시의발생 역시 어떤 계획에 의해서 준비되고 설계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1세기부터 유럽 경제가 자급자족의 장원경제에서벗어나기 시작하여, 잉여농산물의 처리, 생필품의 구입 등의 교환의 필요가 발생하자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통의 요지나 영주의 성벽 부근에는 사고 파는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본격화된 12세기에 들어서면 도시는더욱 늘어나고 규모도 커지게 되었는데, 이는 국왕이나 영주들이 이들에게 교환의장소를 제공해준 대가로 수수료를 받아(일종의 자리 세) 수입을 올리는 중요한 수단이되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성장의 속도에 가속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시가 형성되면 도시 자체의 방어를 위한목적에서 성벽을 두르고 성문을 내어 통행을 제한하고, 봉건영주로부터 매수(買收)혹은 용병을 동원한 투쟁으로 자치권을 획득하여, 자치도시 혹은 주변의 농촌을 흡수하고,도시국가로서 독립을 유지하였습니다.

당시의 도시 풍경을 그려보면, 성벽 밖의 주변에는좁고 낮은 단층집들이 지저분하게 늘려 있는데, 이런 집들은 대개 도시수공업자들의살림집으로서, 낮에는 성안에서 하청(下請)을 받아 일하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와쉬는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의당 교수대가 있고, 중심광장에서사방으로 뻗어 나간 방사선(放射線)의 큰길을 따라 사이사이에는 작은 길이 거미줄처럼엉켜서 소통을 돕고 있습니다.

거리에 나 다니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양떼와소나 말, 닭, 돼지 등이 어지럽게 엉켜서 길을 메우기도 하는데, 특히 돼지는 길거리에버려진 각종 음식물을 치우는 효과도 있었으나, 길을 더욱 더럽게 하는 역할도 동시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나그네, 순례자, 농민, 도둑, 날치기,귀족, 상인.... 등, 비라도 내리면 거리는 온통 진흙 수렁이 되어 통행조차 어렵게되고....

도시 중심에는 빌딩이 있어서 위용을 자랑하기도 하였으나,건물과 건물 사이에 공간이 부족하여 위층은 대개 붙어 있었으므로 밑에 있는 길은빛이 들지 않아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건물에는 여인숙(旅人宿),술집, 빵집, 식육점, 대장간, 세탁소, 염색소.....등이 자리잡고 있었고. 도시의중심광장에는 시청사와 교회가 있고, 시청사에는 자치도시의 상징인 높다란 종루(鐘樓)가있습니다.

그리고 시청사를 향해서 오른 손에는 칼, 왼 손에는저울을 든 동상이 있어서, 부정과 부패, 사기와 배신을 응징할 듯 가냘픈 여인이지만날카로운 눈매로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광장에서는 장이 서는데, 수공업제품을 비롯하여,모피(毛皮), 옷감, 설탕, 향신료(香辛料), 생선...개구리, 달팽이(우렁이) 등의 상품을포함해서, 물건을 걸어 다니면서 소리 내어 파는 행상인, 구걸하는 거지 등도 빠질수 없는 풍경입니다.

이렇게 도시를 이야기하면 낭만적이라던가 지저분하다던가 하는 생각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시는 도시 나름 데로 그들의 법(도시법)이 있었고, 그들의 행정을 담당할 조직도 갖추고 있었는데, 이 당시의 도시라는것은 역시 치안이 문제였습니다. 거지, 도둑, 강도가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열심히일해서 재산을 늘려야 되고, 이 재산을 지켜야 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도시 법의 제정은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적어도 이 법을 제정하는데 거지, 도둑,강도가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고....도둑이나 강도에 대한 처벌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잔인했다고 합니다.

손발을 자르고,... 교수대에 시체를 매달아 지나는사람들에게 경계의 표시로 삼았고, 해가 뜨면 종루의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해가지면 역시 종을 쳐서 성문을 닫았던 것도 이런 치안 확보의 방안이 였습니다. 이런얘기를 바뀌어 보면 도둑과 강도가 너무나 심해서 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고, 살기어렵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살아야 되기 때문에 도둑과 강도가 반복되는 악순환을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나) 상인 길드(Merchant guild)

이런 도시에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상호부조와 공동이익을목적으로 서로 뭉치게 되었는데, 이런 조직(조합:組合)을 길드(guild)라고 불렀습니다.이것을 다시 직업별로 분류해서 상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상인 길드와, 같은 직종(職種)의수공업자들이 만든 동직(同職) 길드(craft guild)가 있습니다.

상인 길드는 서유럽에서 중세 초부터 각지의 시장을찾아서 장돌뱅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도둑과 강도를 막기 위해 무리를 지어서(隊商)가깝고 먼 거리를 이동하다가, 10세기경부터 성채(城砦)와 수도원·교회 부근에 정착하여부근에 있는 농촌에서 내왕하는 수공업자까지도 합쳐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취락도시(聚落都市)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단이 비크(vik) 또는 포르투스라하여 나중에 중세도시로 발전하는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시가 형성되자, 상인과 수공업자들 사이에는상인 길드 또는 춘프트(Zunft)라는 동업자조직이 형성되었는데, 상인 길드의 발생은,북서 유럽 지역에서는 10세기 말~11세기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각지의영주나 국왕으로부터 영지 내에서 교역의 자유와 관세면제의 특권을 받았고, 이런사실은 상인 길드의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사실상 상인 길드를 결성하고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상인길드가 특허장을 가진 것은 프랑스의도시 발랑시엔으로서, 1050~70년 길드 특허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생토메르는 1072~83년에상인 길드 규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바포드와 캔터베리, 독일의 쾰른, 민덴고스랄,벨기에의 브뤼주 등에는 11세기 말~12세기 초엽에 상인 길드가 발생하여 그 후 현저히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최고(最古)의 특허장인 발랑시엔 및 생토메르의 길드특허장에 의하면, 상인 길드 결성의 동기가 된 것은 길드 성원(成員)의 상호부조였습니다.길드 회원은 위급한 경우, 실패했을 경우, 사망했을 경우, 상품을 구입하였을 경우등, 생활의 온갖 면에 걸쳐서 상호간에 도울 것을 목적으로 공동조직에 결집하여서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1세기 말에 이르러, 상호부조의 성격은점점 엷어지고 도시금제권(都市禁制圈) 내에서의 상업의 독점이 주요목적이 되었고,길드 성원만이 상업을 해야 되며 여기에 가입하지 않은 외부의 사람은 그들의 독점을깨거나 똑같은 상품을 취급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서울 운종가(종로)에 있었던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이나, 무거운 등짐과 봇짐을 지고지방 장날을 찾아 다녔던 보부상들이 조직원 외에 사람들을 추방했던 것과 비슷하다고보시면 되겠습니다.

(나) 수공업 길드(Zunft or Craft guild)

수공업(영:craft)의 종류는 몹시 다양하여, 쇠붙이로도구를 만드는 대장쟁이부터, 양모로 옷감을 짜는 직물업자, 이를 가공하는 가공업자등등으로 대 분류를 할 수 있고, 다시 대 분류에서는 전문적인 특성에 따라 중 분류세분류가 나타납니다. 같은 직종끼리는 공동의 이익과 친목의 도모, 정보의 교환등을 목적으로 모여서 여러 가지를 논의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동일직종(同一職種)의모임을 춘프트(Zunft)라고 합니다.

상인 길드가 프랑스에서 출발하고 발달했다면 수공업동직 조합인 춘프트의 본고장은 독일이고,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있습니다. 이 춘프트는 9∼10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성립되었고, 11세기에는각 도시마다 결성되었습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11세기에는 아직 예외적으로 밖에존재하지 않았고, 최초의 춘프트 특허장이 생긴 것은 1100년 전후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많은 협회, 단체, 조합 등이 직종별직업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것을 가르쳐 흔히들 이익집단(利益集團)이라고 합니다.개인의 힘으로 거대한 사회 조류에 맞서기에는 힘이 부치기 때문에 다수(多數)가단결된 힘으로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자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집단이기주의라고하여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데...이런 이익집단의 역사가 유럽에서는 이 시기에 활발한활동을 하였고, 목표는 다 같이 살자는 취지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이들간에 상호약속(규약,정관)이 이루어지고, 이 약속은 철저히 지킴으로서 본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습니다.

11∼15세기 사이에는 비약적으로 수공업자의 수와종류가 늘어나고, 이에 수반해서 많은 춘프트가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 쾰른에는61개, 뤼베크, 뉘른베르크에는 50여 개, 빈에는 약 80개의 춘프트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춘프트 결성의 동기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생활이 경쟁에 의해서 서로 망하게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였는데, 그 방법으로 도시 내에서 다른 사람이 같은 물건을생산할 수 없도록 막았고(도시금제권) 같은 조합원 내에서는 경영상의 여러 조건을통제함으로써 성원들의 전통적인 생활수준과 그 평등을 가급적 유지하려고 하는데있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① 원료는 공동으로 구입하고, 선매(先買)를 금지한다.
② 주인이 고용할 수 있는 직인(職人)과 도제(徒弟)도 일정한 제한(1∼3명)을 넘어서는안 된다.
③ 사용하는 도구의 종류·수를 규제한다.
④ 노동시간을 정하고조조(早朝) 및 야간의 노동을 금지한다.
⑤ 제품이 시장에 반출되기 전에 품질검사를받고 스탬프를 찍지 않은 물건은 판매를 금지한다.
⑥ 공정가격을 정해서 판매한다.한편, 외부에 대한 봉쇄성의 경향은 춘프트의 성원만이 해당되는 상품을 제조하고이를 판매할 수 있다는 등이 주요 내용인데 이는 영업을 독점하여 이익의 최대화를노린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인(Master : 匠人)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課程)을이수해야 했는데 이를 도제제도(apprenticeship system : 徒弟制度)라고 합니다.예를 들면 이발사가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이발소를 열고, 가위를 들어 손님의머리를 손질하는 것이 아니라, 13 ~4 세에 처음 들어와서는, 이발소 내의 청소부터시작해서, 손님들의 머리를 감아 주는 세발(洗髮)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를 도제(徒弟: Apprentice)라고 하며, 다시 얼마를 지나면 면도(面刀)나 간단한 조발(調髮)도하게되는데 이 때를 직인(職人 : Journeyman)이라고 합니다. 다시 얼마를 지나 가위로머리를 손질하는 조발(調髮)을 담당하고, 정해진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정식 이발사가되면, 비로소 장인(匠人:Master)이라고 하여 이발소를 독자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들의 수업에는 물론 수업료는 없지만 도제기간 중일체의 보수 또한 없습니다. 다만 장인(마스터)집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 전부고,새로이 개업을 할 때 약간의 기구등을 보조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업의 형태는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스스로 익히는 특이한 전수방법을 택했습니다.대장간의 경우라면 도제는 풀무 질, 직인은 함마 질, 장인은 달굼 질의 과정을 거쳐야되겠지요.

이런 일련의 복잡한 조치들, 도제제도와 춘프트는그들의 이익을 지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경쟁이 생명인 근대 산업 발달을저해한 죄과(罪過)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영업의 독점은 춘프트가 성립된 초기에는비교적 완만하였지만, 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경쟁상대도 증가하게 됨으로써 점점어렵게 되자, 이 독점을 깨는 자는 떠돌이로서 집단 딸돌림(왕따)을 받았고, 다른사람의 진입을 막았으며, 중세 말기로 접어들자 시장이 좁아졌기 때문에 생업 활동범위는한계에 달하였고, 그 결과, 춘프트는 영업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종 조건을설치하여 가입제한을 더욱 강화 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입 제한의 요건으로서 첫째로 업주(業主)로서의가입 희망자는 출신의 제한을 받았고, 둘째로 수공업주(匠人:手工業主)의 지위를얻기 위해서는 도제와 직인으로서 일정기간을 마쳐야 하고, 또한 장인(匠人)으로서일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장인(匠人)으로서의 시작품(試作品)을 제출하여 심사에 합격하여야만하였습니다.

도제의 수업시기를 영국에서는 7년, 독일에서는 약3년, 그 밖의 나라에서는 5년이 되었습니다. 도제 다음 직인(職人)은 정해진 수업(?)을마치고도 마스터가 되기 전에 수년 간 여러 도시를 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셋째로새로 마스터가 되자면 가입금을 납부하는데, 이것이 세월을 지나면서 끊임없이 인상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제한으로서는 수공업주의 수의 제한, 수공업주의 지위의세습화를 정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리하여 14세기 이후에 들어서면서 마스터가 될 가망이없는 다수의 져니먼(직인) 층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본래의 춘프트에 대하여자기들만의 장인(匠人)조합을 조직함으로써 춘프트에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인들은 이 직인(職人)들에게 선수금을 주고,제품을 구매해 주는 선대(先貸)제도를 채택하므로써, 주문생산이 이루어지고, 동시에수공업자들은 상인의 예속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기술의 향상과 수요의 증가는 마침내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이 등장하여 근대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춘프트는 급속히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유럽 곳곳에는 수공업형태의 장인들이누대의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특이한 제품을 소량 생산하여, 기계적인 대량생산에식상한 고객 층을 상대로 맥을 잇고 있습니다.

(4) 원격지 상업

13세기 왕권이 취약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국내치안을 담당할 만한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보호는 기대할 수 없었고, 도시의주민이나 상인들은 자체의 힘으로 도둑들의 약탈로부터 막아야 했습니다. 십자군원정을 계기로 상업이 확대되면서 이제 상인들은 먼 거리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상인이지 몸에는 무기로 중 무장을 하고 길을나섰는데, 그것도 혼자서 먼길을 간다는 것은 강도(强盜)를 부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였기에 항상 무리를 이루고 다녔습니다. 여기에서 좌측통행과 우측통행의 관습이발생하는데,... 가령 길을 가다가 강도가 나타나면 어느 쪽에 있는 것이 유리한가?를염두에 두게 되었고,... 총이 없는 시대에서 칼과 창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좌측(左側)으로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고,...총이 등장한 후로는 반대로 우측(右側)으로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는데,...자동차가 거리의 주인으로 등장한 지금은좌측입니까? 아니면 우측입니까? 나라마다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사람은좌측통행, 차마는 우측통행...일본은 우리와 반대...미국은 우리와 같고, 영국은일본과 같고...내륙국가와 섬 나라와의 차이 인지 아니면 의회 공화정과 군주 공화정과의차이 인지?..

육로(陸路)의 경우는 프랑스의 상파뉴 지방을 중심으로,남북간 동서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 졌는데 상인들이 가지고 다닌 상품은 가벼우면서도값이 비싼 향신료, 의약품, 염료(染料), 보석, 견직물 등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여기서 향신료(香辛料)란 조미료가 아닌 기호품(嗜好品)으로서 향신료(spice)를 영어에서는스파이스(spice)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후기 라틴어로 약품이라는 뜻이라고합니다. 우리말로 구태여 번역한다면 약품이라기 보다는 양념에 해당됩니다. 우리들이양념이라고 하면 단연 고추와 마늘을 상좌(上座)에 앉히고, 다음으로 참기름, 생강,멸치젓...등으로 이어지는데 사실은 참기름이나 멸치젓을 제외하면, 고추가 우리나라에전래된 것은 임진란 이후로 17세기에 널리 보급되었고, 마늘도 단군신화에까지 등장하지만사실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고려후기(14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육식(肉食)을 즐겼으나, 목축이 가을을지나면서 목초(牧草)의 부족으로 많은 가축을 도축하고, 이를 저장하기 위해서 소금에절이거나, 차거운 겨울 날씨의 자연 냉장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날씨에 이상이 생겨기온이 올라가면 단백질은 부패(腐敗)되고, 그 과정에서 지독한 냄새가 비위를 역겹게하나, 그렇다고 그 귀한 고기를 버릴 수는 없고, 먹자니 그렇고...그래서 양념을뿌려서 먹게 되었는데, 그 양념이라는 게 후추와 계피였습니다.

그런데 그 흔한 후추와 계피가 당시 유럽에서는 생산이되지 않았고, 이슬람 상인들을 통하여 동양으로부터 전량 수입에 의존하였습니다.기호식품의 속성이 한번 맛들이면 좀처럼 버리지를 못합니다. 우리들이 매일 먹다시피하는 고추와 마늘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며칠간만 먹지 못해도심한 사람은 금단현상을 일으킨 다는 사실을 외국 여행이라도 가 보면 금방 알 수있습니다. 산해진미의 다른 나라 고급요리가 즐비해도 그놈의 고추장으로 밥을 비벼서먹었으면...

컬럼부스가 신대륙을 찾아 나선 것은 이 향신료를값싸게 구하기 위해서 였고, 영국이 아편전쟁을 유발한 것은 차(茶)의 수요 급증으로발생한 무역역조 현상을 막기 위해서 였다고 하니 사람들이 먹는 다는 것은 역시중요한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것도 생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기호식품을 두고생명과 바꾸는 전쟁도 불사하였으니, 인간만사 저변에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5) 중세 유럽의 군사력 - 용병(mercenary : 傭兵)

로빈후드(Robin Hood)라고 하면, 11세기 영국에서일어난 먼 나라 이야기지만, 의적(義賊)이라는 이름으로 임꺽정이나 장길산 만큼이나우리에게도 친숙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11세기 잉글랜드의 셔우드의 숲을 근거지로하여, 리틀 존과 태크 수도사 등을 비롯한 패거리들과 함께 포악한 관리와 욕심 많은귀족이나 성직자들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의 횡포를 응징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적은 백정이나 광대 등의 천민들이양반과 토호(土豪)에 반발해서 도둑이 되지만 이 로빈 후드는 기사라는 지배계급이였고 여기에 수도승까지 합세합니다. 이들이 돈을 받고 전쟁을 대신 해 줄 때는 일거리(직업)가있지만 전쟁이 없으면 실직자가 되어 의적의 행세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의적(義賊)이라고해도, 도둑은 역시 도둑이지요. 이런 부류(部類)가 대개는 용병(傭兵) 출신들이라고합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즉 군대(軍隊)가 있어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요. 그래서 고대 그리스나로마 시대에는 시민들이 무구를 갖추고 중장보병으로 출정하여, 집단방어와 집단공격으로공동의 목적을 달성하였는데, 이것이 중세가 되면서 게르만의 전사집단에 근원(根源)을둔 용사 집단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들을 영어에서 솔저(Soldier)라고 하고, 우두머리를대장(Captain)이라고 불렀는데, 돈에 따라 움직인다고 해서 다시 머셔나리(mercenary)라고불렀습니다.

용병을 보수를 받고 복무하는 군인, 즉 직업 군인을의미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해석해서, 중국 송 대의 국경 수비군인, 우리나라의 임진란(亂)이후에 설치된 3수병(3手兵 : 포수, 사수, 살수) 까지도 용병으로 해석하지만, 이들은국가의 계급으로써, 한 영역을 차지하고, 그 조직으로 활동한데 반하여, 여기에서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세 유럽의 용병은 소속도 국가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돈을주면 대신 싸움을 해주는 청부 군인들이란 점에서 일반 용병과는 구별됩니다.

봉건제도하에서 군사제도는, 보수보다는 주종관계에바탕을 둔 봉사 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12∼13세기에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금전에 의한 계약제도가 성행하게 되고, 하급귀족이나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직업적인전투 집단이 생겨나 이것이 점차 용병 집단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봉건 법에 따라 이루어진 주종관계에서, 기사(봉신)가주군에게 부담하는 군사적인 의무는 1년에 40 일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기사가 여러 명의 주군과 2중 3중의 계약관계를 맺어짐으로서, 기사로서는 같은 주군으로모시는 이들 주군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같은 기사가 한 달 간은 이 주군(主君)에게,다시 한 달이 지나면, 그 전 까지 적(敵)으로 싸웠던 다른 주군에게 봉사해야 하는웃지 못할 소동도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이 없었다 할지라도 계약 기간 어물쩍 싸우다가, 기간이 지나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철수해 버리고, 포로가 되면,몸값을 지불하고 풀려 났기 때문에,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알지 않았고,... 전투에전력을 다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군대로 전쟁다운 전쟁, 특히 장기전은 도저히불가능했습니다.

이래서 국왕이나 유력한 영주들은 용병을 기용하는데,용병의 구성은 대장을 중심으로 대략 2~30 명 내외로 구성되었습니다. 대금의 지불은대장에게 일괄 지불하면, 대장은 그 돈으로 다시 부하들에게 분배하였고, 싸움 중에도상대편에서 돈을 더 주겠다고 하면, 계약 기간의 만료와 더불어 서슴없이 반대편에서종전의 상전(?)을 상대로 싸움을 했습니다.

이런 유럽의 군사제도는 나폴레옹의 국민군대가 나타날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용병으로 용맹을 떨쳐 비싼 값을 받은 것은 스위스 인들의용병이 단연 으뜸이었고, 도시가 자치권을 획득하는 일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도,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수비군에도 모두 이 용병들이 동원되었으며, 사정은다르지만 현재의 바티칸 근위병도 이 용병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나. 중세 유럽의 학문

(1)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글(Letter)은 읽는 것과 쓰는 것, 두 가지 요소가결합되었을 때 그 진정한 의미가 주어집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쓰여진 글을 다시누군가가 읽었을 때, 이를 이해하고 공감하면 문제는 간단해 지지만, 그 내용이 현실과괴리(乖離)되거나 추상적일 때, 그 해석상의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특히 종교적인혹은 윤리적인 가치는 시공(時空)의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므로, 그것이교리논쟁이던 학술논쟁이던, 시간과 지역을 달리하면서 변질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는것은 불가피한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학에서 경전의 해석을 위해 훈고학(訓學)이 일어났고, 불교에서도 석가모니의 언행을 가리기 위한 부파불교가 발생했으며,이슬람교에서도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을 연구하는 하디스학이 등장하여 그 진위(眞僞)를가리는 과제가 한 동안 학자들간에 공방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트교에서도 신성(神性)을 내용으로 하는 여러저작이 이루어 졌는데, 거기에는 단연 성경이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성경이외에도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등은 교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이를 찬미했다는 점에서 이들을교부(father church:敎父)라고 하고 이들의 종교적인 주장을 교부철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지가 발달하고 시대가 달라지면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영역에도 의심을 갖게 되는데, 로마카톨릭에서 학술적인 근거를 마련한 것이 스콜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콜라를 신(神)자가 달린 학문, 학자, 학원, 학교 등으로번역하고 있지만, 복합적인 내용을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용어가 없기때문에 그냥 스콜라로 부릅니다. 이 스콜라가 등장한 것은 칼 대제(768-814)가 각지의교회와 수도원에 부속학교를 세워, 유럽을 문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학문을장려한데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가 등장하였고,이들의 학문을 스콜라 학이라고 하면서,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학문을 널리 스콜라 학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로서,그 요체는 크리스트교의 신앙과 학문적인 이성(理性)의 결합을 중요 내용으로 담고있습니다. 유럽에서 대학이 생겨나고 학문적인 연구가 지속되자 지적 흥분은 크리스트교에까지미쳐서,... 예수는 하느님으로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왔는가? 마리아가 동정녀라면그 남편(약혼자) 요셉은 누구인가? "이해할 수 없으면 믿을 수도 없다"는유행이 퍼짐에 따라 크리스트교의 교의(敎義)를 학문적으로 뒤 바침 하기 위해, 성서를비롯한 모든 크리스트교의 문헌을 체계적으로 연구 분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연구의 테마 중에는 "동물에도 영혼이 있다"라던가"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는가?"라는 교리 항목별 연구가 성행하였습니다.이러다 보니 같은 크리스트교 문헌에서도 상반되는 내용이 많이 발견되었고, 이런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한 추론(推論)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추론을얻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특히 이슬람을 통해서 이 시기에전파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얻은 결론이 신의 존재나 신앙 일체를 자연적사회적 현상으로 해석한 것이 스콜라 학이 였고, 이러한 대학의 스콜라 학이 맹신(盲信)에가까운 교회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논리학은 3단 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고자연 학은 운동·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를 목적론적 자연관에 둔 자연학이라고 합니다.

철학적인 어려운 용어를 빼고 간단히 이를 정리해보면, 3단 논법이란, 명제나 가설에 대한 연구의 접근방법에서 A는 B와 같고(A=B),B가 C와 같다면(B=C) A와 C도 같다(∴A=C)고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은이론적으로도 문제가 없겠지요. 그러나 자연 학은 운동과...,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원인으로 소재(質料因), 형상(形相因), 동력(動力因), 목적(目的因)의 네 가지로보고, 이 가운데 형상, 동력, 목적은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소재(질료)와형상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한다는데,...어렵고(이해 안되고), 길고 먼 이야기를줄여서 간단히 보면, 살기 어려운 현실세계에서 사후보다는 현실을 자연 존재의 우월로보는 유물론의 입장이리고 보시면 대충을 맞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입장이 어렵게 되는 것은... 실제로파리 공의회(1210)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관한 저작 및 주해(註解)를파리에서는 읽지 못한다"라는 금령을 내렸고, 대학의 자치확립을 도운 교황조차도이에 동조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안되고, 그의 논리학만은 된다고 발표하여,스콜라 학자들은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릴 위험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토마스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3.7)로서 그가 "신에 관한 진리" 일체를 "자연적 이성"으로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가 죽기 직전(1270)과 죽은 후(1277) 파리 사교들로부터두 차례나 파문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서는 그의 해박한 지식으로 그리스트를옹호하고자 했지만, 교황청의 입장은 그 자체를 신에 대한 모독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다른 학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파문의 위험을 안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당시에 유행했던 논쟁 및 공개토론을 통해 줄기차게 계속된 이 스콜라철학이, 14세기이후, W.오컴, M.J.에크하르트 등이 등장하여 오직 하나의 신, 신비주의에 몰입되고쇠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발전하여, 지동설이나진화론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 과학에 끼친 공적은 높다고 하겠습니다.

(2) 중세 유럽의 대학

(가) 학생 중심의 볼로냐 대학

중세 유럽의 문화 산물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대학과교회건축양식, 그리고 의회제도를 꼽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대학이라는 것도 어느시기에 법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 세기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던문화적 산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스 로마에는 일찍부터 학문의 전통은 있었지만,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 또는 교수조직에 해당하는 대학(학교)은 없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 기라성 같은 많은 대학의 원조(元祖)로이탈리아의 볼로나 대학(Universita di vologna)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 (The universityof Paris)을 들고 있는데, 이 두 대학이 생겨난 것은 12세기경의 일이라고 얘기되지만이것은 추정일 뿐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는 문자가 아직은 라틴어밖에 없었기 때문에,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문맹(文盲)에 해당되었고, 국왕에서부터 하급 기사에 이르기까지대부분의 지배계급들이 문맹자 옅다고 합니다. 인구의 증가와 산업의 발달, 도시와화폐경제의 출현은 라틴어를 잘 아는 법률가, 또는 서기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현상을 가져왔습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라야 되겠지요.

이래서 학문의 폭이 넓어지자 볼로냐에서는 여러 가지전문 과목을 교수하는 교육기관이 등장하여, 법률학, 일반교양(자유 7 학과: 문법,수사, 논리, 산수, 기하, 천문, 음악), 의학, 신학 등을 다루어 종합적인 교육기관으로성장한 것이 볼로냐 대학입니다. 그런데 종합적인 교육이 대학의 특색이긴 했지만

오늘날 대학을 의미하는 유니버시티(University)가당시로서는 종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 유럽 상공 인들의 동업자 조합(組合),즉 길드(영:Guild, 독:Gilde, 프:Guildes)의 별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사 또는 학생의단체(조합)를 상공 인들의 이익 보호를 위한 같은 길드의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라틴어의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가 동업자 조합을 의미하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대학만을지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조합, 즉 우리베르시타스가왜 필요했는가? 라는 의문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독일 왕 하인리히 4세와 성직 서임권 문제로 투쟁할 때, 그의 이론을 뒤 바치기 위해서여러 법전을 조사하다가, 유스티니아누스법전에서 학술론찬(The Digest : 學術論纂)을발견하였는데(1076) 이미 볼료나 대학에서 강의되고 있었고,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유럽 각처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며,여기서 중세 최대의 법학자로 알려진 이르네리우스가 학설론찬을 근거로 해서 로마법의주석(註釋)을 행하고, 그라티아누스는 그것을 참고로 해서 로마교회의 법령을 편찬하였습니다.그로부터 볼로냐 대학은 로마법 및 교회법 연구의 중심으로 갑자기 변했습니다.

이때까지 교사와 학생이 있는 집단적인 교육기관은보편적인 배움터(Studium generale) 혹은 공통의 학교(Stadium Commune)로 불린데반해서 볼로냐에 모인 학생들은 그들의 단체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는의미에서 우니베르시스타라 부르고, 일차적으로는 시민들과 방세(房貰)를 두고 투쟁하였는데,학생들이 볼로냐에 몰리자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방을 구하는 사람은 많고, 방이모자라자 방세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이에 학생 대표는 볼로냐 시 당국자를 찾아가, 방세를내리지 않으면 다른 도시로 모두 철수하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대학이기숙사는 물론이고, 교실도 없이 교사 개인의 집, 교회나 공공 건물의 회랑, 광장등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다른 도시로 이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이를 관철시킨 학생들은 다음의 투쟁목표를 교사에게 돌렸습니다.

당시 대학의 강의 풍경은 선생이 강의(講義) 하면학생들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노트하여 이를 책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종이는 겨우 보급되었다고는 하나 그 값이 비쌌고, 인쇄술의 발달이 없었기 때문에모든 책은 모두가 필사 본이 였습니다. 따라서 책값이 여간 비싼 게 아니 여서 일반인들이책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 보다 훨씬 후가되는 14세기에 이르러서도, 교사의연봉이 50 후로린(플로린 : 피렌체에서 발행한 금화) 정도였을 때 책 한 권의 값이교사 연봉의 절반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정하에서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배움의 길에 나선 학생들에게 수업은 그 자체가 돈이었겠지요.

그래서 학생들은 교사(敎師)의 부실한 수업을 방지하기위해서 계약을 체결, 교사는 학생들의 허락 없는 휴강 금지, 시외로 나갈 때는 담보제공, 수업시간 엄수, 강의 충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 등을 요구하였습니다.이런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서 교사가 결국은 수용하였는데 교사로서도 학생들의 수업료하나에 모든 것을 의존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이 늘 상 학생들에게 당할 수만은 없었고,그들도 클레지아(collegia)라는 조합을 만들어 학생들의 우니베르시타스에 대항하였는데,collegia가 조직(Organization)의 뜻을 담고 있었고, 이것이 영어의 칼리지(college)로되었습니다. 이 칼리지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엄격히 심사하여, 그 질을 높였는데,심사에 통과하는 것이 학위(學位)가 되였고, 조직에 가입하는 것으로 교사로서 자격을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많은 학생들은 이 칼리지와 끌꺼로운관계가 되는 것은 학위 취득이나 교사가 되기 위해서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교사(교수)에게순응하게 되었고, 취득된 학위는 유럽 어디에서나 통용되었습니다. 이래서 대학은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학문의 전당이 되었지만 볼로냐 대학에서 학생 중심의전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 교사 중심의 파리대학

이런 대학의 사정이 알프스를 넘어서 프랑스로 가면사정은 정 반대로 나타납니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남 프랑스를제외하면 대학의 출발은 사교 교회의 부속학교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사교 교회에서는본사 승려(僧侶)단이라는 고급 승려의 단체가 있어서, 성무(聖務) 집행은 이 단체가책임졌고 따라서 이 단체는 새로운 승려의 교육까지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도 성가(聖歌)에 관한 것은 성가대장이 그외 일반학과(7개의 자유학과)는 문서국장이 맡았는데, 이런 교회의 부속학교가 13세기프랑스에서는 여러 도시에서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파리의 노트르담사원의 부속학교가 대학의 형태를 취하고 유럽 최고의 학부라는 영예를 차지하였습니다.

파리가 유럽의 정치 중심지가 되면서 유능한 교사들이이 곳으로 몰려들었고, 이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 역시 파리로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규모가 불어나자 학교가 노트르담 사원을 떠나, 센강의 프티 풍을 건너서 지금의 소르본느(Sorbonne)가 있는 라틴지구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학은 볼로냐와는 달리 교사단체가 대학의 중심을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사(master) 중심의 우니베르시타스에는 13세기 중엽 4개학부(인문, 교회법, 의학, 신학)로 나누고, 그 규모에서는 자유 7개 학과를 포함한인문학부가 가장 컸으며, 교양과정에 해당하는 7개 학과(문법, 수사, 논리, 산수,기하, 천문, 음악 등)를 이수하면 전문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전문과정까지마친 사람은 많지 않았고, 가장 규모가 큰 인문학부는 민족에 따라 4개로 나누고,각 학부에는 지금의 학장에 해당하는 딘(Dean)을 두었습니다.

파리대학의 또 다른 특징은 기숙사란 의미의 칼리지(college-houseof scholars)가 있었는데, 이것은 돈 없는 학생들에게 독지가가 무료로 제공하는아파트, 또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빌려 쓴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기서도교사(校舍)가 확보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칼리지가 차츰 강의실로도 이용하게되어, 지금의 기숙사와는 전혀 달랐으며, 루이 9세 때 궁정 교회의 사제가 소르본느에이런 유의 아파트를 세운 것이 후일 신학 부의 대명사처럼 되어 파리대학이 소르본느대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설비를 갖춘 대학으로 발전하지만,이 보다 뒤늦게 출발한 영국의 대학(college/university) 옥스퍼드대학(1167)과 케임브리지대학(1209)도초기부터 칼리지 중심이 였고, 교사 조직에서는 졸업장을 수여하는 일만 맡고 있었습니다.

중세 대학의 자치에 대해서는 볼로냐의 학생자치와파리의 교사자치로 나뉘는데, 파리대학의 교사 자치는 그 출발이 사교 교회의 문서국장책임으로 있어서, 학교가 노트르담을 떠나 라틴지구로 옮겼을 때도 그의 간섭에서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학생들 대부분은 사제이거나 수도사들이옅기 때문에 직 간접으로 교회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 살해 사건과, 경찰과의충돌에서 사망한 학생 문제 등이 일어났을 때 그 재판권을 두고 교회와 국왕이 마찰을일으켰으나, 결국은 국왕 필리프 2세가 굴복하여 재판권을 교회로 넘겼습니다(1200)이래서 대학은 일단 세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그 후 다시 교회와 투쟁하여,교황의 지지를 얻고 교회의 지배권을 크게 제한하는 결정을 얻어냈습니다(1213)

그 후에도 우여곡절을 여러 차례 겪고 나서 1231년에는대학이 교회로부터 완전 독립하여 자치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3) 연금술(alchemy : 鍊金術)

연금술 재현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하면 금(Gold)을얻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 근거는 금도 역시 다른 물질에서 변형된 것이라고보고, 값싸고 흔한 구리, 납, 주석 등을 다른 물질과 반응시키거나, 합치면 금이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꿈은 이미 기원전 알렉산드리아에서시작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체계화되어 중세(中世) 유럽에 퍼진 주술적(呪術的) 성격을띤 일종의 자연 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 같은 무렵 중국에서는 도교(道敎)에서 방술이라는게있었는데, 그 목적은 불로장생, 방법은 선단의 제조와 복용, 중국연금술이라고 할수 있는 선단(仙丹)은 그 성분이 수은, 이것을 만들어 먹었다가 황제를 비롯하여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서양연금술은 E. L.홀름야드에 의하면 금속전환을실현하여 사람에게 불로 장수를 부여하는 힘(아마도 중국의 영향)을 가진 철학자의돌(philosopher’s stone), 즉 다른 이름 엘릭시르(elixir) 또는 팅크제(tincture)의제출을 추구하는 실천적·현교적(顯敎的) 연금술과, 물질적인 금속전환을 단순한비유로 하고 기도와 귀의(歸依)에 의해 죄 있는 인간을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신앙의 한 방식이 된 신비적·비교적(비敎的) 연금술이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금속전환, 즉 화학을 의미하는 알케미는아랍어 알키미아 alkimia가 유럽어화(語化)한 것으로, 그 정관사 al을 제외한 어근kimia는 아랍의 말로는 검은 땅을 의미하며, 그 검은 땅이 이집트를 아랍 인들의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연금술의 본고장은 헬레니즘시대의 이집트,이집트에서 싹튼 것은 그리스 자연철학의 물질 관에 기초하여 금·은의 형상을 가열·증류·승화등의 수단에 의하여 추출하고 이것을 비금속의 질료에 부여하여 형상 전화를 실현하려하여금을 얻을 수 있다는 착상, 이런 착상이 이집트의 전통적인 고도의 야금 기술, 합금·착색에의한 금·은과 외견상 비슷한 재료를 얻으려는 금속 가공기술에 결합한 것이라고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집트·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등 중동지역의신비주의 관념과, 기술을 주술로서 파악하는 고래의 관념이 그리스 철학과 유착하고,여기에 덧붙여 천체와 금속을 관련짓는 점성술 사상도 포섭되어 연금술은 그 발단부터복잡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럽 세계에 이슬람 연금술을 최초로 소개한 것은로버트 오브 체스터(한때 에스파냐에 체재함)가 1144년에 완성한 라틴어역서 연금술구성의 서(書)라고 하며, 이것에 이어 많은 연금술 문헌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A.마그누스·R.베이컨도사술적(詐術的) 연금술을 비판하면서도 연금술의 이론을 지지 하였고,

R.룰루스 등의 이름으로 발간된, 대부분 위작(僞作)이라고여겨지는, 다수의 저작이 연금술에 대하여 과대·불명료한 기재를 하고, 한편 앞에서말한 연금술에 관한 많은 저작이 만들어졌습니다. 유럽 연금술을 화학의 전신이라는뜻에서 대표적인 저작은 앞의 자비르의 라틴어 이름 게베르의 이름이 붙은 비법집대전을 비롯한 일련의 저작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 까지 누구도 금을 만들지는못하였고, 다만 많은 실험을 통해 부수적인 화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에 많은 성과를얻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 칭기즈 칸의 몽고제국의 -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