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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리케
유행 지난 청바지 같은 날엔 언덕 위 카페로 가죠
테라스 너머 <지중해> 저편을 바라보며
케모마일과 루이보스 조각천을 잘라
은은하고 상큼한 스프링케모마일을 만들어요
따뜻한 물에 몇 번 흔들면 지루하던 봄날도
레몬그라스 향으로 플로팅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보내 준 갤러리 속 풍경을 만지작거립니다
최대한 실이 보이지 않게 공구르기를 하면
저 멀리 바흐룰 룸*이 펼쳐지지요
파도는 리본을 접어가며 해변을 덧대고
흐린 수평선을 박음질하며 조개껍데기를
등대 오른쪽에 배치하려다 솔기가 터져 버렸어요
문득 봄꽃 같은 당신이 떠오르고
그럴 땐 무작정 백사장을 걷지요
주머니 지퍼를 달기 위해선 노루발을 갈아 줘야 해요
어제는 휴일을 데리고 뒷산으로 갔어요
올 풀린 바람처럼 골짜기를 배회할 때
아왜나무가 왜 그러느냐고 말을 걸어 왔지요
진달래, 고깔제비, 양지꽃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찻잔 속에서 오늘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올 것 같진 않아요
그림자 하나가 오후를 끌며 살피꽃밭에 쪼그리고 앉네요
창밖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는 먼 훗날의 기억입니다
파랑이 없는 하루를 여행 가방 속에 밀어 넣어요
언젠가 바꿔 들었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오늘은
생크림 빵 위에 노을 한 점 디핑해봅니다
* 중세 아랍인들은 지중해를 ‘로마인의 바다’란 뜻으로 이렇게 불렀다.
오후의 편식
편의점 앞 고양이 세 마리가 늦은 점심을 그루밍 하는 시간
잠시
나른해진 오후의 한쪽 귀퉁이를 베어 문다 그건 오래된 나의 식사법
쏟아지는 메신저 알림음과 자동차 경적이며 분주했던 오전을 식탁 아래 밀어 넣고 소금커피에 샤벳상어 맛 쿠키를 찍어 먹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건널목을 건너가는 키 큰 여자의, 등 뒤를 종종거리며 따라가던 횡단보도가 천천히 제 자리로 돌아오고 책상 위 제라늄은 아까보다 더 나긋한 향기를 내뿜는다 모든 소란이 사라진 지금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5월의 정원* 속에는 샤스타데이지와 월계화, 흰 찔레꽃이 피어있고 층층이 포개어진 빈 황토 화분은 게으른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그 위로 참새들이 햇살을 쪼고 있는
그러니까 지금은 느슨해진 매트로놈의 아다지오 같은 것
오후 다섯 시, 그림자가 길게 제 키를 늘일 때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를 듣는다 음률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초록에 초록을 덧칠하고
대나무잎만 먹는 판다나 유칼립투스만 먹는 코알라처럼
청춘이었을 땐 꼬리를 울리는 방울뱀이었지만 지금은 소리가 사라진지 오래 차 주전자에 땅거미와 레몬 조각을 넣고 하루를 우려 마신다 가끔은 입가에 묻은 시든 페이소스를 떼 내기도 하면서
* 장임순 화가의 그림
보청기
귀를 등에 진 채 기어 다닙니다
껍데기는 얄팍하며 나사 모양의 줄무늬가 있습니다
소리를 먹고 사는 나를 두고 어떤 이는 와각지쟁을 논하기도 하지요
꿈에 내가 기어가면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고
바다를 건너면 세상 불가능하다 하고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을 땐 뚜껑 덮는다고 합니다
갈강갈강하던 각시는 할미 고듸가 되어
잘 들리지 않는 두 귀를 가을 부채처럼 뒷전에 던져둔 지 오랩니다
오늘은 흰머리 아래 주름진 둥지로 이사 가는 날
풀잎 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를 짊어지고
느릿느릿 가만가만 가는 길은 멀고 캄캄합니다
그녀의 삶도 더디게 살다 소리가 먼 길 떠난 뒤로는
말 주머니가 쪼글쪼글해져 더듬이 같은 눈썹을 찡그리며 입 모양을 듣습니다
달팽이 동굴 속에 내일을 틀면
어느 풀잎 위에 살았는지
쌉싸름한 상추 맛과 나리꽃 향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거친 길 위에서도 마음껏 기어 다니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生은 어떠했는지요?
어둠이 밀려올 무렵 할미는 막내딸의 안부 전화를 받습니다
“들리지 않는다” 무심하게 끊으면
휘영청 창밖엔 오늘따라 달이 밝습니다
소리도 없는 것이 어찌 저리 빛나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제 안쪽으로 껍질을 기울이면
세상의 모든 소리는 궁극에 닿는다는 것을요
백운대白雲臺* 이야기
가시덤불에서도 잠이 쏟아진다는 봄,
겨울잠에서 깨어난 산나물 뜯으러 어머니는 징검다리 개울을 건너가네 등 뒤로 병아리 같은 햇살이 아장아장 따라가고
마당에는 고사리, 취나물, 산나물이 널리고 싸리 울타리 넘어오는 바람에 흰 서답이 꾸덕꾸덕 말라가네
이팝나무꽃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적게 피면 흉년 든다고
145mm 운동화 신고 나비처럼 팔랑팔랑 소풍 가는 날 꽃그늘 아래서 수건돌리기, 장기자랑, 보물찾기하며 왁자한 긴 하루를 보낸 뒤
대문에 들어섰을 때 뉘엿뉘엿 지는 해가 내 그림자를 엿가락처럼 늘여 마당귀에 걸어놓네
하늬바람에 곡식이 모질어진다는 한 여름,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며 아버진 동트기 전 들녘에서 소 꼴 한 짐 져다 놓고 해가 뜨면 논 물꼬 살피고 잡초도 베고 어둑할 때 흙담 너머로 땀 내음 앞세우며 돌아오고
어머니가 가마솥에 쌀, 보리, 콩을 쪄서 말린 미숫가루는 한 철 별미고 대청마루 뒷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푹푹 찌는 날은 팔 둥둥 걷어 올려 풋살이라 하고
할머닌 밀가루 반죽을 한 후 긴 막대기로 널따랗게 펴고 밀어 우리 식구 다 배부르게 먹을 만큼 느름국수를 만들어 두레 밥상 위에 올려놓네 놋그릇 속으로 개밥바라기별이 동동 떠다니는 초저녁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가을,
일곱 식구 달라붙어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와랑 타랑 탈곡기를 밟으며 콩 타작 하는 날은 담 모퉁이 감나무도 용을 쓰느라 홍시는 더욱 붉어지고
시집 안 간 막내 고모는 성질이 있고 통통해서 금뚱이란 별명이 있었는데 모공이 넓다며 동동구리무 아줌마에게 몰래 보리쌀로 구리무를 바꾸었다 할머니에게 혼나고
하굣길 구불구불한 들길을 단짝 친구 혜경이 즉석 이야기와 함께 걸으면 길섶 꽃향유며 구절초, 금잔화가 귀 쫑긋하며 따라오고
입동에 서리가 내리면 매운 추위가 온다고,
김장하는 날 온 식구가 모여 절인 배추에 청각 갈치 버무린 속을 넣고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뒤란에 묻으면 기러기 떼는 서쪽 산 위로 눈썹이 되어 날아가고
산이 울면 눈이 내린다며 어머니는 서둘러 똬리를 머리에 얹고 우물가 물 한 동이씩 길어 드므에 채우면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밥솥에서 김 나는 소리 그럴 땐 기다렸다는 듯 동구 밖에서 첫눈이 오네
* 고향 지명
구름점방
사라진 것들은 어느 하늘 어귀에 살고 있을까
구름이 점방을 펼쳐놓은 곳이 있었다
동네가 시작되는 삼거리
백 년이나 넘었다는 느티나무는 두어 평 평상을 내어놓고
늙은 주인과 함께 자주 하품을 물었다
우루루 몰려온 참새 떼 같은 아이들은
작은 부리마다 츄파춥스 하나씩 물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루 서너 번 다니는 버스는 덜컹거리며 읍내 소식을 실어 날랐다
가끔씩 나무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길은 왜 세 개 뿐일까 생각도 하면서
자욱한 먼지 너머로 신기루처럼 보이던 먼 곳
두 개의 백열등을 개구리 눈알처럼 걸어놓고
밤이면 점방은 등대처럼 반짝거렸다
하루를 끝낸 아버지들은 막걸리 한 잔에 목을 축인
터벅터벅 흙내 나는 구름 하나씩 호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뭉게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 조개구름, 비늘구름, 면사포구름, 두루마리구름
언니 오빠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구름을 잡아타고
멀리 바다 넘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간간이 비릿한 갯내음이 마을을 다녀가곤 했지만
흘러간 시간들은 지금쯤 어느 곳에서 별이 되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녹슨 간판도 떼어지고
점방이 있던 자리엔 잡초만이 무성한데
이제 내어놓을 평상도 없는 느티나무는 굽은 허리를 더 굽힌 채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주름진 귓밥을 후비고 있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평
궁극으로 향하는 일상의 미학적 태도
ㅡ 최경선의 시에 대하여
최경선의 아플리케 외 4편을 읽었다. 그녀의 시적 역량은 세계를 인식하는 사유에서 발현된다. 응모작 5편에는 일상의 세목을 다루는 섬세한 감각들이 밀도 있게 직조되어 있다. 최경선은 안정적인 언어 사용으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과잉 없이 빚어낸다. 최경선의 시편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생활 언어와 심도 깊은 은유의 감각적 이미지 사용 방식이다. 이 작품들에서 감각은 단순한 묘사의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선별하는 윤리적 태도로 기능한다. 시간에 대한 일관적 질문 또한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특화된 능력이다.
「아플리케」에서 세계는 덧대고 박음질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 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감각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변주한다. ‘아플리케’라는 바느질로 ‘지중해’와 ‘플레이리스트’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유연하게 봉합하는 미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리본을 접은 파도가 해변을 덧대거”나 “흐린 수평선을 박음질하”는 그녀의 세계는 이미 수선물이 되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봄과 사랑, 여행과 기억은 솔기 터질 위험을 안고도 생크림 위에 노을을 디핑하는 감각을 허락받는다. 「오후의 편식」에서는 삶을 '우려 마시는' 방식으로 감당하는 시인의 삶에 대한 선언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거창한 서사가 아니라 순간의 미각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시에서는 시간의 리듬을 다루는 방식이 탁월하다. “식탁 아래로 밀어 넣”는 오전이나, ‘느슨해진 메트로놈의 아다지오’로 정의하는 오후에서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배열하는 시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브람스와 제라늄, 고양이와 판다, 코알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선택적으로만 세계를 수용한다. “청춘이었을 땐 꼬리를 울리는 방울뱀이었”던 화자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차를 우리는 오후의 느슨한 리듬을 따라가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보청기」는 가장 서사적이면서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작품이다. 상실된 청각이 결핍이 아닌 또 다른 완성의 형태로 제시되며, 노년의 삶은 연민이 아닌 존엄의 언어로 그려진다. 달팽이와 보청기와 노인의 귀를 넘나드는 은유가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청각을 잃은 노년이 결핍을 넘어 궁극에 닿는다는 정의는 존엄하기까지 하다. 제 안쪽으로 껍질을 기울이면 세상의 모든 소리는 궁극에 닿는다는 결말에 오래 머물게 되는 시다. 노년은 결국 연민이 아닌 감각의 완성이 되게 만드는 성숙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백운대 이야기」는 개인 서사를 넘어 구술사에 가까운 이야기다. 개인적 기억을 넘어 공동체의 노동과 계절의 시간을 구술사적 리듬으로 복원해 내는 특징을 통해 시인의 서사적 감각과 호흡 조절 능력을 확인하게 한다. 계절별 구성이나 속담의 활용과 노동의 리듬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이다. 특정 인물을 영웅화하지 않고 공동체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어서 더욱 의미가 깊은 시다. 마지막 ‘첫눈’의 도래는 자연의 사건이자 기억이 닫히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문득」에서는 멸종, 파괴된 숲, 저장된 씨앗을 통해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이 시에서 의자로 옮겨 앉는 화자의 행위는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자세를 바꾸는 결심이어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충분한 해답을 제시한다.
최경선의 응모작 5편은 덜 듣고 골라 먹고 천천히 걷는 슬로잉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 고향의 계절사,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사유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거창한 서사 대신 사소한 행위의 축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재구성한다. 오래 얻은 감각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는 봉합과 우림과 저장과 회귀와 방향 전환은 최경선을 신인상 당선으로 추천하는 데 충분하다. 언어의 밀도 또한 안정적이다. 생활어와 전문어, 식물명과 음악, 도구의 이름들이 과잉 없이 배치되며, 이미지들은 감각적으로 분명하면서도 상징적 무게를 확보한다. 다만 일부 작품에서는 이미지가 풍부한 만큼 행간의 여백이 다소 빽빽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이는 향후 시인이 감각을 선별하고 절제하는 훈련을 통해 더욱 단단한 긴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번 응모작은 이미 자기만의 미학적 태도와 세계관을 갖추고 있으며, 감상적 진술에 기대지 않는 성숙한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생활의 속도를 낮추고, 감각을 골라 쓰며, 세계를 조심스럽게 봉합하려는 이 시인의 작업은 오늘의 시단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출발점이라 판단된다. 이에 본 심사위원들은 본 응모자를 2026년 봄 애지 신인상 수상자로 선정하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최경선의 신인상 당선을 축하드린다.
ㅡ애지문학상 심사위원 반경환, 배옥주(글 배옥주)
신인상 당선소감 (최경선)
어디선가 눈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먼 곳이 그리웠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전나무 숲과 산타크로스마을과 지붕을 맞댄 골목, 다정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편의 동화처럼 떠올랐습니다. 눈이 귀한 남쪽지방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던 오후, 애지 신인상 당선 소식이 눈처럼 찾아왔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을 가만히 두 손으로 받았습니다. 혹시 꿈은 아닐까, 금방 녹아서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염려하면서도 가슴 한켠엔 아득한 것들이 밀려왔습니다.
삶은 늘 나를 힘들게 했지만 시를 만나고부터는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밀쳐두었던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며, 공연을 보고, 혼자 사색을 즐겼습니다.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고, 어떨 땐 단 한 줄의 문장도 만들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나를 다독였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시가 내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눈이 오듯.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모지母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애지>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뽑아주신 반기환 선생님과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애지 가족이 되어 오래도록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결같은 정성으로 지도해주신 김영식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여기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시를 쓰겠습니다. 그리고 늘 곁에서 응원해주는 가족들과 <시거리 시 창작반> 문우님들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창 밖 하늘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어쩌면 먼 곳을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