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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雨荷) 박문하 선생을 기리다
최 화 웅
1. 우하 박문하의 내력
우하(雨荷) 박문하(朴文夏.1918∼1975) 선생은 부산의 의사 수필가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 서거한 지 43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1918년 3월 13일 부산 동래에서 박용한(朴容翰)과 김맹련(金孟蓮)의 3남(문희, 문호, 문하) 2녀(수정, 차정)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용한은 구한말 동래 개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와 서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에서 일하다 일제에 항거해 자결한다. 박용한의 동생 박일형(朴日亨)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해방이후에는 인민위원회 경남도위원회 선전책으로 활동했다. 어머니 김맹련은 기장 출신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낸 한글학자 김두봉(金枓奉)과 제헌국회의원으로 월북한 김약수(金若水)와 사촌간이다. 그는 맏형 문희(朴文熺, 1901~?), 둘째형 문호(朴文昊, 1907~1934), 누나 차정(朴次貞, 1910~1944) 삼남매는 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친 의(義)로운 형제들이다.
그는 1958년 수필집『배꼽 없는 여인』을 시작으로 신문 잡지를 통해「약손」,「나무로 살자」,「잃어버린 동화」,「새벽에 돌아오다」,「사남매가 광복군으로」등 400여 편의 수필작품을 남기며 부산문단과 한국의사수필가협회를 이끌었다. 부산문인협회가 2014년 4월에 개최한 ‘제1회 찾아가는 시민 문예 강좌’에서 부산대 김정자 명예교수가 ‘살매 김태홍 시인’과 ‘김민부 시인’을 재조명하고 ‘제2회 시민 문예 강좌’에서 부산대 정약수 명예교수가 ‘독립투사가문의 의사수필가 박문하’를 회고했다. 이를 계기로 수필부산문학회에서는 정약수, 황선영 전회장과 우아지 편집국장이 그동안 우하 문학상 제정을 제안해온 문제를 정기총회에서 회원들의 폭넓은 의견을 들었다. 2018년 6월 6일 수필부산문학회 박희선 회장이 확대간부이사회를 소집하고 문학상의 명칭을 ‘우하수필문학상’으로 결정하고 7월 13일 2차 확대간부이사회에서 우하수필문학상 운영위원으로 정약수, 황선영, 정의륙, 최홍석, 최화웅, 우아지 등 6명을 위촉하고 기금확보와 구체적인 운영방안 등 현안을 협의했다. 제1회 우하수필문학상 시상식은 올 연말에 갖기로 했다.
2. 부산의 수필시대를 열다
그의 수필 사랑은 “글이란 참된 데서 피어나고 만드는 데서 시든다.”고 할 만큼 순수하고 솔직했다. 네 번째 수필집『낙서인생』(1972)의「수필이란 무엇인가」와「수필잡감(隨筆雜感)」을 통해 자신의 수필론을 피력한 바 있다.「수필이란 무엇인가」에서 “가슴으로 시를 쓰고 머리로써 평론을 쓴다면 수필은 두 다리로써 쓰는 문학이다. 생활의 바탕이 없는 수필문학은 공허한 기교에 불과하다.”고 말했고「수필잡감(隨筆雜感)」에서는 “바쁜 시간에 쫓기고 복잡한 생활에 억눌리는 사람들이 재미없는 현대소설을 멀리 하고 또 어려운 현대시를 도외시하면서도 짧은 시간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며 또 생활이 담겨있는 수필문학에 한층 많은 공감을 가지게 된다.”고 술회했다. 동아대 김병규 교수는「박문하론-생활의 체취(體臭)와 여백(餘白)」에서 ‘그의 수필은 여백의 예술’이라는 말과 함께 “기교를 모르는 무언의 자세로 조용히 인생의 여운을 풍기는 수필문학”이라고 평했다.
우하는『사상계』발행인 겸 편집인 장준하와 동시대인(同時代人)이다. 곧은 심지의 장준하는 필사본 잡지 『등불』에 이어 피난지 부산에서『사상』을 창간한다.『사상』의 맥을 이은 월간『사상계』는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담시〈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폐간처분을 받고 1975년 8월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한다. 우하는 어린 시절 독립운동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형제 따라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 뒤 가승(假僧)과 호떡장수, 병원조수로 일했다. 그는 독학으로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부산 동래 수안동 동래시장 건너편에서 민중의원을 열었다. 의사의 체험과 삶을 소재로『사상계』,『신동아』,『현대문학』등 월간지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오다 1963년 여름 광복동 ‘7커피’에서 김병규, 김일두, 오도환, 이남원, 정신득, 허 천 등과 함께 수필부산문학회를 발기하고 동인지『Essay』에 이어『隨筆』을 계간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태 뒤에는『輪座』발기동인으로 부산수필의 산파역을 맡는다.『輪座』창간동인으로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향파 이주홍과 요산 김정한, 시인 이영도와 교육자 김하득, 작곡가 이상근, 영화평론가 허창, 식물학자 이용기를 비롯한 다양한 인사와 어울렸고『輪座』창간동인지에는 최현배, 박경리, 박목월의 작품도 보인다.
그는 일찍이 “자기를 말하는 문장이면 그것이 곧 수필이고 사람에게는 각자의 감상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누구나 쓰는 것이 수필”이라고 했다.「수필은 문학의 부록이 아니다」에서는 “이제 시나 소설의 시대는 지나가고 바야흐로 수필문학의 황금시대가 막을 올리고 있다.”고 선언하고 제주대 안성수 교수는「수필문학론과 작법의 만남」에서 “시문학이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언어를 즐겨 쓰고 소설문학이 설명하기와 보여주기를 보완적으로 사용하는 서사적인 언어를 즐겨 쓴다면 수필문학은 시적 감성을 살린 간결하고 소박하며 담백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격조 있게 전달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그가 일찍이 선언한 수필문학의 황금시대 개막은 프랑스 비평가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가 “수필이 미래에 모든 장르를 흡수해 버릴 것”이라는 예상과 맥을 같이한다.
3. Essay와 Miscellany
르네 웰렉(Rene Wellek)과 오스틴 워렌(Qustin Warren)은『문학의 이론』에서 “문학의 장르를 작품이 참여하는 미학적 관습”이라 했다. 국어사전에서는 수필을 “일정한 형식이 없이 체험이나 감상, 의견 따위를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적은 글”이라고 했다. 금아(琴兒) 피천득은 1969년에 발표한「수필」에서 “수필(隨筆)은 청자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鋪道)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頹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溫雅) 우미(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수필가 이명지는 “피천득의 수필론은 한 마디로 맑고 투명하다. 그 맑고 투명함은 자잘한 돌 자갈 바닥이 훤히 보이는 시냇가에 송사리 떼가 놀고 있는 모습을 수채화로 그려 놓은 듯하다.”고 평했다. 수필의 ‘수(隨)’는 ‘따를 수’자에 ‘필(筆)’은 ‘붓 필’자로 글자대로 풀이하면 “수필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에는 끈질긴 생명력과 예술적 가치, 그리고 마르지 않는 깨우침을 이끄는 살아 있는 메시지가 스며 있어야 한다. 동양에서 수필이란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중국 남송시대 홍매(洪邁, 1123~1202)다. 서양에서는 동양의 수필보다 4세기쯤 늦게 프랑스 몽테뉴와 영국 베이컨이다. 이 무렵 유럽에서 에세이가 특별한 주제에 관한 학문적 시론(試論) 또는 소론(小論)으로 시작하여 그 의미는 ‘조사하다’, ‘음미하다’, ‘시도하다’라는 등의 뜻을 가지고 문학의 한 장르로 출발했다.
우리나라에서 수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시기는 고려 때 이재현의「역옹패설」(1342) 로부터 시작했다. 학계에서는 한국수필을 두고 서양의 중(重)수필(Essay)와 경(經)수필(Miscellany)의 복합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사립 옥성학교를 중퇴하고 13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서른네 살에 돌아온 삼오당 김소운의 귀국을 계기로 1963년 수필부산문학회의 동인지『Essay』창간과 동인활동이 공식적인 부산수필사의 출발이자 우리나라 수필문학의 효시였다. 이어 1965년 ‘여럿이 둘러앉다’라는 의미의 수필 동인지『輪座』의 창간에 우하를 비롯한 부산의 수필가들이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수필시대를 연 것이다. 우리의 현대수필 개념은 서양의 에세이보다 폭이 넓고 깊다. 우리의 수필개념은 기행문, 일기, 감상문에 유머와 위트까지 포함하여 그 폭이 넓다. 돌이켜보면 지난 날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우리가 맛보았던 주옥같은 수필문학작품이 나이가 들수록 그 감동이 새삼 사무친다. 그가 수필가로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청천 김진섭의 “산다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다.”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 시대의 우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4. 사남매가 광복군으로
그는 구한말 조국의 운명에 대해 애끓는 마음으로 자결한 아버지의 초상을 품은 다섯 자녀 중 막내 유복자다. 맏형 문희는 사립동명학교와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뒤 일본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동래지역 청년연맹’과 ‘신간회 동래지회’를 결성한 뒤 ‘신간회 중앙위원’으로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그는 일본관헌의 추격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50년 6월 실종된다. 그의 실종이 월북으로 간주되어 집안은 오랜 세월 주홍글씨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둘째형 문호는 ’동래청년연맹‘ 집행위원과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뒤 북경화북대학을 수료하고 의열단 단원이 되어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1935년 일경에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 받고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한다. 둘째형 문호는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래청년동맹에 가입한 뒤 지역청년운동에 참여하면서 동래누룩조합에서 일하다가 공금 1,500원을 가지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상해에서 외당숙인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을 만나 김두봉의 소개로 중국어를 배우는 동안 의열단장 김원봉을 소개받는다. 그는 화북대학 사회학부에 다니며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가입한다. 그는 1931년 베이징 일본공사관의 사회주의자 검거 선풍 때 체포된다. 그는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이나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에 관한 진술을 거부하고 동래누룩조합의 공금횡령죄로 우라카미 형무소에 수감된다. 출소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가혹한 고문으로 스물여덟의 나이로 순국했다.
그의 누나 차정은 항일구국단체인 근우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화북대학을 졸업하고 ‘태항산 호랑이’로 불리던 밀양 출신 한글학자 김원봉과 결혼, 동지가 된다. 그녀는 중국에서 생사를 건 무장 독립운동을 통해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한다. 그 뒤 조선혁명 간부학교 설립과 조선혁명당 부인회를 결성하고 “조선에서 자란 소녀들이여, 가슴에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을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는 내용의 교가를 작사한다. 그의 남편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서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였고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민족전선 의장으로 활동함으로써 민족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범우사가 펴낸 그의 추모 수필집『여백의 예술』에 실린「사남매가 광복군으로」에서 우하는 “제1차 임정요인 귀국 시에 김규식 박사를 만나 차정 누님이 8.15 6개월 전에 중국 곤륜산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쓰고 “그해 겨울 임정요인 2차 귀국 때 서울 한미호텔에서 자형 약산을 만나 누님의 유해를 앞에 놓고 둘이서 통곡했다.“고 전한다. 8살 위의 누나 차정은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를 졸업한 뒤 중국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순국한다.
차정은 여학교 재학시절 1928년 발간된 일신여학교 교지『일신』제2집에 단편소설이자 자전소설인「徹夜」와 시「개구리소래」, 그리고 수필「가을 아침」등을 남겼다. 시「개구리소래」에서 “천궁(天宮)에서 내다보는 한조각 반월(半月)이/ 고요히 대지(大地) 우에 비칠 때/ 우리 집 뒤에 잇는 논 가운데는/ 뭇개구리 소리맛처 노래합니다/ 이 소래 들을 때마다/ 넷 기억(記憶)이 마음의 향로(香爐)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떠러집니다/ 미지의 나라로 떠나신 언니/ 개구리소래 듯기 조화하드니/개구리는 노래하것만/ 언니는 이 소래 듯지 못하고 어듸 갓을가!”라고 읊었다. 시에서 나오는 ‘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 수정을 일컫는다. 한편 부산MBC는 1995년 광복보도특집「대륙의 들꽃, 박차정」(제작 신용헌 기자)의 방영을 계기로 박차정 의사 숭모회가 결성되어 생가복원과 동상건립이 활발히 추진된다.
5. 우하, 수필가의 길을 가다
요산 김정한은 그를 두고 “그의 수필은 쓰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쓴 글”이라 했고 권대근 박사는 동인지 ‘윤좌’ 창간 50주년 특집 ‘부산수필의 어제와 오늘’에서 “의사 수필가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린 박문하는 토속적 해학과 유머가 넘치는 수준 높은 수필집을 냈으며 부산문인협회장을 맡는 등 문학 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평했다. 2008년 부산문인협회가 우하 박문하 전집을 발간하면서 제14대 정인조 회장은 발간사에서 “우하는 재미있게 읽히는 수필을 썼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의 수필문학이 생활이 없는 문인들에 의하여 생활감정이 조작되고 표현이 날조에 빠져서 마치 서투른 정형수술을 받은 것처럼 되어 가고 있다.”고 탄식한 바 있다. 1975년 범우사가 펴낸 그의 추모수필집『여백의 예술』에 실린「사남매가 광복군으로」에서 그는 “1934년 둘째형과 함께 맏형과 차정 누나가 있는 상해로 밀항했다. 거기서 일경에 체포되어 문호 형은 끝내 옥사하고, 그는 두 해 남짓 고초를 겪은 뒤 미성년자라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본국으로 송환된 뒤 청도 운문사에서 한때 승복을 입고 가승생활을 한다. 그 뒤 병원조수로 일하면서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동래 수안동 동래시장 맞은편에서 개업한다. 그러나 실종된 맏형과 월북한 자형 때문에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되어 어느 하루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의 어린 시절 어린이잡지『별나라』동래지사를 맡아 활동했다.『별나라』는 동맹휴업을 모의하고 지역항쟁의 불씨를 지폈던 동래고보 학생들의 은밀한 독서회 조직을 품었고 동래지역 청소년들의 아지트가『별나라』동래지사로 시대정신을 이어갔다. 그는 폐간을 앞둔 1933년과 1934년 두 해에 걸쳐『별나라』지사장을 맡았다. 그의 첫 작품은 별나라 1934년 4월호에 실린 동시「우리들의 새끼기차」였다. 새끼기차 놀이는 동네 아이들이 새끼줄을 길게 두르고 기차 흉내를 내면서 노는 놀이였다.
6. 제4대 부산문인협회장을 맡다
그는 1963년 7월 전국 처음으로 부산에서 수필부산문학회를 결성하는데 발기동인으로 참여하여 동인지『Essay』창간의 산파역을 맡는다. 부경대 남송우 교수는 “수필동인회의 창간이 공식적인 부산수필사의 시작”이라고 평했다. 수필부산문학회는 2013년 11월 22일 부산일보 10층 강당에서 '창립 50주년 및 수필 80호 특집 발간 기념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정약수 회장은 "수필부산문학회야말로 수많은 단체 가운데 가장 '뿌리 깊은 나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욱 좋은 수필의 꽃을 피우고, 더욱 풍성한 수필의 열매를 수확해 가야 하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1965년 부산에서는 ‘윤좌(輪座) 동인회’가 창립 되어 새로운 부산의 수필시대를 꽃피웠다.『輪座』의 창간 동인으로는 향파, 요산, 시인 이영도, 우하, 솔뫼 등과 교육자 김하득, 작곡가 이상근, 영화평론가 허창, 식물학자 이용기 등이 참여했다.
그는 향파 이주홍, 청마 유치환, 요산 김정한에 이어 제4대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맡아 어려운 재정을 돕고 문인들의 친목을 다졌다. 그는 당시 사비로『부산문학』제5집〈부산의 작고시인특집〉,〈재부작가론〉,〈작고시인론〉등을 잇달아 출간하는 등 작고 문인을 재조명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첫 수필집『배꼽 없는 여자』(1958)를 통해 의사로서의 경험과 의학상식을 전하고 1963년 두 번째 수필집『인생쌍화탕』머리말에서 서울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던 아들 의언(義彦)이 여름방학 때 송정해수욕장에서 실종된 아픔을 “이 책이 출판되는 날 나는 모든 일 제쳐놓고 일 년 동안 한 번도 찾아가지 못한 송정바다로 의언이를 찾아가서 그 동안 참았던 울음을 실컷 울어볼 작정이다.”라고 써 애끓는 아버지의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세 번째 수필집『약손』(1965), 네 번째 수필집『낙서인생』(1972)을 펴냈다.
맹광호 초대 한국의사수필가협회장은 작고 의사수필가 5인의 수필선집『잃어버린 동화의 시절』발간에 즈음하여 “의사 수필쓰기 활동에 하나의 기폭제가 될 것을 확신하며, 평소 수필 읽기와 쓰기에 관심을 가진 다른 동료 의사들에게는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작고한 의사수필가는 그를 비롯하여 최신해, 이장규, 빈남수, 김사달 등 5인이 참여한 수필선집『잃어버린 동화의 시절』에는 등 5인이 41편의 작품을 실었다.『잃어버린 동화의 시절』을 출간한 한국의사수필가협회는 2008년 6월 수필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의사 37명이 모여 창립한 이후 7번째 합동문집을 출간하고 전국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수필공모전을 이어가고 있다.
7. 우하 평전을 마무리하며
일제의 탄압과 ‘빨갱이’ 마녀사냥이 혼란을 거듭하던 시대를 산 그는 가족의 기록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생가도 훗날 역사학자 신용하, 조동걸 교수로부터 전해 듣고서야 찾았다. 그는 6.25 때 군의관으로 지원 입대하여 야전병원에서 전상자를 돌보았다. 그러나 휴전이 되면서 구설수에 올라 군 특수기관에 연행되어 가혹한 심문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르고 전역했다. 그에게 심지어 “민중의원”의 ‘민중’자를 바꾸라고 강요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그는 처음 일간지와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이름이 알려지자 단행본을 펴냈다. 성문각이 펴낸『세계문예대사전』에서는 “우화의 수필은 어떤 것이나 재미가 있다. 그는 의창(醫窓)에 비친 많은 이야기를 르포 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에 대한 경종, 인간애의 향훈, 의학지식의 전달 등 다각적인 의미화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밝혔다.
그의 초기 수필작품은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발표한 작품「약손」과「나무로 살자」(1964),「잃어버린 동화」(1968),「손가락이 닮았다」(1972),「아내의 미학」(1973),「삼남매가 광복군으로」(1975) 등으로 인구에 회자했다. 1975년 그가 숨지자 국내 유명 수필가들은 추모 수필집『여백의 예술』(범우사)을 발간했다.『여백의 예술』에 참여한 필진은 김소운의「우하와 나」, 김사달의「우하 선생을 보내고」, 유병근의「우하 백자도」, 박연구의「박문하 선생을 보내고」, 후기는 한국수필가협회 조경희 회장이 맡아 “기교를 모르는 무언의 자세 속에서 조용히 인생의 여운을 풍기는 수필문학. 나는 그와 벗하여 인생의 여백을 메워가면서 조용히 살아가련다.”라고 썼다. 작가들 사이에는 ‘서로 경멸하는 풍토가 있다’는 말로 문인상경(文人相輕)이 회자한다. 우리는 옛 이야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현실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예외를 찾는다면 그가 바로 우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원들께서 몇 년 전부터 생각하고 의논했던 '우하 박문하 수필문학상'을 제정한 쾌거에 저도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손을 맞잡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