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0. 공감5시
제목: 횡성 운암정
1. 오늘은 황성군의 운암정에 대해서 소개해 주신다고요. 운암정, 귀에 익은 글귀입니다. 어디에 있는 정자인가요?
운암정은 허영만의 만화 <식객>과 드라마 때문에 유명해진 음식점 이름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운암정이라는 그 석 자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드릴 운암정은 횡성 섬강 옆에 있는 정자를 일컫습니다. 주소는 횡성읍 읍하리입니다. 횡성에서 춘천방면으로 오다가 보면 오른쪽에 있는데 금방 눈에 띕니다. 섬강을 가로지르는 횡성교를 건너자마자 산 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횡성은 한우로 유명하잖아요. 바로 현재 횡성한우축제를 매년 열고 있는 축제장에서 강을 건너다보면 바로 보입니다.
2. 정자가 산 밑에 있고 강 옆에 있으면 산과 강이 조화를 이뤄 더욱 아름답겠네요?
운암정 정자 뒤에 있는 산은 승지봉이라는 산입니다. 해발 300m정도로 등산을 하기에도 좋아 횡성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산 위에 올라 횡성읍내를 내려다보면 한 눈에 넓은 들이 들어와 경치를 감상하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막혔던 가슴이 탁 트입니다. 그런데 운암정 바로 아래는 온갖 돌들이 울룩불룩 솟아 강바닥을 장식한 섬강이 있습니다. 이 강은 운암정에서 내려다보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살이 눈을 부시게 하고, 그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노니는 모습이 가히 장관입니다. 그야말로 산과 강과 정자가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3. 정자가 지어진 데는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정자가 잘 알려지고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이유가 바로 정자 건립 유래에 있습니다. 유래에 의하면 이 지역에 사는 김종운(金鍾雲) 또는 김한갑(金漢甲)이라고 하는 사람과 이원직(李元稙)이라는 사람이 자수성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환갑을 맞아 지은 것이라 합니다. 지은 연대는 1937년입니다.
4. 1937년이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네요. 지어진 사연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되나요?
1977년에 출간된 태백의 설화 횡성편에 <雲岩亭의 由來>라 하여 다음과 같이 정자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습니다.
횡성에서 여러 대를 살아 온 김 씨와 이 씨 성을 가진 두 소년이 있었다. 두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성장하였다. 그런데 두 집은 모두 가난하였다. 그 때문에 이들의 우정은 서로 가난한 처지에 있어서 남달리 각별한데가 있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서로 비슷한 처지여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도 서로를 위해 주는 것으로 하였다.
“얘, 너 밥 먹었니.”
“먹기는 먹었으나 저녁에는 죽을 먹었다.”
“나도…”
조반석죽(朝飯夕粥)이라더니 그들의 생활은 항시 이런 빈곤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두 소년은 자라면서 어떻게든지 우리의 집안은 우리 힘으로 일으켜보자고 맹세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다부진 생각은 이상(理想)이기도 했다. 한번 부농(富農)이 되어 본다는 것, 세상에서 말하는 몇 백 섬을 누리는 지주가 되어보는 것은 농부의 최대 희망이었다.
두 소년은 어려운 생활에도 탈 없이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 이젠 농사일에도 어른의 한 몫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소년은 생각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모으면 부자가 되겠지. 부자라고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복운이 있는 것은 없을 터이니.”
그래서 두 친구는 서로를 격려하였다. 한 친구는
“야! 한갑(漢甲)아 우리 한번 목적을 세워놓고 뼈가 부서져라 일해 보자꾸나.”
원식(元植)이란 젊은이는 이렇게 그의 친구를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간의 결심이란 도중에 버리지만 않는다면 무서운 것이다.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봉당의 디딤돌을 뚫는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가난을 이겨 보자는 순수한 젊은이의 마음은 차라리 비장한 결의이기도 했다. 그들은 40대에 이르면서 서로 생활의 안정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횡성에서 제법 부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 후 10여년 동안 두 집은 수백석지기로 있었다. 어려서 뼈저리게 느끼던 가난 속의 굶주림에 도전하여 사나이 일대의 개가를 올린 것이다.
어느 덧 세월은 흘러 김, 이 두 사람은 환갑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상한 인생이라지만 노경(老境)에 접어들어 환갑을 맞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동기보다 절친한 김 씨와 이 씨 두 노인은
“우리가 세상에 나왔다가 죽마고우로 성장할 수 있는 것만도 인연인데 그 후 헤어지지 않고 이렇게 각자 자수성가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 뜻에서 내 고장에 오래도록 남길 기념을 하나 만들어 놓세.”
라고 이 노인이 이렇게 입을 떼어 놓았다. 그러자 김 노인도 기다렸단 듯이
“좋고 말고 거 잘한 생각일세.”
라고 하였다.
두 노인은 궁리 끝에 횡성강변이면서 푸른 산기슭인, 문자 그대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인 지금의 자리에다 아담한 정각 하나를 세우기로 했다. 이는 후세에도 소요객은 물론 전국에서 찾아올 시인묵객(詩人墨客)의 한유처(閒遊處)로 제공하려는 데서였다. 공사비는 둘이서 똑 같이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 해로 완성을 본 이 정자각은 김 씨와 이 씨 두 노인의 아호(雅號) 중 글자 하나씩을 따서 이름 하기로 하였다. 김 노인의 호는 운수(雲水)요, 이 노인의 호는 청암(靑岩)이었기 때문에 김 노인의 운자와 이 노인의 암자를 따서 정자 이름을 운암정(雲岩亭)이라 했다.(태백의 설화)
5. 가난한 젊은이가 열심히 일을 하여 부자가 되었고, 그렇게 자수성가한 기념으로 마을을 위해 좋은 일을 생각했다니 정말 모범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다는 자체가 좋은 생각이지요. 요즘 시국이 많이 좋지 않잖아요. 통치자의 무능이 제일 문제이지만, 그런 무능한 통치자의 권력을 등에 업고 사리사욕으로 국정을 농단한 몇몇 사람 때문에 많은 자괴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설화가 주는 교훈이 더 다가옵니다.
그래서 태백의 설화에서 이 이야기 뒤에 이렇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러한 정각은 당시의 행정책임자나 그렇지 않으면 이름 높은 선비들의 찬사로 風致 좋은 곳에 세우는 것이 通例이겠으나 이 雲岩亭은 그러한 事由에서가 아니라 한낱 無名의 두 農夫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데 특색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또 친구 간의 우정도 참 좋았고요, 서로 격려하면서 도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미담이 무엇보다도 아름답습니다.
6. 그야말로 서로 도와 열심히 살면 잘 살 수 있다는 큰 교훈을 주는 사례이네요. 횡성군에서는 이를 잘 보전해야겠네요?
그 때문에 강원도에서는 1984년에 6월 2일에 문화재 자료 17호로 지정해서 보전관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갔더니 보수를 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