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02년에 있었던 두 가지 일
(1) 허운 노화상 제자 맞습니까?
이 해 봄철에 등공 스님과 강릉 등 삼척에서 활동하는 보문회 신도들이 중국 복건성 선유현 큰스님을 찾아 방문했다. 큰스님의 안내로 큰스님이 중건한 여러 절들을 참관하였다. 이때 샤먼에서 여행사 직원인 한 한국인이 통역을 맡았는데,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은 한국 강원도 강릉에서 온 일개 사찰의 신도회장을 ‘한국불교신도회’ 대표부라고 소개한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선유현 관리들이 이 대표단을 극진히 대접하기 시작 하였다. 가장 좋은 호텔에 묵게 하고, 최고급 식당에 초대하는 등 마치 외국 사절단을 대하듯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공무원들이 이렇게 극진히 대접한 것은 ‘한국에서 온 대표단이 선유현에 투자하여 절을 지어달라’는 속내가 있었다. 당시 지방단체로서는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큰 과제였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한국 불교신도 대표단이 된 일행은 융숭한 대접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이리저리 안내받으며 환대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또한 적절한 절을 지을 수 있는 부지를 안내받고 싶다는 등공 스님의 요청에 의해 옛 절터 등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부지를 안내하는 것이다. 일행의 중국 방문은 현지에 당장 절을 지을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현지 공무원들은 외국에서 어떤 대표급이 현(한국의 郡단위)에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한 일이었다.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달 뒤인 음력 8월 보름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큰스님이 한국에 입국하시며 통역인 강거사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강거사의 연락으로 우리는 급히 인천공항에 함께 가서 큰스님을 영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 전 한국 불교신도회 대표단이 음력 8월 보름 한국에서 법회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고 초청해서 오셨다는 것이었다. 강거사와 나는 급히 큰스님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번호로 교대로 연락하며 확인하였다. 강릉 쪽 사찰의 신도회장이 거듭 연락을 받으며 응답하였다.
전혀 ‘그런 초청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왕 오셨으니 보름법회 때 큰스님을 모실 의향이라도 있는지 물어 봤다. 하지만 그럴 의도가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큰스님은 한국에 오기 위해 북경에 가서 며칠을 묵으며 한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고, 스스로 비행기 표까지 끊어서 왔는데 한국에서는 초청한 적이 없다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끼리는 통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고, 아울러 믿고 의지할 기관이나 통역이 없던 큰스님이 한국 다니기 얼마나 어려웠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고, 싫든 좋든 한국에 있는 통역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은 큰스님을 대하는 한국의 불교계도 마찬가지다. 말이 통하지 않아 수없이 많은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있었으며, 그에 따른 오해도 많이 생겼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우선 큰스님을 편히 쉬실 수 있는 강원도 영월의 망경산사로 모시기로 하였다. 망경산사는 작년에 다녀가셔서 벌써 가는 길의 중요지점을 알고 계셨다.
나는 오는 길에 차안에서 여쭈었다.
“허운 노화상 연보를 검토해 보면 관정 법사님의 법명이 어디에도 안 나옵니다. 사부님께서는 허운 화상의 제자가 맞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나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스님을 비판하는 다수 사람들의 물음이고, 중화권 인터넷에 들어가 보아도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해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큰스님에게 확실하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질문을 받고 큰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신 채 한참 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허운 스승님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다. 오랜 기간 동안 스승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었지...”
너무나도 진지한 모습에 우리 모두는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큰스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2) 중국 사찰 순례에서 생긴 일
2002년 11월 오송암 등정 스님을 비롯한 망경산사 스님들과 함께 큰스님을 따라 중국에 가서 큰스님이 창건하거나 중건한 사찰들을 순례하였다.
단체의 안내를 책임 맡은 나는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행의 일정은 바쁘지만 매우 즐거운 분위기였다. 한국에서는 강거사님이 통역을 해주었지만, 이번 여행에는 통역이 없이 큰스님과 한국 스님 5명이 함께하는 특이한 여행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글씨로 써서 이야기 하는 필담이 시작되었고, 필요하면 온몸을 써서 이야기 하고, 다급하니 큰스님이 평소에 전혀 쓰지 않던 영어를 쓰시기도 했다.
마지막 날 포전 광화사도 참배하고 선물구입도 한 이후 채식식당에 갔을 때 그곳에서 결국 약간 불미스런 일이 터졌다. 포전은 바로 큰스님이 태어난 곳이다. 「극락세계 유람기」에 보면, 큰스님은 이곳 읍내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큰스님 생가를 가보고 싶다고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글씨를 써서 ‘큰스님 태어난 곳을 가봅시다’라고 했더니, 갑자기 큰스님 표정이 굳어지면서 화를 내셨다. 우리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 가려면 돈을 내라’는 말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큰스님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주지로 있으며 일주일간 선정에 들었던 삼회사도 보여주었다.
극락 다녀올 때 몸을 찾은 미륵동굴도 보여주었다.
허운 화상 사리탑도 보여주었다.
동굴에서 수행하다가 극락세계 갔던 백사암사를 보여주었다.
내가 미리서 세운 나의 부도탑 연탑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나에 대하여 무엇을 더 추적하려 하느냐?’
사실 구선산 영취암사의 안내판이나 미륵대전에는 큰스님 관련한 소개와 사진도 걸려 있었고, 허운 노화상 사리탑에는 큰스님 글씨도 있었기 때문에 큰스님의 근본에 대하여 의심할 수는 없었다. 이번 방문으로 은근히 보이는 큰스님의 수행력에 감화되며 더욱 큰스님을 믿고 공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몇 가지의 확신으로서도 덮을 수 없는, 당시 국내의 큰스님에 대한 소문은 너무 나빠져 있었다. 예를 들어 큰스님은 맥사암사 가까이 있는 ‘석관정대화상 탑’을 보여 주셨지만,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이 보기에는 ‘석관정이란 스님은 이미 입멸하셔 탑이 섰고, 지금 이 스님이 그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솔직하게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현장에서 그 말을 했을 정도다.
3) 2003년 13차 . 14차 방문
(1) 너희들은 왜 나를 떠나지 않았느냐?
3개월 뒤인 이듬해 2월 큰스님은 13번째 한국을 방문하셨다. 그 때 마중 나온 우리를 보고 차에 타자마자 통역 강거사님을 통하여 물으셨다.
“중국에 다녀와서도 너희들은 왜 나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마중 나왔는가?”
마치 ‘중국에서 너희들이 나를 떠나버리도록 심하게 대했는데, 왜 아직 남아 있느냐?’는 어투였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사부님을 존경하고 믿습니다. 사부님을 부정하는 소문이 파다해도 지금 우리하고 마주하고 있는 분은 진정한 수행자라고 보기 때문에 우리가 사부님을 떠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중국 다녀온 후 더욱 사부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답변을 듣고 큰스님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묵묵하셨다. 통역 강거사님이 한국제자들이 큰스님 계시는 중국에 다녀와서는 종종 등을 돌린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충 설명을 하였다. 우리는 큰스님께 별도로 질문했다.
“그 때 포전현 채식식당에서 사부님 태어난 곳을 가보자고 했는데 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까?”
큰스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답하셨다.
“가 봐도 별 의미가 없지 않느냐? 거기 가면 모두 가난한데 어떻게 빈손으로 가느냐?”
만일 통역이 있었더라면 중국에서도 이처럼 간단하게 끝났을 이야기가 당시는 매우 큰 오해를 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도 그때 섭섭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큰스님을 떠나게 할 만큼의 사유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것은 사실 별개의 이야기이고,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그 뒤로 큰스님을 더욱 믿고 모셨기 때문이다.
(2) 대구 지하철사고
2003년 2월 방문 때는 서울 여래선원을 들려 망경산사에서 며칠 지내셨다가 영월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대구 광덕사로 가셨다. 나중에 강거사가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평소 관덩 스님은 저녁 공양을 하시고 나면 바로 주무시고, 12시에 일어나 씻은 뒤 조용히 참선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는 갑자기 소리 내서 우시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강거사가 깜짝 놀라 일어나서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처럼 펑펑 울면서 말씀하셨다.
“세상에 이렇게 불쌍할 수가 있나!”
“이곳 지하철에서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
“정말 너무 참혹하다.”
(3) 강거사의 통역 이야기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시자마자 2월 20일 서초구민회관에서 법회가 있었다. 이때 박병규 변호사의 주선으로 1,000명이 넘는 불자가 참여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때 대주 스님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다. 강거사님은 연변에서 태어나 중국어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반 회화는 능숙하지만 불교 교리에 대해서는 그래도 대주 스님이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국적인 강거사님도 큰스님이 심한 사투리를 쓰면 알아듣기 어렵다고 하는데, 큰스님이 불교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그것도 심한 복건성 사투리를 쓰면 대주 스님이 알아듣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다.
큰스님은 이틀 전 대구 지하철역 화재 사고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지 법문하시며 처음에 그때 희생된 영가들을 위해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다. 그러나 복건성 사투리를 얼마나 심하게 쓰셨는지, 대만에서 유학했던 대주 스님도 그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이렇게 통역했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지하철 타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강거사님이 이 통역을 듣고 놀래서 나에게 곧바로 들려준 이야기다.
강거사님 이야기 하나 더 덧붙인다. 어느 날 산책길에 길가에 있는 대추나무에서 대추 몇 개를 따서 큰스님께 드렸다.
“주인에게 허락 받았느냐?”
“주인이 없는 나무입니다.”
대답을 듣고 큰스님은 대추를 드시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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