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당시 영국의 낭만주의는 1700년대 말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아 개화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쓸던 1800 – 1850년 사이에 유행했다. 워즈워드와 코울리지가 공동 출간한 ‘서정 가요집’을 효시로, 이성보다는 감성,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자아와 개성, 상상력을 강조하고, 자연과의 친화와 이상적 삶에 대한 탐색 등을 특징으로 한다.
워즈워드와 코울리지 등은 프랑스 혁명 이후 산업혁명의 실용적인 사상에 휩쓸려 보수화된 경향이 있는데, 나폴레옹 전쟁 이후 바이런, 셸리, 키츠 등은 이에 반발하여 영국을 떠나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으로 이동하며 이상과 낭만주의를 지키려 했다.
이 세 사람을 영국 3대 낭만파 시인이라 한다. 이 무렵부터 중세의 이야기와 이국 정서 등에 비상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기존의 관습과 사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와 정열을 구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이런이 사망한 1820년대 초반 이후 영국 낭만주의는 급속히 쇠퇴했다.
< 윌리엄 워즈워드. 1770-1850 >
영국 낭만주의 문학을 개척한 시인. 호반 시인. 계관 시인.
잉글랜드 호수 지방의 아름다운 코커머스에서 출생. 그의 아버지는 초대 론즈데일 백작 제임스 로우더의 법정 대리인으로서, 일로 인해 자주 집에 오지 못해 자녀들과 서먹서먹하게 지냈다고 한다. 1778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만, 아버지마저 1783년 사망하여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이 그의 마음에 위안이 되었고, 이것이 그의 시작의 원천이 되었다. 자연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깊이 관찰하고, 사랑과 고요함을 노래하여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 된다.
1787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고, 1790년 유럽으로 도보 여행을 떠나 알프스 산맥과 그 주변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둘러보았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열광 속에서 이를 옹호했지만, 나중에 ‘공포의 시대’를 경험하고 나서는 환멸을 느끼고 보수적으로 변했다.
이 때 프랑스 여성 아네트 발롱과 사랑에 빠져 1792년 딸 카롤린을 낳았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에다 영불간 긴박한 관계로 인해 혼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정말 결혼하려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는 딸의 결혼(1816년) 이후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는 등으로 아네트와 딸을 최선을 다해 도왔다.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 입국이 허용되자 1802년 도로시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아네트와 9살 된 딸을 만났다.
1797년 콜리지와 사귀면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1798년 콜리지와 함께 출판한 ‘서정가요집’의 서문은 18세기 식 고전주의에 종말을 고하고, 영국 낭만주의를 여는 첫걸음으로 평가된다. 그 이전 신고전주의 시들은 내용이나 상상력보다는 형식과 이성을 중시하고, 교훈시나 풍자시 등의 목적성을 앞세운 시들이었다.
워즈워드는 위 시집의 서문에서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넘쳐 흐름’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이고,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가 좋은 시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평범한 삶에서 소재를 선택할 것과 일상 언어를 사용할 것, 평범한 일상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채색할 것‘을 주장했다.
1797-98년 사이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독일을 여행하면서 고독과 정신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간행된 ‘서곡’이란 자적적 작품과 ‘루시 시편’과 같은 대표작들을 쓰기 시작한다. 귀국 후 호수 지방, 시인 로버트 사우디의 집 근처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그와 교우한다. 그로부터 워즈워드와 콜리지, 사우디는 ‘호수 시인’으로 불린다. 이 시기 그의 시의 주제는 죽음과 이별, 인내와 슬픔에 관한 것들이 많다.
1802년 론즈데일 백작 윌리엄 로우더가 워즈워드의 아버지에게 빚진 4천 파운드를 지불했다. 이 돈은 그가 결혼하는 데에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어릴 적 친구 메리 허친슨과 결혼했다.
대표작으로는 ‘마이켈’, 시집 ‘서곡’, ‘무지개’, 추수하는 아가씨‘, ’소요‘, ’초원의 빛‘ 등이 있다.
1843년 영국 왕실이 임명하는 계관시인이 되었다.
1850년 80세에 흉막염으로 사망했다.
널리 읽히는 그의 시 두어 편을 소개한다.
- 무지개 -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설레느니.
내 어린 시절에 그랬고
나이 먹은 오늘에도 마찬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어버이.
바라노니, 나의 하루 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 초원의 빛 -
한 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 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초원의 빛’이란 제목으로 1961년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1920년대 미국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과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잘 생긴 부잣집 소년 버드(워렌 비티)와 가난한 식료품상의 딸인 청순한 소녀 디니(나탈리 우드)가 엮어내는, 청춘의 주체하기 어려운 열정과 풋풋한 사랑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펼쳐 보여준 명작이었다. 윌리엄 인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축구부 주장인 버드는 많은 여학생들의 인기를 얻고 있지만, 진정 좋아하는 소녀는 디니였다. 그녀의 집은 가난했지만, 총명하고 아름다운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혈기 왕성한 버드는 디니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 했지만, 독실한 기독교도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그녀는 이를 거절한다. 자존심을 상한 버드는 보란 듯이 다른 여학생들과 어울리고, 마음을 상한 디니는 집안에서 칩거 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숲 속을 산책하다가 어떤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의 부모는 딸의 상처를 감싸려고 애쓴다. 그녀의 아버지는 참으로 생각이 깊고, 안 그런 척 하면서 딸의 속마음을 세심히 헤아리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증상이 더 악화되어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 무렵 버드의 집은 파산하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해 간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두 사람은 엇갈려 각자의 길을 걸어 왔다.
버드는 식당 집 딸 안젤리나와 결혼하여 평범한 농부가 되어 있었다. 디니도 입원했던 병원에서 만난 남자의 청혼을 받아 결혼해 평범한 숙녀가 되었다. 우연이 그들은 만나게 했다.
둘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사랑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이제 친구로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기로 한다. 버드는 헤어지면서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어!’라는 말을 남기고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이 자막으로 흐르는 가운데,
‘사랑은 젊은 날 우리를 휘몰아치고 간 소나기인 걸’이란 디니의 독백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청춘은 아름답다고들 한다. 그러나 청춘은 사실 불안과 방황, 혼란의 시기이며, 그래서 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청춘들이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경험이 없는 관계로 앞과 주위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그들은 자신들의 열정이 시키는 대로만 달려나가기 때문에 어린 연인들의 운명은 서로 엇갈리기 쉽다.
우리는 이 열병을 잘 앓고 지나야만, 아픈 만큼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초원의 빛’이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영화와 TV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이경윤 감독, 윤정희와 최무룡 주연의 영화.
가난해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사용은 군 제대 후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던 순남과 결혼하지만 여전히 가난하다. 그들은 3년을 기약하고 각기 머슴과 식모살이에 나서 돈을 모으고, 200 평의 땅을 산다.
아들도 낳고 희망을 가꾸며 살아가는 데 사용이 폐병이 걸리고, 순남의 지극정성으로 병이 낫는다. .........
1997년 KBS 1TV에서 방영된 드라마.
1970-8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오누이의 삶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국인의 끈질긴 삶의 의지를 그린 것이다. 차광수, 유호정, 임채무, 현석, 박정수, 김규철, 윤유선, 전광렬, 엄유신 등이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