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품정리사의 기록
관심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는 중앙일보의 역량을 모아 마련한 지식 구독 서비스입니다. 더중앙 독자에게 오늘 하루만 무료로 전문을 공개합니다. 더중앙플러스(https://www.joongang.co.kr/plus) 구독 후 더 다양한 콘텐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난히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었다.
철썩철썩. 파도도 거칠었다.
내가 도착한 현장은 한적한 해변가 도로였다.
겨울이 오기 전이었지만 바닷바람이 매서웠다.
이런저런 곳에서 유품정리 의뢰를 받았지만,
이번에 다소 의외의 장소였다.
해변가 차량 속 유품을 정리해 달라니….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전화로 전해 받은 현장은 비교적 쉽게 찾았다.
평일 낮에 해변가 도로에 차량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누군가는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끔찍한 기억을 남기게 됐다.
차량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여니 매캐한 냄새가 훅 밀려왔다.
맵고 싸한 향에 시취가 흐릿하게 잠겨 있었다.
가장 먼저 블랙박스를 확인했다.
실종신고가 돼 있었을까, 가족은 있을까.
그날의 흔적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6일 전 밤이었다.
밤바다에 차를 세워둔 40대 초반의 남자가 뚜벅뚜벅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돼서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아마도 어디선가 밤새 술을 마신 것이리라.
그의 손엔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보이는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차를 탔고 시동은 켜지 않았다.
그것이 남자의 마지막이었다.
빈 차량엔 빈 맥주캔들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희거무튀튀하게 연소된 그것이 재로 남았다.
트렁크 안에서 커다란 박스 두 개를 발견했다.
열어 보니 옷가지며 개인 물건들이 가득했다.
뭔가 남기려 했던 유품이라기보다 그냥 도피 중인 사람의 물건 같아 보였다.
뒷좌석에도 쓰레기와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했지만,
어쨌든 간단히라도 정리를 해둬야 했다.
곧 오기로 한 견인기사를 배려하기 위함이다.
내겐 익숙하지만 남들에겐 평생 한 번 있을까 싶은 일이기 때문에….
유품은 고인을 아는 이들을 제외한 타인에겐 공포스럽다.
혐오스럽기도 하다.
남들의 눈에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
아무 관련 없는 타인의 기억에까지 남게 할 필요는 없는 장면이다.
물건들을 추슬러 담다가 흰색 종이가 보였다.
차량에서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쪼가리.
유서였다.
발견하는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글이었다.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꼭 전해 달라고.
짤막한 내용과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다.
(자신을 발견할) 경찰관에겐 미안하다는 글도 남겼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은 이런 내용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절대로, 제발 살리지 말아 달라고.’
죽음에의 의지가 무겁게 담긴 부탁으로 글이 마무리됐다.
나보다 앞서 시신을 발견하고 이송하고 차량을 확인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편지를 발견하거나 읽지 못한 듯했다.
경찰이 고인의 신상과 관련된 물건들을 전부 가지고 갔지만,
차 안에선 무슨 교육이수증 같은 게 남겨져 있었다.
고인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었다.
이름과 나이를 알게 된 순간 시신은 지인처럼 말을 걸어온다.
유서를 붙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유서 ‘수취인’의 연락처까지 남겨 놓은 것이 문제였다.
고인이 남긴 것을 전하고 말고 결정할 자격이 내게 없음을 떠올렸다.
나는 유품정리사다.
내 맘대로 유품의 처분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유서의 수취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씨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씨 맞으시죠?”
긴 숨소리에 이어 본인을 확인하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돌아가신 ×××님의 차량 정리를 맡은 업체 직원입니다.
차 안에서 고인의 유서를 발견했습니다.
○○○님께 꼭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적혀 있어서요.”
“네. 결국 그렇게 되었네요. 알겠습니다.”
상대는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까.
혹시 너무 많이 울면 어떻게 해야 하나.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어느 부분까지 알려야 할까.
별생각을 다 했던 것에 비하면 퍽 허무한 통화였다.
차 안에 있던 짐과 짧은 유서만으로는 이 남자와 그녀의 사연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냥, 왠지 이 사람들은 살아서도, 함께해서도 외로웠겠구나 싶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관계는 있다.
함께해서 병들어가는, 지독하게 외롭게 만드는.
사랑은 희생의 결실이라고 했는데,
누구의 희생과 어떤 결실이었을까.
해변가 바람은 거셌지만, 파란 하늘은 높디높았다.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었다.
그들의 거리처럼 말이다.
더중앙플러스- 더 많은 정보를 보려면 아래 기사를 클릭하세요.
남친과 절친의 ‘잘못된 만남’…바퀴벌레 속 그녀의 일기장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4338
손주 다락방 꾸미던 할아버지…죽음은 ‘악마의 설계’ 같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003
비싼 ‘오피’ 살던 사업가 죽음…수상한 이혼 서류 나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9638
아빠 시신 수습 거부한 아들…돼지저금통 배는 뜯겨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2778
월 400만원 벌던 배달 기사, ‘소주병’ 무덤에 가둔 실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6963
어느 유품정리사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