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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11.28
조선의 셰프들
▲ 1892년 궁중 잔치 때 고종에게 올린 안주상을 재현한 모습. /국립고궁박물관·국가유산청·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이 내년 2월 2일까지 '궁중음식' 특별전을 열고 있어요. 전시에선 1892년 고종 임금의 만 40세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왕에게 올린 음식 63가지를 재현해 주목을 끌고 있는데요. 조선 시대 임금은 식사를 하루 평균 다섯 번 했다는 설명도 나옵니다. 한식이 'K푸드'로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지금, 옛 궁중 음식을 만들었던 이들이자 '조선의 셰프(수석 요리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궁중 음식의 최고 셰프, 대령숙수
숙수(熟手)의 사전적 의미는 '잔치와 같은 큰일이 있을 때 음식을 만드는 사람, 또는 음식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요리사였던 것이죠. 그런데 조선 시대 육조(국가의 정무를 나눠 맡아 보던 여섯 관부) 중에서 이조(吏曹)의 산하 기관이었던 사옹원(司饔院)이란 곳이 있었어요. 이곳은 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에 속해 있던 요리사들을 '대령숙수(待令熟手)', 줄여서 '숙수'라고 불렀습니다. '대령'이란 임금의 명을 기다린다는 것이죠.
숙수는 남성이었어요. 신분이 양반과 천민 사이의 중인 계층이던 이들은 종 6품에서 종 9품까지 중하급 벼슬을 지녔고, 세습을 통해 대대로 그 지위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숙수의 아들이 대략 열 살이 됐을 때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배우게 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이런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니 이른 나이에 경력과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과정을 통해 식재료에 대한 지식, 지역 특산물에 대한 이해, 제철 음식을 쓰는 요령 등을 하나하나 익혀 갔을 것입니다. 또 중식과 일식 등 주변 나라 음식의 특징, 맛과 영양이 배합된 조리 방법, 의례와 절차에 걸맞은 음식 배치 등도 배워 레시피를 만들었을 거예요.
이들은 궁 밖에 살면서 궁중 잔치인 진연(進宴·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베풀던 잔치)이나 진찬(進饌·진연보다 규모가 작은 잔치) 때 입궐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임금에게 올리는 밥상을 높여 이르는 말이 '수라상'인데요. 평소 수라상은 대궐 안에서 음식을 만들던 소주방(燒廚房)에서 지었어요. 이 소주방이 유명 드라마 '대장금' 전반부의 주요 무대입니다.
대령숙수는 남자, 소주방 노비들도 남자
소주방을 떠올리면 궁녀를 비롯한 여성들이 주로 드나드는 장면이 연상되겠죠? 그렇지 않았습니다. 숙수가 남자이듯 이곳의 출입자도 대부분 남자였어요.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라간의 남녀 성비가 15대1이었죠. 또 세종 때 수라간에 출입하던 노비 388명 중 370명 이상이 남자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음식을 많이 만드는 것은 매우 고된 육체 노동이었기 때문에 당시엔 '남자들의 일'로 여겼다는 거예요.
소주방 업무는 평소의 음식 준비였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날에는 역시 최고의 '셰프'였던 대령숙수의 손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때 대령숙수는 임시로 지은 주방인 가가(假家)에서 음식을 준비했어요.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의 세트장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러니까 대령숙수의 일이란 요즘으로 말하면 고급 출장 뷔페 서비스와 닮아 있었습니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의 특별전에서 볼 수 있는 전시물 중에서 '선묘조제재경수연도'라는 다섯 폭짜리 옛 그림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7년 뒤인 1605년(선조 38년) 열린 경로잔치의 모습을 자세히 그린 그림인데요. 자세히 보면 숙수들이 요리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담장 밖에 만든 임시 주방에서 바삐 불을 지피고 음식을 조리하는 모습이에요.
이후 조선 후기에 궁궐 요리사들의 업무는 세분화됐다고 하는데요. 대령숙수 말고도 떡과 한과를 만드는 조과숙수, 소주방에서 일하는 주방숙수, 이 밖에 세면장(국수 담당), 상화병장(만두 담당), 죽장(죽 담당) 등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궁궐 담장 밖으로 나온 궁중 요리
이렇게 궁중의 잔치 음식을 만들던 숙수는 상근직도 아니고 일이 있을 때마다 출퇴근하는 것이니 편한 직책 아니었겠느냐고요? 글쎄요. 나라의 행사에서 아주 중요한 음식을 맡았으니 무거운 책임도 뒤따랐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땠을까요.
'고종실록'을 보면 1903년 임금에게 올린 수라상 음식 중 생홍합에 들어 있던 모래 때문에 황제의 치아가 상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당시 이게 상당히 아찔한 일이었는데, 고종은 불과 5년 전에 하마터면 독을 든 커피를 마실 뻔했으나 냄새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마시지 않아 암살 위기를 모면한 사건을 겪었거든요. 더군다나 당시는 기울어 가는 나라의 위상을 억지로 높이기 위해 궁중 잔치를 비롯한 국가 행사에 무리하게 예산을 쓰던 때라 사고에 대한 분노는 더 컸을 것입니다. 신하들은 홍합을 올린 숙수 김원근 등 관련자에게 태형과 징역형을 내릴 것을 건의했으나 임금은 유배형 정도로 그치게 해 줬다고 합니다. 고종이 이름난 미식가였던 것을 미뤄 볼 때, 모래가 섞이긴 했어도 음식은 꽤 맛있었던 모양이에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가 되자 여러 숙수가 궁중에서 일자리를 잃고 민간의 고용직 요리사로 변신해야 했습니다. 안순환(1871~1942)은 '마지막 대령숙수'였다고 부정확하게 알려진 인물인데요. 요리사라기보다는 관리 출신의 요식업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환국(대한제국 때 화폐 주조를 맡던 관아) 관리였던 사업가 안순환은 1903년 지금의 서울 세종로사거리 일대인 황토마루에 '명월관'이라는 2층 양옥 요릿집을 개업했습니다. 바로 이 식당에 숙수들이 고용돼 궁중 음식을 내놨다는 것입니다. 한정식이라는 메뉴가 이때 처음 개발됐다고 해요.
명월관이 명성을 얻자 안순환은 1908년 대한제국의 궁중 음식 담당 책임자로 임명됐습니다. 명월관에 대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식당이자 일반인들이 비로소 궁중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장소'였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궁중 음식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마련됐던 셈이죠.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은 명월관의 분점이었습니다.
▲ 경복궁 소주방 일대의 모습. 임금에게 올리는 ‘수라상’은 이곳에서 만들었어요. /국립고궁박물관·국가유산청·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선조 때 열린 잔치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일부. /국립고궁박물관·국가유산청·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대한제국의 요식업 전문가 안순환. ‘명월관’이라는 근대 요릿집을 열어 숙수들을 고용, 궁중 음식 대중화에 나섰어요. /국립고궁박물관·국가유산청·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오주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