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충신 박제상과 돌이 되어 사랑을 증명한 박제상 부인
곱게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만 어딘가에 슬픔이 배어있다. 낙엽이 겨울을 불러오기 때문이리라. 늦가을에 바쁜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박제상유적지를 찾아 길을 떠났다. 선바위에서 허고개를 넘기까지의 길은 참으로 멋있다. 고개가 높으니 골짜기가 깊고 나무가 많으니 사계절 어느 때고 좋지 않은 때가 없지만 특히 가을에는 단풍으로 아름답다.
울산에서 문화관광 해설을 하면서 가장 힘든 곳이 박제상유적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망부석이 두 개라던데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신모사지는 어디입니까?”, “백결선생이 박제상의 아들이 맞습니까?”등의 난처한 질문이 쏟아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박제상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골격으로 하고 설화로 살을 붙인 것이기 때문에 진위를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자신이 아는 것을 해설사가 어떻게 답하는지를 테스트하려는 짓궂은 관광객도 있다. 이래저래 해설사의 애환만 쌓여간다.
박제상(朴堤上)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일본서기 등에 나와 있다. 신라 제18대 실성왕(實聖王,재위402-417년)에 의해 내물왕(奈勿王, 재위356-402년)의 아들인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이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들의 형인 신라 제19대 눌지왕(,재위417-458년)이 즉위한 후 두 동생을 구해올 적임자로 지략이 뛰어난 양산태수 박제상이 발탁되었다.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 장수왕을 설득해 복호를 구해왔지만, 눌지왕이 미사흔을 마저 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지라, 고구려에서 돌아온 뒤 처자도 찾지 않은 채 곧바로 왜국으로 건너갔다.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뒤쫓아 갔지만 이미 배가 떠난 뒤라 대성통곡을 했다. 그 배가 떠난 자리로 알려져 있는 울산 강동 유포석보에 발선처 비가 있지만 경주 남천 변 장사 벌지지를 발선처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왜로 간 박제상은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왔다고 일본 왕을 속이고 신임을 얻은 다음, 미사흔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본인은 잡히고 말았다. 왜왕은 박제상이 자신을 배신하고 미사흔을 탈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갖춘 그의 충성심에 감복하여 신하로 삼으려고 회유했다. 그러나 박제상이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저항하자 온갖 고문 끝에 화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어느 누가 박제상을 만고충신으로 추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눌지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그에게 대아찬이란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봉했다. 대아찬은 17관등 가운데 다섯째 등급의 벼슬이다. 미사흔에게는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아 은혜를 갚게 했다고 한다.
박제상 부인은 남편이 왜로 떠난 후 날마다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박제상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슬픔과 원한을 이기지 못하여 두 딸과 함께 죽게 된다. 몸은 치술령에서 바위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치술령 남쪽 국수봉 아래 바위틈으로 날아가 숨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새가 숨은바위’라는 뜻인 은을암(隱乙巖)이라고 부른다. 또 박제상유적지 근처에는 새가 날아갔다는데서 유래한 비조(飛鳥)라는 마을이 있다.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령의 신모(神母)라 하고 신모사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조선 영조 21년에 나라에서 박제상 가족의 넋과 혼을 기리기 위해 치산서원을 세웠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졌다.
현재의 치산서원은 1992년에 복원되었다. 서원 뒤로는 병풍 같은 산이요,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으니 명당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서원과 망부석, 은을암을 아우르는 박제상유적지는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치산서원 앞 홍살문을 지나면 정문인 삼강문(三綱門)이 맞아준다. 이 문은 유교의 기본 도덕지침인 삼강오륜 중 삼강을 의미한 것으로 박제상의 충절, 부인의 정절, 두 딸의 효절을 강조한 것이다. 삼강문 안으로 들어가면 가운데에 공부하는 장소인 관설당이 있고 좌우에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관설당 뒤쪽에는 박제상의 위패를 모신 충렬묘, 부인을 모신 신모사와 두 딸을 모신 쌍정려가 있다. 3동의 사당을 나란히 배치하여 사당 군을 이룬 것은 박제상 관련 이야기를 반영한 독특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 옆 건물은 2008년 9월 개관한 기념관인데, 박제상 스토리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나타낸 영상물과 패널이 마련되어 있다. 삼모녀상과 박제상추모비를 기념관 앞 뒤쪽에 마주보게 설치해 애절한 사랑을 형상화해 두었다.
치산서원을 뒤로 하고 치술령으로 향했다. 평이한 서북능선 코스를 택했다. 나무들 윗부분엔 늦가을 단풍이 고운 모자를 쓴 듯 했고, 바닥에 누운 갈잎 카펫을 밟으니 눈 위에 설피를 신고 걷는 듯 신비롭다. 서원에서 숙연했던 마음과는 달리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라는 시구가 절로 읊조려진다.
깔딱 고개가 없는 산은 없는가 보다. 온 몸이 땀에 젖었지만 왠지 싫지 않다. ‘치술령 765m’란 표지석이 나타났고 그 옆에 신모사지비도 보였다. 지난 10월 경주 지진에 경계석이 빠져나와 두 곳이 훼손돼 있었다. 이곳이 박제상 부인을 신모로 모셨던 장소라고 생각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찡하다. 신모사지가 여기가 아니고 치산서원 옆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50m쯤 내려가면 망부석인데 경주 망부석이란다. 정상에 오르기 300m 전쯤 울산 사람들이 주장하는 망부석이 있어서 구분해서 부른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망부석에 올라 여기가 그 옛날 박제상 부인과 두 딸이 박제상을 애타게 기다리던 곳이었냐고 바위에게 물어봐도 묵묵부답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바라다보니 박제상 부인의 그리움, 기다림, 초조, 불안함, 안타까움, 억울함 등의 감정이 전해져 온다. 한 번 오르기도 힘든 산을 날마다 올라서 동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부인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이혼을 밥 먹듯 하는 오늘의 세태에 세찬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3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은을암으로 차를 몰았다. 산길은 가파르고 구불구불했다. 새가 되어 숨었다는 바위 틈 속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박제상 부인의 혼은 여기에 숨어들어 조용히 쉬고 싶었나 보다. 남편이 그리우면 망부석에 날아가 동해를 바라보다 왜국을 드나들며 원통하게 죽은 지아비의 혼과 만나려 했을까.
16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지금 새가 된 부인의 후손 새들이 아직도 애절한 울음을 운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울음이 아니다. 부인의 혼이 부르는 승화된 사랑의 노래를 흘린다. 은을암 옆 종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멀리 치술령이 올려 보이고 온통 산들이 발아래다. 탄성이 절로 나고 무겁던 마음이 홀가분하다.
박제상에 대한 수수께끼는 너무나 많다. 왜로 배가 떠난 곳, 신모사지와 망부석의 위치,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어디인지가 궁금하고, 영해박씨 족보가 전하듯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 박제상의 아들이 맞는지가 그렇다. 새로운 역사적 증거물이 발견되지 않는 한 영원한 숙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박제상의 충절, 그 부인의 정절과 아이들의 효절은 길이 천추에 남을 것이다. 이쯤 하면 관광객의 까다로운 질문에 답이 되었기를 기대한다.
지난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다. 나라가 시끄러워 개탄스럽다. 이제는 박제상 같은 충신이 나오기란 어렵겠지만 국민 모두가 자기자리에서 맡은 바 본분을 다하여 국력 신장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낙엽이 진다. 지는 단풍이 곱듯 사라져간 충신의 빛깔도 너무나 아름답다.
첫댓글 현세에는 박재상같은 우직한 충신은 어림없지요
당시나 지금이나 권력에 아첨하고 눈치만 살피는 기회주의자 간신은 우글우글하지만
가족까지 버려야 하는 그러한 충신은 불가능이 정답이겠지요
다시 한번 고대사 복습하고 갑니다
최고의 독자님 감사합니다.
산을 사랑하는 64동기님 들이라서
문화재 사랑도 다른가 봅니다.
많이 읽어 주시면 다음 편도 올릴게요.
다음편은 12월 30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