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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밤 광주역에서 붙잡혀
증언자 : 김용완(남)
생년월일 : 1962.(당시 나이 18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8
개 요
5월 15일 앨범사진을 찍으려고 나왔다가 공수들이 학생들을 때리는 것을 보고 가두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5월 19일 광주역 앞에서 공수들에게 두들겨맞은 후 심한 머리부상으로 전남대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매일 진통제를 복용하며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공수들의 만행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요
5월 15일 졸업 앨범사진을 찍는다고 오전 11시까지 광주공원으로 나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광주공원으로 나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도 한 분 나오지 않았다. 40분 정도를 기다리다 최동철이라는 친구와 함께 광주극장 쪽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건너가던 중 상업은행 쪽에서 시위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골목으로 몰리는 것을 보았으며, 전경들이 학생들을 때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대학생들에게 동정이 가기까지 했다.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들이 시민을 보호하기는커녕 두들겨패는 광경을 목격하고 나는 가두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18일 오전 11시쯤 산수교회를 다녀온 후 운동화를 신고 주황색 트레이닝을 착용하고 중앙국민학교 쪽으로 걸어가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계엄이 내렸다", "전두환이가 권력을 잡으려고 그런단다"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 중앙극장 사거리에서 장갑차, 지프차, 트럭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해산하라"고 소리치고 경상도 말투가 거칠게 튀어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시민들은 흩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공수들은 갑자기 보이는 대로, 잡히는 대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나는 중앙국민학교로 도망을 갔다. 시민들은 기회가 생기면 '계엄해제'를 외치며 투석했다. 1시간 정도 지나 담을 넘어 밖을 보니 공수들이 그때까지도 잡힌 사람들을 구타하고 있어서 다시 담을 넘어 들어와 정문으로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19일 오전 수업 1시간을 마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시내로 나갔다. 11시쯤 충금지하상가 앞에서 시위대와 공수들간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에는 구경을 하다가 돌을 던지는 시민들과 함께 공수들에게 맞섰다. 공수들이 쫓아올 것 같으면 얼른 충장로 골목으로 도망가고, 공수들이 물러나면 나는 다시 대로로 나와 돌을 던졌다. 공수들은 시위대가 있는 곳으로 최루탄을 쏘아댔으며 간혹 터지지 않고 굴러다니는 것도 있었다. 이때 나는 최루탄을 흠뻑 마시고 한참 동안 콜록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의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터지지 않고 굴러다니는 폭동진압용 최루탄이었다. 나는 얼른 쥐어서 던졌다. 공수들을 향해 날아가던 최루탄은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광주역 쪽 공수들을 밀어버리자
20일 도청 앞에서 차가 부딪혀 불타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한참 동안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아버님을 만나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 7시쯤 저녁을 먹고 옥상에 올라가서 문화방송국이 불에 타는 광경을 보았다. 계속 보고 있는데 밖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옥상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와서 모여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수들이 가택수색을 한대 글쎄, 학동에서부터 해온다고 그러더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걱정도 되고 겁도 났다. 아버님께서는 "지금 곧장 지산동의 고모집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집에서 밖으로 나왔다. 바로 나와서 도교육위원회 쪽으로 오자 계엄군들이 총을 메고 포진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모여든 시민들은 공수를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하천에 내려가 돌을 주어다주기도 하고 공수를 향해 던지기도 했다. 시민들이 계속 불어나자 공수들이 위기를 느끼고 노동청에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으로 퇴각하는 것이 보였다. 시위군중은 3천-4천명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시민관 쪽으로 다가갔다. 공수들 중 일부는 중앙국민학교(도청) 쪽으로 퇴각하고, 일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는 시위대의 앞 대열에 있다가 신발이 벗겨져 뒤로 밀렸다. 시민관에서 공용터미널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대열 그대로 광주역 쪽으로 갔다. 어떤 시민은 "낙오자가 생기면 중간에 매복한 공수들에게 잡히니까 낙오자가 없도록 하시요"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중흥시장 앞에서는 과일상자를 내주면서 먹으라고 하여 맛있게 나눠먹기도 했다.
모여든 시민들은 광주역 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공수들이 무섭게 달려들면 골목으로 도망을 갔다가 공수가 밀리면 다시 골목에서 나와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시민들은 힘의 열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주유소 부근에 세워둔 트레일러를 끌어다 광주역 쪽을 방어하고 있는 공수들을 밀어버리기 위해 주유소 주인에게 열쇠를 달라고 했지만 주인이 주지 않았다. 시민들은 트레일러 옆에 있는 드럼통을 밀고 공격했다. 계엄군들은 이에 맞서 공포탄을 하늘에 대고 쏘아댔다.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을 본 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러한 공수들의 작태를 보면서도 시민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며 "공포탄이다. 공포탄" 하면서 광주역 진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앞에서 뒤로 밀려 잠시 방관하는 사이에 내 앞에 있던 그 많은 시위군중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대열의 앞에 있던 시민들이 공수에게 붙잡혀간 사실도 모르는 채 나는 1명의 운전수, 2명의 시민들과 2톤 트럭의 앞좌석에 타고 앉아서 신역 진출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시위가 거의 끝난 도로 위에 돌멩이들이 도로 바닥에 깔려 있어 차가 울퉁불퉁 흔들거렸다. 그러자 2명의 사람들이 차에서 뛰어내리고 차에는 나와 운전수만 남았다.
순식간에 나와 운전수는 공수들에 의해 포위당했다. 나는 차에서 뛰어내렸지만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나는 공수들 5, 6명에게 광주역 쪽으로 붙잡혀갔다. 도망을 가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 공수들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신역쪽 벽돌공장으로 도망을 갔다. 공수들이 계속 쫓아왔지만 나를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불안한 마음을 억제한 채 벽돌공장에서 도로로 튄 후 다시 재생타이어 공장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쫓아온 공수들에게 붙잡혀 1시간 동안 곤봉으로 두들겨맞았다. 양쪽에서 두 사람이 잡고 세 명은 머리와 다리를 잡은 후 양쪽 팔과 다리를 동시에 구타했으며, 나는 머리를 맞지 않기 위해 손을 머리로 가져가려고 애썼다. 그러면 공수들은 손과 머리를 계속 때리는 것이었다. 무릎 아래는 군화발로 차다가 밟았으며 곤봉으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날이 어두워졌다. 공수들은 나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나는 걷지도 못하고 공수들에게 끌려갔다. 어디쯤인지 하여 길을 더듬어보았다. 한참 가던 중 나와 공수 1명이 비가 와서 물이 괴어 있는 지하 2층 공사장으로 빠져버렸다. 물에 빠진 공수는 나를 가리키며 "개새끼가 이래저래 사람을 피곤하게 하네" 하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얼마 후 허우적거리는 나와 공수에게 헬기 사다리가 내려왔다. 공수는 쉽게 공사장에서 빠져 나갔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쉽게 빠져나오 지 못하는 나를 향해 공수들은 짜증을 내면서 죽여버리네 어쩌네 하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나를 공사장에서 끌어올린 공수들은 시멘트 바닥에 눕혀놓고 곤봉으로 복부를 구타하였으며 왼쪽 다리 무릎 아래를 대검으로 찔러버렸다. 나는 이때까지도 너무나 많이 맞았고 물에 빠져나온 후라서 몸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으므로 대검에 찔리거나 복부를 구타당하면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공수 1명은 내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군화발로 짓이겨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 비로소 아픔을 느끼고 차라리 죽여라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의 온몸에서는 피가 비오듯 쏟아졌으며 얼굴은 온통 피로 덮여버렸다. 시멘트 바닥에 질질 끌려다녀 엉덩이는 살이 패고 찢어져 있었다. 공수들이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2톤 트럭에 부상자를 싣고 떠났다. 그 후 거의 의식을 잃고 있어서 기억도 희미하고 생각나지도 않는다. 결국 광주역 앞 광장에서 부상자는 나와 40대 아저씨 한 분을 봤을 뿐이다.
계엄군이 철수하게 되고 군부대 TMO 직원들이 광주역 광장에 나왔다. TMO 직원 중의 한 사람이 의식불명인 나를 목격하고 광주역 안 벤치로 옮겨놓고 나의 뺨을 계속 때리고 모포로 몸을 덮어주면서 간호를 해준 덕택에 나는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TMO 직원은 나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전화번호를 중얼거렸지만, 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 나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전화번호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30분 정도 말하는 연습하듯 혀를 굴리려고 노력했다. 끝내는 55-7557(고숙집 연락처)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TMO 직원이 고숙집으로 연락을 하였으나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아 다시 TMO 직원이 연락하여 "지금 오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빨리 오시오" 하자, 고숙과 작은아버지가 오셨다.
그러나 나를 병원으로 옮길 차가 없어서 앰뷸런스를 부르려고 전화를 했는데 못 온다고 했다. 가까스로 택시 한 대를 잡아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검문을 한 차례 받았다. 고숙과 작은아버지께서 응급환자라고 사정하여 무사히 통과되었다. 병원에 도착하였지만 환자가 너무 많아서 입원은커녕 치료도 받지 못 하고 지체되었다. 이때 나는 온몸이 마비되었으며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고숙의 간곡한 사정으로 의사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마침 고모가 아는 의사가 한 분 있어서 덕분에 응급실로 들어가 응급처치를 하게 되었다. 응급실 바닥에는 내가 흘린 피가 고여 신발을 신지 않고는 들락거릴 수 없었다.
병원생활
응급처치를 끝내고 9층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날이 21일 새벽이었는데 이때부터 나는 매일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편안히 누워 있지도 못했으며, 병원이 떠나 가도록 고함을 지르고 여러 차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곤 했다. 뇌에 피가 고이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했다.
21일부터 중상환자가 엄청나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대검에 찔린 다리를 꿰매고 난 후 피가 없어서 뇌수술을 받을 수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환자들이 피가 부족한 상태여서 중환자를 우선으로 수술해 주었다. 두 사람이 치료 도중 사망했다. 한 사람은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였고, 또 한 사람은 목을 관통하여 죽어 실려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것을 보자 나는 갑자기 살아야 한다는 각오가 생기게 되었고 교회를 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다.
22일에는 9층에서 6층으로 병실을 옮기게 되었다. 23일에는 계엄군이 화순 방면에서 전남대병원 쪽으로 기관총을 쏘며 엄호사격을 하였는데, 일반환자가 병원에(662호실) 입원해 있던 중 총탄을 맞게 되어 치료를 받은 것도 목격하였다.
나는 매일 어지러움과 고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6월 6일까지는 머리속에 혈액이 뭉쳐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촬영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나의 부모님은 각서를 써야만 했다. CT 촬영 도중 죽더라도 책임지우지 않겠다는 각서를 남기고 CT 촬영에 들어갔다. 1차는 실패하고 2차를 시도하여 촬영에 성공하였으나 문제는 피가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했다.
6월 5일 오후 4시쯤 면도기로 머리를 삭발하고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도를 했다. 수술을 위해 밥은 이틀 가까이 굶게 되었으며 머리가 어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저녁 7시경 다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형님이 와서 위로해 주었다. 형과 나는 잠을 못 이루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6일 수술을 하기로 하였는데 수술부위가 숨골과 가깝고 수술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6월 6일은 현충일이라고 쉰다고 아예 병원에 나오지를 않았다. 고모가 사정 사정하여 오후 2시경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하기 전 어머니와 형의 얼굴을 보고 무어라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이 마취에 의해 깊은 잠에 빠졌다. 수술 예정시간이 3시간이었는데 수술은 5시간이나 걸렸다.
오후 7시가 넘어서 회복실로 들어가 산소호흡기로 호흡을 하였고 662호실로 옮겼다.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고 수술한 부위의 머리 뒤에는 호스를 대어 찌꺼기 피를 받아내게 했다.
그 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쌀죽을 먹었고 차츰 차츰 회복되어 갔다. 수술 전 6월 2일쯤에 육군 사병 한 사람이 봉봉을 사들고 위문을 왔다. 그러나 나는 이때 군인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만나기를 거부했다. 다만 그 사병이 내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그 당시 나를 구해 준 TMO 직원이 아닌가 뒤늦게 추측하게 되었다.
6월 10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매일 신음하고 있는데 합동수사본부에서 양 중사라는 자가 조서를 받으러 왔다. 이름과 주소, 직업을 묻고 시위참여 사실을 물으면서 진술서를 받기 위해 유도심문을 하였다. 나는 사실 그대로 당시 상황을 자세하고 떳떳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중사는 나를 특수폭도로 이름붙였다.
나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야기하는 도중 몸 전체가 떨리곤 했다. 또 통합병원에서 장교 1인과 사병 1인이 와서 전대병원보다 통합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3차례를 걸쳐 권유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부했다.
외신기자들도 자주 찾아와서 다치게 된 이유와 지금의 상황을 듣고 갔으며, 할머니와 교회단체에서도 병문안을 와서 성경책을 읽어주곤 하였다. 또 한번은 제주도 간호전문대생들이 지원을 왔다. 이들은 전남대병원의 간호원보다도 더 극진하게 간호해 주었다. 숭신공고 교장선생님과 교육감이 금일봉을 들고 찾아와 위로해 주고 갔다.
6월 26일에는 갑자기 혀가 굳어지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날은 밤새 내내 혀가 굳어지는 걸 막기 위해 성경책을 낭독했다. 그러자 그 후 아무렇지도 않고 정상적이었다.
이때까지도 정기적으로 CT 촬영을 하였는데, 주사약의 충격으로 어깨와 다리가 마비되기도 했다. 의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퍼렇게 멍이 들도록 꼬집으며 상태를 진단했지만 감각이 없었다. 현재까지도 다리와 어깨가 약간 마비되어 있다.
치료비는 전국적으로 거두어진 성금으로 병원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 5일부터 그 성금이 떨어졌다고 강제퇴원을 시켰다. 그 이후 생활이 어렵게 됨에 따라 병원에도 못 다니고 진통제로 유지해 오며 지내고 있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