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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문
그 지취가 됨이여, 참다운 체[體]는 모든 교화의 영역에 가만히 합하고, 덕의 모습[相]은 첩첩이 깊은 문에 드러나고, 작용[用]은 번다하게 일어나지만 항상 여여하고, 지혜[智]는 두루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도다.
진(眞)과 망(妄)이 서로 사무치니 범부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보고, 사(事)와 이(理)를 쌍으로 닦으니 근본지혜에 의지하여 부처의 지혜를 구하도다.
이는 사를 따라 변함이라 하나와 많음이 연기함이 무변함이요, 사는 이를 얻어서 융통함이라. 곧 천 가지 차별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도다.
그러므로 십신(十身)이 분명하여 서로 이루고, 육위(六位)가 어지럽지 아니하나 새롭게 거두어들이도다.
넓고 큼은 사이가 없는 데까지 들어가고, 먼지와 터럭처럼 작음은 밖이 없는 것까지 에워싸도다.
환하게 다 나타남은 마치 겨자씨를 담은 병과 같고,
동시에 구족한 것은 바닷물의 물방울과 같도다.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는 것은 텅 빈 방에 천 개의 등불을 밝힘과 같고,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가을 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거듭거듭 서로 비춤은 제석천 그물에 구슬을 드리움과 같고,
순간순간 원융함은 저녁 꿈에 세상이 지나감과 같도다.
법문이 중첩함은 먼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만행이 아름답게 펼쳐짐은 비단 위에 꽃이 핌과 같도다.
其為旨也여 冥真體於萬化之域하고
기위지야 명진체어만화지역
顯德相於重玄之門하며 用繁興以恒如하고
현덕상어중현지문 용번흥이항여
智周鑑而常靜이로다
지주감이상정
真妄交徹이라 即凡心而見佛心이요
진망교철 즉범심이견불심
事理雙修라 依本智而求佛智로다
사리쌍수 의본지이구불지
理隨事變이라 則一多緣起之無邊이요
이수사변 즉일다연기지무변
事得理融이라 則千差涉入而無碍로다
사득이융 즉천차섭입이무애
故得十身歷然而相作하고 六位不亂而更收하며
고득십신역연이상작 육위불난이갱수
廣大即入於無間이요 塵毛包納而無外로다
광대즉입어무간 진모포납이무외
炳然齊現은 猶彼芥瓶이요
병연제현 유피개병
具足同時는 方之海滴이로다
구족동시 방지해적
一多無碍는 等虛室之千燈이요
일다무애 등허실지천등
隱顯俱成은 似秋空之片月이로다
은현구성 사추공지편월
重重交映은 若帝網之垂珠요
중중교영 약제망지수주
念念圓融은 類夕夢之經世로다
염념원융 유석몽지경세
法門重疊은 若雲起長空이요
법문중첩 약운기장공
萬行芬披는 比華開錦上이로다
만행분피 비화개금상
제6門, 旨趣가 깊고 미묘하다[旨趣玄微]
一, 理事無碍
1, 三大를 보임
其爲旨也여 冥眞體於萬化之域하고 顯德相於重玄之門하며 用繁興以恒如하고 智周鑑而常靜이로다
그 지취가 됨이여, 참다운 체[體]는 모든 교화의 영역에 가만히 합하고, 덕의 모습[相]은 첩첩이 깊은 문에 드러나고, 작용[用]은 번다하게 일어나지만 항상 여여하고, 지혜[智]는 두루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도다.
2, 眞과 妄을 융합함
眞妄交徹이라 卽凡心而見佛心이요 事理雙修라 依本智而求佛智로다
진과 망이 서로 사무치니 범부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보고, 사와 이를 쌍으로 닦으니 근본지혜에 의지하여 부처의 지혜를 구하도다.
二, 事事無碍
1, 無碍의 所由
理隨事變이라 則一多緣起之無邊이요 事碍理融이라 則千差涉入而無碍로다
이는 사를 따라 변함이라 하나와 많음이 연기함이 무변함이요, 사는 이를 얻어서 융통함이라 곧 천 가지 차별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도다.
2, 無碍의 相(十玄門)
<1> 제법이 상즉하여 자재함[諸法相卽自在門]
故得十身歷然而相作하고 六位不亂而更收하며
그러므로 十身이 분명하여 서로 이루고, 六位가 어지럽지 아니하나 새롭게 거두어들이도다.
*十身은 衆生身과 國土身과 業報身과 聲聞身과 獨覺身과 菩薩身과 如來身과 智身과 法身과 虛空身이라.
*六位는 卽三賢(십주, 십행, 십회향) 十聖(地)과 等妙二覺
<2> 넓고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없음[廣狹自在無碍門]
廣大卽入於無間이요 塵毛包納而無外로다
넓고 큼은 사이가 없는 데까지 들어가고, 먼지와 터럭처럼 작음은 밖이 없는 것까지 에워싸도다
<3> 미세하게 서로 수용하면서 제자리에 있음[微細相容安立門]
炳然齊現은 猶彼芥甁이요
환하게 다 나타남은 마치 겨자씨를 담은 병과 같고
<4> 동시에 구족하여 서로 응함[同時具足相應門]
具足同時는 方之海滴이로다
동시에 구족한 것은 바닷물의 물방울과 같도다.
<5>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수용하나 같지 않음[一多相容不同門]
一多無碍는 等虛室之千燈이요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는 것은 텅 빈 방에 천개의 등불을 밝힘과 같고
<6> 비밀히 숨고 드러남이 함께 성립됨[秘密隱顯俱成門]
隱顯俱成은 似秋空之片月이로다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가을 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7> 인드라의 그물과 같은 경계[因陀羅網境界門]
重重交映은 若帝網之垂珠요
거듭 거듭 서로 비춤은 제석천 그물에 구슬을 드리움과 같고
<8> 十世로 나누어진 법이 다르게 이루어짐[十世隔法異成門]
念念圓融은 類夕夢之經世로다
순간순간 원융함은 저녁 꿈에 세상이 지나감과 같도다
<9> 사에 의지하여 법을 드러내어 이해를 냄[託事顯法生解門]
法門重疊은 若雲起長空이요
법문이 중첩함은 먼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10> 여러 장의 순수함과 뒤섞임으로 덕을 갖춤[諸藏純雜具德門]
萬行芬披는 比華開錦上이로다
만행이 아름답게 펼쳐짐은 비단 위에 꽃이 핌과 같도다.
제6門, 旨趣玄微
지취가 깊고 미묘하다
지취현미(旨趣玄微) : 화엄경의 뜻이 아주 깊고 미묘하다. 지취(旨趣)는 근본되는 뜻을 말하는데, 대지(大旨), 종지(宗旨)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지취라고 하지만 흔히 사회에서는 취지라고 한다. 그것이 현미(玄微)하다. 이 현(玄)자는 아득할 현(玄)자다. 천자문에 보면 ‘천지현황(天地玄黃)’할 때 하늘을 현(玄)자로 표현한다. ‘가물 현’이나‘검을 현’이라고 토를 다는데, 현은 검다고 하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설사 검다하더라도 우리 머리카락 색깔이라든지 옷 색깔을 말할 때의 흑(黑)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가물가물 끝이 없어서 검다는 것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은 아무리 쳐다보고 쳐다봐야 끝이 없다. 하늘이 아주 아득하게 멀어서 가물가물하다. 멀다, 깊다. 그래서 또 검다.
미(微)자는 아주 미세하다, 미묘하고 세밀하다는 뜻이다. 현미경(顯微鏡)할 때 의 미(微)자다. 현미경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것까지 볼 수 있는 거울이듯이, 화엄경도 그 뜻이 미세하다.
화엄경의 뜻이 아득하고 깊고 유현하고 멀고 미세하다.
왕복서는 화엄의 이치를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해서 높이 우러러 보는 글이다. 그 중에서도 '지취가 현미하다'고 하는 제6문의 뜻이 아주 깊고 오묘하다.
이것은 곧 ‘무애(無碍)의 도리(道理)’를 말하는 것이다.
화엄경은 물론 일심(一心)의 도리(道理)도 나타내지만 무애의 도리라고 하는 걸림이 없는 이치를 잘 드러낸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여기에 걸리고 저기에 걸리고, 전부 걸리면서 산다. 그런데 모든 존재가 왜 그렇게 그 자리에서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존재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걸릴 것이 하나도 없다. 보통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전부 걸리는 것이고 장애 투성이지만, 눈이 열려서 깨어있는 눈으로 보면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는 것이 무애(無碍)의 도리다.
없을 무(無)자, 걸릴 애(碍)자 무애(無碍)의 도리, 걸림이 없는 이 현미한 취지를 6문에서는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사(理事)가 무애(無碍)하다. 그 보다 좀 더 차원이 다른 것은 사사(事事)가 무애(無碍)한 것이다.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다는 것이 이사무애이고 사(事)와 사(事)가 걸림이 없다는 것이 사사무애다.
화엄경의 깊은 내용은 궁극적으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이치를 밝히는데 있다. 경전에 직접적으로 ‘사사무애’라는 표현이 없지만 화엄경의 내용이 ‘사(事)와 사(事)가 걸림이 없는 이치를 표현했다’고 해서 간단히 사사무애라고 정리한다.
화엄경은 모든 존재가 걸림없이 존재한다고 하는 존재원리를 이야기 한다.
그것이 사사무애다. 특히 제6문에서는 사사무애를 열 가지로 나누어 십현문으로써 드러낸다.
얼른 납득이 안가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걸림이 없다고 하는 이 이치를 믿고 이해해서 그에 맞게 인생을 걸림이 없이 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행복하고 보람있고 유익하게 사는 인생이 펼쳐진다는 것을 제6문에서 보여준다.
一, 理事無碍
*
이사무애(理事無碍) : 이(理)는 이치고 사(事)는 현상, 눈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다 걸림이 없다. 달리 어떤 무애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두고 하는 소리다. 현상을 두고 우리가 이해하는 차원을 그렇게 이사무애(理事無碍)로 본다.
1, 三大를 보임
其爲旨也여 冥眞體於萬化之域하고 顯德相於重玄之門하며 用繁興以恒如하고 智周鑑而常靜이로다
그 지취가 됨이여, 참다운 체[體]는 모든 교화의 영역에 가만히 합하고, 덕의 모습[相]은 첩첩이 깊은 문에 드러나고, 작용[用]은 번다하게 일어나지만 항상 여여하고, 지혜[智]는 두루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도다.
*
삼대(三大)를 보임: 이사무애는 삼대를 보인다. 삼대는 본체[體]와 형상[相]과 작용[用]이다.
삼대를 우리 자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듯이 활동하는 모습이 작용[用]이다. 우리가 이러한 얼굴, 이러한 형상을 가진 것은 상(相)이다. 그런데 그 내면에 ‘공부하자, 하지 말자’라고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주체가 있다. 그것은 체(體)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은 물론이고 두두물물, 모든 사물, 모든 존재, 심지어 먼지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와 같은 삼대를 지닌다. 이 삼대와 아울러 지(智)까지 보이는데 이것을 체(體) 상(相) 용(用) 지(智) 라고 한다.
*
기위지야(其爲旨也)여 :그 뜻됨이여, 지취가 됨이여. 지취는 그 뜻, 취지, 됨됨이 이런 말이다. 우리는 지금 책을 보고 화엄경이라 하지만 사실은 이 책이 화엄경이 아니라 이 세상, 이 우주법계가 그대로 화엄경이다.
그런 화엄경의 뜻이
*
명진체어만화지역(冥眞體於萬化之域)하고 :어두울 명(冥)자는 ‘가만히’라고 해석하면 된다.
참 진(眞)자, 몸 체(體)자, 진체는 참다운 마음의 체(體)다. 우리들 마음의 모습이다. 이것이 가만히 몰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만화의 영역에 합해져 있다. 소리내고 합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가만히 그렇게 합한다.
만화(萬化)라고 하는 것은 만 가지의 변화무쌍한 영역이며 지금 눈 앞에 펼쳐져있는 현상들을 모두 말하는 것이다. 만 가지 뿐만 아니라 수만, 수천, 수억의 현상이 지금 우리 마음과 합해져서 하나로 존재한다.
참다운 마음의 체, 우리들 마음의 모습인 진체가 가만히 만화(萬化)의 영역에 합해있다. 비가 오면 비오는 것을 이해하고, 눈이 오면 눈오는 것을 이해한다. 더우면 더운 것을 이해하고 추우면 추운 것을 이해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부 우리 마음과 하나로 통일 되어 있다.
어떤 물건과 물건이 눈에 보이게 딱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만히 몰래 은밀하게 합해져 있다.
화엄경의 깊은 뜻은 인간이 살아가고 생로병사하며 춘하추동이 바뀌고 생주이멸하는 모든 존재의 현상과 작용에까지 다 합해있다.
*
현덕상어중현지문(顯德相於重玄之門)하며 : 덕상을 첩첩이 깊은 문에 나타낸다. 덕의 모습은 삼대(三大:체(體),상(相) 용(用)중에 상(相)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만물 하나하나가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장점이 덕상(德相)이다. 이 덕상이 거듭되고 거듭되는 아주 아득하고 깊은 문에 드러났다.
모든 존재의 훌륭한 점, 덕의 모습이, 화엄경에서 깊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이치에 다 드러나 있다.
*
용번흥이항여(用繁興以恒如)하고 : 작용은 아주 열심히 일어나는데 그 근본자리는 항상 여여하다. 용(用)은 작용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작용이고, 눈으로 보는 것도 작용이며 마음이 글자를 따라가고 뜻을 해석하고 느끼고 감동하는 것도 작용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지금까지 우리의 작용들이 얼마나 많이 번거롭게 일어났는가.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척척 일어나고, 때 맞춰서 식사하고, 세수하고, 양치질 하고, 방청소 하고, 정리하고, 보낼 사람 보내고, 받아들일 사람 받아들이며 지금 이 순간까지 너무나도 많은 일을 했다. 그러는 동안 일으킨 일들이 모두 작용이다.그것이 번흥(繁興)이다.번거로울 번(繁)자, 일어날 흥(興)자, 아주 많이 번거롭게 일어난다.
이 작용은 아주 열심히 일어나지만, 우리의 근본자리인 심체(心體)는 항상 여여하다. 항상 항(恒)자, 여여할 여(如)자 항상 여여(如如)하다. 늘 그 사람이고 늘 그 마음이다.
이 시간까지 오늘 하루를 쳐도 좋고 일생을 쳐도 좋고 일년이나 한달 어느 기간을 쳐도 상관이 없다. 그 기간동안 우리가 작용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나'라는 것은 늘 여여하게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다. 우리 마음은 항상 그 자리다. 아주 질서정연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많은 일을 해왔음에도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있다.
이렇게 해서 체(體) 상(相) 용(用) 삼대(三大)를 순서대로 설명하였다.
*
지주감이상정(智周鑑而常靜)이라 : 지혜는 두루두루 다 살핀다. 체, 상, 용의 내용을 다 이해한 것이 지(智)다. 말하자면 삼대에 사람이 개입된 것이다.
체(體) 상(相) 용(用)이 현상을 이해하는 방향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지(智)는 그 삼대를 제대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지혜의 입장으로 볼 때 모든 것을 알고, 감지하고, 두루두루 살피지만, 그러면서 그 살피는 당체자리는 항상 고요하다.
바닷물이 아무리 출렁거려도 항상 물일 뿐이다. 물인 그 입장에서는 언제나 여여하다. 그러면서도 온갖 파도의 모습을 다 짓는다. 파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렇다.
삼대의 이치를 잘 안 그 지혜는 주감(周鑑)한다. 두루할 주(周)자, 거울 감(鑑)자, 두루 살피대 우리 마음이 그러한 사실을 다 안다. 그러면서 항여(恒如)라고 했던 말과 같이 상정(常靜)이다. 항상 상(常)자, 고요할 정(靜)자 항상 적정하게 고요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화도 났다가 슬프기도 했다가 좋기도 했다가 별별 마음의 작용이 있지만 그러한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거울에 사물이 비치듯이 주감하여 두루두루 다 살핀다. 우리 지혜는 두루두루 다 살핀다. 그렇지만 우리 근본마음자리는 항상 고요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글 속에 참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열 번, 스무 번 읽고 쓰고 음미하면서 깊은 의미를 가만히 느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2, 眞과 妄을 융합함
眞妄交徹이라 卽凡心而見佛心이요 事理雙修라 依本智而求佛智로다
진과 망이 서로 사무치니 범부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보고, 사와 이를 쌍으로 닦으니 근본지혜에 의지하여 부처의 지혜를 구하도다.
*
진(眞)과 망(妄)을 융합함 :이것도 이와 사가 걸림이 없는 내용중의 한 부분이다. 보통 방편불교라든지 저급한 불교, 소승불교 같은 데는 부처님을 하늘처럼 보고 중생은 땅처럼 보면서 망상과 진심을 둘로 나눠놓고 본다.
번뇌망상을 어떻게 하든지 떼내어야 진심이 나타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그런데 화엄경은 그렇지 않다. 진(眞)과 망(妄), 진심과 망심이 사귀어서 사무쳐있다고 본다.
*
진망교철 (眞妄交徹)이라 : 진(眞)과 망(妄), 진심(眞心)과 망심(妄心) 진짜와 가짜, 이렇게 연관시켜도 좋다. 진과 망이 서로 사무치니
*
즉범심이견불심(卽凡心而見佛心)이요 : 범부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본다. 중생들의 마음에서 불심을 봐야 한다. 사와 이를 쌍으로 닦는 것이다. 본래 우리가 마음속에 갖추고 있는 지혜를 의지해서 부처의 지혜를 구한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범부라고 하고 중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늘 부처님과 나, 범부와 성인,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을 나누어 생각한다.진심은 깨끗한 우리의 청정한 본심이라면 망심은 망상이고 번뇌의 마음이라고 나눈다.그런데 ‘범부의 마음을 떠나 달리 어디에서 부처의 마음을 찾겠는가’ 이러한 이치가 화엄경이나 법화경의 이치다. 우리 마음 떠나서 부처의 지혜를 구한다면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과 같고 거북이에게서 털을 구하는 것과 같다. 토끼 뿔, 거북이 털은 아예 없는 것인데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에서 부처의 지혜를 어떻게 하더라도 밝혀내야 한다. 나의 이 어리석은 중생마음에서 부처의 지혜를 발견해 내야 된다.
물론 부처님은 하늘같은 존재, 중생은 땅같은 존재라고 나누어서 가르치는 불교가 많다. 그런 식으로 나눠놓고 이야기하면 설명하기도 쉽고 이해도 잘 된다.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고 남은 잘났다고 생각하면 아주 편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불교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편을 빌리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놓았다.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전의 성립은 후대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총망라해서 결집한 내용이지만 경전은 그 초점을 어디에 맞추었는가가 중요하다.
부처님이 역사적으로 화엄경을 설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모든 경전은 부처님의 깨달음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일생중에서 어딘가에 초점이 딱 맞춰져서 편집이 된다. 중생들의 근기가 성숙해가고 또 부처님의 중생을 향한 가르침의 진도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결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이 맨 처음 설법한 것을 드러낸 경전이라면 언제 결집하든 누가 결집을 하든 초전법륜경이라고 한다.
열반경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광경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경전이다.
부처님의 열반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열반경이 되는 것이다.
무슨 내용으로 부처님의 어떤 설법에 초점을 두었는지가 중요하다.
경전은 대부분 그렇게 결집되어졌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처음 깨닫고 나서 삼칠일 동안 설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우리가 1만일결사를 하고 화엄경을 공부하려고 하는 판인데 겨우 21일동안에 이 방대한 화엄경이 다 설해졌다니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 성도하고 6년 고행 끝에 일주일간 보리수 아래서 아주 훌륭한 삼매에 들었다. 제대로 선정에 들어서 그 선정이 끝나자마자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는데, 깨닫고 나서 삼칠일이라고 하는 21일동안 ‘내 깨달음이 확실한가’하고 다시 검토하고 또 검토하며 당신 깨달음의 법희선열(法喜禪悅)에 젖어서 기쁨을 누리고 맛을 음미하며, 당신의 깨달음이 철두철미하게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았는가를 검토하는 기간이 삼칠일 동안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기도를 해도 삼칠일 동안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도 ‘세 번 아니면 일곱 번 외우라’고 되어 있다. 염불책에 보면 ‘삼칠편을 하라’고 써놓은 것들이 많다.
무엇이든 세 번 아니면 일곱 번 하게 되어 있는 것은 부처님이 21일동안 그 깨달음을 가지고 검토하고 법희선열에 젖어있는 과정을 삼칠일 동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과정동안 깨달음 속에서 노니는 부처님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표현해 놓은 것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후대에 결집되었지만, 부처님 정각 후 삼칠일 동안의 법희선열에 초점을 맞춰서 결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것이다.
이 화엄경의 내용은 중생의 근기에 맞춘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당신 깨달음의 내용을 한껏 표현한 내용이다.
그러한 부처님의 깨달음에 비춰볼 때 진심과 망심이 한 덩어리다.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범부의 마음에 즉(卽)해서 불심을 본다. 그것이 즉범심인데, 이 즉(卽)자는 불교에서 독특하게 사용한다. ‘즉(卽)한다’라는 것은 손에 손가락이 달려있는 관계다. 손가락은 손에 즉(卽)해 있다. 손가락과 손이 둘이 아니다. 또 한편 손과는 관계 없이 손가락만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가족관계에 즉(卽)해 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할 것 없이 전부 서로가 즉(卽)해 있다. 한 덩어리다. 그러면서 또 개개인이기도 하다.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면서도 독립된 관계를 즉(卽)이라고 표현한다.
즉(卽)자를 확실하게 이해 하면 불교를 공부하는 데 아주 좋다.
범부의 마음에 즉(卽)해서 나아가서, 범부의 마음에 딸려서 불심(佛心)을 본다. 우리 중생들 마음, 우리 범부의 마음을 떠나서 불심이 없다. 손가락을 보려면 손에서 봐야한다. 손에서 손가락을 보는 것이다. 그와 같이 범부의 마음, 우리 중생들의 마음이 번뇌망상의 마음이고 못난 마음이고 탐진치 삼독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시기질투하고 남 해코지 하고, 잘되는 것을 보면 배아파 하는 못난 마음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봐야한다. 그 마음을 떠나서 부처의 마음이 따로 없다. 이 구절 하나만 해도 근사하다.
보통 일반불교에서는 이렇게 말을 안한다.
‘범부의 마음 따로 있고 부처의 마음 따로 있다’고 본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는 일단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것은 소승불교다.
선(禪)이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의 도교적인 성향과 합해지면서 독특한 정신세계를 구축한 것은 사실이지만, 순수한 불교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대승불교가 훨씬 우수하다. ‘범부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본다’라고 하는 이치는 어떤 선리(禪理)보다 훨씬 우수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수행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고, 자기 인생을 가꾸어 가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안목과 자세라면 훌륭하다.
*
사리쌍수(事理雙修)라 : 사와 이를 쌍으로 닦는다. 사(事)는 현상이나 밖으로 드러난 사물이고 이(理)는 내면, 우리의 마음이다. 이것을 쌍으로 닦는다는 말은 새로 깎거나 구축하거나 구조물을 만들고 다듬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그렇게 갖춰져 있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공부를 제대로 잘하는 것을 이(理)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사(事)적인 면, 일에 나아가서는 멍청이가 많다. 특히 절의 스님들 중에서 이(理)는 경을 많이 보고 법문 많이 들어서 빠삭한데 사(事)라고 하는 일에 나아가서는 아주 캄캄하고 천하에 그런 멍청이가 따로 없는 이들이 많다.
그렇게 되면 잘못된 것이다.
이(理)와 사(事)를 같이 해야 한다.
밖에 나가서 돈을 잘 버는데 집에 들어오면 형광등 전구하나 못 바꾸는 것도 안될 일이다. 못하나를 못쳐서 그 집 보살이 쳐야 하고 전구도 그 집 보살이 바꿔 끼우는 집이 많다.
물론 여자가 할 일과 남자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여자라서 남자 일을 못하고 남자라서 여자일을 못한다고 하는 것도 안될 말이다. 여자도 남자일을 할 수 있고 남자도 여자일을 할 수가 있다. 그것이 조화이고 중도다.
사(事)에 밝은 사람은 이(理)도 밝아야 되고 이(理)에 밝은 사람은 사(事)도 밝아야 된다. 그것이 같이 가는 것이 조화다.
나는 늘 불교의 가르침을 모양새라고 말한다. 모양새라는 것이 조화다. 이(理)도 닦고 사(事)도 닦고 이것을 쌍으로 닦아야 조화다.
집안살림도 잘 하고 사경도 잘하고 법회도 잘나오는 것이다.
절에 가서 참선 좀 배웠다고 집에 떡 들어앉아 가부좌 틀고 앉아서 남편 퇴근하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가부좌 틀고 참선만 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간혹 그런 것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천하에 멍청이 중에 상멍청이다.
불교를 그렇게 공부하는 것은 안하는 것만 못하다.
사(事)와 이(理)를 쌍으로 닦아야 된다.
이(理)는 공부라면 사(事)는 인간사다. 사람이 살아가는 문제다.
*
의본지이구불지(依本智而求佛智)로다 :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의지해서 부처의 지혜를 구한다. 본지(本智)라고 하는 것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인 근본지(根本智)다. 사람사람이 다 문수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본지(本智)다. 본래 가지고 있는 지혜다. 그 본래 가지고 있는 지혜에 의지해서 부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참선하고 기도하고 경보고 위빠사나하고 온갖 수행이란 수행을 다 하면서 밖의 것을 구하는 걸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誤算)이다. 결국은 자기 마음자리를 떠나있지 않다.
우리가 지금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웃고 울고 슬퍼하는 이 마음을 보통 중생심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하찮은 중생의 마음작용이지만 그것을 떠나 달리 부처의 마음작용이 없다. 그 하찮은 우리들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근본지 속에 불지(佛智) 부처의 지혜, 깨달음의 지혜가 있다. 어리석은 범부의 알량한 망상 속에서 부처의 지혜를 본다는 것은 대단한 이야기다.
결국 자기 마음자리에서 떠나있지 않는 것이다.그래서 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발처(至至發處)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고 가고 가도 항상 본래 그 자리고, 이르고 이르어 어디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결국은 출발한 그 장소다.
여러분들이 출발하는 장소는 집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나중에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맞다. 집으로 안돌아가면 노숙자 생활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조화가 어그러진 것이고 틀려버린 인생이다.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인생은 집에 돌아가서 집에서 자야 된다. 본래 자기 마음자리에 의지해서 부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 떠나서 부처의 지혜를 어디가서 구할 것인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모든 사람이 다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이치를 부처님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서 그런 말씀을 한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그 말씀을 하였다. ‘내가 부처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나만 따라오는 짓을 하지말라’ 는 말이다. ‘너희들 모두가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이해하면 좋다. 이해하기도 쉽고 뜻도 아주 깊은 내용이다.
二, 事事無碍
*
사사무애(事事無碍) : 사(事)적인 것과 사(事)적인 것이 걸림이 없다. 본래 걸림이 없는 경지다. 이러한 이치를 화엄경 전반에 걸쳐서 이야기 하고 있고 청량국사는 왕복서에서 간략하게 서문에서 표현하고 있다.
화엄경에서 밝히고자 하는 이치 중에 제일 요긴한 이치가 여기 나오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道理)다.
몸과 마음은 걸림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어떤 눈에 나타난 사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걸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알쏭달쏭하다.
이러한 사사무애의 경지가 너무 좋기 때문에 화엄학자들이 큰 관심을 기울이고 화엄경의 고준한 이치를 이야기 할 때 ‘사사무애’에 심취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화엄경의 주된 이치는 ‘보살행’이라고 본다. 입법계품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들의 대표격이고 모든 불자, 모든 수행자의 모델이자 표본인 선재동자는 법을 구하는 행각을 하면서 53선지식을 만나서 묻는 질문들이 한결 같다. ‘무엇이 보살행입니까’‘어떻게 해야 보살행을 닦습니까’ 선재 동자의 이 질문속에는 불자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다. 답은 보현행원이다. 그래서 나는 화엄경의 주된 뜻은 보살행이라고 본다.
물론 과거에 화엄학을 연구한 분들도 보살행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보살행이나 사람을 돕는 선행은 성인군자들도 이미 많이 언급하였다. 그에 비해 사(事)와 사(事)가 걸림이 없다고 하는 사사무애의 뜻은 아주 고준하고 이 세상에 어디에도 밝힌 바가 없는 이치다. 오직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내용이기 때문에 불교학자들은 그 쪽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게 되고 사사무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보살행도 결국은 사(事)와 사(事), 너와 내가 걸림이 없는 하나의 뿌리, 하나의 존재라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보살행과 사사무애가 다른 길이 아니다.
오히려 사사무애이기 때문에 보살행이 실현될 수가 있다. 완전한 보살행을 하려면 사사무애의 이치를 알아야 되고, 사사무애의 이치를 알면 저절로 보살행이 나온다. 사사무애와 보살행 중에 어디에 더 비중을 두고 이야기 하는가 하는 것은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1, 無碍의 所由
理隨事變이라 則一多緣起之無邊이요 事碍理融이라 則千差涉入而無礙로다
이는 사를 따라 변함이라 하나와 많음이 연기함이 무변함이요, 사는 이를 얻어서 융통함이라 곧 천 가지 차별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도다.
*
무애(無碍)의 소유(所由) : 걸림이 없다고 한 이유에 대해서 말한다. 이치면으로 화엄경은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를 통해 걸림이 없다고 하는 도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도 걸리지 말고 사는 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걸림없이 산다’는 말보다도 ‘걸리지 말고 살자’는 것이 더 좋겠다.
신문을 보나 TV뉴스를 보나 이웃집에서 하는 짓을 보나 세상은 온통 일체가 내 마음에 걸리는 일들 뿐이다. 세상에 나 이외에는 온통 마음에 안들고 어떨 때는 나까지도 내 마음에 안든다. 나도 내 마음에 안드는데 나 이외 것이야 전부 내 마음에 안드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거기에 내가 걸리지 않는 것이다. 걸리지 않는 것으로 보면 걸림이 없다.
이치를 제대로 알면 걸릴 것이 없다는 것이 화엄경의 교훈이다. 화엄경의 가르침은 ‘걸릴 것이 없다. 걸리지 마라. 걸리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다.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이 다 걸림이 없는 경지를 우리가 이해를 하는 것이다. 걸림이 없다고 하는 이치를 안다면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것이 곧 평화로와지는 것이다.
*
이수사변(理隨事變)이라 :이치는 사물을 따라 변한다. 우리는 이렇게 몸을 가지고 화엄경을 공부하는 장소에 온다. 눈과 손발을 가지고 온다. 그러면 내 마음도 저절로 따라와서 그 분위기에 젖어 든다. 집에서는 아무리 혼자 공부하려고 해봐야 쉽지가 않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다 같이 와서 이 분위기 속에 화엄경 약찬게를 읽고 법성게를 한 번 읽으니 마음도 온 우주 삼라만상과 한 덩어리가 되어 그 많고 많은 화엄신중과 내가 전부 도반이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된다. 그것이 이수사변(理隨事變)이다.
이치는 마음이라고 보고 사(事)는 어떤 상황이나 현상이라고 본다면, 이치가 현상을 따라서 변한다. 우리 마음이 환경을 따라서 변한다. 흔히 우리는 마음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 진짜 맞는 말이다. 마음은 상황이나 사물을 따라서 거기에 맞춘다.
우리가 이렇게 2백여 명이 공부할 때의 자세와 캄캄한 방에 자기 혼자 편안하게 있을 때의 마음씀씀이, 몸자세, 모든 것이 다 다르다.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변하기 때문이다.
*
즉일다연기지무변(卽一多緣起之無邊)이요 : 이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事)적인 것을 따라서 변한다. 하나[一]와 많은 것[多]이, 그리고 나 개인과 모든 대중, 대중과 나 이것이 전부 연관관계를 맺고 서로서로 연기해서 인연 따라 일어남이 끝이 없다. 이런 구절은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아 정말 그렇게 돌아간다.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고 어느 누구만의 세상도 아니고 전부 이 세계가 한 덩어리로 돌아가는구나’하는 것을 이해할 때가 있다. 하나와 많은 것이, 이치나, 우리의 마음과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한히 연기한다. 전부 인연을 맺어서 발생하는데 그것이 끝이 없다.
여러분들은 전부 개개인이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모두 같이 2백 명 이상되는 우리 불자들이 이 자리에서 함께 호흡을 하면서 함께 화엄경의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이다. 그것이 일(一)과 다(多)로 나와 여러 많은 대중들이 함께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데 그런 것이 끝도 없다. 이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여기 있는 책상도 그렇고 달려있는 등도 그렇고 벽도 그렇고 모든 것이 이 화엄의 세계에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끝도 없다.
우리가 지금 화엄경 약찬게를 읽고 법성게를 읽고 이렇게 법회에서 화엄경의 이치를 들으면 여러분들은 자기 혼자만 듣는 것 같겠지만 여러분들의 몸에 있는 수억만 개의 세포가 동시에 듣는다. 여러분이 기분이 좋으면 수억만 세포가 동시에 기분이 좋다.
화엄신중들 이름을 우리가 약찬게를 통해서, 또 경전을 통해서 읽으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억만 마리의 세포가 같이 신중들 이름을 읊조리는 것이고, 같이 약찬게를 읽는 것이다. 나 혼자만 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일다연기지무변(一多緣起之無邊)이다.
안으로는 그렇고 겉으로도 나를 중심으로 해서 더 확대시키면 이 우주만유 삼라만상이 함께 읽는 것이다. 함께 흥겨워하고 함께 법희선열에 젖어드는 것이다.
나는 설명할 줄을 몰라서 요거 밖에 못하겠는데, 여러분들 각자가 잘 음미해 보기 바란다.
‘내 한 사람이 하는 줄 알았는데 내 몸 안에 있는 수억만 마리의 세포가 같이 공부하고 내 혼자 화내는 줄 알았는데 내 몸에 있는 수억만 마리의 세포가 같이 화내고 같이 슬퍼한다. 그 가운데 주인공은 또 나다. 결국은 주인공이 잘 해야 된다’ 참으로 근사한 이치다.
우리가 지금 하루를 사는 모습만 보더라도 우리는 하루동안 수많은 것과 인연 맺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끝이 없다.
‘나’라고 하는 하나와 ‘나 이외의 모든 것’이라고 하는 다(多)가 무한히 연기하면서 하루의 삶이 엮어진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렇고, 언제나 그러하다.
*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 사(事)는 이치를 얻어서 원만해진다. 현상은 이치를 얻어서 원융해진다. 사람의 마음이 들어서 현상이 좋아지고 아름다워진다. 사(事)가 눈에 나타난 우리의 육신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육신은 우리 마음을 통해서 조화를 이룬다. 융화한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사(事)를 육신이라고 보고 이(理)는 이치니까 마음이라고 보는 것은 70에서 80퍼센트는 이해가 되는 설명이다.
나무를 예로 든다면, 우리는 나무를 가지고 별별 조각을 다한다. 땔나무를 해서 불도 땔 수 있고, 재목을 깎아서 집도 지을 수 있고, 불상을 조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무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작용이 거기 들지 않으면 나무는 그대로 나무로 있을 뿐이다. 산에 있는 나무는 몇 천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그냥 썪을 뿐이지 다른 변통이 없다. 원융해지지가 않는다. 이것은 나무에 대한 비유일 뿐이지만, 우리들 삶이 궁극적으로 그렇게 엮여져 있다. 사물에 마음작용, 정신작용이라고 하는 이치가 들지 않으면 원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
즉천차섭입이무애(則千差涉入而無碍)로다 : 천 가지 차별들이 서로 서로 그 속에 스며든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200여명 신도들이 모였는데 하나에서부터 열 가지, 백 가지 모두가 다 차별한다. 그러는 한 편 화엄경을 함께 공부한다고 하는 화엄행자로서 모두 화엄의 세계 속에 젖어 들어간다. 섭입의 섭은 젖을 섭(涉)자다. 삼수 변에 걸음 보(步)자를 합쳐서 물이 솜에 젖어들고 물이 땅에 스며들듯이, 가물었을 때 대지(大地)에 비가 내리면 그 빗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 듯이, 스며들어서 동화가 되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흙과 물이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 섭입(涉入)이다.
그래서 걸림이 없다. 물과 흙이 걸림이 없다. 서로 잘 어울린다.
천 가지가 차별하지만 서로서로 그 속에 젖어 들어서 걸림이 없다. 서로 아무 장애가 없이 조화가 잘 된다.
비가 와서 땅에 물이 흥건하게 고이면 땅은 그 물을 받아들여서 여유로워지고 풍족해지고 거기서 온갖 만물을 다 발생시킨다. 얼마나 멋진 조화인가.
현상적으로는 전부 우리가 다 다른 사람이다. 얼굴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입은 옷이 다르고 생긴 모습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그 다른 것이 화엄의 세계 속에서 전부 물이 땅 속에 스며들듯이 스며들어서 아무 장애가 없다. 서로 조화를 이룬다. 화엄회상이라고 하는 분위기에 우리 마음이 젖어 들면 조화를 이룬다. 조화를 이루면 우리가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서로 차별된 사람들이 다 그 하나의 이치속으로 젖어든다.
우리는 다 다르지만 최소한도 공부하고 있는 이 순간은 전부 조화를 이루고 융화를 하고 있다. 특히 약찬게 같은 것을 다같이 소리 높여서 외울 때 얼마나 좋은가. 여러 사람이 외우지만 한 목소리다. 이것을 확대하면 삼라만상이 같이 춤추는 것이고 축소하면 내 몸 안에 있는 수억만 마리 세포가 같이 동참하는 것이다.
세포속에 세포가 있고 그 세포속에 또 세포가 있다. 작은 쪽으로 가자면 끝없이 작은 쪽으로 전부 다 동참하고 끝없이 넓은 곳으로 확대자면 끝없이 넓은 것들도 모두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동참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서로 걸림이 없다.
우리 개인의 하루도 천 가지 만 가지 온갖 차별된 현상을 엮어내고 있다. 그러나 걸림이 없다. 문수선원에 와서 공부했다고 해도 화장실에 가서 볼 일 보는 것에 걸림이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이 서로 서로 그렇게 되어 있다.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치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상당히 함축성 있게 세상 이치를 잘 표현한 내용이다.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이런 구절들은 천 번, 만 번 읊조리고 음미하고 쓰기를 해도 좋을 일이다.
2, 無碍의 相 (十玄門)
<1> 제법이 상즉하여 자재함[諸法相卽自在門]
故得十身歷然而相作하고 六位不亂而更收하며
그러므로 十身이 분명하여 서로 이루고, 六位가 어지럽지 아니하나 새롭게 거두어들이도다.
*十身은 衆生身과 國土身과 業報身과 聲聞身과 獨覺身과 菩薩身과 如來身과 智身과 法身과 虛空身이라.
*六位는 卽三賢(십주, 십행, 십회향) 十聖(地)과 等妙二覺
*
무애(無碍)의 상(相): 세상은 걸림이 없다. 앞에서 차별된 현상들이 서로 걸림이 없다고 하는 이유를 이야기 하였다. 사사무애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이치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열 가지로 세세히 나누어서 비유를 들면서 이 이치를 열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 한다.
청량스님은 이 서문을 쓰면서 ‘글로써 표현하는데 순리를 따랐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특별히 십현문이라고도 하고, 십현연기라고도 한다.
*
십현문(十玄門) :왕복서를 설명하기 좋게 10문(門)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데 제 6문의 두 번째 단락인 사사무애에서는 첫 단락에서 세상이 무애인 까닭을 먼저 이야기 했다. 두 번째로는 사사무애의 상(相)을 열가지로 나누어서 보여준다. 두 구절씩 열 가지로 나눈 이 부분을 흔히 십현문(十玄門)이라고 표현한다. 열 가지 아주 현묘한 문이다, 아득하고 깊고 깊은 문이다.
현(玄)자는 천지현황(天地玄黃)할 때 그 현(玄)자인데 검을 현(玄), 아득할 현(玄), 가물가물할 현(玄)자다. 색깔이 검다고 하는 흑(黑)이 아니라 아득해서 끝이 안보이는 것을 현(玄)이라고 한다.
화엄경은 모든 존재의 이치를 낱낱이 다 드러낸다. 모든 존재 속에 겉으로 표현되지 않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이치들이 있는데, 그것을 화엄경을 통해서 다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눈을 뜬 사람,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을 깊을 현(玄)자, 아득할 현(玄)자 현문(玄門)이라고 한다. 십현문이란 깊고 아득한 경지를 열 가지로 표현한다는 말이다.
사사무애는 화엄경의 깊은 도리고 또 가장 어렵기도 한 도리다. 청량국사는 그것을 열 가지 문으로써 설명하는데 달리 무슨 조작을 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이 자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른 가슴에 와닿지 않고 납득이 잘 안되더라도 부처님 말씀이나 깨달은 분의 말씀은 모두가 다 한 목소리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을 다 수용하고, 지금의 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사사무애의 이치는 특별한 이치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이 자리에서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이치다. 그것을 믿고 이해해야 된다.
*
본래 모든 존재는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걸림없이 존재한다.
그것을 십현문에서는 열 가지 방향으로 설명을 하는데 그 십현문의 제목만 보면 다음과 같다.
1,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2,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3,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4,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5,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6,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
7,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8,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9,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10,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
*
이 열가지 십현문으로써 사사무애의 도리를 잘 표현한 것인데 과거 화엄의 대가들인 현수스님이라든지 지상스님이라든지 이런 이들이 이렇게 정리를 한 것이다.
<1>, 제법이 상즉하여 자재함[諸法相卽自在門]
故得十身歷然而相作하고 六位不亂而更收로다
그러므로 十身이 분명하여 서로 이루고, 六位가 어지럽지 아니하나 새롭게 거두어들이도다.
*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제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다. 제법(諸法)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경에 있어서의 모든 가르침이고 확대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구름이 끼고 비가 오고 여름이 되면 날씨가 무덥고 식물이 아주 무성하게 자라고 하는 이런 현실들도 전부 제법이다.
모든 이치,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이 제법이다. 그것은 서로 즉(卽)해 있다. 상즉이란 서로 즉(卽)해서, 연관되어 있고, 엮여져 있다는 뜻이다.즉(卽)자는 우리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자주 쓰면서도 우리는 그냥 ‘즉(卽)해 있다’고만 표현한다. 이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인데 보통 연관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처럼 손과 손가락처럼 한덩어리다. 손가락은 손에 즉(卽)해 있다. 이런 정도의 관계를 즉(卽)이라고 한다.
손과 손가락은 한 덩어리면서 엄밀히 나누면 손은 손이고 손가락은 손가락으로서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 모두가 깊은 의미에서 보면 이런 상즉의 관계이다. 그러면서도 각각은 자유자재하다.
제법(諸法)은 서로 즉(卽)해 있으면서 자유자재하다.
한 동네 한 아파트에 여러 수백 명이 산다고 할 때 전부 한 아파트라고 하는 것에 즉(卽)해 있다. 서로 연관이 딱 되어 있다. 그러면서 모두 각자 생활을 잘 해 나간다.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유롭다고 하는 자재문(自在門)이다.
본래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방해하면 안된다. 방해하면 경비한테 신고를 하든지 경찰서에 신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치가 본래 방해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피아노 소리도 많이 내서는 안되는 것이고 부부싸움도 어디 산에 가서 해야지 집에서 하면 이웃집에 방해를 하는 것이다.신고하면 법에 걸린다.
서로가 즉해있으면서도 자재(自在)함을 우리가 지켜줘야 된다.
우리 모두는 손과 손가락과 같은 밀접한 연관 관계다. 법당에 들어올 때 벌써 내 호흡을 딴 사람이 마시고 딴 사람의 호흡을 내가 마신다.
잘 아는 사람 한두 명끼리만 호흡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하고도 이미 호흡이 다 섞여 버린다. 이 법당 안에 있는 이백 명의 호흡이 우리 몸 속에 다 섞여버린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싫지만 이 시멘트 기운하고도 내가 뒤섞였다.
이미 내 몸 속에는 시멘트 기운이 다 들어가 있고 이 시멘트 속에는 내 몸의 기운이 다 들어가 있다. 시멘트 기운하고도 내가 이미 서로 즉해 있다. 상즉(相卽)이다.
그러면서 시멘트는 시멘트 대로 나는 나대로 자재하다. 집은 집대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책은 책대로 모든 것은 자재(自在)하다. 이렇게 모든 우주 삼라만상은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그 이치를 잘 알고 그 이치에 맞게 살자는 것이다. 그러면 자유롭고 해탈이다. 화엄경은 그러한 이치를 하나하나 밝혀간다.
*
고득십신역연이상작(故得十身歷然而相作)하고 : 그러므로 십신이 분명하여 서로 이룬다.
역연(歷然)하다는 뚜렷하다 확실하다는 말이다. 역력하다고 할 때의 역(歷)자다. 십신(十身)이 뚜렷하다. 그러면서도 서로 독립되어 있다.
십신(十身)은 중생신(衆生身) 국토신(國土身) 업보신(業報身) 성문신(聲門身) 독각신(獨覺身) 보살신(菩薩身) 여래신(如來身) 지신(智身) 법신(法身) 허공신(虛空身)이다.
십신은 부처님의 열가지 몸이지만 부처님만이 아니라 보살도 그렇고 중생인 우리도 다 십신이 뚜렷하다.
예를 들어서 관세음보살은 우리가 잘 아는 친한 보살이다.
그 보살은 중생신(衆生身)을 가지고 있다. 또 국토신(國土身)을 가지고 있다.
국토가 바로 관세음보살의 몸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도 업보신(業報身)을 가진다. 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 나름의 업보를 가지고 있다.
또 성문(聲聞)도 되고 독각(獨覺)도 되고 연각(緣覺)도 되고 또는 보살(菩薩)의 몸도 되고 여래의 몸도 된다. 지혜신(智慧身)이라고 하는 지혜의 몸도 되고 진리의 몸인 법신(法身)도 되고 심지어 텅 비어 있는 허공신(虛空身)까지도 된다.
우리 개인도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 성문신, 연각신, 보살신, 여래신, 지신, 법신, 허공신 이라고 하는 열 가지 양상을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을 나눠놓고 보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서로서로를 지어간다.이러한 이치를 화엄경 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열 가지의 몸을 자유자재로 나툴 수 있다. 부처라고 해서 계속 굳어 있는 부처의 모습만 짓고 있다면 부처로서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또 이런 몸을 함께 해야 된다. 이렇게 십신의 모습이 분명하지만, 그것으로써 또 서로를 이루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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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위불난이갱수 (六位不亂而更收)하며 :여섯 가지 지위가 어지럽지 아니하면서도 전부 새롭게 거두어들인다. 갱수라는 말은 거두어 들인다,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본래 부처지만, 수행을 통해 현상적으로 닦아 올라가는 점차가 다르다. 그것이 육위다. 한 인간의 입장에서 부처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이러한 단계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십주 밑에도 십신이라고 하는 지위 단계가 있는데 십신이란 ‘믿음’을 말하기 때문에 보살지위에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보살의 지위를 말할 때는 십주부터 친다.
육위(六位)는 십주, 십행, 십회향이라고 하는 삼현(三賢)과 십지(十地)와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의 큰 이름만 따서 6위라고 한다. 십주 십행 십회향이라고 하는 세 가지 현인의 지위가 삼현(三賢)이다.
십지는 십성(十聖)이다. 삼현과 십지를 합쳐서 삼현십지(三賢十地)또는 삼현십성이라고 한다.
이 삼현십성(三賢十聖)과 등각(等覺), 묘각(妙覺)이 합쳐서 육위다. 보살의 수행점차를 화엄경에서 나열한 순서와 같다.
옛날 강원에서는 화엄경을 공부할 때 세주묘엄품은 안 보고, 십주품, 십행품, 십회향품, 십지품만을 보았다. 조금 후대로 내려와서는 현담만을 보기도 했는데, 화엄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기회가 드물었다. 그래서 옛날 강원에서는 ‘삼현십지 어디쯤에 본다’는 말이 흔하고, 십주품, 십행품, 십회향품, 십지품에 손 때가 묻고, 그 부분에만 주나 토가 많이 달려있는 책들도 많았다. 이러한 것은 강원의 한 풍습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지위가 어지럽지 아니하면서도 다시 거두어들인다. 갱수(更收)는 전부 새롭게 거두어들여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性正覺)이라는 말처럼 마음 한 번 내는 데 정각이 다 갖춰져 있다. 아무리 52위를 나열한다 하더라도 다 한 마음속으로 거둬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즉해있다고 하는 관계다.
처음 발심했을 때 그 속에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이 다 포함된다.그러면서도 또한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이 또 어지럽지 않게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한 방에 같이 있다. 개개인으로 보면 각각 독립된 개인이다. 또 화엄행자로서 화엄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 덩어리로 다 다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십신과 육위가 따로 존재하지만 전부 연관이 되어서 융통자재하다. 이것이 제법이 서로 즉해서 자재한 문의 이치다.
<2>, 넓고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없음[廣狹自在無碍門]
廣大卽入於無間이요 塵毛包納而無外로다
넓고 큼은 사이가 없는 데까지 들어가고, 먼지와 터럭처럼 작음은 밖이 없는 것까지 에워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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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 넓은 광(廣), 좁을 협(狹), 넓은 것이나 좁은 것이 자유자재해서 걸림이 없다. 넓고 좁은 것이 자유자재해서 걸림이 없는 도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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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즉입어무간(廣大卽入於無間)이요: 넓고 큰 것은 사이가 없는 데까지 들어간다. 무간(無間)까지 들어간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또 속이 있다. 그것을 천 번 쪼개도 또 속이 있을 수 있다. 사이가 있는 것이다. 요즘은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분자니 원자니 나노니 하고 이름을 붙인다. 쪼갤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작은 최소 단위의 물질인 쿼크(quark)나 힉스(higgs)도 발견되었다. 쪼개는 능력이 그만큼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그 정도이지 이 역시 기술이 발전하면 더 쪼갤 수 있다. 쪼개진다는 것은 그 속에 사이가 있다는 뜻이다.
물질은 이것과 저것이 결합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쪼개는 기술이 아직 부족해서 그렇지 얼마든지 더 쪼개고, 더 새로운 입자들에 관한 용어가 나온다.
거대한 장치를 만들어서 빛의 몇 배의 속도로 물질을 이동시키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물질들로써 물질의 기원을 찾아내는 과학기사가 신문에도 자주 나온다.
불교에서는 가장 작은 것을 인허(隣虛)라고 한다. 인허(隣虛)란 허공에 가깝다는 말이다. 텅 빈 것에 가까운 먼지라고 해서 인허진(隣虛塵)이란 말도 있다. 능엄경에 나오는 말인데 이웃할 인(鄰)자 허공 허(虛)자 먼지 진(塵)자를 써서 작은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 텅 빈 것과 가장 가까운 먼지다. 그렇게 작은 것에 이 어마어마한 큰 것이 다 들어간다.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간다’고 하는 익히 아는 말도 있지만, 그러한 표현보다도 광대즉입어무간이라는 표현이 천 배 만 배 더 극단적인 아주 극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무간(無間)이란 사이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작아도 쪼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이가 있다.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 사이가 없는 아주 작고 작은 것에까지 들어간다. 지금 내 눈에는 2백여 명 되는 청중들이 한눈으로 다 들어온다. 보는 내 눈이 커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이렇게 바라본다. 사실은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큰 산도 내 눈에 들어오고 빌딩도 내 눈에 들어오고 나무도 내 눈에 들어온다. 우리 키의 열 배 가까이 되는 큰 소나무도 사실 알고 보면 눈에 보일락 말락 작은 솔씨에서 생겼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비유를 들자면 광대하다는 것은 큰 소나무고 사이가 없이 작은 것은 솔씨다. 숲에 있는 소나무가 솔씨에서 생긴 도리는 눈을 뜨고 찾아보면 곳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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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포납이무외(塵毛包納而無外)로다: 진모(塵毛)는 먼지와 터럭을 말하는 것으로 아주 작은 것을 뜻한다. 지금 같으면 쿼크라는 말을 썼을지 모르지만, 경전이 쓰여질 당시 가장 작은 단위가 진모였다.
그렇게 작은 속에 무외(無外)를 다 담을 수가 있다. 진모가 작지만 무외를 포함한다.
아무리 커도 바깥은 있다. 예를 들어서 이 지구를 천 개, 만 개를 쌓았다 해도그 쌓은 밖은 또 있다. 몇백 광년, 몇천광년, 몇억광년을 지나간 그 바깥 그 넓고 넓은 우주공간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또 바깥이 있다. 우주는 그렇게 무한하다. 그런데 무외(無外)란 바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표현상으로는 ‘우주 끝까지’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가장 큰 것을 표현한 것이 무외다.
무간(無間)이니 무외(無外)니 하는 말은 불교 말고는 어디서고 만나지 못하는 표현들이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것은 무간(無間)이고, 제일 큰 것은 무외(無外)다. 얼마나 크면 더 이상 바깥이 없겠는가.
먼지나 터럭 끝 같이 제일 작은 것이 바깥이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것을 에워싼다. 포납(包納)은 다 에워싼다는 말이다.
우주 끝까지의 크기를 먼지 속에 다 집어넣는다.
이 말은 앞에 나온 광대즉입어무간(廣大卽入於無間)이라고 한 말의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말을 바꾸어 놓아서 그렇지 그야말로 넓고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이 없음을 뜻한다.
작은 솔씨는 큰 소나무에서 나왔고, 작은 솔씨가 큰 소나무를 키워 낸다.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이다. 넓고 큰 것이 작은 것 속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에워싸는 데도 걸림이 없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모든 존재는 사실 다 그와 같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만들어서 그런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3>, 미세하게 서로 수용하면서 제자리에 있음[微細相容安立門]
炳然齊現은 猶彼芥甁이요
환하게 다 나타남은 마치 겨자씨를 담은 병과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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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 십현문의 세 번째문 이름은 미세상용안립문이다. 미세하게 수용하면서 제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름에 익숙해져야 한다.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고 그 자리에 모두 안립되어 있는 세계다. 안립이라고 하는 말을 경전에선 잘 쓴다. 안정이 되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으면 각자 공부하고 있는 자리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안립이다. 사물이나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자기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 안립이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리 그 위치에서 자기 모습, 자기 향기, 자기 얼굴, 자기 개성을 가지고 존재한다. 그대로 다 옳다. 다 맞다. 상대의 생활양식이나, 생각하는 것이 내 기준에 맞춰 볼 때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없다. 이러한 이해도 모두 화엄경에서 나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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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제현(炳然齊現)은 :병연(炳然)은 환하다는 뜻이고 제현(齊現)은 가지런히 나타나 있다는 뜻이다. 환하게 눈에 보이듯이 나타나 있는 이것은
유피개병(猶彼芥甁)이다 : 마치 겨자씨를 유리병에다 담아놨을 때 그 유리병을 통해서 환하게 낱낱이 또록또록하게 비치는 것과 같다.
그 이름을 나중에 미세상용안립문이라고 했지만, 청량스님은 왕복서에 이렇게 두 구절의 아름다운 문장으로써 표현하였다.
투명한 유리병에 아주 작은 겨자씨를 잔뜩 담아 놓았다. 병 안에 들어있으니 겨자씨를 다 수용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겨자씨가 다 눈에 들어온다. 미세한 것을 다 수용하여 그대로 낱낱이 독립해 있으면서도 다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세상만사 삼라만상 모두가 이렇게 존재한다. 사람이면 사람, 사물이면 사물이 모두가 다 그렇다.
지금 2백여 명 우리 신도들이 이렇게 있는데, 모두 환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대로 다 나타나서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을 비유를 하자면 마치 개병(芥甁)과 같다.겨자씨 개(芥)자, 병 병(甁)자, 겨자씨를 유리병에 담아놓은 것과 같다. 병에 들어있는 겨자씨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 유리를 통해서 겨자씨를 보면 겨자씨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나하나 환하게 독립되게 그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구상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도 그렇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사람이 그렇게 독립되게 그 자리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이 전부 그렇게 그 자리에서 독립되어 있다.
우리는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기하고 가까운 것 중심으로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외의 것은 무심코 넘어가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아예 생각을 않고 지낸다.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 개개인의 입장을 본다면 낱낱이 똑같이 나와 같이 느끼고 존재한다.
옆에 사람이 큰 병에 걸리고 큰 불행을 당했다 하더라도 내 일이 아니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큰일이다. 누구든지 똑같다. 그런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러한 이치가 언젠가는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을 것이다.
<4>, 동시에 구족하여 서로 응함[同時具足相應門]
具足同時는 方之海滴이로다
동시에 구족한 것은 바닷물의 물방울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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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 한 순간에 다 갖춰져 있어서 서로 응(應)하는 문(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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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동시(具足同時)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동시에 구족되어 있는 것은
방지해적(方之海滴)이로다 : 바다에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 동시에 구족한 것은 바닷물의 물방울과 같다. 바닷물의 양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한 방울의 물 속에 그 드넓은 바다가 다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한 방울 바닷물의 의미만 알면 드넓은 바다를 다 알 수가 있다. 비가 꼭 땅에만 오란 법이 없고 건물 위나 산에만 떨어지란 법도 없다.
바다에도 똑같이 온다. 그런데 바다에 물방울이 떨어졌을 때 그 무수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기존의 바닷물의 분별이 애매모호하다.
낱낱이 무수한 물방울이 떨어졌지만 결국은 바닷물이라고 하는 하나로 다 갖춰져 버린다.
빗방울이 바닷물에 동화가 되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 모든 것이 다 그 속에 포함되는 것과 같다. 그것이 구족동시다.
바닷물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차별된 입장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한없이 차별한다. 사람도 각각이고 만물도 각각이다. 그런데 사람이나 동물이나 광물이나 생물이나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것은 같은 우주공간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성질이 똑같다. 하나의 원리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로써 전체를 다 파악할 수가 있다.
예를들어 스님들이라면, 한 스님을 통해 다른 스님들을 다 알 수가 있다. 또 한 집안이라면 집안의 한 사람으로써 그 집안을 다 알 수가 있다.
그것을 좀 더 확대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그렇다. 나뭇잎 하나로써 이 우주 법계 모든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구족동시(具足同時)는 방지해적(方之海滴)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다. 우리도 문수선원에 각자 개인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차원에서, 보다 더 눈을 뜬 입장,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전부 한 덩어리다.
각자 개인이면서 또한 한 덩어리다. 무수한 빗방울이 바닷물에 떨어진다. 낱낱이 따로 독립된 빗방울이다. 그러면서 또 통일된 하나의 바닷물이다. 반대로 하나의 바닷물이면서 낱낱이 독립된 개체의 빗방울일 수가 있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사람은 사람대로 무수한 개개인의 삶이 있으면서 진리의 성품속에서는 전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무수한 빗방울이 바닷물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듯이 우리는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아직 우리 눈에는 그것이 안보이고 전부 각자인 것으로만 보인다. 네 것과 내 것이 다르고, 너 다르고 나 다르다. 핏줄을 나눈 형제사이도 네 것과 내 것을 나누고 재판을 붙여서 야단법석을 한다. 그것은 무지몽매해서 눈 앞에 펼쳐진 현상만 보고 쫓아가다 보니 그런 것이다.
한 꺼풀 너머에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전부 우리는 하나다. 이것을 우리가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면서 깨달아야 되는데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러한 사실을 청량스님은 방지해적(方之海滴)이라고 표현 하였다.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이 모든 존재는 하나하나 독립된 빗방울이지만 결국은 바닷물이라고 하는 통일된 하나의 바다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산천초목과 사람도 결국은 하나다.
사람끼리도 다르고 형제끼리도 다른데 어찌 산천초목과 사람이 같을 수 있겠는가.깨어있는 눈으로 한 눈 더 뜨고 보면 저 산천초목과 내가 둘이 아니다, 하나다.
그러한 차원이 아직 우리 눈에는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지 그러한 차원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아직 산천초목과 나와 하나라고 하는 것은 알려고 하지 말고, 우리 형제자매는 최소한도 하나다, 라는 것만 철저히 느끼고 실천해도 상당하다.
형제자매는 최소한도 하나다. 부모처자는 최소한도 하나다. 이 정도까지만 우리가 깨달아도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은 천지만물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이다. 일본에 『생명의 실상』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다. 불교내용과 기독교내용과 세상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전부 농축시켜서 30권인가 하는 책으로 저술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많이 되어 있는데 그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의 서두에는 “천지만물과 화해하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왜 천지만물과 우리가 화해를 해야 되는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천지만물과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제끼리 화해하듯이 천지만물과 우리가 화해를 하면 모든 갈등이 사라진다.화해가 안됐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그 책 역시 기가 막힌 내용인데, 화엄경의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가르침이다.
'구족동시(具足同時)는 방지해적(方之海滴)'이라고 하는 이 구절만으로도 우리한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동시에 구족해 있다. 비유하자면 그 드넓은 바다에서 한 방울의 물과 같은 것이다.’
글의 표현이 참 근사하다.
이러한 이치를 철학적으로 풀면 구차하고 설명이 길다. 또 그 설명은 썩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다. 그런데 ‘구족동시(具足同時)는 방지해적(方之海滴)이로다’ 하는 여덟 글자 속에는 모든 것들이 다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왕복서를 명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5>,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수용하나 같지 않음[一多相容不同門]
一多無碍는 等虛室之千燈이요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는 것은 텅 빈 방에 천개의 등불을 밝힘과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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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수용하나 같지 않다. 십현문중에 다섯 번째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은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용납하지만 그것이 같지 않고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부동이다, 같지 않다는 말은 다르다는 뜻이다.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용납하지만 같지 않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일다무애(一多無碍)다. 하나와 많은 것이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법문하는 내가 혼자지만 법문을 듣는 여러분과 아무 걸림이 없고 또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와서 공부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걸림이 없다.
십현문은 화엄철학을 대표하는 열 가지 표현이다.그 내용은 결국 사사무애(事事無碍)다. 모든 존재는 전부 걸림이 없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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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무애(一多無碍)는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는 것은
등허실지천등(等虛室之千燈)이요 : 텅 빈 방에 천개의 등불을 밝힘과 같다. 일다무애를 설명하면 잘 이해가 안되니까 비유를 든 것이다. 텅빈 방에 천 개의 등을 켜 놓은 것과 같이 동등하다. 등(等)자는 동등하다고 새긴다.
여기 등불이 많은데 등불은 한 개를 켜도 그 하나의 불빛이 이 공간 하나에 꽉 찬다. 어둡고 밝고는 다르지만 등불은 세 개를 켜나 열 개를 켜나 백 개를 켜나 전부 그대로 이 방에 꽉 찬다. 절대 싸우지 않는다.
열 개를 켠다고 해서 ‘여기는 내 자리다’‘여기는 네 자리다’ 이런 식으로 경계를 가지고 다투지 않는다.
자기 빛은 자기 빛대로 이 구석에서 저쪽 구석까지 비추고 저쪽 구석에 있는 빛도 거기서도 이쪽 구석까지 다 비춘다.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자유롭게 조화를 이룬다.
한 개는 개체고 많은 것은 전체다. 천 개의 등불을 한 방안에 켜놓은 것과 같이 개체와 전체가 아무 걸림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사실은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고 그렇게 살아가야 옳다.
나와 우리 사천만 국민이 함께 한 나라에 이렇게 살지만 서로 자기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서로 걸리지 않고 서로 방해하지 않고 살아간다.
본래 방해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색깔 입힌 마음,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어서 서로 방해한다.
사람에게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개재되는데 그것을 정(情)이라고 한다. 마음 심(心)옆에 푸를 청(靑)을 더한 것이 정(情)이다.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는 자기 감정이 개재된다. 그 마음이 그대로 텅 비고 본래 청정한 마음 같으면 모든 존재가 존재하는 형식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수용할텐데 거기에 감정의 색깔이 덧입혀져 버린다.
감정이 개재되어버리면 네 것이다, 내 것이다, 우리편이다, 상대편이다 온갖 불필요한 사량분별과 망상분별이 낀다. 안경에 푸른색을 입혀서 보면 세상이 푸르게 보인다. 노란색을 입혀서 보면 노랗게 보이고 붉은색을 입혀서 보면 붉게 보인다. 공연히 아무 색깔도 없는데 색깔을 입혀서 보니 푸르게도 보이고 누렇게도 보이고 붉게도 보인다. 그것이 정(情)이고 감정이다. 별별 종류와 천차만별의 심도를 가졌다. 각각 다른 그 감정들이 마음에 개재되면 본래 청정한 마음을 덮어버린다. 감정의 색깔이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모든 존재가 본래 자유롭고 평화롭게 존재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때가 끼듯이 감정이 끼면 거기에 ‘좋다 싫다’고 하는 온갖 감정이 생기면서 고통과 갈등을 야기한다.
우리 불교에서 ‘마음을 비운다, 수행을 한다, 마음을 닦는다, 기도를 한다, 참선을 한다’는 일들은 사실 어떻게 보면 마음에 색깔 입혀진 것을 제거해 내는 일이다.
마음에 낀 색깔을 제거해 내는 일을 화엄경 이치대로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색깔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단지 알면 그 뿐이다. 본래 색깔이 없다. 색깔은 미움도 되고 사랑도 된다. 본래 미움도 없고 사랑도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연이 되어서 싸우게 되고 또 서로 사랑하게 되고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다.
본래는 없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일이다.
그렇게 아는 것은 갈고 닦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 그냥 아는 것이다. 그저 본래 우리 마음은 그런 것이 없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을 괜히 허상에 사로잡혀서 내가 한 번 속았구나’ 하고 한 번 돌이키면 끝이다.
오랫동안 기도하거나 오랫동안 참선하거나 오랫동안 경을 봐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이치라고 하는 것은 수만 년동안 어둡던 동굴에 불을 한 번 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나라에도 동굴이 많은데, 그런 동굴속에 수만 년, 수억 년의 어둠이 있었다고 해도 거기에 전기 시설을 해서 전기 스위치를 탁 올리면 그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만 년동안 어두었다고 그 어둠이 나가는 시간이 한 시간이 걸리거나 이틀이 걸리거나 삼 일이 걸리지 않는다.
전기를 켜는 그 한 순간에 어둠은 싹 다 사라진다.
사라지는데 일 분, 일 초도 안걸린다.
전기를 켜는 순간 사라질 뿐이다.
색깔이 입혀진 마음을 번뇌망상, 분별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동굴 속의 어둠과 같다. 우리가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인데, 색깔 없는 것이 내 마음의 본래 모습인데’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그 순간이 전기 스위치를 켜는 순간이다. 우리가 수만 겁의 생을 거듭하면서 중생으로 캄캄하게 살아왔더라도, 그 생각 한 번 일으키는 그 순간에 수만 년 동안의 그 어둠, 그 번뇌망상이 싹 사라져버린다.
마음의 도리는 그렇게 되어 있다.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한 그러한 이치를 깨달아서 중생들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을 자꾸 접함으로 해서 어느날 어느 계기에 그렇게 마음이 돌아설 수가 있다.
본래 우리는 청정한 이치로써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화엄의 이치를 통해서 깨닫는 것이다. 이치는 눈에 보이듯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천 개의 등을 텅 빈 법당에 밝힌 것과 같다’고 비유로써 표현했다. 그럴 수 없이 좋은 표현이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우주 공간의 모든 사물들은 전부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도록 되어 있다.
사실은 모두 각자가 자기 할 일을 자기가 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의 궁극적 이치는 사사무애에 있다고 하는 말을 자주 한다. 특히 청량스님이나 과거 화엄학자들은 보살행이 아니라 사사무애에 초점을 맞추어서 화엄경을 이야기한다.
보살행도 결국은 사사무애를 이해했을 때 진정한 보살행이 나온다. 사사무애의 경지에까지 이르러 동체대비의 입장에까지 갔을 때 진짜 보살행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일다무애(一多無礙) 등허실지천등(等虛室之千燈)’이다. 천개의 등을 빈 방에 켰을 때 서로서로 하등의 경계를 다투거나 내 자리 네 자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데 공연히 우리는 잘못된 생각으로 자기의 틀과 자기의 잣대를 만들어 옳다, 그르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를 다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화엄의 안목은 이 세상 그 어떤 종교 어떤 철학의 안목보다 우수하고 뛰어나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것을 우리가 하나하나 이해해 나갈 때 상상할 수 없이 깊은 의미와 맛을 느낄 수가 있다.
<6>, 비밀히 숨고 드러남이 함께 성립됨[秘密隱顯俱成門]
隱顯俱成은 似秋空之片月이로다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가을 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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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 : 비밀히 숨고 드러남이 함께 성립된다. 이 표현도 근사하다. 구성(俱成)은 함께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사람과 모든 천지 만물이 다 이렇게 존재한다. 우선 사람만을 두고 생각하면 제일 이해가 빠른데, 사람으로서도 드러난 면이 있고 숨은 면이 있다. 은(隱)은 숨은 것이고 현(顯)은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얼굴을 가지고 있고 육신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일체 생활을 하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생활에 나가는 것은 현(顯)이다. 전부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드러나지 아니한 내면의 내가 있다. 그것은 은(隱)이다. 모든 존재와 모든 사람은 은과 현을 함께 가지고 있다.
꽃도 이렇게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반만 드러난 것이다.반은 내재(內在)되어 있다.
내재되어 있는 것이 꼭 꽃을 꽃피우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것도 있고 또 세월이 가면 꽃이 시들게 하는 힘도 있다. 꽃이 시들게도 하는 그 작용들은 보이지 않는다. 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모든 존재가 그렇게 숨은 면과 드러난 면이 함께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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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구성(隱顯俱成)은: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사추공지편월(似秋空之片月)이로다: 가을 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여름달하면 재미없고 봄달도 재미없다. 겨울달은 너무 차갑다. 가을달이 아주 근사하다. 은현구성이 가을하늘에 조각달과 같다. 시적인 표현이다.
예를 들어서 반달이 있다고 하면 반달이 우리 눈에 반만 보여서 그렇지 반은 숨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안다. 햇빛을 반밖에 못받아서 반달이 된 것이지 달 자체는 전혀 손상이 없다. 일식이나 월식이 있어도 잠깐 그 위도가 달라졌을 뿐이며 사실은 온달이라고 하는 사실도 잘 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고 얼굴을 가지고 있고 생활을 하고 말을 한다. 이것이 전부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사람을 이해하고 평가하면 안되는 것이다.
마치 반달처럼, 드러나지 않는 숨은 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숨은 면이 더 많다. 꽃도 마찬가지고 모든 존재가 다 그렇다. 예를들어 꽃씨가 있다고 하면 언뜻 보기에 씨앗은 그저 씨앗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씨앗 속에는 푸른 하늘도 있고, 새싹도 있고, 꽃도 있다. 푸른 색, 붉은 색 온갖 색깔이 씨앗 속에 다 있다.
우리 불교에서는 연꽃을 좋아한다. 만고의 아름다운 연꽃이지만, 연꽃이 들어있는 연뿌리는 흙투성이고 아무렇게나 생겼다. 그러나 연근 속에 연꽃이 있는 것이다. 연근속의 연꽃은 은(隱)이고 연근은 현(現)이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다 드러난 것 같으면서도 드러나 있지 않다.그런데 또 드러난 것만이라도 제대로만 알면, 나머지 숨은 것도 알 수가 있다. 반만 드러났다 해도 드러난 반을 제대로 모르면 숨은 반도 전혀 모른다.
드러난 것 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돈거래를 한다든지 약속을 한다든지 특히 이해관계 거래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반은 드러나고 반은 숨어있다. 이러한 이치를 가지고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의 입장에서는 ‘만물이 그대로 부처다’라고 한다. 나는 한걸음 양보해서 법화경의 입장으로 ‘사람이 부처다’라고 말한다. 만물이 부처인 것은 우리가 얼른 수용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다. 우리들의 그릇에 얼른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사람이 부처다’ 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실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최상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화엄경과 법화경과의 또 다른 차원이 바로 그런 점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 건져내서 청량국사는 서문에다가 이렇게 짧게 표현했다.
‘은현구성(隱顯俱成)은 사추공지편월(似秋空之片月)이라’
참 근사한 표현이다. 하나하나 글자 놓인 것을 보면 얼마나 시적인가.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가을 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이런 구절들을 붓으로 크게 써서 벽에 붙여놓고 며칠 감상하고 떼고 하는 것도 좋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아는 것이다.
<7>, 인드라의 그물과 같은 경계[因陀羅網境界門]
重重交映은 若帝網之垂珠요
거듭 거듭 서로 비춤은 제석천 그물에 구슬을 드리움과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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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인다라는 제석(帝釋)이고 인다라망이라고 하는 것은 제석천의 그물이다.
‘서로 사귀고 얽히면서 비추는 것이 제석천 그물에 드리운 구슬과 같다’ 이것도 역시 우주의 삼라만상이 이렇게 구성되어 있고 모든 존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안목으로 볼 때 이미 우리는 그런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청량스님의 깨달음과 뛰어난 글 솜씨로 한껏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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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중교영(重重交映)은 :거듭 거듭 서로 서로 사귀어 비추는 것은
약제망지수주(若帝網之垂珠)요: 제석천 그물에 구슬을 드리움과 같다.
모든 존재가 거듭거듭 서로 사귀어 비친다.
여기는 중중교영(重重交暎)이라고 했는데 어떤 표현에 보면 중중(重重)중중하고 무진(無盡)무진하다라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을 반복해서 표현한 것도 있다.
중중교영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거듭거듭 사귀어 비친다. 교(交)라고 하는 것은 서로 얽히고 서로 연관되어서 서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속에 당신이 있고 당신 속에 내가 있다. 남을 보고 나를 알고 나를 보고 남을 안다. 모든 존재가 그렇게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앞서 등불 이야기도 있었지만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 뒤섞여서 비추고 있다. 서로 그렇게 스며들어 있다. 손과 손가락과 같이 즉(卽)해 있는 입장이다.
나만을 놓고 보면,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은 그저 다른 존재로서만 보일 수도 있지만 나와 나아닌 다른 존재와의 관계는 마치 손과 손가락과 같은 존재다. 같은 존재이면서 엄밀히 말한다면 약간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약제망지수주(若帝網之垂珠)라고 했다.
제망(帝網)은 제석천의 그물이다. 이것을 인다라망이라고 한다.
제석천궁을 아름답게 지었는데 그것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다이아몬드와 같은 뛰어난 보석으로 그물을 짜서 그 화려한 제석천의 궁전을 덮었다. 그 보석이 한 두 개가 아니라 여러 수 억만 개의 다이아몬드로 짜여져 있어서 서로서로 그 빛이 반사된다. 비춰주고 비춰 받는 것이 중중교영이다.
여기에 있는 다이아몬드가 저쪽에 비치고 저쪽에 있는 다이아몬드가 이쪽에 비치고, 또 옆으로 옆으로 전부 서로서로 내가 상대의 빛을 받아들이고 또 내 구슬을 상대에게 비춰주면서 전부 혼융(混融)되어 있다.
그것을 제석천 그물이 구슬을 드리운 것과 같다고 해서 제망지수주(帝網之垂珠)라고 한다.약(若)자는 이럴 때 ‘같다’라고 새긴다. 제석천의 그물이 구슬을 드리운 것과 같다. 구슬을 늘여뜨린 것과 같다.
옛날에는 중국집 문 앞에 구슬을 발로 엮어서 드리워놓는 것이 있었는데 요즘도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상상하자면 그런 식이다. 그보다 억만 배나 되는 큰 구슬로 만든 그물이다. 물론 이것은 그물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그러한 관계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나와 남, 나와 다른 동물, 나와 그리고 다른 식물,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사람과 공기, 사람과 온갖 산천초목과 저기 떠있는 별들과 멀리 있는 존재들까지도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그런 관계로 되어 있다고 하는 표현이다.
요즘은 ‘남미 끝에서 잠자리가 날개짓을 하면 중국에 태풍이 몰아친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딱 화엄경에 있는 소리다.
그런 관계를 지금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이다.
<8>, 十世로 나누어진 법이 다르게 이루어짐[十世隔法異成門]
念念圓融은 類夕夢之經世로다
순간순간 원융함은 저녁 꿈에 세상이 지나감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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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십세(十世)로 나누어진 법이 다르게 이루어졌다. 법성게(法性偈)에 보면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라는 표현이 있다. 깨달은 안목으로 볼 때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말한다.
보통 상식적으로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그런데 깨달음의 밝은 눈으로 보면 과거에도 그 과거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현재에도 현재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미래에도 미래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불교는 아홉 등급으로 매기기를 좋아하는데 예를 들어 구품연대라고 하는 것이 극락세계에도 있다.물건을 살 때 하지하(下之下) 하지중(下之中) 하지상(下之上) 중지하(中之下) 중지중(中之中) 중지상(中之上) 상지하(上之下) 상지중(上之中) 상지상(上之上)으로도 나누는데 그런 것 역시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사람의 등수도 아홉가지로 나눈다.
불자들이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공부하는 데는 구등급이 아니라 구천 등급도 있을 수가 있다.
아무튼 불교에서는 시간을 과거의 3세, 현재의3세, 미래의 3세로 해서 아홉 가지로 쪼갠다. 그것을 구세(九世)라고 한다.
그런데 십세(十世)란 이 모든 시간이 우리 현재 한 순간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전일념(現前一念)이라고 쳐서, 9세와 그것을 관통하는 현전일념(現前一念)을 더하여 10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십세(十世)로 나누어져 있는 법이 전부 다르게 성취된다. 그래서 이성문(異成門)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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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념원융(念念圓融)은 : 순간순간 원융함은
유석몽지경세(類夕夢之經世)로다 : 저녁 꿈에 세상이 지나감과 같다. 순간순간 속에 무한한 과거가 포함되어 있고 무한한 미래도 다 포함되어 있다.
순간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가 원융하다고 하는 것은 쉽게 예를 들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제 일을 금방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법문하는 과정에도 작년 생각이 떠올라서 ‘작년엔 튀김 저렇게 안했는데’하면서 금방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다. 미래 역시 그렇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는데, 모레는 또 무슨 일이 있는데’하면서 금방 미래로 가버리는 것이다.
현재에 있다고 해서 생각이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속에 과거도 포함되어 있고, 미래도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원융(圓融)이다. 류(類)자는‘같다’는 뜻이다. 비유하자면 석몽지경세(夕夢之經世)다. 밤에 꿈을 꾸는데, 한 세상을 다 지낸다.
나는 여기서 가능하면 직역으로 번역을 하였는데, 5초 10초 동안 잠깐 꿈을 꾸어도 거의 일생을 꿈꿀 수 있고, 몇 시간 내지 하루를 꿈 꿀 수도 있다.
이광수의 『꿈』이라고 하는 소설에는 주인공인 스님이 예불하면서 저녁 종을 한 번 땅 치는데 그 종소리가 미처 다 끝나기 전에 천신만고를 겪으며 일생을 사는 꿈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낙산사 조신이라고 하는 스님의 꿈 이야기를 이광수 선생이 소설로 구체적으로 잘 썼다.
종 한 번 둥- 치는 1,2초 사이에 꿈을 꾸는데 그 꿈속에서 장가도 가고 아이들도 낳고 늙고 병들어 죽고 영광과 오욕이 뒤섞이고 하는 문제가 다 지나가는 것이다.그러한 꿈을 다 꾸고 깨어났는데도 종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유석몽지경세(類夕夢之經世)라는 것이 그렇다.
어떤 경우는 꿈에 내가 살다가 죽어서 또 다른 생을 살다가 또 그것도 끝내고 그 다음 생, 삼생(三生)을 사는 경우도 있다.
우리들이 살아온 70년, 80년을 돌이켜 봐도 지금 생각하면 하룻밤 꿈이다.
30대나 40대나 50대나 60대나 70대나 80대나 살아온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룻밤 꿈 밖에 안되는 것이다.
1, 2초 안에 30년 세월이 들어가고, 긴 경우는 백 년도 1,2초 안에 다 포함된다.이것이 우리 마음의 도리고 이치다.
마음이 시간상에 있어서 그렇다.
그것을 법성게에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한다. 기막힌 이치다.
부처님이나 옛날 도인 스님들이 확철대오하여 정말 철두철미하게 진리를 크게 깨달으면 이런 이치에 대해서 환하게 그냥 알아버리는 것이다.
요즘 과학이론은 면밀히 계산을 해서 무슨 무슨 이론을 세워놓는데 몇 년 지나면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 전에 세웠던 이론을 뒤바꿔 버린다.
그러나 도를 통해서 어떤 이치를 밝혀놓은 것은 이와 같이 영원히 변동이 있을 수가 없다.
념념원융(念念圓融)은 유석몽지경세(類夕夢之經世)로다 이 한 구절만 해도 참 근사하다.
설사 꿈 이야기를 이끌어오지 않더라도 한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한 순간을 빼면 영원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미래도 없다. 이러한 이치를 청량스님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염념원융은 유석몽지경세다’라는 간단한 말 속에 이 이치를 잘 표현했다. 이러한 것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100번을 쓰면서 읊조려 보기 바란다.
<9>, 사에 의지하여 법을 드러내어 이해를 냄[託事顯法生解門]
法門重疊은 若雲起長空이요
법문이 중첩함은 먼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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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사라고 하는 어떤 현상적인 것에 의지하여 법을 드러내어 이해를 낸다. 생해문(生解門)은 ‘아 도리가 그렇구나’ 하고 이해를 내는 것이다. 탁(託)은 의탁한다 부탁한다고 할 때의 탁이다. 눈에 드러나고 귀에 들리는 현상을 사(事)라고 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정신적인 것이라든지 숨어있는 이치를 이(理)라고 한다.
불교에는 이면사면(理面事面)이라는 말도 있고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는 말도 있다.
사찰에서 절을 운영하는 사람을 사판이라고 한다. 사면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다.또 강원에 있다든지 선방에 있다든지 뒷방에 있으면서 참선이나 경전 공부를 위주로 살아가는 스님들은 이면의 공부를 중심으로 한다고 해서 이판이라고 한다. 이치면으로 진리면으로 공을 들이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게 둘로 나눠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것이 절의 원융한 모습이다.
여기에서 탁사(託事)라고 하는 말은 사면(事面)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꽃 한 송이에 의탁해서 진리와 법을 나타낸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라고 노래한 서정주씨는 원래부터 불교인이다. 불교의 화엄연기 사상을 시로써 표현한 것이 ‘국화옆에서’라고 하는 시다. 한 송이 국화꽃 속에는 봄부터 울었던 소쩍새의 울음도 다 포함되어 있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던 사실들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한 송이 국화꽃을 통해서 생해(生解)한다. 이해를 낸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에도 이치가 있고 진리가 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우리가 이치를 볼 수 있고 진리를 볼 수 있으면 그것이 사면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의지해서 연기의 이치를 안다는 것 역시 탁사현법생해문이다.현법(顯法)할 때의 법은 세상만사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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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중첩(法門重疊)은: 법문이 중첩한 것은
약운기장공(若雲起長空)이요: 마치 저 드넓은 하늘, 멀고 먼 하늘에 구름이 무엿무엿 일어나는 것과 같다. 구름은 비슷한 것 같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 늘 다른 모습 같으면서도 또 같은 구름이다.
약(若)자는 같다는 뜻이다. 운기장공(雲起長空)은 구름이 긴 하늘, 드넓은 하늘에서 뉘엿뉘엿 일어나는 것과 같다. 여름날 구름이 하늘에서 일어날 때 얼마나 중중첩첩(重重疊疊)으로 일어나는가.
특히 인도에서 우기 때, 비 오기 전 몰려오는 그 구름은 말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에 구름이 일어날 때는 굉장하다.그와 같이 화엄경은 법문이 무성하고 풍부하고 넉넉하고 많고 끝도 없다. 그래서 바다 해(海)자도 많이 쓴다. 법문이 바다처럼 넓다는 표현이다.
화엄경 법문은 중첩이다. 몇 중(重)인가 하면 십 중으로 되어 있다.
법문 한 마디 나오면 열 번, 한 마디 나오면 열 번, 한 마디 나오면 열 번 무조건 보살도 열 명이고 단계도 열 단계고 게송도 열 게송이다. 그래서 화엄경은 십십법문(十十法門)이다.
간혹 열 한 게송도 나오지만, 대부분 열 게송으로 짝을 맞추고 열 명의 보살, 열 명의 신장이 나온다. 이러한 형식은 사면(事面)이다. 이 세상은 본래로 원융무애하고 완전무결한 형태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열이라고 하는 사면을 통해 원융무애하다고 하는 이치를 드러낸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전무결한 것인데 중생들의 욕심이 개재되고 감정의 색깔이 끼니까, 불평불만이 생기고 문제가 일어난다.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한껏 자기 능력과 자기 인연만치 잘한다고 하는데 공연히 어머니가 불평한다. 어머니 나름의 자기기준이 있어서 마음에 안들어하고 잘하느니 못하느니 불평하며 문제를 야기한다.
주부는 다 100점짜리 주부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서로가 다 그런 것이다. 또 한편 그러니까 사실은 알고보면 모두가 완전무결한 것이다.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십십법문으로써 반복한다. 법문중첩(法門重疊)이다.
법문이 중첩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굳이 열이라야 되는가.
화엄경에서는 열 이라고 하는 그 숫자 그 사면에 의탁해서 이대로가 완전무결하다고 하는 법을 드러내기 때문에 숫자 열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불만도 많은 인생이지만 사실 눈을 뜨고 보면 현재 이 모습 이대로가 완전무결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며 살자는 것이다. 법문이 중중 중중 하고 첩첩 첩첩한 것이 이렇게 의도적이다.
화엄경 법문이 중중첩첩한 것은 마치 하늘에서 구름이 일어난 것과 같다. 얼마나 시적인가. 참 표현이 근사하다.
이런 데에 차츰차츰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야 참 화엄경 근사하다. 이건 뭐하고도 바꿀 수가 없는 이치구나’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들 마음속에 화엄경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재산, 어마어마한 보물로 내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화엄경이 그냥 있어서 보물이 아니다. 내가 그만치 깊이 이해하고 느꼈을 때 화엄경은 보물로 다가온다.
자자입심(字字入心) 구구입심(句句入心) 이라는 말이 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우리 마음에 들어가서 자리매김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 마음 밭에 심어져서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싹을 틔우고 줄기가 뻗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길이 있게 되는 것이다.
법문중첩이 화엄경에서 얼마나 근사한가 하면 약운운기장공(若雲起長空)이다. 마치 여름날 저 드넓은 창공에 뭉게뭉게 구름이 일어나는 모습과 같다.비슷하면서도 다른 내용이고 다른 내용이면서도 비슷한 내용이다.
청량스님은 이 화엄경을 그렇게 보았다.
그야말로 참 표현을 잘 했고, 근사하다.
이런 것은 설명으로 해 봐야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도 설명이 안 된다.
저 창공에 여름날 구름이 무엿무엿 피어오르는 그 모습을 뭐라고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냥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설명이 안 되니까 그저 글 뜻을 정확하게 알아서 많이 읽고 많이 써서 느끼는 것에 화엄경의 맛이 있다고 늘 말씀을 드린다.
<10>, 여러 장의 순수함과 뒤섞임으로 덕을 갖춤[諸藏純雜具德門]
萬行芬披는 比華開錦上이로다
만행이 아름답게 펼쳐짐은 비단 위에 꽃이 핌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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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 : 여러 장의 순수함과 뒤섞임으로 덕을 갖춤, 십현문의 마지막 문은 제장순잡구덕문이다.
장(藏)이라는 말이 화엄경 본문에도 많이 나오는데 ‘새겨져 있다’ ‘그 속에 스며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탁자나 법상이나 주장자, 심지어 죽비 하나에도 조각을 하는데 연꽃도 조각할 수가 있고, 사자 모습도 조각할 수가 있고, 매난국죽을 조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장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앉으신 사자좌에는 무엇무엇이 어떻게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 나오고 그것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설명이 된다. 난초를 조각했다고 난초는 아니지만, 거기에는 난초 그림이 갈무리[藏]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장(諸藏)이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 수행법이라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육바라밀을 닦는 것도 해당된다. 화엄경에서는 십바라밀이라고 하는데 열 가지 바라밀을 제장(諸藏)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수행이나 열 가지 바라밀을 가지고 순(純)으로 닦기도 하고 잡(雜)으로 닦기도 한다. 순(純)은 순일하다 순수하다는 뜻이고 잡(雜)은 여러 가지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수행 가운데 사경을 제일 많이 하면서 법문도 듣고 봉사도 나가고 눈에 보이는 대로 여러 가지 보살행을 한다고 할 경우 사경은 순이 되고 나머지 활동이 잡이 된다.
순과 잡은 다른말로 주와 조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바라밀(主波羅密)이 있고 조바라밀(助波羅密)이 있다.
주로 하는 것이 주바라밀이다. 살림을 사는 주부는 집안일이 주바라밀이다. 그리고 절에 와서 불공하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은 조바라밀이다. 불교를 신앙하는 것 가운데서도 기도가 자기 전문이라면 기도가 주바라밀이고 법문 듣고 경전공부하는 것은 조바라밀이다.
경전공부하는 것을 주바라밀로 하고 나머지 기도나 봉사활동이나 보살행은 조바라밀로 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수행법을 순(純)으로도 하고 잡(雜)으로도 하고 주바라밀로도 하고 조바라밀로도 하고 하면서 덕을 갖춘다.
부처님을 만나서 불교를 믿고 이렇게 수행을 하며 불교신행생활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성덕(成德)과 단장(斷障)을 위함이다.
여기는 구덕(具德)이라고 했는데 성덕(成德)이나 구덕은 같은 말이다.
성덕은 나의 덕을 자꾸 성취시켜가는 일이다. 좋은 일, 보살행을 많이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름답게 살 수가 있다.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보살행이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남에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고 그보다도 더 우선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 진정으로 공덕이 되고 보탬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전부 덕을 이뤄가는 일이다.
단장은 끊을 단(斷)자, 장애라는 장(障)자. 나의 안좋은 점, 부족한 점, 약점을 하나하나 끊어가는 일이다. 번뇌가 많다든지 업장이 두터워서 공부하면서도 생각은 딴 데 가있다든지 도대체 잘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들도 전부 장애다. 그 장애를 하나씩 하나씩 끊어가는 것이 불교공부다.
불교를 믿는 일은 덕을 키워가는 일이면서 한편으론 내 삶의 부정적인 면, 장애를 끊어가는 일이다. 이중에 성덕을 구덕(具德)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을 청량스님께서는 만행분피(萬行芬披)는 비화갱금상(比花開錦上)이라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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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분피(萬行芬披)는 :보살만행으로써 향기롭게 피는 것은, 보살행을 잘 하는 것은
비화개금상(比華開錦上)이로다 :마치 비단에 꽃을 수놓은 것과 같다.
만행은 육도만행, 십도만행이라고도 한다. 일반불교에서 육바라밀을 이야기한다면, 화엄불교에서는 십바라밀을 이야기 하는데 그 십바라밀이 십도만행이다.
법회에서 사회를 보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 후원에서 봉사하는 것, 책상을 펴고 거두고 하는 것도 만행이고, 불명을 받는다고 떡을 해오고 귤을 사와서 대중공양을 올리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하나 보살만행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중의 경이며 최고의 경인 화엄경을 한 자 한 자 귀담아 듣고 손으로 써보기도 하고 내용을 파악하려는 노력도 내 자신에게 아주 좋은 보살만행이다.
이런 것이 분피(芬披)라고 했다.향기로운 분(芬)자 펴다 할 때의 피(披)자다.
향기롭게 핀다.
보살행을 하면 싫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겸손하고, 자기 앉을 자리 남보고 앉으라고 하고 다른사람이 먼저 좋은 자리에 신 벗게 하고, 책상 하나도 자기가 먼저 운반한다면 ‘저 사람 참 훌륭하다’라고 저절로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불법과는 관계가 없이 세상이치가 그렇다.
그것이 피(披)다. 향기롭게 핀다. 보살만행을 향기롭게 피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비단 위에 꽃을 수놓은 것과 같다.
십도 만행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것은 비단 위에 꽃을 폄과 같다.
우리가 흔히 금상첨화라는 표현을 하는데 여기서는 화개금상(華開錦上)이라고 표현했다.
무늬없는 비단도 고급스러운 천인데 거기에 꽃수를 놓아놓으면 얼마나 근사한가.
열 개(開)자는 수놓아졌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얼굴도 잘생겼는데 교양도 있는데다가 보살행까지 한다, 겸손하고 하심하고 굳은 일은 다 도맡아 한다. 이런 것이 금상첨화다.
화엄(華嚴)이라고 하는 것은 꽃 화(華)자, 장엄할 엄(嚴)자다.
우리가 화엄경 하는데 꽃으로 장엄한다는 말이다.
본래 사람은 비단이다. 아주 소중한 존재다. 거기다가 보살행까지 더하면 비단에 꽃으로 장엄하는 것이 된다. 천으로 치면 최고급 비단인 우리들이 화엄경 공부를 하고 이런 훌륭한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꽃으로 그 비단을 장엄하는 일이다.
내가 가끔 권하는데 화장실에 컵 하나 놓고 꽃 한 송이를 꽂을 줄 알아야 한다. 화장실에 꽃 한 송이를 꽂아놓으면 그 화장실이 화장실이 아니라 응접실이다.그렇게 분위기가 달라져버린다.육안으로 볼 수 있는 식물로 된 꽃도 그런 역할을 한다.
그와 같다. 사람이 어디 가든지 보살행을 하고 겸손하고 사양하고 하심하고 남보다 먼저 보살행을 하면 꽃처럼 그 가정의 분위기라든지 어떤 모임이나 단체 사찰의 분위기를 완전히 그 사람이 정화한다. 아름답게 꾸민다. 그것이 화엄이다.
본래 우리의 본성은 완전무결한 비단이다. 그 위에 꽃을 새겼든 안 새겼든 상관없이 비단은 비단으로서의 그 값을 다 한다. 완전무결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서 완전무결한 비단에 또 꽃을 새겼다. 우리들 사람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은 아주 훌륭하다. 그대로 부처님이고 그대로 보살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과 아울러 방편, 서원[願], 힘[力], 지혜를 더해 십바라밀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행해간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본래 완전무결한 훌륭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다 더해서 좋은 일을 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공부한 것을 여법하게 실천에 옮기고, 공덕을 닦는다면 그 사람의 모습이 금상첨화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꽃으로 수를 놓은 것이며 장엄하는 화엄이다.
본래 우리 존재는 완전무결하고 아주 훌륭한 존재인데 거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십도만행을 닦아간다면 얼마나 근사하겠는가.
일반신도에게는 스님 하면 일단 100점을 따고 들어간다. 스님이 참선이나 기도, 경을 공부한다든지 충실한 수행정진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게 생활을 할 때 일반인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빛이 난다.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십도만행을 아름답게 펼침은 비단위에 꽃이 핌과 같다’ 참 근사한 표현이다.
청량스님의 글이 이렇다. 이러한 글로써 그 많은 화엄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이 내용은 십현문 중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참 좋습니다!...요즘은 정말 字字入心 句句入心 이네요 ㅎㅎ ...고맙습니다. 혜명화 보살님~ ()()()
無間 無外 包納 同時具足相應門. 一多無碍 事事無碍. 字字入心 句句入心. 萬行芬彼 比華開錦上.
사람의 길에 대한 한편의 아름다운 대서사시와 시작노트를 눈으로 생생하게 듣는 듯 아름답습니다. 어른스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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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여 주신 혜명화 님, 수고하셨습니다._()()()_
一多無碍는 等虛室之千燈이요...고맙습니다 _()()()_
萬行芬披는 比華開錦上이라...고맙습니다. _()()()_
글뜻을 정확히 알아서 많이 읽고 쓰고 느끼고....고맙습니다._()()()_
긴글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정말 대방광불화엄경은 경이롭고 감동스럽습니다 .()..
혜명화님,정말 수고하셨습니다.넘 고맙구요_()()()_
고맙습니다. _()_
萬行芬披는 比華開錦上이라 / 십도만행을 아름답게 펼침은 비단위에 꽃이 핌과 같다.. 혜명화 님!! 이렇게 정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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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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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足同時 方之海滴 이로다./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구족한것은 바다에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_()()()_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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