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고맙습니다. 그런 부름과 그런 과제를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앞에 그런 목표를
설정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가 진짜로 원했던 길이 자신을
항상 그 방향으로 나가도록 만드는 것이었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당신에게 온 이
유고, 제가 이 대화를 사랑하고 찬미해온 이유입니다. 내가 내 안의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보기 시작한 게 당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니까요.
내 지극히 사랑하는 자여, 네가 그렇게 말하니 하늘이 기뻐하는구나. 바로 이
것이 내가 네게 오고, 나를 부를 모든 사람에게 가게 되는 이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 있다. 이 대화는 결코 너 혼
자하고만 나누려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 몇벽만 명의 사람들을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각자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때로는 그럴
수 없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이 책을 손에 넣은 그들은, 자기 삶의 그 순간에
딱 들어맞는 방식으로, 스스로가 불러들인 그 지혜를 받고 있다.
너희 각자가 혼자 힘으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여
기서 벌어지는 일의 경이로움이다. 너희에게는 그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자
신에게 이 책을 주고, 자신을 이 대화로 데려오고, 자신더러 이 대화집을 펼
치게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너희를 여기로 데려온 건 너희 자신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 마음에 지녀온, 남은 문제들을 함께 탐구해보자.
죽은 후의 삶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죽은 후 영혼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능하면 최대한 그 점에
대해 많이 알고 싶군요.
그렇다면 네 갈증이 채워질 때까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앞에서 나는, 벌어지는 일 모두가 너희가 원해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다. 너희는 몸을 지니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몸에서 벗어나 있을 때
도,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
처음에는 너희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자신의 현실을 의식하면서 창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서로 다른 두 에너지인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
각이나 집단의식 중 하나가 너희 체험을 창조할 것이다.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이 집단의식보다 강한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
큼, 너희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반면에 너희가 집단의식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내면화하는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그
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지금 삶에서 소위 현실이란 걸 창조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너희는 삶에서 언제나 자기 앞에 다음 세 가지 선택을 마주한다.
1. 너희는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들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고,
2. 창조력을 지닌 자기 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으며,
3. 집단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지금 삶에서 너희는 개인의 자각을 의식하면서 창조하는 쪽이 힘들다는 걸 깨
닫는다. 사실 너희가 주변에서 보는 그 모든 걸 전제로 하면, 너희는 자주 자
신의 이해(理解)를 틀린 걸로 치곤 한다. 이 때문에 집단의식에 굴복하는 것
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너희는 그렇게 한다.
반면에 처음으로 소위 사후(死後)라는 순간으로 들어갔을 때, 너희가 주변에
서 보는 모든 걸(아마 너희로서는 믿지 못할) 전체로 한다면, 너희는 아마도
집단의식에 굴복하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 개인의
이해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너희는 그것들에 매달리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낮은 의식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자기 개인의 이
해에 머무는 편이 너희에게 이롭고, 높은 의식에 휩싸여 있을 때는 집단의식
에 굴복하는 편이 너희에게 더 이롭다.
그러니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을 찾는 게 현명하리니, 너희가 교제하는 동
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소위 사후에는 너희가 이런 등급표를 놓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순식간에, 그야말로 자동으로,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과
높은 의식 자체에 둘러싸일 것이기에.
그럼에도 자신이 그토록 크나큰 사랑에 둘어싸인 걸 너희가 모를 수는 있다.
당장에는 모를 수도 있다. 따라서 너희에게는 그런 상황을 자신이 '벌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자신이 그 순간에 아무 운이나 작용하게 하는 변
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너희가 체험하는 건 죽는
상태에서 너희가 지녔던 의식이다.
너희 중 일부는 죽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하면서도 기대를 갖는다. 너희는
평생 동안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왔다. 너희가
'죽으면' 그런 생각들이 뚜렷이 드러나리니, 너희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해왔
는지 갑자기 깨닫는다(realize : 현실로 만든다, make real). 그것은 너희의
가장 강력한 생각들, 너희가 가장 열렬하게 지녀왔던 생각들, 즉 삶에서 항상
그러했듯이 우세해질 생각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 수도' 있겠군요. 그 사람이 평생동안 지옥을 가
장 확실하게 존재하는 장소로 여겼고, 신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며, "
겨에서 밀을", "양에서 염소를" 가려낼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온갖 일들이 다 신
을 화나게 했으니, 자신은 당연히 "지옥으로 가리라" 믿었다면, 그는 지옥으로 '가
겠군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천벌의 불길 속에 던져질 테고요. 무슨 수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 대화를 진행하면서 몇번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우리고, 우리가 그
렇게 생각한다면 어떤 현실이라도 창조할 힘을 갖고 있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니 지
옥불과 천벌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게 되는 거죠'
'궁극의 현실'에서는 '존재' 자체를 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묘사하는 식의 지옥 체험을 포함해서, 너희가 원하는 모든 하위 현실을 창조
할 수 있으리라는 네 지적은 정확하다. 나는 이 대화를 통틀어 어디에서도 너
희가 지옥을 체험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지옥은 존재하지 않
는다고 말했다. '너희가 체험하는 대부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희
는 그것들을 체험한다'
이건 정말 믿기 힘들군요. 바네트 베인이라는 제 친구가 얼마 전에 이 문제를 다룬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정말 딱 이 문젭니다. 제가 이 문단을 쓰는 지금은 1998년 7
월입니다. 저는 지금 이 문단을 2년 전에 적은 문단들 사이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전에는 한번도 이런 적이 없지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려고 마지막으로 또 한번
읽고 있자니 생각이 나더군요. '가만 있어봐! 얼마 전에 로빈 윌리암스가 '우라기
여기서 이야기하는 바로 이 문제'를 영화에서 다루었잖아.' 그 영화 제목은 [꿈은
이룰 수 있나 : What Dreams May Come]인데, 놀랍게도 방금 당신이 말씀하신 걸 영
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도 그 영화를 알고 있다.
당신이 아신다고요? '신이 영화에도 갑니까?'
신은 영화도 만든다.
우와!
그렇다. 너는 [오, 신이시여(Oh God) : 조지 번스 주연의 영화 - 옮긴이]를
못 보았느냐?
글쎄요, 아 물론, 하지만......
어째서 너는 신이 오직 책만 쓴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로빈 윌리암스 영화는 말 그대로 사실입니까? 제 말은, 그게 진짜냐는 겁니다.
아니다. 신성을 다룬 어떤 영화도, 어떤 책도, 혹은 인간의 다른 어떤 설명도,
말 그대로 사실인 건 없다.
성경도요? 성경도 글자 그대로 사실이 아닙니까?
아니다. 나는 네가 그걸 안다고 생각하는데.
저, '이 책'은요? '이 책'은 당연히 글자 그대로 사실이겠죠!
아니다.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싫지만, 너는 이 책을 너 개인이라는 체(
filter)로 걸러서 가져오고 있다. 네 체의 그물눈이 이제 살수록 더 엷어지고
더 가늘어진다는 건 인정하마. 너는 아주 좋은 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체다.
저도 압니다. 다만 그걸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책과 [꿈은 뭘 이룰 수 있나] 같은 영화를 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저는 그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말리고 싶고요.
그 영화의 작가와 제작자들은 불완전한 체로 거르긴 했지만, 그래도 몇 가지
굉장한 진리들을 제시했다. 그들이 그러내려던 핵심은, 너희는 체험하고 싶어
하는 꼭 그대로를 죽고 나서 체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자, 이제 본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다만 그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걸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지옥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지옥을 체험한다면, '이 지옥은 뭐가 다른 겁니까?'
너희 스스로 창조한 현실에 남아 있는 한,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런 현실을 영원히 창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소위
'나노세컨드(10억분의 1초 - 옮긴이)'라 부르는 극히 짧은 순간밖에는 그것을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자신의 상상이라는 은밀한 영역에서조
차 슬픔이나 고통의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평생동안 그런 자리가 있고, 제가 저지른 어떤 짓 때문에 그런 자리에 던져져
도 마땅하다고 믿어왔다면 무엇이 영원히 그런 곳을 창조하는 저 자신을 막아줄 수
있습니까?
네 앎과 이해가.
이승에서 너희의 다음 번 순간이 너희가 지난번 순간에 얻는 새로운 이해들에
서 창조되듯이, 소위 저승에서도 너희는 앞서 알고 이해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순간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거기서 금방 알고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너희는 언제나 자신
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후에는 결과들이
즉각 나타나기 때문이니, 너희라도 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런 생각이
창조해내는 체험 사이의 연결관계를 놓칠 리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자신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행복한데,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무서운지, 또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의미심장한데,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실상
무의미한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고 난 직후의 순간들에 벌어지는 상
황을 놓고 왜 그토록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도요.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한 임사(臨死)체험을 하고 돌아와 두번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
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겁에 질려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을 만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요.
영혼은 마음의 가장 강력한 제안에 반응하고 그것을 재창조하면서, 그것을 자
신의 체험으로 빚어낸다.
어떤 영혼들은 그런 체험 속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그것을 아주 현실처럼 만든
다. 심지어 몸을 가진 동안의 체험들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에 머무를 때조차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반면에 재빨리 자신을 적응시켜 그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새로운 생각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당장에 새로
운 체험들로 옮아가는 영혼들도 있다.
당신 말씀은 사후라고 해서 상황이 존재하는 무슨 특별한 방식 같은 건 없다는 건
가요? 우리 마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 같은 건 없다는 겁니까? 죽음을
거쳐 다음 현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신화와 전설과 가상 체험
들을 만들어간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구속에서 풀려나는 건 언제입니
까? 언제쯤에야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까?
너희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할 때, 이것이 바로 로빈 윌리암스 영화의 핵심이
고, 여기서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존재 전체의 영원한 진리를 알고, 그 위
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며, 그 웅장한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바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아니다, '위대한 유일 진리'는 있고, '종국의 실체(Final Reality)'는 존재한
다. 하지만 너희는 그런 현실에 관계없이 언제나 너희가 택하는 바를 가질 것
이다. 신성한 피조물인 너희는 너희의 현실을 성스럽게 창조하고 있다는 것 -
- 때로는 그것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바로 이것이 그 실체이기에.
하지만 너희가 개별 현실을 창조하길 그만두고 더 큰 현실, 통일된 현실을 이
해하고 체험하고 싶어한다면, 너희는 당장에 그렇게 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런 선택과 그런 바램과 그런 의지와 그런 앎의 상태로 '죽는' 사람들은 당
장에 '하나됨(Oneness : '하나임'으로도 번역 - 옮긴이)'의 체험 속으로 옮아
간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바랄 경우에만, 바라는 만큼만, 또 바
랄 때만, 비로소 그런 체험 속으로 옮아갈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몸을 지니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전적으로 바램의 문제, 선택하고 창조하는 문제, 궁극에 가서는 창조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하는 문제, 다시 말해 이미 창조된 것을 체험하는 문제다.
이것은 '창조된 창조자(The Created Creator)'요, '부동의 동인'이다. 그것은
알파요 오메가며, 전이자 후이고,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삼라만상의 지금-그때
-항상의 측면이다.
나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너희에게 나 자신을 강요하지도 않
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너
희는 원할 때마다 내게로 돌아올 수 있다. 너희가 몸을 지니고 있든, 아니면
몸에서 벗어난 다음이든, 당장 그 자리에서. 너희는 개별 자아의 상실이 너희
를 기쁘게 할 때마다 '하나(One)'로 되돌아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 또 너
희는 원할 때마다 개별 자아의 체험을 다시 창조할 수도 있다.
그것이 존재 전체의 가장 미세한 부분이든 아니면 가장 큰 부분이든, 너희는
원하는 모든 측면을 체험할 수 있다. 너희는 미시우주를 체험할 수도 있고,
거시우주를 체험할 수도 있다.
나는 미립자를 체험할 수도 있고, 바위를 체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 잘했다. 너는 이것을 이해해가고 있다.
너희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머물 때, 너희는 전체보다 작은 부분, 즉 미시우
주의 부분을 체험한다. (물론 그렇다고 가장 작은 부분이란 의미는 아니다.)
반면에 너희가 몸에서 벗어나 있을 때(일부에서 '영계'라 부르는 상태에 있
을 때), 너희의 시야는 기하급수로 확대된다. 갑자기 뭐든 알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진다. 그때 너희는 거시우주 관점을 가질 것이고, 지금은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너희가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다시 또 더 큰 거시우주가 존재한다
는 사실이다. 즉 존재 전체는 너희가 그 시점에서 체험하는 현실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게 갑작스레 분명해지리니, 이것은 당장에 너희를 경외심과 기대감,
경탄과 흥분, 기쁨과 들뜸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알고 이
해하는 것, 즉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도 알고 이해할 것이
기에.
제가 과연 참된 지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을까요?
너희가 '죽고' 나면, 너희는 지금껏 자신이 답했던 온갖 물음들을 다시 제기
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존재하리라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질문들에
자신을 여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혹은 존재 전체와 하나되는 체험을 선택
할 수도 있다. 또 너희는 자신이 다음 번에 되고 싶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게 뭔지 정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너는 가장 최근의 육신으로 돌아가길 원하느냐? 아니면 다른 종류의 인간형상
으로 삶을 다시 체험하길 원하느냐?
혹은 그 당시 체험 수준에서 네가 있는 '영계'의 그 위치에 그대로 머물길 원
하느냐? 너는 자신의 앎과 체험이 계속해서 더 나아가길 원하느냐? 아니면 "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이제 '하나임'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느냐?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나는 언제나 너희에게 이것을 물을 것이다. 너희가 가장 아끼는 소망, 너희의
가장 큰 바램을 주는 법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주가 알고자 하는 것 역시
언제나 이것이다. 사실 우주는 날마다, 순간마다 이렇게 하고 있다. 너희와
나의 차이는, 너희는 이것을 의식으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나는 자각한다는
것이다.
말해주십시오, 제가 죽고 나면 몇몇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하듯이 제 친척들, 제
가족들이 절 만나러 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게 이해시켜주는지요. 우리
는 '먼저 간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나요?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나요?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너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길 원하느냐? 그러면 그렇게
될 것이다.
아, 제가 혼동했군요.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우리는 누구나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이 자유의지는 우리가 죽고 나서까지 이어질 거란거죠?
그렇다, 그게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 가족들의 자유의지가 내 것과 일치해야 하겠군요. 내가 그런
생각과 바램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과 바램을 가져야겠군요. 그
렇지 않다면 내가 죽더라도 그들은 날 위해 거기 있지 않겠군요. 더구나 저는 앞으
로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은데, 그중 한두 사람은 계속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또 개중에는 점점 더 높은 체험, 당신 표현대로 '하나임'과
다시 합쳐지는 체험 속으로 옮아가고 싶어할 사람도 있을 테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죠?
우주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모순 같아 보이는 상황들은 있지만, 실제로는 어
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묘사한 식의 상황이 일어난다 해도(그런데
이건 아주 좋은 질문이다), 너희 양쪽 다 자신들이 택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양쪽 다요?
양쪽 다.
어째서 그런지 여쭤봐도 됩니까?
된다.
그럼, 어째서......
너는 신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내가 한 곳, 오직 한 곳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뇨, 전 당신이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이 전지전능하
다는 걸 믿습니다.
음, 네 말이 맞다. 내가 없는 곳은 없다. 이건 이해하겠느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너는 뭣 때문에 그게 너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느냐?
당신은 신이니까요. 전 다만 인간일 뿐이지만요.
알겠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식의 '다만 인간일 뿐인' 것에 붙들려 있구나...
...
좋습니다. 좋아요......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저도 신이라고, 혹은 적어도 신과
같은 재질로 이루어졌다고 해두죠. 그렇다면 당신 말씀은 저도 어디나 항상 있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것은 그냥 의식이 자신의 현실 속에 무엇을 붙잡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소
위 '영계'에서 너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네가
한 '때'에 한 곳에서 한 영혼(soul)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체험하고 싶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그보다 더 큰, 한 '때'에 두 곳 이상에
서 존재하는 네 영(spirit)을 체험하고 싶다면, '너는 그렇게도 할 수 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때'든 자신이 '원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서 너
희 영을 체험하리니, 이것은 실제로는 오직 한 '때'와 한 '곳'만이 존재하며,
너희는 언제나 그 모두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선택
할 때마다, 자신이 원하는 그것의 어떤 부분, 혹은 어떤 '부분들'도 체험할
수 있다.
저는 제 가족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그중 '한 사람'은 다른 어딘가에 있는 '전
체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면요? 그럴 때는 어떻게 되죠?
너와 네 가족이 같은 것을 원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너와 나, 그리고 네 가
족과 나,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같은 존재다.
뭔가를 바라는 네 행동 자체가 뭔가를 바라는 내 행동이다. 너희는 '바램'이
라는 체험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나 자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는 너희가 바라는 것을 바란다.
네 가족들과 나 역시 같은 존재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바라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네 가족들 또한 바라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너희 모두는 같은 것을 바란다. 너희는 평화를 바라고,
풍요를 바란다. 너희는 기쁨을 바라고, 성취를 바란다. 너희는 만족을 바라고,
일을 통한 자기 표현과, 삶에서의 사랑과, 몸의 건강을 바란다. 너희 모두가
같은 것을 바란다.
너는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삶
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네게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상의 방식과 소위 영계의 방식에서 유일하게 다른 한 가지는, 지상
에서는 너희 모두가 같은 것을 바라면서도, 어떻게 해야 그것을 갖게 될지를
놓고는 모두가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것을 추구하는데
도 너희는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지닌 이런 다른 견해들은 너희에게 서로 다른 결과들을 가져다준다.
이런 견해들을 '받침생각(Sponsoring Thought)'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이야기했다.
* 음악 - 첫날처럼(Comme Au Premier Jour) - 앙드레 가뇽 (Andre Gag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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