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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적)과 기도
마태복음 4장 23-24절 /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혹자는 기독교를 ‘기적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숱한 사건들을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자들 중 병약한 자에게서 치유의 기적이 있은 것을 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도 가정에 질병을 비롯하여 여러 이유로 병들어 고생하기도 하고 몸이 많이 쇠약해지며 약함으로 힘들어 하므로 여기에서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며 기도에 궁금증을 갖기도 합니다. 병을 고치며 몸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없을까? 해서입니다. 성경에는 병을 고치는 이적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에게도 이 기적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심정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기도가 이 일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습니다. 그렇다보니 기도를 기적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는 실정입니다.
1. 기적
세상에서는 종종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는 기적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암 등을 비롯해 불치병 또는 죽을 병인데 나았다거나 벼락을 맞았는데 멀쩡하게 툭툭 털고 일어났다거나 교통사고로 회복불능의 상태였는데 온전히 회복되었다든지…참으로 많습니다. 이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서도 무종교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회자되어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더욱더 두드러집니다. 그러면서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2. 성경의 기적
(1) 구약시대의 기적
기독교에서 기적의 은사를 원하는 것은 병에서 나은 사람들의 기록을 성경에서 보는데, 기적을 하나님께서 행하셨으며,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고, 또한 병 고침의 은사를 주시며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한 것인지를 기적의 일반적인 이해와 함께 성경의 기적에서 보는 이해를 잘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서의 ‘기적’은 ‘이적’으로 말해지기도 하며, 또한 ‘표적’(표징)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이곳 글에서는 ‘기적’(奇蹟)이란 하나의 용어로 사용합니다만, 이 기적은 ‘이적’(異蹟)으로 있는 일이며 또한 ‘표적’(表蹟)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록하여 알려주시고 있는 기적은 창세기 1장 첫 장의 시작에서부터 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엿새 동안에 온갖 만물을 비롯하여 사람을 창조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어떻게 우주 천체가 있으며 여기에 하늘과 땅 바다가 있고 그 모두가 질서 있게 존재하면서 그 안에 온갖 만물이, 그리고 사람이 있게 되었는지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행하신 기적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과학이 제시하는 빅뱅설도 그리고 자연진화론으로도 설명 되지 않는 세상의 기원과 근원이 있게 된 하나님의 기적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에녹은 나이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고 그 후 하나님과 함께 300년을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을 보지 않게 하고 하늘로 데려가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은 죽어 그 육체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으며 이는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물이 겪는 원리로 자연의 이치인데, 에녹이 어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데려감에 있을 수 있었는지요.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행하신 기적입니다. 노아 때에는 온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여 사람과 함께 무릇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멸하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또한 그 심판 속에서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을 구원하신 일은 기적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에 이삭을 잉태케 한 기적,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기 위하여 행하신 나일강을 피물로 변하는 재앙을 시작으로 ②개구리 이, 파리, 가축 돌림병(악질), 독종, 우박앙, 메뚜기, 흑암, 장자죽음에 이르는 열 가지 재앙에서 보는 기적에서는 애굽의 왕과 애굽 신들을 굴복시켜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셨으며,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육지 건너가게 하여 애굽 군대로부터 구원하셨고,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40년 보호하여 주셨으며,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첫 성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점령하게 해 주시는 것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엿새 동안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 돌다가 일곱째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제히 양각을 불며 일곱 바퀴를 돌자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역을 3년 반 동안 극심한 가뭄 상태에 두기도 하시고 이때의 가뭄 동안에 까마귀를 통해서 고기와 빵을 물어다 주어 연명하게 하였는가 하면 엘리야를 통해서 시돈 땅에 속한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여 가뭄의 3년 반 동안에 생존토록 하셨는가 하면 또한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는 살리는 기적을 행하였으며, 3년 반의 가뭄을 끝내시는 것에서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의 제사장 850명을 갈멜산으로 오게 하여 그들의 신을 외치는 앞에서 비를 내리는 기적을 행하고 그들을 모두 죽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엘리야는 에녹에게 있었던 하늘로 올림을 받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선지자 엘리사에게로 이어져 모압 정벌 시에 식수로 어려움을 겪을 때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게하고 그곳에 물이 흘러 병사들의 식수를 해결하였으며, 죽은 선지 생도의 아내에게 이적을 행하여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여 두 아들과 함께 생활을 이어나가게 하였는가 하면, 아들이 없는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있게 하였고 후에 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었을 때는 다시 살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람의 장군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였는가 하면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가 탐욕스럽자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 발하는 이적을 행하였으며, 생도들이 먹는 국이 독성으로 인해 먹을 수 없을 때 독이 사라지게 하여 생도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였고, 한 농부가 가져온 보리떡 스무 덩이와 채소 한 자루로 생도 100명을 먹였고, 생도들이 사용하는 깊은 웅덩이에 빠져 나감해 할 때 나뭇가지를 웅덩이에 던져 도끼날이 떠오르게 하는 기적을 행하였고, 아람과의 전쟁에서는 아람의 군사들의 눈을 멀게 하는 기적을 행하기도 하는 등 엘리사에게서도 기적이 계속해서 행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사가 죽어 장사되었을 때에는 그의 시체에 다른 사람의 뼈가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서는 기적도 있었습니다(왕하 13:21). 이렇게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에 때에 기적이 두드러진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불신앙에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외에도 기적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임하게 되는 히스기야 왕의 병을 낫게 하여 그의 수명을 십 오년을 더함과 함께 그의 나라를 앗수르 왕에서 구원하여 보호해 주시는 표징으로 해의 그림자를 뒤로 십 도(10°)를 물러가게 하신 기적, 다니엘이 맹수인 사자 우리에서 구출되고 그의 동료 셋이 풀무불에서도 실오라기 하나 타지 않은 기적 등 등,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신이신 본질을 계시하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언약에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기적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에서 있은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심으로 메시야이신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는 것을 시작으로, 본문에서는 메시야 사역으로 중요한 일인 흑암에 앉은 백성들을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여 그들이 보는 바인 빛에서 보게 되는 메시야 사역인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그들이 앓고 있는 온갖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 곧 사단을 그들로부터 쫓아내 자유함에 있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참조. 행 10:38). 이는 모든 사람이 죄에 사로잡혀 있으며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음으로 죄 값인 죽음을 당하며 마귀와 함께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주의 사역을 행하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고 영생하는 생명의 복을 얻게 해 주심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각종 기적에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권능을 대하는 계시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모두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자기 계시의 사건으로 있는 것으로, 그분이 누구이신지, 또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될 수 있도록 그분께서 어떤 역할을 맡고 계시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보낸 그의 제자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라고 말해 주며,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있는 일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자신 행한 기적들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에 관한 약속들이 실현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요,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실 구원을 미리 겪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나 보여 주기 위한 증거로서 기적을 행하여 보일 것을 요구하는 것에는 악한 세대가 표적(기적)을 구한다며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3) 사도들이 행한 기적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각 고을에 보내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신 것은 그들로 자신들이 섬기는 주님의 나라인 천국 – 하나님의 나라 - 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며 그 천국의 주인이 지닌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에서입니다(마 10:1-8; 막 3:14). 그리고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때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면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어 영광스런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에 있는 믿는 자들을 통치해 가실 것에서 그의 권세는 제자들에게 위임이 됩니다.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권세를 행사하여 갈 것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음에 있게 되는데 그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표징(표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사도들의 사역에서는 복음 전파와 함께 하는 권능이 행하여졌습니다.
(4) 사도시대의 초대교회에서의 기적
사도들의 복음 전파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모아진 사람들로 주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부터 공급되는 은사가 성령을 통해 각 사람에게 주어져 교회를 섬기는 봉사에 있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하였습니다. 그 은사는 각양으로 성도의 믿음을 주께 굳건히 있게 하며 덕을 세움에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1)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2)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3)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는데,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시는 것으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고전 12:8-11). 이것에서 보는 은사는 모두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해지는 기적(이적)에 다름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으로 있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각양 은사가 교회 속에서 주어진 것은 어느 특정인에 의한 개인적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적 은사로 주어져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가 발휘되었던 것에 있습니다. 하여, 매주일 교회로 모였을 때에 그때마다 각각 주어진 은사가 질서 있게 발휘되었습니다. 어떤 성도에게서는 이런 은사가, 또 어떤 성도에게서는 저런 은사가, 또한 다른 성도에게서는 또 다른 은사가 발휘됨으로써 교회에 큰 유익을 도모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이방지역에서도 세워져 나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어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 각각의 은사가 그리스도 한 분을 드러내며 그분의 나라로 집중해 나가는 계시적 성격의 은사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계시적 은사가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어 종결되고, 사도 시대에서의 사도의 역할이 마쳐지면서 각 교회에 목사가 세워져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설교자의 직무에 있으면서, 그리고 성도는 그 계시의 해석에 의한 설교를 통해서 깨닫고 계시해 주시고 있는 주께 굳건히 믿음을 가짐에 있을 수 있게 됨으로써 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했던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에 있은 계시적 은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시적 은사에 담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인 율법의 강령(정신)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이웃 – 믿음의 형제와 자매 –을 자신의 몸을 사랑함 같이 사랑하는 은사는 교회 속에서 계속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몸인 그리스도인, 곧 성도에게로 공급되어 섬김의 봉사로 발휘됩니다. 모든 기적의 은사는 이 하나로 실현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기적이 지닌 하나님의 권능의 행사입니다.
3. 기적은 종결되어 그쳤는가? 아니면 존속되고 있는가? : 기적(은사) 중지론과 기적(은사) 지속론
기적은 종결되었다는 기적(은사)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도 시대 이후에는 사도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특정인에게 주어졌던 기적을 행하는 권능에 있는 은사가 더 이상 행함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은사 자체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 어거스틴(Augustine)은 ‘참된 종교에 관하여’에서 기적이 중단되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2)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은사중지론을 말했습니다. 그는 초자연적 은사와 기적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확증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으로서 그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루터(Martin Luther)와 칼빈(John Calvin) 또한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기적의 은사는 종결되었다는 견해에 있었는데,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과 2판(1539년 라틴어판, 1541년 불어판)에서 치유 기적이 특정시대에 허락된 후 중지되었다고 하였으니, 기독교강요 제4권 19장 18항에서 치유의 은사는 다른 이적들과 마찬가지로 주께서 일시적으로 베푸셨던 것들로 복음의 새로운 선포를 영원토록 놀랍게 만들기 위하여 지금은 사라졌다고 말하였습니다. (4) 워필드(B. B. Warfield)도 그의 저서 '기독교 기적론'에서 동일한 논거로 "사도시대의 교회는 자신들 안에 성령께서 친히 계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로서 온 선물(은사)임을 특징적으로 각양의 기적을 행하는 것에서 증거했다. 이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들로서의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이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분명히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키셨으며,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라고 말하여 기적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럼에도 주장하는 기적의 은사는 성경적 기적이 아닌 사이비 기적으로 사도시대 이후의 모든 기적 행함 주장은 허위라고 간주했습니다. (5)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방언, 기적, 예언 등의 특이한 은사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기독교회를 세우고 건설하시기 위해 초대교회에 주신 것이었으며,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고 기독교회가 견고히 세워지면서 이 특이한 은사들은 중단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치유 등의 기적을 행하신다고 믿고 병자 치유를 위해 기도도 하지만 은사중지론을 주장합니다. (6) 데릭슨(Gary W. Derickson)은 은사가 중지되어가는 현상이 이미 1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들을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자들로 여기며 신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의 은사를 믿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들이 이렇게 말하여 주장하는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또한 자신들의 글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심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 글들을 보는 자들은 또한 오해합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은사중지론을 주장했으나 후에는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기적의 은사를 인정하였다고 말입니다. 해서, 은사중지론의 주장에 있었던 것에서 은사지속론을 인정하는 주장으로 전환하였다고 봅니다. 과연 그러한 것인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그와 견해를 같이 하는 은사중지론을 말함에 있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기적 행함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부정에 있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인 은사중지론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 자체가 중단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적을 더 이상 전혀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도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적을 행할 권세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기를 중단하셨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며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서의 은사의 기적은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된 권세에 의해 사도들이 행하여 왔던 기적의 은사는 사도시대의 종결과 함께 중지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기록하는 성경의 기록의 완성에 의해 계시된 말씀의 종결과 함께, 그리고 교회를 온 땅에 세워나가시며 그 교회의 직분자로 계시의 말씀에 봉사하는 은사를 베푸시는 것과 함께 사도의 복음 전파 사역에 그 필요를 인해 따르게 했던 한정되었던 기적의 은사는 종결되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에서 기적의 은사의 중지를 말하는 분들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다만 기적의 은사가 특정인에게 주어지고 그 특정인을 통하여 행사된다는 것에 그렇지 않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여, (1) 어거스틴(Augustine)은 ‘참된 종교에 관하여’에서 기적이 중단되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그는 또한 후에 이 책의 본문에 내용을 추가할 때는 밀라노에서 발생한 시각장애인 치유를 언급하면서 이 책 22권 8장에서 기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다른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어 이렇게 있은 기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만도 너무 많아서 이루다 열거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2) 루터는 칼빈과 같이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기적의 은사는 종결되었다는 견해에 있었으나 성도들이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서 병 고침에 있는 기적은 인정했습니다. 그러한 루터는 초대교회에는 병 고침의 기적들이 단순히 주어졌으나 후대의 교인들에게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개종시키고 영적으로 구원함으로 단순한 병 고침에 있은 기적들 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행할 수 있었다고 믿음으로써 진정한 기적들이란 가시적인 것에서 나타내 보여 온 영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3) 칼빈은 치유의 은혜가 다른 기적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사라진 것은 새로운 복음 선포를 영원히 경탄할만한 것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었다면서, 기독교강요 2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치유의 기적을 행할 권세를 주지 않으셨다고 진술하지만, 초판에서부터 “주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주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육체적 연약함을 종종 고치신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러하다”라고 하였으며, 4판에서도 “진정 주님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서 자기의 백성 가운데서 현존하시며 한때 그러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병약한 부분들을 필요할 때마다 고치신다”며, 하나님께서 계속 치유를 행하신다는 주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성경 주석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니, 고린도전서를 주석하며 은사의 결핍은 우리의 망은(忘恩)에 대한 대가로써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이라고 진단하면서, “왜냐하면 하나님의 풍요함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또한 그의 관대하심은 줄어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칼빈의 이러한 견해는 그와 함께 기적(은사)에 대한 신학의 이해를 가져나가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그러한데,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의해 있은 성령의 은사의 지속적인 주어짐에 의해서 은사의 존속과 그에 따른 지속을 주장합니다. 해서, 초대교회에 있었던 기적이 동일하게 일어나야 한다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무슨 병이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순절 교회와 그와 같은 류에 있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대표적으로 강조하여 주장하는 은사인 방언, 병 고침이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 계속해서 있을 것이란 견해를 갖는데, 그 은사가 특정인에게 주어져 그에게서 은사가 행해진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고, 병 고침에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어 그들이 방언에 있게 하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한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피터 와그너에 의해서 퍼진 ‘신사도운동’, 존 윔버에 의한 ‘빈야드 운동’이 있는 실정입니다.
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적의 은혜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셨으며, 그 기적의 정점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에 있습니다. 이 죽음과 부활로 인간이 안고 있는 죄의 비참한 현상으로 겪는 아프고 병들고 약해지고 노쇠해지고 쓰러져가는 원인인 죄 문제가 죄 사함으로 해결되었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 속에서 영생하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원하며 기도하는 것의 응답에 있는 것입니다. 해서, 이 땅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아무 것도 아니며 죽으나 죽음을 보지 않는 생명에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아픔과 병듦에 있고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어 큰 근심이며 번민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벗어날 수 있기를 구함에 있을 때 혹 어떤 자는 나음으로 기쁨에 있기도 하며, 혹 어떤 자는 그럼에도 더욱 악화되고 약해지며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기까지 하는 슬픔에 있기도 합니다만, 그 모두를 하나님께서 영생하는 참생명과 하나님의 나라에 그를 두시고 허락하시는 자비임을 압니다. 하여, 하나님께 병 낫기를 구하며, 소생하여 다시 일어나는 회복에 있기를 구할 때 나은 기적을 겪으셨으면 그 기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권능에서 자신들을 살피신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혹 그렇지 못할 때에 하나님의 자비에 깊이 의존해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따릅니다. 병약하며 죽음에 임박해 있는 자가 뭘 원하시는가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운명이 다함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생명의 존속을 구하는 기도에 있지 말고 자신을 받으실 하나님을 의존함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지성을 내세우며 철저한 무신론자로 있었으나, 딸을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암으로 고생하며 쇠약해져 갈 때 지인을 통해 실력 있는 의사를 모시고 식사하면서 자신을 진단한 차트를 잔뜩 보여주며 “내가 계획한 일과 쓸 글도 여러 있고, 할 일이 많습니다”라고 할 때, 그 자료를 보는 의사가 “그냥 사시면 안되겠습니까? 3년 살면 3년 사는 동안 일하시고 5년 살면 5년 사는 동안 일하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암 치료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몸의 회복을 위해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어령 교수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이 그렇게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질로 심하게 고생하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성경을 기록하는 사도로 있었기에 눈의 안질은 큰 가시였습니다. 그러기에 세 번이나 낫기를 하나님께 구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안질의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었음을 깨달은 바울은 다시는 눈의 안질로부터 낫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할 때 그 건강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병약할 때 그 병약함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부요할 때 그 부요함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가난할 때 그 가난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행복할 때에 있은 그 행복은 하나님이 부신 은혜입니다. 불행할 때 있은 그 불행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함에 있는데, 그 은혜를 받음에 있은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그 모두에서 바울이 말한 삶에 있기에 참으로 그렇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것에 있는 자는 진정으로 기도의 응답 속에서 살아가는 신실한 믿음에 굳건히 서 있는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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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아는 지혜에 있게 해주신 것에서 ‘지혜의 말씀’이다.
2) 한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아는 지혜에 있음으로 해서 그 복음의 진리의 해석과 설명에 있을 수 있는 지식을 지니게 해 주신 것에서 ‘지식의 말씀’이다.
3) 구원 얻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전파에 있게 해주신 한 성령으로부터 선물(은사)로 주어진 믿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권능을 표현하는 것에서 산을 옮길만한 능력(기적)을 행하는 믿음을 지칭한다(마 21:21; 막 11:23; 고전 13:2).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라고 말씀하시어, 그들이 주께로부터 위임받은 권세에 의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함께 기적을 행하게 해 주셨다. 과연 제자들은 사도로 천국복음을 전파함에서 기적의 은사도 함께 행하였는데, 사도 바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았으며, 심지어는 2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또한 그 자신이 독사에 물리기도 하였는데, 아무 일 없는 듯이 손을 툭툭 털었으며 아무 일 없었다. 이 모두에 있은 기적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 전파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감에 있는 사도에게 권능을 행하심이었으니, 곧 사도에게 허락하신 권능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권능을 오순절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기적의 현재성을 말하며 오늘의 믿는 자들도 능히 행할 수 있을 것으로 신자들을 현혹한다. 그런데 그들은 병 고침에 집중되어 있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인 독사에게 물리며 어떤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며 그 누구에게도 독사에 물릴 것과 독극물을 마실 것을 강조하지도 권하지도 않는다. 왜인가? 사도에게 한정되었던 기적으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적이 아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살무사를 비롯한 맹독사에 물리면 죽는다. 독극물을 마셔도 죽는다. 모든 믿는 자가 해를 입지 않는 기적의 은사를 받음에 있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맹독사에 물리고 독극물을 마셨는데 응급치료를 받고 죽지 않고 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일반인들은 천행이라고 말하며 다행으로 여기지만, 믿는 자는 자신과 함께 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사(기적)에 감사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즉사하든 사망한다. 하지만 그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에 의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하신 죽음의 해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자비의 은사를 이미 입고 있는 자이다. 하여, 설사 나음에 있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깊은 의존에 있는다. 믿는 자 중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은사, 곧 하나님의 자비를 입음에 있지 못한 자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의 은사에 대해 잘못된 이해에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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