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오후 4시 36분. 봄날이라고 착각할 만큼 따뜻하던 기온이 툭 떨어지고 낮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더니 급기야는 스산한 안개비가 화팅(華亭)호텔 거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전성기의 위용을 드러내며 기분 좋게 승리한 이창호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의 인터뷰를 정중히 사양하고 관계자들과 떨어져 방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동생 이영호와 단출하게 저녁밥을 먹었다.
중국 랭킹2위 콩제(孔杰)를 꺾고 박영훈의 패배를 설욕했지만 아직은 관계자들과 어울려 승리의 축배를 들 때가 아니다. 더 큰 상대, 더 무거운 승부가 남아있다. 제10회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이후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구리(古力). 국내대회를 석권하면서도 국제전에만 나서면 무너지는 ‘안방불패’라는 명예롭지 못한 꼬리표는 이미 오래 전에 떼버렸다.
이창호와 구리의 통산 상대전적은 3승 3패 호각. 2006년에도 1승 1패를 기록했다. 제3회 도요타덴소배에서는 이창호가 이겼으나 제6회 춘란배에선 구리가 이창호를 밀어내고 승승장구, 결승까지 치고 올라갔다. 불과 보름 전 이 호텔에서 이창호에게 패배의 쓴 잔을 안겨주며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한 창하오(常昊)가 결승 상대.
춘란배의 스파링파트너는 10년 우정의 벗에게나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구리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무너져가는 팀을 최종라운드까지 이끌어준 ‘소신산(小神算)’박영훈의 얼굴을 봐서도 우승을 학수고대하는 동료들과 가족, 성적이 좋을 때나 곤두박질할 때나 변함없이 성원해주는 고마운 팬들을 위해서도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된다.
저녁식사를 마친 형제는 호텔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마사지센터를 찾았다. 이영호가 발견한 이곳은 비용이 시간당 48위안(한화 5800원)으로 매우 저렴한 데다 서비스도 훌륭하다. 종반으로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은 어쩔 수 없지만 승부를 마칠 때마다 몰려오는 신체의 스트레스는 바로 풀어줘야 한다.
안마를 받고 센터 문을 나서다가 관계자들과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음을 교환했지만 마주치는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안다. 우리는 믿습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운명의 대회전(大會戰)을 앞둔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종반의 사신(死神)’돌아오다
이튿날 오후 2시. 대국실, 검토실은 인산인해(人山人海). 대국실의 붉은 포토라인을 에워싼 신문, 방송 사진기자들은 좋은 슈팅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고 검토실은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모니터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화이강(華以剛) 중국기원 원장의 신호에 따라 돌을 가린 결과 이창호의 흑. 첫 착수 위로 카메라 플래시가 번갯불처럼 들이친다.
일단, 기분 좋은 출발이다. 최근,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한때 ‘이창호의 흑’이라면 ‘흑번무적(黑番無敵) 슈사쿠(秀策)’를 홋가하는 필승의 부적이 아니었던가. 하루 전 대국에서 이창호가 보여준 ‘신산(神算)의 반면운영이 그런 믿음을 더욱 굳게 했다. 결코 무리하지 않는 평범한 착수, 느린 듯 두텁게 서서히 상대를 압박하는 행마,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놓이고 보면 가장 이상적인 요소를 짚어가는 구상력, 종반으로 갈수록 정교해지는 손속, 한치의 오차도 없는 끝내기···. 관계자들을 불안하게 했던 국수전, 삼성화재배의 이상감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회전은 초반부터 관계자들의 예상을 벗어나 과속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전장(戰場)은 불과 10여수만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창호가 우상귀 백의 도전을 타이트하게 압박하면서 우상일대가 희뿌연 포연(砲煙)으로 뒤덮였다. 때이른 전면전의 양상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최근 이창호가 보여준 대부분의 급전은 비보(悲報)를 전하며 막을 내렸는데···.
습관처럼 아침식사를 거른 기자 몇몇은 울상을 지었다. 대국이 시작되는 장면을 스케치한 뒤 잠시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와 느긋하게 오후대국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초반부터 험악한 전면전이 펼쳐져 전장을 떠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검토실에 상주한 신문, 방송 기자들은 전장의 종군기자와 같다. 그나마 전투식량(C- RATION)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전쟁터에서 컵라면, 스낵을 먹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니까.
거의 모든 사람은 행운보다 불운의 예감에 더 뛰어나다. 관계자들의 불길한 예감은 서서히 맞아떨어졌다. 이창호는 하루 전 선보였던 전성기의 두터운 방패를 버리고 날카롭지만 자해의 불안정성이 깃든 칼을 결연히 뽑아 들었다. 우상귀에서 발발한 전투는 우하일대로 흐르다가 중앙으로 번져갔고 치열한 공방을 거쳐 다시 우상귀로 방향을 틀었다. 이창호는 이 초대형 전투에서 60집에 이르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그 대가로 우변에서 중앙으로 흘러나온 대마의 운명을 걸어야 했다.
구리는 이따금씩 아웃복싱도 구사하지만 인파이터의 기질이 강하다. 무리하지 않는 행마의 힘이 좋다.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그런 힘이 아니다. 가드를 단단히 올리고 무수히 날아드는 잽 사이로 야수의 눈빛을 번득이다가 상대의 동작이 커지는 한 순간을 노려 독침 같은 크로스카운터를 날리는 힘. 그것이 몇 년째 부동의 중국 랭킹1위를 지켜온, 심지어는 한국의 젊은 프로들마저 이창호를 제쳐두고 세계최강으로 꼽아준 구리의 힘이다.
관계자들이 안형을 갖췄다고 보았던 이창호의 가드가 구리의 날카로운 잽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흑의 급소에 얼음처럼 차가운 독침이 꽂힐 때마다 한국의 취재진은 전율을 일으켰고 중국 검토 좌석에선 환호성이 높아졌다. 장고(長考)에 장고를 거듭하던 이창호는 아득한 천길 낭떠러지에서 초읽기라는 또 하나의 적을 맞았다. 늦추는 듯하다가 어김없이 급소를 찔러오는 구리의 파상공격은 한국 선수단의 숨이 콱콱 막혀올 만큼 중압감이 느껴졌다. 모니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 답답한데 온몸으로 그 무게를 견디고 있는 이창호의 심정은 어떨까.
한없이 괴로우리라. 모르긴 해도 단체전이 아닌, 개인전이었다면 돌을 거두지 않았을까. 이창호가 버티는 마지막 힘은 높은 도덕성으로 무장된 책임감일 것이다.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저버릴 수 없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실상은 추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연히 검토실 밖에 있던 관계자 한 사람이 응수타진의 한수를 던져놓고 화장실을 향해 걸어가는 이창호의 모습를 보았다며 그 표정을 전해준다.
“화장실에 가는 것 같았어요. 승부의 열기로 검붉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는데 온통 땀에 젖은 머리카락, 비세의 국면을 한수, 한수 혼신을 다해 버티고 있는 괴로움을 확연하게 드러낸 그 얼굴이 너무나 처절해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다. 그는 가슴에 칼을 꽂는 아픔을 견디며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절박한 승부의 외나무다리를 홀로 걷고 있었다. 그렇구나. 참는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었구나. 가슴에 칼을 꽂는 ‘인(忍)!’
그 인내의 힘일까. 거짓말 같은 종반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픈 곳만 골라서 두드리며 좌상일대부터 좌변, 좌하일대까지 휘돌아가는, 굳어진 집이나 다름없는 철벽의 대세력권을 형성했던 백의 진영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방심일까 아니면 처절한 공방이 일으킨 현기증일까. 구리의 손속이 중심을 잃었다. 잡으러 왔다가 물러나고 물러났다가 다시 잡으러 오는 공격의 패턴은 같았으나 그 리듬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였다. ‘종반의 사신(死神)’이창호가 홀연히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은. 좌하귀, 상변에서 타이밍 절묘한 응수타진의 연타가 이어지고 끝낼 수 있을 때 확실하게 끝내지 못한 구리의 걸음이 휘청거렸다. 일찌감치 방패를 버린 이창호는 뽑아 들었던 칼을 다시 버리고 조훈현의 빠른 창을 움켜쥔 것 같았다. 터보엔진을 장착한 ‘속력행마’에 ‘흔들기’까지, 스승의 성명절기(聲名絶技)가 제자의 손에서 꽃처럼 요염하게 피어났다. 철벽 같은 중국 랭킹1위의 가드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 그 영예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 이창호에게 돌아갔다. 현지시각 오후 5시 45분. 277수 끝 흑 1집반승. 이창호는 반면으로도 백이 남는다는 종반의 승부에서 8집을 남기며 실추된 ‘신산’의 명예를 되찾았다.
승부의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검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창백해진다. 다시 신문, 방송 기자들이 몰려들고 포토라인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붉은 사각의 링, 그 섬광 속에서 이창호는 홀로 눈이 부셨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으리라. 염원을 이룬, 땀에 젖은 남자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첫댓글 화팅호텔이 국전을 자주 여는 중국, 상해던가요? '구리'는 중국의 차세대 선두주자잖아요...우리의 이창호는 벌써 30이 지났군요. 한국의 명예를 짊어진 이창호의 승승장구를 다 같이 기도드립시다!! 참, 저는 이제 겨우 4급실력임다.
달비치님 바둑실력이 대단하시네요 ㅎㅎㅎ 부러워라
신천옹님 좋은기사 잘 읽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8급정도 언젠가 달비치님께 한수지도를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