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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행(同行)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박 / 宋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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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신마을 도착
*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
'산악인의 집'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행준비
@@ 의신 마 을
지리산에는 산과 더불어 살아 숨쉬는 수많은 마을이 있다. 섬진강과 지리산의 물이 만나는 화개에서 화개천을 따라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면 의신마을이 있다.
의신마을은 예로부터 지리산과 지리산의 삼신동(청학동)에 얽힌 전설이 깃들여 있는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의신마을은 지리산과 이땅이 전란 또는 혼란에 휩싸일 때마다 그 소용돌이에 말려 큰 홍역을 치르기도 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으며 한때는 마을 전체가 사찰이어서 불교문화의 산실이기도 했다 한다.
산간벽지의 조그마한 마을이 왜구의 침입과 이념 대립의 현장이면서 불교문화의 산실이었던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 마을이 지리산 마을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양지 바른 기슭에 자리잡은 의신마을은 산간 오지이면서도 예로부터 비교적 양호한 지리적 여건 탓에 온갖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것이다. 남서쪽으로는 남해 바다와 섬진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가 하면 북동쪽으로는 삼남 지방의 대로였던 벽소령을 끼고 있는 요충지인 셈이다.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의신마을은 깊은 산속의 마을이면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마을의 한자 지명이 바뀌기도 했다 한다.
의신마을 은 원래 한자로 "依神" 또는 "義神"이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의병 활동 근거지로 재난을 입게 되자 "神"자 대신 "信"자를 사용해 지금은 "義信"마을로 고쳐 쓰고 있다.
원래 의신마을의 "神"자 유래는 지리산의 삼신동 개념에서 비롯했다. 의신마을 4km 아래에 있는 "神興"과 덕평봉 일원의 "靈神"등 "神"자가 든 세 곳을 삼신동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삼신동의 개념은 신라 정강왕 첫해(886년) 이곳을 찾았던 최치원선생이 이들 마을이 있는 일대를 신선들이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라 해 신흥동 마을 입구에 "삼신?quot;이란 각자를 친필로 새겨 넣은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지리산의 삼신마을은 근래에 접어들면서 잦은 전란들에 휩싸여 수난을 겪으면서 일제시대 당시 한자 지명이 바뀌게 된다. "依神" 또는 "義神"마을은 "義信"으로 "神興", "영신"은 "德平"으로 각각 고쳐졌다.
이는 주민들의 뜻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일제의 말살정책에 의한 개명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신마을에 가면 마을청년회에서 의신마을의 연혁에 관한 안내문을 커다랗게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인근 등산로도 상세하게 표시돼 있어 이채롭다. 이 안내판에 기록된 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은 500여년 전에 의신마을로 형성됐다고 한다. 당시 경주 정씨, 단양 우씨, 전주 최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경주 정씨는 하동 함양 남원을 연결하던 삼남대로 벽소령을 넘어 의신마을에 안착했으며 그후 단양 우씨와 전주 최씨가 입주 안착한 이후 큰 마을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란을 피해 이주해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마을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에는 의신사란 절이 있었는데 서산대사가 이 절에 들어와 암자인 철굴암에서 수도를 했다 한다. 서산이 15살 때 초시에 낙방하고 남쪽지방의 산천을 유람하던 중 화개동천에 이르러 의신마을의 의신사에서 불교에 입문했다는 것이다. 서산이 구태여 의신사에서 수도 정진하게 된 것은 의신마을이 예로부터 지리산의 삼신동(청학동)으로 지목돼 온 길지였기 때문이라는 게 마을 주민들의 얘기다.
그러나 의신마을은 근세에 이르러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왜적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외치던 동학 농민군이 1908년 이곳을 지나면서 왜병과 교전을 벌였으나 신무기에 밀려 30여 명이 전몰하는 비운을 겪게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 의병들의 공동묘지가 마을에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지금은 사라지고 표시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당시 장렬하게 쓰러져간 동학농민 의병대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라도 건립했으면 하는 바람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또한 의신마을은 1950년 전란을 전후해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과 토벌대가 격렬하게 교전한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 위의 빗점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유명하며 인근의 대성골은 빨치산이 몰살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모두 의신마을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의신마을 사람들 중 당시 사상이나 이념에 물들거나 심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의신마을의 터가 좋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의신마을은 1945년 이후 삼성 이외에 이씨 김씨 전씨 강씨 허씨 등 다수의 성씨가 들어오면서 인구가 늘어나 130여 가구의 큰 마을을 이루었다가 1948년 여순 반란과 한국전쟁으로 두 차례 마을이 전소되고 수복 후 마을이 복구돼 80가구에 달했으나 이농 현상으로 지금은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의신마을에 의신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있는데 절은 평지에 있었으며 절벽에 김언신, 김미의 제명이 보이고 30여 명의 승려가 범패를 부르며 정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안내문과 속두류록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의신마을에는 신라 시대부터 신사란 대찰이 있었으며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전란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동학운동과 경술국치, 여순반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의신마을은 화마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빼어난 지세로 지금도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수백년 전부터 수호신으로 마을 앞에 당산신을 모셔 두고 음력 섣달 그믐날이면 수일 동안 목욕재계한 제주가 등을 밝힌 뒤 설날 아침에 온 동민이 참석해 동제를 올리고 있다. 주민들은 해마다 새아침에 정성껏 올린 당산제 덕분에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산행칼럼] 권동현의 산행칼럼 [의신마을을 찾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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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들머리에서.... 오전 08시20분경....
* 대성동 가던 길에..... 멀리 '단천지능'과 '의신계곡'이 보이고
* 녹차밭
* 대성동민박 / 2가구가 민박을 함.
* 참새가 방앗간을.............
* 부추전과 도토리묵 그리고 동동주
* 이사람들 태평이네요....
* 친환경 수도꼭지
대성동민박집을 출발
원대성마을 갈림길을 지나 첫번째철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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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철교에 도착 잠시 휴식을 취하고....
* 철교에서 내려다본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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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후 '작은세개골'로..........
* 끈질긴 생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