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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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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
국무총리 | 이현재 (1988) 강영훈 (1988 ~ 1990) 노재봉 (1991) 정원식 (1991 ~ 1992) 현승종 (1992 ~ 1993) |
전임: 전두환(제11·12대)
후임: 김영삼(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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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출생일 | 1932년 12월 4일(1932-12-04) (79세)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 (현.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
정당 |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
종교 | 불교 |
배우자 | 김옥숙 |
자녀 | 노재헌, 노소영 |
부모 | 노병수, 김태향 |
노태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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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 4일- | |
태어난 곳 |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 |
복무 | 대한민국 육군(육사11기)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대장 |
근무 | 육군 |
주요 참전 | 베트남 전쟁 |
기타 이력 | 정무장관, 내무부장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 , 대구광역시 출생)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의 정치인이며 국회의원과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전두환, 정호용의 육사동기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였고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를 허용하였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 출신. 아호는 용당(庸堂, 龍黨)이고,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목차[숨기기] |
노태우는 조선 세조~성종 때의 영의정을 지낸 노사신의 15대손이라 한다. 1932년 12월 4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팔공산 근처에서 공산면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盧秉壽)와 어머니 김태향(金泰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병수는 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盧秉祥)의 중학교 졸업식을 참석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노태우는 숙부 밑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56년 보병 소대장, 그 뒤 미국에 유학하여 특수전학교 대인 심리전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육사 11기가 추축이 되어 결성한 하나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60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1961년 방첩부대 정보장교를 거쳐 1966년 방첩부 방첩과장, 이후 육군본부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하였으며, 1968년 수도사단 대대장, 1971년 보병 연대장, 1974년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지냈다.
1978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었다.
1980년 야당 정치인 가택연금 당시 그는 김종필에게 깎듯이 예우했다. 김종필과의 계속된 만남 도중, 김종필은 신군부 세력 중 그에게 유일하게 깎듯이 대했던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가르쳤고, 1인자와 틈이 벌어지지 않는 비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에 의해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민정당의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81년 정무 제2장관이 되고, 82년 남북한고위회담 수석대표로 참여하였다.
체육부 장관과 제41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등을 역임하였으며 1983년에는 88올림픽이 서울특별시 유치가 확정되면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정의당 전국구 후보자(비례대표)로 출마, 전국구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에 다시 임명되었다. 1984년 KOC 위원장, 서울아시아경기 조직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으나 같은 날부터 전국적으로 반정부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제5공화국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였는데, 이때 노태우는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선거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였다.
당시 그의 6·29 선언은 고독한 결단이라고 선전되고 연출되었으나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였지만 전두환의 확고한 지배하에 있었으며 노태우의 개별적 자율성은 없었다고 평가된다. 노태우는 민심이 이반되던 1987년내내 그는 전두환 정권에 충성을 맹세한다.
대통령 후보자 당시 노태우는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하여 보통 사람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1994년 서석재·박계동 등의 폭로사건으로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는 곧 비아냥의 용어로 바뀌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차별화 된 선거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머리, 주걱턱 등 연예계의 금기용어도 이때 해금되었다고 한다. 정권 중간평가와 경인운하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1987년 9월 야당인 통일민주당의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이 승리하자 이에 반발한 김대중이 탈당하였다. 9월 30일 최종협상도 결렬되어 김대중은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로 인해 야당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1972년 유신 이후 최초의 대통령선거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는 전국 득표율 36%로 김영삼과 김대중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6공화국 집권기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있을때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제2대 민정당 총재로 취임하였다. 1987년 12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새 헌법에 따라 치뤄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노태우의 대통령직 취임 직후 5공 청산을 원하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을 주저했고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백담사로 은둔하였다.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기간 중에도 시민사회단체는 전두환 구속, 12.12, 5.18 관련 처벌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8년 여당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이에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 을 추진해 90년 3월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89년 3월 4일, 국회에서 지방자치법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대통령 후보시절,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을 공약하였고, 그 결과로 평시 작전 통제권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에 환수 했다.
노태우는 언론 자유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른 결과로는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이라는 지위를 부여한것이 있다.
1991년 11월 13일 노태우는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의 핵포기 선언에 대해 김영삼은 이를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집권 초기부터 공산권과의 수교를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소비에트 연방(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국제 연합(UN) 에 남한과 북한이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1991년에는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는 남북한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91년 국제로터리클럽 폴해리스 명예회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장준하를 명예회복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11]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가 치뤄지면서 30여년만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노태우는 후계자로 박철언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민주계의 김영삼의 반발로 취소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고, 김영삼은 집단탈당까지도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긴뒤, 1992년 8월 28일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을 탈당하였다. 1993년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이 되었다. 2월 김영삼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퇴임하였다.
대통령 퇴임 후 1994년 국회의원 서석재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설이 제기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반박하였다. 같은 해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수설이 제기되어 수사에 들어가자, 해외 순방 출국 길에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비자금 수사 후 비자금 수수가 사실로 드러나자 굴복하였다. 1995년 대통령 재직시 조성한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져, 법원으로부터 징역 15년, 추징금 2천6백88억원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97년 12월 사면되었다. 1997년 당시 2629억원을 추징금을 선고받고 6월말까지 2286억원을 납부하였다. 현재 남은 추징금은 387억여 원이다.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노태우는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사면 이후 노태우는 특별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추징금을 꾸준히 납부하던 노태우는 2008년 들어 동생 노재우와 조카 노호준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2008년 4월에는 동생과 조카 명의의 회사가 자의 비자금으로 설립된 것이라며 소송을 벌였으며, 12월에는 동생과 조카의 주주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하지만 이후 가처분 신청에서 패소하였고 나머지 추징금 환수의 난항이 예상된다. 노태우는 2천628억원의 전체 추징금 가운데 2천339억원을 환수한 상태다.
한편 최근 노태우는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이다.
2011년 4월에는 기관지에서 침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한의사협회는 5월 11일 노태우의 몸에서 발견된 침과 침뜸사 김남수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침이 유사하다고 주장한 뒤 서울중앙지검에 침 시술자의 신원을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김남수는 1990년대 초 이후 노태우를 만난 적 없으며, 제자들의 침 수술 의혹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윤치영은 노태우 대표위원에 의한 민주화 선언은 무정부상태로까지 치달을 뻔한 대한민국을 쾌도난마를 끊는 솜씨와 같이 온국민에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윤치영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두고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니,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이니 하고 입방아를 찧는 일은 너무나도 정치적 선동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일왕의 장례식에 조문단을 파견했다.[20]
1987년 대통령선거당시 통일민주당을 비롯한 민주세력들은 지역감정을 "군부와 민주정의당의 정치공작이며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노태우후보를 당선시키려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영남출신의 군인중심인 하나회가 조장했다는설도 있다. 또한 1990년 1월, 김영삼 김종필과의 3당 합당에 의한 민자당 창당으로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1]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은 1990년 보안사령부(현재의 기무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한 사건을 말한다. 이 목록에는 정계와 노동계,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 기록이 담겨 있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보안사는 이후 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으며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광주사태 발언
1995년 10월, 노태우는 "광주사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자신의 발언을 용서해달라"며 사과했고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노태우의 대표적 별명. 흔히 수동적이고 미온적인 처신과 카리스마 없는 행동으로 물에 물탄듯 하다는 비꼼의 의미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듣고 있지만 실제 물태우의 기원은 재임 당시 물난리가 잦고 수재민 발생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노태우 자신도 재임시절 자신을 물태우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였다.
노태우는 8월 9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후보에게 3천억원을 지원했던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일로인하여, 김영삼 대통령 측근과 노태우 대통령 측근들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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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수 (盧秉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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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향 (金泰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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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盧泰愚)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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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숙 (金玉淑) 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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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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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영 (盧素英) 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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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崔泰源) 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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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헌 (盧載憲) 19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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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金永漢) ?~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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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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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동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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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동 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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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金復東) 1933~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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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숙 (金玉淑) 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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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盧泰愚)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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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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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진호 (琴震鎬) 19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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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영 (盧素英) 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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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崔泰源) 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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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헌 (盧載憲) 19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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