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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애종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조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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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曺植 | |
조선국 경상도 합천 대야성 삼가현 태수 (朝鮮國 慶尙道 陜川 大耶城 三嘉縣 太守) | |
임기 | 1569년 6월 1일 ~ 1572년 2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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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합천 삼가현 (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사망일 | 1572년 2월 21일(1572-02-21) (70세) (음력 2월 8일)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합천 삼가현에서 노환으로 병사 |
거주지 | 조선 경상도 합천 삼가현 |
본관 | 창녕(昌寧) |
학력 | 한학 수학 |
경력 | 학자, 사상가, 교육자 |
정당 | 동인 출신 성향 북인 계파 후예 |
부모 | 조언형(부) 인천 이씨 부인(모) |
형제 | 형 1명 남동생 1명 누이동생 5명 |
배우자 | 본부인 남평 조씨 1번째 첩 이름 미상 2번째 첩 은진 송씨 |
자녀 | 슬하 4남 2녀 (본부인 남평 조씨 소생 슬하 1남 1녀(적자 조차산, 딸 조씨)) (2번째 첩 은진 송씨 소생 슬하 3남 1녀(서자: 조차석, 조차마, 조차정)) |
친인척 | 손녀사위 곽재우, 김우옹, 사돈 곽월 |
별명 | 자(字)는 건중(楗仲) 아호(雅號)는 남명(南冥)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
종교 | 유교(성리학) |
조식(曺植,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 1572년 2월 21일(음력 2월 8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창녕명종과 선조
조식(曺植)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
조식은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골[1](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과 인천이씨퇴계 이황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한성부의 고관이었으나 그의 증조부 생원 조안습(曺安習)의 대에 이르러 경상남도한성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한성부
소년기에 조식은 이윤경, 이준경조언형좌구명, 유종원[2]
그는 과거 공부보다도 정통 유학과 제자백가, 노장사상[3]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대곡 성운과 친구가 된 이래 평생을 교류하며 같이하였고, 근처의 청풍계에 숨어살던 성수침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4] 그러나 기묘사화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3]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
장인인 남평조씨1531년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가 한성부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3]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1539년(중종 33년) 38세에 특별히 초빙되어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6월
차산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남명집
아들 조차산을 추도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 |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 靡室靡兒僧似我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 無根無我如雲 한 평생 보내자니 어쩔 수 없는 일 / 送了一生無可奈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가 흰 눈처럼 어지럽도다. / 餘年回首雪紛紛 | ” |
아들을 잃고 상심에 빠졌던 그는 스스로 시를 지어 위안을 삼았다.
그의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자 회재 이언적은 그를 왕에게 추천하여 헌릉참봉[3] 또 퇴계 이황의 추천으로 단성현감[3] 이때까지만 해도 퇴계 이황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였으나 후일 퇴계가 고봉 기대승과 리기(理氣)의 사단칠정에 관한 7차 논쟁을 듣고 물뿌리고(灑) 마당쓰는(掃), 쇄소(灑掃)하는 생활 방법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논하며 선비를 참칭한다고 비판하면서 선비관에 대한 차이로 이황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 이언적이이화의 인물한국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성운[3]
1545년 인종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렀지만 다만 그는 인종명종명종
(중략)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중략) 자전(紫殿)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려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가지, 백가지나 되는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중략)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 1559년(명종 14년) 조지서
1561년 지리산산천재[5]이 칠언절구는 산천재 네 기둥의 주련에 새겨 있다.[6]
“ | 春山底處无芳草 /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只愛天王近帝居 /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 ” |
그가 출사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후일 유홍준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와 불출사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6]'라고 평하였다. 이후에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고, 이황이황은 그에게 한성부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의 뜻을 피력하였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러한 현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학파와 남인실학
그의 제자로 김효원[8], 동강 김우옹[9],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의병장 곽재우이황과 기대승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의 이괄의 난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과 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
명종말엽에 이량 세력과 윤원형이 몰락했음에도 출사를 거부했고, 이기의 일파도 몰락했으며, 선조 즉위 후에는 심통원이황의 문도들과 이이이황의 문도, 이이
그는 아들을 잃은 뒤 자신의 친 외조카 중 이준민진주에서 태어난 이준민은 과거 시험에 급제한 후 한성한성부김우옹
누이 조씨가 죽자 이준민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지나친 효행으로 병이나자 생질의 병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때 오건(吳健)에게 '자수(子修[10])의 증세가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있다는데, 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더한지 덜한지 계속 들을 수 없어, 단지 날마다 근심 속에 탄식만 할 따름입니다.'라면서 사적인 서신에서 이를 토로하기도 했다.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또한 관료들의 폐단을 지적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569년
1571년[11] 1572년음력 2월 8일선조증직으로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에 추증
선조 때 증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가,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1615년(광해군 7)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
동인의 영수였던 김효원은 이황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대북 정인홍과 정인홍의 문인 이이첨이 인조 반정[12] 그 뒤 윤휴, 허목 등 일부를 통해 남인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사액덕천서원
북인의 몰락으로 그는 조선사회에서 저평가되어오다가 187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부터 이이, 이황, 성혼, 서경덕에 필적하는 성리학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때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 남곤,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송(宋)
그러나 제자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鄭蘊) 등이 분립하는 내부의 분열을 겪은 데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 북인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평생 처사로 남았다.[13] 한편 1544년 벼슬길에 나가보라는 이황
이황성리학[14]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15] 이황은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14] 했는데, 조식은 이에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16]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17]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
“ | 신(정인홍)이 젊어서 조식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이황이 조식성운이황조식과 성운 | ” |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동인남인과 북인[17]
조식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대학공자실학
또한 조식은 우리 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조식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성호 이익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척신 정치에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의 처사로 지냈던 남명은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 '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14]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14]
외조카 이준민의 사위 조원(趙瑗[18])이 과거 시험이황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했으며,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될 때는 박승임의 문하생 일부와 그의 문하생들이 북인남인
1617년 생원 하인상 등 유림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남명을 문묘홍문관에서 1회,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
“ | 외조카에게 보내는 시 수많은 근심에도 눈은 멀지 않아도 만사엔 조금도 관심 없다 百憂明未喪萬事寸無關 | ” |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19] 이라는 찬사를 부여하며 그의 우뚝 솟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그의 문인들은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부분 북인 붕당을 형성하였으나 제자 정구의 문하생 중 허목 등 일부는 남인으로 전향하여 후일 남인 성리학과 남인 실학
접기 1995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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