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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아리랑]들불처럼 번진 “反봉건 反왜세” 지금도 메아리 입력날짜 : 2010. 01.01. 00:00
이에 한일합방 10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우리지역 항일운동사를 재조명하고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특집 ‘新아리랑’을 마련했다. 이 특집은 한일병합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난 주요사건을 되돌아보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 있는 강제노역과 정신대 피해자의 보상문제를 짚어본다. 아울러 일본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광주전남출신 인사들의 활약상과 고향사랑을 만나보고, 광주시와 전남도가 펼치고 있는 일본 지자체간 교류활동을 통해 화해협력의 토대를 다져본다. /편집자 주 3만여 농민군, 관군·일본군과 처절한 혈전 동학 4대 전적지…역사적 교훈 잊지 말아야 청러일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쇠한 한반도를 노리고 있는 조선말기. 전라도의 농민들은 부패한 관리의 폭정과 파렴치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죽창과 낫을 들고 분연히 일어섰다. 바로 1894년(고종 31년)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를 부르짖으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다. 116년의 시간을 거슬러 3만명의 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처절하게 싸움을 벌인 장흥석대들을 찾아나섰다. 광주를 벗어나 화순 너릿재 터널을 넘자 갑자기 몰아친 눈보라가 남도 산하를 백의(白衣)로 뒤덮어 반봉건·반외세의 깃발을 들고 진군하는 농민군들의 함성이 들려오는듯했다. 장흥읍에 이르러 옛 성안에 들어서자 때마침 정남진 5일장날이어서 활기가 느껴졌다. 장흥문화원에서 김기홍 원장(71·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을 만나 동학전적지 안내를 부탁했다. 문화원에서 나와 고개를 하나 넘자 석대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1894년 11월27일 2차봉기에 나섰던 동학농민군이 태인전투에서 패배하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해산한 농민군들은 벽지로 숨거나 도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장흥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다. 장흥 석대들은 당시 강진현, 전라병마절도사영, 벽사역, 장흥도호부, 자울재를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장흥, 강진 일대의 농민군은 이방언(李邦彦, 1838-1895)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일본군과 관군, 유생이 중심이 된 민보군에 맞서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격돌이 펼쳐지게 된다. 본대에서 해산한 농민군들이 장흥으로 몰려들어 연합 농민군의 규모는 적게는 1만에서 많게는 3만에 이르게 되었다.
연합 농민군은 계속해서 강진현과 전라 병영의 공격에 나섰다. 강진의 관청을 불태우고 병영의 화약고를 폭발시켰으며, 저항하던 관군과 병영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다시 일어서는 전기를 맞는 듯했다. 병영성, 장흥 강진일대를 점령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대적할 전투태세를 갖추는 사이 농민군의 토벌을 위해 관군과 일본군도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주의 관군은 일본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지시에 따라 영암, 장흥, 능주의 세길로 나누어 강진으로 향했다. 관군과 일본군 선발대와 1차 교전이 벌어진 것은 13일. 결과는 농민군의 패배였다. 수천명이나 되는 농민군이 패한 이유는 일본군의 신식무기때문이었다. 농민군과 관군-일본군 본대와 운명을 건 일대회전이 15일 장흥 남외리 석대들에서 벌어졌다. 농민군은 고흥읍 방향으로부터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들어갔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순무선봉진등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도중대가 잠시 쉬는 사이 뜻밖에 비류(동학군) 삼만명이 고봉 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까지 산과 들 가득히 수십리에 뻗혀 봉우리마다 나무사이로 기를 꽂고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며 포를 쏘아대며 날뛰어 창궐하니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요, 성내 부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아우성이었다. 일본군 중위와 상의한 뒤 통위병 30명으로 후록 주봉의 적을 막게 하고 교도병으로 성모퉁이 대밭에 숨게하고 먼저 민병 수십명을 내보내 평원으로 유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양로에서 공격하여 나가니 적이 도망하여 20리 밖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하다가 해가 저물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방언도 장흥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은신하던 중 25일 이두황 군사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그러나 재판에서 뜻밖에 석방됐다. 흥선대원군과의 교분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을 떠나 보성군 회령면(지금의 회천면) 새터에 사는 이의원(李義元)의 집에 숨어지내다 체포돼 1895년 4월25일 그의 외아들 성호와 함께 장흥 장대(지금의 서초교자리)에서 처형돼 최후를 마친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석대들 옆 산허리에는 희생된 농민군 영령을 추모하는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서있다. 이 탑은 1992년 세워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12년만인 2004년 4월25일에야 비로소 제막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무명용사 1천165명이 묻힌 자리는 지금 체육관이 들어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장흥읍 남산공원 영회당에는 동학군에 맞서 장흥부성을 수성하다가 순절한 장흥부사 박헌양 등 관민 96인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김기홍 원장은 “석대들 전투가 끝난지 110여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동학군과 수성군 후손들간에는 미묘한 감정적 앙금이 남아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경술국치’ 백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2010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세계사에서 가장 폭압적인 식민 지배를 당하게 된 1910년 경술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이다. ‘민족 말살’로 대표된 일제의 폭압적 식민정책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수난을 당했으며, 그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다.” 그러므로 ‘국치 100년’을 맞는 우리는 과거의 역사가 주는 아픈 교훈을 재발견함으로써 미래를 열어갈 자양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끼친 가장 대표적인 가해(加害)의 상처 몇 가지를 기억해 보자. 첫째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항일(抗日) 봉기한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일본군에게 대량 학살당했다. 일본군에 학살당한 농민군 숫자는 최소 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그들 대부분은 전라남도 일대에서 학살당했다. 둘째 1931년 만주사변(滿州事變)부터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수백 만 명의 우리 선조들이 일제에 의해 군인(軍人)과 군속(軍屬), 노무자(勞務者),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 등으로 해외 각지로 강제로 끌려갔으며, 그 가운데 수십 만 명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그 유골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셋째,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끼친 가해(加害)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하고 가장 가슴 아픈 상처는 바로 우리 할머니들 수만 명이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성노예인 ‘위안부’로 끌려가 세계사에서 일찍이 유례가 없는 잔혹한 인권 유린을 당한 것이다. 넷째, 독립(獨立) 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수 만 명의 독립지사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과 고문 또는 학살당했다. 다섯째, 일제는 식민통치의 하수인인 친일파(親日派)들이 대거 득세하도록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획책함으로써 영구히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 민족에게 다대한 상처를 입힌 당사국 일본 정부는 아직도 과거사에 대하여 진정한 반성이나 청산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반성은커녕 “36년의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망언(妄言)을 간헐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치100년’이 되는 2010년에는 ‘아픈’ 역사를 ‘소중히’ 기억해 냄으로써 다시는 이 땅의 후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전히 과거사 청산에 미온적인 일본에 대해 “타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결코 자기 자신도 해방 할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크게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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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준수기자의 노천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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