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인간을 오로지 목적으로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선의지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수단화한다는 것은 그 인간을 통해 어떤 이득을 취하려고 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전자를 정언명령이라하고
후자를 가언명령이라 한다.
정언명령은 무조건 옳은 일을 하라는 것이고
가언명령은 나에게 이득이 생기면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언명령에 따른 인간관은 대단히 인간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시청인과 같이 최약자들에게는 가장 절실하면서도 가장 이루어지기 어려운 목표이다.
어떤 복지 정책이나 의안도 명분상으로는 다 정언명령을 표방한다.
정치인도 한결같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그런 립서비스의 이면에는 장애인이나 국민을 자기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야망이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표를 많이 줄수 있는 대상들을 찾아 끊임없이 표사냥을 해댄다.
국민은 그들의 그러한 저의를 알면서도 이왕 하는 김에 조금이라도 낫다고 여기는 정치인을 선출하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인간 사회란 순수한 목적으로만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어느정도 실익이 있어야 무엇이든 가능하게 되어 있다.
만일 전혀 실익이 없는데도 그 일을 한다면 그야말로 가장 순수한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 목적을 위한 실천은 각자의 쾌락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는 현실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적 이익을 초월해서 가장 소외된 이들을 찾아갈 것을 강권하는 이념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의 세계다.
만일 많은 종교인들이 이러한 초월적 이상을 실천할 수 있다면 세상은 벌써 지상낙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이상은 이상일 뿐 현실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청인을 위해서 아무 사심없이 정언명령에 따라 일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에게 큰 힘과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시청인을 위한 일을 할 때도 뭔가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게 된다.
정말 시청인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보람도 얻고 좋은 평판도 얻는다면 일거양득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되려면 어느 정도 기반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한국처럼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맨땅에 헤딩하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처음에 관심을 보이면서 다가왔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떠나가게 된다.
결국은 다들 떠나고 당사자들은 덩그러니 남겨져서 원래부터 해오던 대로 고독을 씹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고독한 현장에서 오래 버티려면 현실적인 무언가에 대한 기대는 최대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칸트의 철저한 정언명령에 따라 묵묵히 사람을 목적으로 삼아 나아가는 헌신적인 정신을 배양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의무론적으로 헌신한다고 해도 현실이 막막한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무론적인 마인드나 정언명령에 따르는 태도도 결코 무한히 지속될 수는 없다.
사람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어서 보람도 있고 힐링도 해야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원칙은 정언명령에 따르는 것이 맞지만 현실에서는 결과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옛날처럼 각주구검한 칸트적 인간형이나
헌신적인 종교형의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아직 관심이 남아 있을때 조금이라도 좋은 상호작용을 통해
떠나는 시간을 조금 늦출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그렇게 잠깐 만나서 안녕이라고 인사하기를 몇번 하다보면
어느새 작별의 시간은 다가오고
우리의 인생도 서산마루에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