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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죽리 다원2구(죽동마을) 소재, 밀성손씨 죽원재사 <1>
4. 다죽리(茶竹里)
뒤로는 중산의 줄기에서 내려 온 꾀꼬리봉을 주산로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평전산(平田山)이, 서쪽으로는 다원동산이 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남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 북천이 흘렀으나 지금은 다원들 건너편으로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꾀꼬리봉의 아래쪽에 다원1구, 2구가 위치하고 잇고, 평전산 기슭에 죽남동이 있다. 다원들 가운데에 율전동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 국도 24호선이 동.서로 통과하고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곳이며, 남쪽으로 트여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원들 가운데 있었던 지석묘군과 평전산 기슭에 있는 고분군등이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문헌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잘 알 수가 없다.
이 마을에 있는 모당천(毛唐泉)의 사적으로 보아 고려말 조선초에 이미 모씨와 당씨가 입촌하여 살았다고 전하나 그 사적은 알 수가 없다.
조선 후기에 와서 죽동리와 죽서리로 방리가 나누어졌다. 지금은 산외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은 죽동, 서쪽은 죽서로 나누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죽동, 죽서, 죽남, 율전을 병합하여 다죽리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일제 말기에 죽남과 율전이 죽동에서 분동이 되었다. 1965년에 행정리를 조정하면서 다원1구. 2구, 죽남, 율전 등으로 나누어졌다. 자연 마을도 다원 1구.2구, 죽남동, 율전동 등 4개 동으로 이루어졌다.
또 산외면사무소와 경찰지서 등이 있어서 산외면의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금천리, 서쪽으로는 남기리, 금천리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꾀꼬리봉을 경계로 하여 엄광리, 금곡리와 인접해 잇다. 남쪽으로는 단장천을 사이에 두고 단장면과 면계를 이룬다. 유적지로는 다죽리 지석묘군과 고분군, 모당천(毛唐泉), 혜산서원, 죽원재사 등이 있다
죽서 마을 서쪽 산 기슭에는 단장면 고례리에 이쓴 밀양댐에서 상수원을 공급 받아, 정수를 하여 밀양과 창녕지역으로 식수를 공급하는 밀양댐 광역상수도 정수장 시설이 있다
(1) 다원 1구(茶阮1구, 다원 茶阮, 죽서 竹西)
꾀꼬리봉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옛 이름은 다원이라고 한다. 다원이라고 한 것은 차나무가 많앗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 차나무는 보두(步斗)라는 중이 중국에서 갖고 와서 엄광사의 주변에 재배하였다고 하는데 이 마을까지 번식하였다고 한다. (주) 레나 : 상동면 가곡리편의 보두산(보두산)과 보담노장, 보두산(보담산), 산외면 엄광리편의 폐사된 엄광사 및 보두산과 관련된 보두(步斗)는 엄광사에 있었던 보두스님으로 추정이 된다. 가곡리편에 보담노장은 엄광산으로 다녔다는 기록이 있음
이 마을에는 일찍이 밀성 박씨 일파가 입촌하여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조선조 중기에 진사 손호(孫顥)가 이 마을에 입촌한 후 일직 손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재사로는 영모재가 있으며, 손호가 이 마을에 입촌한 후 후진 양성을 위한 강습소로 정우헌을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753년에 창건한 격재 손조서(孫肇瑞)를 봉안한 서산서원이 있었는데 1868년 조령으로 훼철된 후 서산고택 또는 철운재로 편액하였다.
1971년 서원의 경역을 확장. 정비하고 각지에 분산 봉안되었던 일직 손씨 명현의 다섯 서원을 후손들이 세거지인 이 곳으로 옮겨 복원하고 혜산서원으로 중건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 서원의 경내에 격재 손조서 신도비문, 다원서당, 이이정(怡怡亭) 등이 있다. 또 수사 손명대의 영정각과 손응룡의 소강정사인 경선재, 양진당 손순룡의 은거서식소였던 양진당, 동오당 손기옥의 추모재사인 동산정 등이 각각 보존되고 있다
새터
절터골 앞에 있는 마을이다. 새로 생겼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사안대(謝安臺)
죽서 마을 북쪽 새터 앞에 흙으로 높집하게 쌓아 올린 대를 말한다. 옛날 이 마을 어른들이 이 곳에 대를 쌓아 이 마을의 학도들로 하여금 여기에 올라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중국 동진 때 문무를 겸비한 재상으로 인품이 뛰어난 사안(謝安)과 같은 인품을 닦으라는 뜻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동산(東山, 사안동산 謝安東山, 연주산 連珠山)
죽서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이다. 사안동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안대의 부근에 있는 산이라고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연주삼ㄴ이라고 한 것은 이 산의 3개 봉우리가 구슬을 이어 놓은 것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또 이 산의 아래 쪽에 어대(魚臺)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곳에 있는 행랑소에서 낚시를 했다고 한다. 이 바위에는 독립의사성하손공사적비(獨立義士成河孫公事跡碑)가 있다
행랑소(行廊沼, 행랑소 行浪沼)
주서 마을 입구에 있었던 소이다. 옛날에 동천이 이 마을 앞으로 흐를 때 마을 입구에 잇는 다우너동산 아래 쪽에 깊은 소가 있었는데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행랑에 가는 거리 쯤 된다는 의미에서 붙은 지명이다. 또 행랑소라고 한 것은 소가 넓어서 늘 물결이 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터짐이
다원1구 마을 앞 도로변 밑에 있는 모퉁이 둑으로 행랑소의 아래 쪽에 있었다. 이 곳에서 단장천까지 도랑이 있었다. 다원 뒷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의 량이 많아서 이 모퉁이 둑이 잘 터진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앵무뱅이
행랑소의 아래쪽에 둑을 따라 남서 방향에 있던 논이다. 옛날 살내에서 다원으로 시집온 신부가 앵과 무라는 몸종을 데리고 왔는데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재산으로 산 논이라 하여 몸종의 이름을 따서 앵무배비라고 했다 한다
송곳방우
꾀꼬리봉 밑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이 송곳같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벼락방우
송곳방우 밑에 있는 바윙이다. 벼락을 맞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양덕골
죽서 마을의 서쪽에 있는 골짜깅이다. 남기리 양덕 마을로 넘어가는 양덕고개가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시묵골
양덕골과 절터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절터골
새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무시묵골과 서나무골 사이에 있는데 옛날부터 절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옛날 이 곳에 서산고택이 있었다고 하며, 또 이 곳에 부치샘이 있는데 물맛이 좋다고 한다
서나무골
절터골과 갓골짝 사이에 잇는 골짜기다. 이 곳에 서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붉은방우
서나무골 중턱 산기슭에 있는 바윙이다. 이 바위에 붉은 이끼가 많아서 붉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서늘방우(시원한 방우, 시원은바우)
붉은 방우의 위쪽에 있는 바윙이다. 이 곳에 앉으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도 시원하다고 해서 시원한 바우 혹은 시원은 바우라고 한다
마당방우
서늘방우 위쪽에 있는 바윙이다. 바위가 마당 같이 넓적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갓골짝
서나무골과 재사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다. 주변의 산세가 갓(冠)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등(武嶝)
서나무골과 갓골짝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다. 산세가 마치 臺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감태방우
갓골짝의 위쪽 산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앞내길
다원 행랑소를 출발하여 다원들, 신기동으로 해서 범머리나루터를 건너 살내마을로 해서 살래다리를 통해서 영남루 기슭으로 가는 길이다
뒷내길
다원에서 왜우를 지나 정문, 긴늪, 법북, 교동으로 해서 밀양시내로 가는 길이다
석전놀이(石戰놀이)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죽동, 죽서 마을 사람들이 편을 갈라 달맞이를 하며 행했던 돌팔매질 놀이를 말한다. 이 날 오후가 되면 죽동 마을 사람들은 다원들 가운데서 죽서마을 사람들은 행랑소 앞 터짐이 둑 앞에서 각각 달집으로 짓고 농악을 울리며 돌팔매질 놀이를 했는데,
석전이 오래 계속되면 마을 어른들이 중간에 들어서서 화해를 시키고 다친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 위문하면서 일년 내내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지금은 이 놀이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2) 다원 2구(茶阮 2구, 죽원 竹阮, 죽동 竹東)
평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죽원이다. 죽원이라고 한 것은 이 마을의 동쪽에 있는 평전산(평전산) 기슭에 죽림이 무성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후기에는 죽동리라고 했다. 현재의 행정리동명은 다원 2구이다
이 마을에 조선조 중기에 생원 손겸재가 입촌한 후 밀성 손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재사로는 오한(聱漢) 손기양을 향사하는 별묘의 치재소인 죽원재사와 죽포(竹圃) 손사익의 강학소인 죽포정사가 각각 보존되고 있다. 또 문암 손석관의 각학소인 문암초허(門巖草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모당천(毛唐泉)
죽동의 죽원재사 밑 밑에 있는 고정(古井)이다. 중국 원니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이 곳까지 온 모씨와 당씨가 거주하며 그들의 식수를 위해 팠던 샘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당샘 혹은 모당천이라 한다. 지금도 샘 가에 있는 돌에 모당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 나라에 살고 잇는 당씨들 중에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 때 이 마을에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영산들, 예안들
죽동 마을 앞 넓은들 가운데에 부분적으로 붙여진 들 이름인데 지금 산외면사무소 앞에 잇ㄴ느 들을 예안들, 그 라애에 남쪽에 있는 들을 영산들이라고 한다. 영산들, 예안들이라고 한 것은 옛날에 이 곳으로 시집온 신부가 가지고 온 재산으로 산 논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즉, 영산에서 시집온 신부가 산 논을 영산들, 예안에서 시집온 신부가 산 논을 예안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산다리
죽동마을에서 영산들로 가는 곳에 봇도랑이 있었고 이를 건너기 위해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영산들에 있었기 때문에 영산들 다리라고 한다. 이 말이 줄여져소 영산다라리고 불렸는데 길고 큰 두 개의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딸개방우산(달개바우산)
죽동 마을의 동쪽 평전산의 남록 끝 부분에 있는 산이다. 이 산 위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중에서 달개비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날끝다리
딸개방우산의 아래 쪽에 있었던 다리이다. 옛날 이 곳으로 북천수가 흐를 때 나루터였다고 한다. 딸개방우산의 끝 부분의 보습의 날과 같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하여 날끝이라 부르고 이 곳에 있었던 다리라고 해서 날끝이라 하는데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으로 다 매몰되었다고 한다
돌배기논
다원들 가운데에 띄엄띄엄 여러 개의 바위가 논에 박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바위가 넙적해서 5 ~ 6명 이상 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경지정리 때문에 다 매몰되었다. 또 이 논에 있는 바위를 농띠방우라고도 하는데 마치 용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장군석방우
돌빼기논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 개의 바위를 손대장군방우, 박대장군방우라고 부른다. 옛날에 두 장군이 서로 힘을 겨루기를 하면서 이 바위를 던졌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일고 한다. 이는 지석묘로 추정되며, 지금은 경지정리 때문에 모두 다 매몰되었다고 한다
칠리탄(七里灘)
재악산(載岳山 사자봉, 해발 1189.2m, 소위 천황산 天皇山) 영정물, 호거산(虎踞山 = 운문산 = 화망산 = 함화산)의 구연물(시례 호박소), 단장면의 고사산(姑射山 = 고야산 = 고예산)
[(주) 레나 :칠치탄원 발원지 중에서 재악산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재악산(載岳山)은 일제가 소위 천황산(天皇山)이라고 개악(改惡)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지리도의 최고의 권위서인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에서는 재악산(재악산)기록하고 있습니다.
재악산(載岳山, 해발1189.2m)은 재악산군(載岳山群)의 제1봉이며, 사자봉 정상에 사자의 모습을 사자봉이 있으며, 재약산(載藥山)은 재악산군의 제2봉으로 수미봉을 말함, 고사산의 “射”는 “야”로도 발음이 되며, “고야산” 이라고도 불렀음, 중국의 한자병음에서는 “射”을 "예ye" 라고 발음을 하며, 한자병음 상의 발음에서 고야리(姑射里)에서 사(射)가 “예”로 변음된 것 같으며, 고야리가 고예리로, 다시 고례리(古禮里)로 변한 것 같습니다.
재악산(載岳산)을 재약산(載藥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국가지리정보원(구 국립지리원)에서는 재악산(사자봉)의 남쪽에 제2봉인 재약산(수미봉)을 별도로 제정했습니다. 재악산과 재약산은 엄연히 구분된느 산이며, 하나의 산군(山群)에 2개의 산명을 명명하는 것은 잘못되었으므로, 재약산은 당연히 재악산군(載岳山群)의 하나의 봉(峰)으로서의 “수미봉(須彌峰)”으로 개명을 해야 합니다.
재악산(載岳山) 산명에 대한 내용은 다음 카페 “밀양광장”의 “재악산 산명고찰” 게시판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에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또 일곱실(七谷)에서부터 칠탄정의 위에 까지 약 7리를 여울져 흐른다고 하여 칠탄리라 불렀다고 한다.
산동 지방의 7개소의 냇물 즉, 이천(밀양댐 상류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의 골짜기배내천), 구천(귀내, 단장면 구천리), 국전천(단장면 국전리), 구만천(산내면 봉의리), 구연수(臼淵水, 산내면 얼음골 위 호박소), 발례천(산내면 임고리) 등의 냇물이 모여 흐르는 곳이라 하여 칠탄이라 한다
등잔소(燈淵)
칠탄정의 아래쪽에 있는 약 100m 지점을 가리키다. 그 아래 쪽에 큰 바위가 있고, 소가 있는데 낚시하는 사람들이 밤이 되는 줄 모르고 계속하다가 등불을 켜놓고 밤늦도록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다 매몰되었다
물방우골
죽원재사의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 곳에 고래장터가 잇었다고 하며 토기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당산껄
죽원재사 뒤에 큰 노송나무가 있는 일대를 말한다. 이 나무가 당산나무로 매년 정월 초닷세날에 이 노송에 당산제를 지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징이갓(징갓)
죽원재사 뒤 재사등의 아래쪽에 있다. 옛날 마을에 질 좋은 징이 있었는데 그 소리가 유난히 아름답고 멀리까지 울려서 이을 탐내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징을 도둑맞을 것에 대비하여 은밀한 곳에 묻어 두기로 했는데, 그 곳을 지이갓이라고 한다. 뒷날 이 곳에 묻어 두었던 징은 강바위라는 자가 훔쳐 갔다고 한다
솔찜이방
뭉개방천 앞에 있어Tejs 방천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옛날 애장(兒葬)터가 있었던 곳이다
뭉개방천
솔찜이밭의 위쪽에 있었던 방천이다. 장마때마다 동천이 넘쳐서 무너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중국인이 이 곳에 살면서 제방을 쌓은 뒤로는 잘 견디었다고 한다. 19589년 사라호 태풍때 다시 무너졌다고 한다
이망쟁이밤밭
뭉개방천 아래쪽 방천 너머 하천 안쪽에 있었던 밤밭이다. 밤밭 주인이 대머리였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잇따리목
단장면 미촌리 쪽에 있는 우수비알의 아래쪽 하천가에 징검다리거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다리는 다죽리 사람들이 우수비알에 소를 방목하기 위하여 다니기도 했으며, 단장면 구미, 사촌리 사람들이 밀양장으로 다닐 때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계법보(桂法洑)
금곡교에서 단장면 미촌리로 돌아가는 산 모롱이에서 단장천에 걸쳐 있는 보(洑)이다. 보머리는 금곡들 쪽에 잇다. 이 보는 단장천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다원들에 물을 댄다
신청천터(申靑泉터)
죽원재와 딸개방우산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골짜기에 있는 샘이다. 옛날 신청천(申靑泉)의 어머니가 청천을 임신한 후부터 샘물이 말랐다가 열달이 지나 그가 출생하지마자 샘물이 다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를 연유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청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샘을 신청천이라 한다. 밀주지에 신청천의 아버지인 신일성의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이들은 합천으로 이거하엿다고 한다
재사등(齋舍嶝)
갓골짝의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이 곳에 죽원재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등의 아래에 징이갓이 있다
당산나무껄
죽동 마을에서 율전으로 간느 한 중간 들 복판에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을 당산나무껄이라고 한다. 즉 돌빼기논 밑쪽이 된다
고래들(古來坪)
당산나무껄에서 밤밭쪽으로 걸쳐 잇는 들이다. 이 곳에는 물이 많이 괴어 있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주) 레나 “고래논”이란 논이 극히 드물었던 아주 옛날부터 자연적으로 논으로 된 곳이며, 이는 자연히 물이 많이 괴여 있는 곳이다. 옛날에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보리를 심지 못하고 벼만 심는 논을 고래논이라고 했으며, 경지정리를 하지 않은 산촌에 이런 논이 더러 있다
감말리논
고래들과 솔찜이밭 사이에 있는 논이다. 가뭄을 많이 타기 때문에 붙인 지명이다
(3) 죽남동(竹南洞)
다원 2구 동쪽 평전산 기슭에 잇는 마을이다. 죽남이라고 한 것은 다죽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일제 시대에 죽동사람들이 이 곳에 농막을 짓고 영농고나리를 하면서 한 두집이 입주하여 정착한 후 생긴 마을이라 한다. 원래는 죽동에 소속된 마을이었는데 일제 말기에 율전과 함께 분동되었다. 행정상으로는 죽남동이라고 한다. 지금은 윗각단, 아래각단 등 두 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죽남다리
죽남 마을에서 괘법보로 가는 길목에 큰 봇도랑이 있는데 이 곳에 놓인 돌다리이다
탑골보
죽남 마을 앞 다리 밑에 있는 보이다. 금곡리의 여러 산골짜기에서 물이 내려 오는데, 이 물을 받아서 죽남 앞들에 관개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탑골들
죽남 앞 들이다. 탑골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 레나 : 탑골은 산외면 금곡리 남동쪽 평전산 산록의 옛날 봉성사 절이 있던 골짜기를 말하며, 봉성사는 고려시대에 큰 절로서 고려 태조가 삼국통일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준 스님이 이 절에 있어, 고려 태조의 관심이 많은 절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사되었다
(4) 율전(栗田)
다원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다원밤밭 혹은 밤밭이라 부른다. 이 곳에는 옛날부터 밤밭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곳에서 생산된 밤을 관청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관율숲(官栗藪)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서넘쪽을 아래밤밭일고 했는데 이 곳에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엇다고 하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몯 떠 내려가고 지금은 또 경지정리를 하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율전은 활성 2통인 구서원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인데, 단장천 마을 앞을 흐르는 단장천 건너 활성2통인 구서원 마을 안골짜기에는 영원사지와 덕성서원의 구지가 있었는데 리더스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졌다.
율전에서 밀양시내로 오가려면 종전에는 산외면사무소가 있는 다원 마을 앞 국도를 경유해야 했는데 요즘은 리더스골프장(밀양시 활성동 소재) 의 진입로가 율전 마을 앞 제방로와 활성1통(살래 마을)과 활성2통(구서원 마을)으로 통하는 산길이 개설 및 확장, 포장되어 활성 2통 입구의 교량을 통과하여 밀양시내로 진출입하기 때문에 교통이 많이 편리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