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 어린 날, 침 발라 우표 붙여서 우체통에만 넣으면 팔도사방 어디든 착착 배달된다고 알았지요.
그래서 울고 보채는 골치 아픈 땡깡쟁이 산통 깨는 심술쟁이는 우표 붙여서 콱 어디론가 보내버린다 했지요. 독도에 가서 빨간 옷 차려입고 얌전하게 마중 나온 우체통을 보자니 눈물이 다 나대요. 시상에 여그가 어디라고 편지 부친 사람에다 그것 꺼내다가 배달하는 사람까지...
- '서시' 김종/ <독도우체통 1>의 첫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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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별
땅에는 꽃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는 시
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시는 사람에게 별처럼 빛나고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시를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 시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강만 광주문인협회장의 '축하의말씀' <시가 빛나는 도시>의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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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숨결을 가다듬어 주던 나무들도
잔털까지 훌훌 털어버리고
새봄맞이에 들어간 12월,
저희 시분과에서는 작년 [꽃봉을 열어 보이듯]
창간호에 이어 2집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금년에도 통일, 독도, 자유시로
함께 어깨동무해 주신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 김정 시분과위원장 '발간사'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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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김윤묵
저기 저
돌 구르는 메마른 땅
벌침 같은 뙤약볕 쏘아대는데
허리 굽은 우리 어매
해진 무릎 헝겊 덧댄 일복 끌며
이른 아침 안개 속에
그림자로 기어기어 풀 매던 곳
이슬 땀 훔치며 삶을 매던 곳
낡은 호밋자루 동무 삼아
마디 굵은 손톱 밑에
흙 마를 날 없더니
꽃이 피네 꽃이 폈네
하얀 꽃 자주 꽃
우리 어매 한숨이
무리 지어 피어나네
세월 그리움이
피고 있네
감자꽃
감자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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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 김을현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최고여
잘 살려면 시상말을 잘 들어야 혀
가을 들판에 감은 따먹으라고 있는 것인께
암만
코 박고 계곡물 안 먹어 본 사람이 어디 있당가
허락받고 산딸기 따먹은 놈이 미친 놈이지
잘 살려면 바람소리도 척척 알아듣고
잘 살려면 다람쥐처럼 달음박질도 잘 혀야제
나랑 산으로 도토리나 주우러 가장께
천지사방에 쩌렁쩌렁 심봤다를 외치며
가슴 탕탕 치면서 사는 거지
암만
봄여름갈겨울 육갑떨지 말고
잘 살려면 자연대로가 최고여
나헌티 뭐 달라고 하지 마
너도 이미 넘치도록 다 가지고 있구먼
마음 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가랑잎 한 잎보다 가벼운 인생 아니던가
긍께 원시인처럼 자연산이 되자고
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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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부는 그 여자/ 김효순
달빛이 옷을 벗는 밤이면
그 여자는
하모니카를 분다
그 여자가 새의 부리처럼 입술을 내밀어서
하모니카를 불면 그 소리는 정처없이 떠도는
새의 울음으로 들린다
그 여자가 한 달에 한 번식 다문화센타에서
고향의 봄을 하모니카로 불 때마다
그 멜로디는 그 여자의 단칸방에
세들어 사는 푸른 곰팡이가
햇볕을 갈망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 여자가 하모니카를 부는 밤이면
달빛이 도둑고양이 한 마리 데리고
반지하 방범창을 열어달라고
울부짖기도 한다고 했다
그럴 때만다 나는
그녀가 남편 몰래 고국의 병든
홀아버지에게 보내주는 십만 원이 떠오르고
내 마음은 지하실에 갇힌 고양이처럼 절박해진다
그녀가 하모니카를 불지 않는 어느 날,
그녀가 좋아하는 달빛이 벗어놓은
옷을 걸치고 그녀를 찾아갔다
바퀴벌레들이 맨발로 마중 나중 나온 동굴 속에서
하모니카가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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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 두 줄/ 박종대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일흔넉 줄 현(絃)이 생겨
줄이 많아 서로 얽혀
내 인생의 음악을 탈 수가 없다니
열두 줄 가야금
여섯 줄 키타
네 줄인 첼로
두 줄인 해금 중
어떤 악기를 만들거나
버리긴 아깝지만
갖고 있음 버겁고
비워야 가볍고
신물(新物)로 채워진다니
일흔한 줄 다 버리고
한 줄은 글을 먹고
또 한 줄은 詩를 타는
해금소리로만
노래하며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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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 박판석
내게는 큰 산이 셋 있습니다
해남에서 온 산
남평에서 온 산
광산에서 온 산입니다
모두 시골에서 태어나 광주로 이사온 산들입니다
그 산 아랜
따뜻하고 포근한 강이 흐르고
청라언덕엔 삐비꽃 버들강아지
늘 푸른 나무들과 새와 짐승들은
추억의 깊은 강물을 먹고 삽니다
늙어서도 책가방 하나 메고 나란히 학교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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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막걸리/ 신현영
광주를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무등산 막걸리 도수가 낮아집니다
오뚜기가 넘어져 있는 걸 본 적 있습니까
이게 무등산 막걸리의 영양입니다
세월이 더할수록 톡 소는
명정(酩酊)의 나날도 이토록 즐거울가
가로등은 이유 있어 어둠을 따라오고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아득히 멀어야
나를 기억하고 추억할 줄 아는
무등산 막걸리 도수가 자존을 세울 수 있습니다
마시게나
저항하다 물들면
얼굴 붉어지는
막걸리 맛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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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부부/ 심정욱
철새부부가
집 앞 나뭇가지에 앉아서
열심히 잔털을 솎아내고 있었다
가벼운 몸을 바람에 맡겨
멀리 날 수 있도록
군더더기를 뽑아내고 있었다
사람은 눈 먼 욕심 때문에
쓸모도 없는 털을 몸에 잔뜩 붙이고 산다
사람도 우주에서 날아온 철새거늘
자유를 모르고 산다
철새는 집이 없어도 자유롭다
이 세상 모두가 그들의 집이다
인간은 쓸데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도 무겁다 무겁다 하면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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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보/ 오승준
꽃봉오리 아이들이
바다에 빠져 있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어둠에 갇혀 있어도
아무도 구하지 않는
힘 센 나라들이
역사를 왜곡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불의한 사람들이
거짓을 말해도
아무도 소리치지 않는
부패한 권력이
사악한 축배를 들어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
그런 세상
그런 사회
그런 나라에 대해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나는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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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전한 힘/ 윤수자
아내의 관심 없이
일터로 가는 남편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그가 아무리 돈 잘 버는 사장이라도
남편의 사랑 없이
외출하는 여자의 뒷모습은 을씨년스럽다
그가 아무리 미인일지라도
가족의 사랑 없이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초라하다
그가 설령 지식과 권위로 당당할지라도
부모의 사랑 없이
학교로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은 외롭다
아무리 뛰어난 성적의 우등생일지라도
지금은 고개 끄덕여 줄 수 있는 사람 없어
서로 위로 받고 싶은 시간
우리에게 온전한 힘은 사랑뿐
줄 수 있을 때 덜어서 주고
끝끝내 사랑하고
사랑하다가 떠나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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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포의 봄바람/ 이길옥
서해 바닷물을 뒤집고 놀다 온
짭쪼름한 봄바람이
격포 방파제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파도를 빨래한다.
북적북적 끓어오르는 하얀 거품이
바람의 머리채를 잡고 뱅그르르 몸을 비튼다.
깜짝 놀란 바람이
거품을 툴툴 털고 일어나
부르르 진저리를 한 번 치더니
봄 화냥기를 몰고 온 성숙하 여인의
나비 속날개 같은 치마를 들치고 들어간다.
여인의 진한 체취에 넋 빠진 바람이
치마를 확 뒤집으며 환장을 한다.
홍조로 익은 부끄러움이
여인의 얼굴에서 봄으로 피어난다.
정신을 추스른 바람이 발목에 힘을 준다.
방파제 초입에
가랑이를 쫙 벌리고 앉아
봄을 파는 아주머니를 발견한 바람이
말초신경에 힘을 박으며 발정 난다.
발칙한 격포의 봄은
서해를 뒤집고 놀다 싹수 빠진 바람으로
여인들을 간 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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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가는 길/ 이현숙
맹목의 그리움도
죄가 되는 가을날
실끝 풀린 지연인 듯
일상을 나서면
솔바람 한 줌
들꽃 한 무리도
예사롭지 않아
옷깃 스치는 산굽이마다
묻어오는
부처의 향기
속 깊은 물가에
살아 아픈 짐 벗어두고
쪽물 이는 하늘 길목
갈꽃으로 서성일 적
일만 번뇌 달래어
한사코 길을 뜨는
단풍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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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게/ 조성식
돌아오는 길,
형수가 싸주신 아이스박스를 열어보니
소라가 뭍으로 나와
바다를 머금은 채
명절 피로에 지친 아낙처럼 엎드려 있다
저녁상에 올라온 소라는
어머니께서 갯가에 나갔다 오시는 날
가끔씩 밥상에 올라왔던
그 소라를 닮았다
딱딱한 껍질 속, 자라목 같은 소라를
벽에 박았던 나사못 되돌려 빼듯
빼내 주시던 어머니처럼
나도 그렇게 딸에게 빼내 주니
갯내음새가 온몸에 스며든다
바다는 일찍이 어머니의 논밭이었으며
친정집 같은 곳,
소떼들이 찾는 풀받 같은 곳이었다
나 또한 소라껍질 속,
뜀뛰며 노니는 한 마리 소라게였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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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 허소미
벙그러지면
꽃심처럼 도사리고 있는
뱀 한 마리
나근나근
부드럽게 안겨드는 여우와
가슴에 꽂을 비수 번득이는
요부 사이에서 피워대는 이야기꽃
그 꽃그늘 아래 어지러이 맴돌다가
그만 끈근이주걱 같은 설화에
말려들어
꼭 피를 부르고야 마는 직성
진홍 립스틱
큰일 날 죄 하나
발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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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팔월/ 홍성주
맴 맴 매에 엠 맴
매미소리에 시끄러운 팔월
작열하는 태양은
바람마저 삼켜버렸고
축 늘어진 호박잎
헐떡거리던 삽살개도
그늘 찾아 잠들고
코스모스 잎마저
목말라 하는
팔월의 오후
소낙비라도 내렸으면
세월호 차리를 보는 것 같아
숨이 막힌다
기다리는 마음
그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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