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래 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같은 광주동지방의 안중호 목사님께서 축하 선물로
주신 책이다.
아마 선교사로 나가는 나에게 물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고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안 목사님께서 선물해주신 것 같다. 안 목사님도 지금은 중국 어딘가에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사역하고 계시다라는 이야길 들었다.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다가 이번에 결국 읽게 되었는데
좋은 자극을 많이 받았다.
1부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청부론자들은 돈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자리라고 강조한다.
돈을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하지도 말고 돈을 최상의 축복으로 여기지도 말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말하면서 돈을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왜?
-돈이 끌어 들일 수 있는 악한 영적 능력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돈의 유혹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재물이 가진 위험과 한계를 알기 대문에 하늘의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계식량계획'(WFP)에서 2002년에 발표한 기아에 관한 사실에서는
'매일 24,000명 정도의 사람이 굶주ㅇ림 혹은 그로 인한 질병으로 죽는다,
7초마다 어린이 한 명이 굶주림 혹은 그로 인한 질병으로 죽는다,
그러나 세계에는 모든 인류가 먹기에 충분한 식량이 있다'라고 보고했다.
성경에도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외곡된 구조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우리에 대한 요청이다.
부에 대한 위험을 알아보자
1)부는 영적생활의 목을 조른다. 부를 지키고 늘리는데 관심을 쏟다보면 영적생활이 고갈된다.
2)부를 어느정도 소유하게 되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보장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며,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욕구는 근심과 염려를 불러온다.
3)부는 우리 눈을 멀게 한다. 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된다.
4)부는 자신을 지배자로 만들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다.
5)부를 잘못 다루면 그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
다 함께 나누어야 할 재물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허비한 것은 심각한 허물이 될 수 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1)사회적 질병으로서의 '가난'을 말할 대 생존이 위협당할 정도의 물질적 빈곤을 의미한다.
2)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난을 말할 때 가난은 정상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필수품에 만족하는 정도를 가리킨다.
다른 말로 이것을 '단순한 삶','소박하고 검소한 삶'이라고도 부른다.
가난은 게으르고 나태한 생활 때문에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 개인적인 문제보다도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속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또 하나 가난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확고한 태도 때문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세번째 가난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가난함에 이르게 되는 경우이다. 이것을 영성적 가난이라 부를 것이다. 자기 수입에서 타인의 몫을 떼는데 만족하지 않고 나에게 필요한 것 이외의 재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소망해야 하는 가난이다.
이런 가난이 주는 유익은 가난의 위험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된다.
1)부가 영적생활의 목을 조른다면 가난은 영적 생활을 자유롭게 한다.
2)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다.
3)부는 우리 눈을 멀게하지만 가난은 우리 눈을 뜨게 해 준다.
4)부는 우리 자신을 지배자로 만들지만 가난은 겸손하게 만든다.
5)부를 잘못 다루면 심판에 처하게 되지만, 스스로 택한 가난은 그런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진정한 복은 무엇이며 우리는 물질적 복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성경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신7:12-15을 보면 율법준수와 그에 따른 축복을 말하고 있다. 청부론의 축복관과 다를바 없다.
이 말대로라면 부자와 권력자는 하나님께 복 받은 의인이고, 가난한 자는 징계받은 죄인일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율법의 약속을 축복의 공식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율법을 지키는 목적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데 있다. 이것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보장이다.
결국 여기에서 우리는 청부론의 문제를 볼 수 있는데,(오덕호 목사의 지적)
1)이 사고에 젖게 되면 물질적인 조건에 다라 자신을 잘못 평가할 위험이 생긴다. 즉 가난한 것이 불신앙의 증러고 혹은 부유한 것이 높은 경건의 증거로 오인될 수 있다.
2)이 사고방식에는 항상 물질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게되기 때문에 영적이고 의로운 삶을 소홀히하게 된다.
청부론의 '복신학'은 구약의 일부 본문만을 택하여 왜곡시킨 결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분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행복인 이유는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발견함으로 의미로 충만해지고,
그 소명을 이루어 감으로 자신의 존재가 영원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2부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삶
예수님은 죄를 짓게하는 근원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그 근원은 욕망이다.
욕망에 대해 우리는 자주 그것을 본성이라고 말한다.
'본성'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바탕'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이기적인 욕망이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람가운데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겨난 것이다.
니버는 이기적 욕망과 물질적인 것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경향이 본성이 아니라 타락함으로 생겨난 제2의 본성임을 분명히 한다. "죄된 욕망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질병이다"라는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욕망은 받아들여야 할 본성이 아니라 치료해야 할 질병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욕망을 위해 하지 않는다.
식욕은 하나님이 우리 몸에 입력하신 좋은 프로그램이다. 그것을 잘 사용하면 건강을 도모하고 문활르 발전시킬 수 있지만, 그것이 식탐이 되면 건강을 망치게 된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져 욕망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되면 비로소 눈이 열려 '필요'와 '욕망'를 구분할 수 있다.
*야베스의 기도는 문제가 있다. '강청하는 기도''하나님을 지치게 할 정도로'강력하게 기도함으로 우리가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1)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가 중요하다.
2)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주인)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소임을 다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구할 때 주인은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믿고 구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도를 통해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힘들여 해야 할 일은 욕심을 비우고 제어하는 일이다.
*청부론에서 말하는 깨끗한 부자의 첫째 조건은 바르고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것이다.
둘째는 번 돈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나누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도 포함된다. (십일조)
대부분 십일조를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한 투자처럼 가르치는데 반해 김동호 목사는
"돈에 대한 반듯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기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훈련"우로 십일조를 규정한다.
과연 이 당에 내것이 있느냐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제하고 나면 다 내 몫이라 할 수 있는가?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수입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다.
황호찬 교수는 십일조에 대해
내 것 가운데 하나님의 몫을 드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 가운데 일부를 내가 쓴다고 생각하라고 제안한다.
청지기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1)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2)소유권을 포기하는 것과 동시에 한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해야 한다.
*풍요롭게 사는 목사가 진실로 교인들의 문제를 알고 있으며 함께 아파할 수 있을까?
그가 진정으로 영원한 것, 참된 것, 경건한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영원한 것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답게 물질에 대해 소박하고 욕심 없이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절제가 그리스도인에게 더 어울리는 이유는?
1)그리스도인에게는 가난하고 짓눌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살필 책임이 있다.
2)육욕을 제어하고 영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3)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내 수입에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몫을 떼고 나머지를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
이와는 다르게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할 금액을 미리 정하는 것, 구차하지 않으면서도 소박하게 살 수 있도록 생활비를 정해놓고
나머지를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3부 나눔으로 풍성한 행복
모한다스 간디는 "이 세상에는 모든 인류의 필요를 위한 충분한 자원이 있다. 하지만 그 자원으로 모든 인간의 탐욕ㅇㄹ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저축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
1)이기심, 할 수 있는 한 많이 쌓아두려고 한다.
2)미래의 불확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한다.
사실 이들도 일을 한다. 다만 미래의 안전과 풍요를 보장할 목적으로 일하지 않는 다는 점이 인간과 다른다.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빌미로 분에 넘치도록 재산ㅇ르 불리고 호의호식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어떤 일을 행할 때는 필요한 만큼만 하고 중단해야 한다.
저축은 '한계'와 함께 '동기'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투기역시,
1)한 사람이 맞는 돈벼락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받는 재앙의 결과이다.
2)불로소득을 기대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맞지 않다.
3)투기에 사로 잡히면 영적 생활에 큰 지장을 받는다.
이런 면에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다.
나눔은 나와 이웃을 모두 풍요롭게 한다.
암브로스는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을 나누는 부자느 자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눔은 내 것으로 남을 돕는 다는 생각을 버리고 고통받고 눈물짓는 사람이 곁에 있는 한 나 혼자 행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서 그주인은 자기 포도원을 위해 일군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일군을 위해 포도원을 경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또한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삯군 목자는 자신의 수입을 위해 양을 돌본다. 반면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한다.
목자를 위해 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목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절약한 돈이 은행에 고여있거나 개인 금고에 잠자고 있으면 경제가 침체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꼭 필요한 물품의 생산이 촉진되고 경제는 건강을 되찾게 된다고 말한다.
부자들이 적정한 정도에서 소비를 제한하고 나머지를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사치품 생산은 줄어들고 생필품 생산이 늘어난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안에서 그 분의 소명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관심일뿐이다.
그는 '소비'가 아니라 '절제'에서, '축제'가 아니라 '나눔'에서, '풍요'가 아니라 '가난'에서 기쁨을 찾기 때문이다.
4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섬김
첫댓글 다시한번 김영봉교수님(지금은 목회에만 전념을 하고 계시죠!)책을 잠시나마 엿보니 좋네요. 김영봉교수님...저희 스승이자 저희 결혼 혼례와 주례를 멋지게 진행해주셨죠..ㅎㅎ덕분에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결혼식을 했고, 주례비도 극구 안받으시고 기차타고 서울로 가셨드랬죠.^^;; 교수님이 쓰신 책 중에 사귐의 기도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도 강추해드립니다..^^ 촌부리 슬기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