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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의 글 >
당신은 나를 위하여...
경북 포항 FB
김 리디아
누가 나를 위하여
거친숨 몰아쉬고 피땀을 흘리며
모진 매를 맞아 주는가.누가 나를 위하여
강제로 옷 찢김과 값싼 조롱을 당하며
머릿속 깊숙이 가시 박히는 중고의 관을 써 주는가.
누가 나를 위하여
골고타 죽음의 숨골을 향해
너비와 길이를 잴 수 없는 대죄를 지고 걸어간단 말인가.
누가 나를 위하여
한 없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죽음을 순명한단 말인가.
그 누군가는 곁에서 하루를 함께 시작해,
종일 곁을 떠나지 않으시며
날마다 감사와 기쁨을 넓고 시푸른 바다와 같은
은총으로 넘치게 주시며
슬픔과 절망의 푸르께한 늪에서 아파할 때
시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십니다.
끊지 못한 분노, 미움, 욕심, 시기, 질투, 나태 등.
악습을 끊지 못하는 저를 위하여 빌어 주시니,
크신 사랑으로, 짙은 애련함으로,
결코 혼자가 아니오, 사랑받고 있음을 느껴 봅니다.
나를 위하여 아직도 높이 매달려 계신 그 누군가의 고통에
기꺼이 함께 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그리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자매님의 ‘다음 블러그’ 명칭 : < 리디아's 꿈꾸는 나의 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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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1>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안산 원곡동 아가페 FB
박 아녜스 (경랑)
나무에 물이 오르고, 새순이 파릇하더니 여름의 시작이 되려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성서 형제회의 그간의 삶이 내 뇌리를 스쳐간다. 성거산에서의 큰모임, 코이노니아, 피정, 묵상회, 선서식, 연이은 성경 공부까지...
힘, 용기, 열정을 한몫에 얻은 자부심을 갖고 해온 사랑하는 성서형제회(F.B)...
그저 '힘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일상으로 돌아왔건만, 늘 허전함과 텅 빈 마음의 욕구가 나를 더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릇 밖으로 쏟아진 물은 오물이 되듯, 스포츠 선수가 슬럼프에 빠져 운동을 할 수 없듯, 나 또한 나를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삶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모든 걸 저버리고 싶을 때, F.B를 통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 순명과 사랑을 또 생각하며,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기도'라는 좋은 것을 남겨주시고,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두 손 모으면 할 수 있는 '기도'와 하느님과 나의 시간이 될 수 있는 '성체조배'의 시간을 주셨다.
난 늘 살아서 움직이는 바람처럼 살고 싶었다. 신앙인, F.B인으로 살아 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느님께로 가는 이 여정이 조금이나마 밑바탕이 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든지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믿음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나의 길을 가련다.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내 귓가에 '아녜스, 힘내라 힘. 파이팅.' 이라고 오늘 밤도 묵주알을 돌리며 나즈막이 기도 합니다. 하루하루 찬란하게 살 수 있기를...
이 글을 통해 F.B 회원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전하며, 우리 아가페 팀에게도 '파이팅'을 보냅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2010.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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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2>
7월 당산동 <전국 봉사자 월례모임>을 다녀와서...
안산 원곡동성당 FB
권 토마 (순)
안녕하십니까
저는 성서형제회에서 새내기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어제 7월 당산동 <전국 봉사자 월례모임>에 참여한 것은 ‘성서형제회가 전국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참석을 해보았습니다.
첫번째 전주서 올라오신 회장님은 아주 발랄하시고, 적극적이시고, 참 친절하시는 분이라는 느낌을 가득 받고 왔습니다.
모임 준비를 주관한 당산동성당 분들과 많은 분들이 그 뜨거운 날씨와 지루한 나눔 이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아주 상큼한 하루를 보낸 것 같습니다.
끝부분에 약간 미숙한 부분은 우리들이 피를 가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됩니다.
완벽하면 인간이 아니고 기계이지요. 완벽하면 이런 모임이 절대로 필요 없지요.
이런 점에서 볼 때에 회장님은 아주 믿음이 강하신 분이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본래 회의란 안건도 있고요, 그리고 그런 안건을 제일 먼저 처리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그리고 나눔 전에 미리 사전에 조율을 해 둡니다.
그 조율을 통해서 중요한 안건도 쉽게 처리되는 것은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어제는 그런 절차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후 3시경에 마칠 나눔이 지루한 공방으로 4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습니다.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첫째, 피정이 되든 교육이 되든 전체적인 진행 사항은 참석자들이 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느낌으로는 미리 프로그램 전체가 알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경험적으로 프로그램을 미리 알면 효과적으로 잘 진행될 것 같지만, 하나 하나 그과정에 전심을 다해 집중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는 시간 동안 불평만이 늘어갑니다.
저는 피정 진행도 해보았고, 피정에 참석도 해보았고, 피정준비도 해보았지만, 제일 편한 것은 피정 참석입니다.
물론 준비하랴, 진행을 하랴, 더바쁘고 힘들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도 나겠지만, 피정을 참석하는 일은 다음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미리 걱정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피정에 참여하는 선배들이 피정에서 더 힘들어하신다는 사실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어제 끝부분의 논쟁은 그 원인이 우리 모두와 교구와 평신도의 활동반경 한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수원교구는 교구인준이 안돼서 진행지원을 받지 못하는 반면, 전주교구는 교구인준때문에 프로그램을 짜는데 많은 제약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평신도가 보는 관점과 사제들이 보는 시야가 아주 다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평신도가 바라보는 세상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세상은 수도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성훈련이 아주 발달했다고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나시오 영성훈련의 예수회는 세상의 공동체를 많이 내포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영성훈련을 많이 하는 까리따스 수도원도 다 이런 까닭입니다.
코이노니아 좋은 방법입니다.
하계수련과 동계피정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 자체보다는 제가 보기에는 매주 모임을 갖는 나눔을 위해서, 이 나눔을 원할히 하기 위한 리더 배출을 위해서, 아니면 성서형제회가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각 수도회는 그 나름대로 지향과 카르스마가 있습니다. 평신도가 세상에서 수도원이 갖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펼치기는 힘들 것입니다. 카리스마를 펼쳐 낸다면 세상에서 발붙이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먼저 회장단이 이런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도 그분들의 기를 꺾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회의석상의 모습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보완해 나간다면 당장은 큰 효과가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레지오의 진행과정을 보시고, 레지오의 교육이나 훈련모습을 살펴보시면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왜 레지오 교육이 매년 같은 프로그램을 반복할까’‘다 아는 레지오 교본연구를 되풀이 할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레지오는 꾸리아나 꼬미시움 단장에게 많은 권한을 줍니다. 그럼에도 이를 다 활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규정대로 다 해결될 수가 없다는 것을 다들 알고 인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이런 장문의 글을 남기는 이유는 저도 체계가 안 잡혀서 횡설수설한다는 것이고 ..
한마디로 말하자면, 회장단을 중심으로 서로를 보안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그런 분위기였으면 한다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회장단이 그런 곳에 신경을 많이 쓴다면 본질에서 덜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진행 관계가 다소 미숙한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여러 번 피정도 해보았지만, 성격이 무딘 제가 그런 곳에 사로잡힌다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모는 차를 가족들과 같이 타고 어디를 간적이 있습니다. 노을이 물들고 주변 경치가 참 좋아서 한마디합니다.
“밖에 참경치가 좋네요...” 그 말에 아버지는“내가 그 경치를 즐기면 이차는 강물에 뛰어든단다...”
우리가 하는 일이 마치 이런 일이 될 것입니다. 진행과 신심을 이끌어 내는 일은 같이 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회장단들에게 용기를 드립시다. 회장단을 믿고 맡겨봅시다. 다소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은 우리는 흐르는 물 위에 있는 배처럼 어느 시각이 지나면 망망대해에 나가고, 노를 젓지 않더라도 배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어느 틈인가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배를 타면서 배에 탄사람 모두 다가 아니라, 배를 조정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들은 주변 경관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우리가 배를 타는 목적도 아주 잘 이뤄지리라 여깁니다.
여러 번 잠깐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저에게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하계연수회에서 가급적이면 만나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스럽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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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2010. 8. 1
루카 12,13-21
♠ 복음 연구
* 13-14절 : 군중 속에서의 그 사람은 예수님을 율법박사로 보았다. 그는 예수께 다가와서 자기 유산에 관한 문제에 결정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당신의 권위로 정당하지 못한 자기 형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시리라고 기대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잡다한 일들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이러저러한 특정 사회 질서나 체제를 옹호하는 결정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소명에 대한 예수님의 의식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처럼 예수님의 사명은 아버지의 뜻에서 비롯되었다
* 15절 : 예수께서는 재물을 늘리고자 하는 행동을 제자들이 반드시 견제해야 만하는 위험한 것으로 보고 꾸짖으셨다. 탐욕은 인간이 재산으로, 또는 필요 이상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말려들었음을 보여준다. 생명은 하느님께로 부터 온 선물이다.
* 16-19절 : 인간적인 모든 계획은 망상을 자아낸다. 인간의 생명은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손 안에 놓여 있지는 않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관한 논의를 자신에게만 한정할 수 없다. 이러한 모든 논의에 하느님이 관여하셔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만약 자신의 노력이나 재물로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실질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다.
* 20-21절 : 우리의 생명이 부나 물질의 소유로 안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이 명확히 보여 준다. 죽음의 천사, 하느님께로 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사탄이 "너에게서 네 영혼을 앗아 가리라." 바로 이 밤에! 그런데 그 부자는 자기에게 많은 세월이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던 것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을 따를 때라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는 세속의 재물에 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뿌리 깊이 박힌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물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 유산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께서는 중재하기를 거부하셨으며 탐욕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예수께서는 한 비유를 통하여 참으로 안전한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셨다. 바로 소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지상 것들에 대한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의 교훈이다.
♠ 대화 방향 : 현재 나에게 가장 큰 관심과 걱정거리는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물질에 대한 탐욕때문에 내안에 계신 하느님을 멀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루카복음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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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2010. 8. 8
루카 12, 32-48
♠ 복음 연구
* 32-34절 :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가진 것은 재물, 명예, 건강, 재능, 학력, 권력 등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쌓아 라고 하신 축나지 않는 보물은 바로 영적 보물이다. 벼락을 맞았습니다. 책을 보면 죽었다가 살아 난 오르티즈박사에게 예수님은 물으셨다. “너는 나에게 어떤 영적 보물들을 가지고 왔니? 영적 보물이라니요? 네가 너에게 준 달란트로 무엇을 했느냐? 너는 육신의 아름다움을 가꾼다고 써버린 그 많은 돈으로 너는 너무도 많은 자선을 할 수 있었지 않느냐? 너를 육신의 노예로 만들고 네 육신을 괴롭혔던 그 다이어트가 네게 무슨 도움이 되었느냐?
* 35-48절 :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삶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는 사람과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예수님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다가 온 어렵고 힘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다.
♠ 복음 요약 : 자선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늘에 영적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주님의 뜻을 알고 수행하는 충실한 종이다. 톨스토이의 “사랑이 있는 곳에” 나오는 마르틴과 같은 사람이 바로 충실한 종이다.
♠ 대화 방향 : 각자가 생각하는 영적 보물에 대해 나눠 봅시다.
♠ 참고 자료 : ▪ 주일복음 묵상 해설: <박영식 / 가톨릭 신문사>
▪ 벼락을 맞았습니다 <오르티즈 / 아베마리아 출판사>
▪ 매일 미사 (오늘의 묵상)
♠ 묵상 보조 자료
예화 : 톨스토이의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에 마르틴이라는 구두수선공이 나옵니다. 그는 본래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을 당시 그에겐 3살짜리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키울 자신이 없어서 시골에 있는 누이에게 맡기기로 마음 먹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이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보고 차마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하더라도 자신이 키우겠다고 생각을 바꿉니다. 그는 성실하며 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구두를 그에게 맡겼고, 덕분에 생활은 안정되었습니다. 어리기만 하던 아들이 자라서 이젠 아버지 옆에서 말동무도 되어 주고 아버지를 도와 잔심부름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열병에 걸려 며칠 앓더니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마르틴은 심하게 좌절했습니다. 아내를 잃은 후 아들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아들을 데려 간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자기 목숨도 거두어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 고향에서 친분이 있던 한 노인이 성지 순례를 하다가 마르틴에게 들렸습니다. 그 노인은 마르틴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보면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부인과 아들의 사별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은 노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마르틴! 자네는 잘못 생각하고 있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인간이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네. 비록 아들은 죽었지만 마음이 아프더라도, 자네는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네. 마르틴 자네가 이렇게 실의에 빠진 것은 그 동안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라네.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네.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목숨이니까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질 걸세.” 마르틴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노인이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게, 읽다 보면 하느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될 걸세. 그 안에 다 있다네.” 다시 순례 길을 떠나는 노인을 배웅하고 나서 노인의 말이 계속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마르틴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마르틴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위해 살 수 있는지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내며 향유를 부어 드린 대목에서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면 자신은 어떤 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것인지 스스로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일 내가 너를 찾아 가겠다”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그날 밤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하루가 다 가도록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하루는 다른 날 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불쌍한 이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눈을 치우는 늙은 품팔이꾼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구둣방에 들어와 잠시 몸을 녹이도록 했으며, 아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 여인에게 먹을 것과 헌 옷과 약간의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또 사과를 파는 할머니의 광주리에서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아이를 용서해 달라고 할머니에게 청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시고 어느새 하루가 저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마르틴은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너는 나를 알아 보지 못했지?” 마르틴이 “누구를요?”하고 묻자 어두운 구석에서 늙은 품팔이꾼이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이어서 “그가 바로 나였다” 하는 주님의 소리가 들리고 아기를 업은 여인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사라졌습니다. 또 다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여자도 나였다” 그리고 사과를 파는 할머니와 어린 소년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저들도 바로 나였다”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르틴은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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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대축일 <연중 제 20주일>
2010. 8. 15
루카 1, 39-56
♠ 복음 연구
* 39-40절 : 마리아는 탄생 예고가 있은 며칠 뒤에 길을 떠났다. 마리아가 여행해야 할 길은 사나흘 쯤 걸리는 거리였으며, 그것은 결코 쉬운 여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갔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땅으로, 나자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서둘러 여행을 한다.
* 41절 : 마리아는 태중에 메시아를 모시고 갔다. 그녀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할 때 엘리사벳과 그녀의 태중에 있는 요한은 메시아가 가져다 주는 구원을 보았다. 그 아기의 자연적인 태동을 구세주와의 만남이 불어 넣어 준 기쁨의 표징이 되었다. 마리아가 집으로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자 구원의 때와 관련된 축복이 시작되었다.
* 42-45절 : 성령을 가득히 받은 엘리사벳은 황홀감에 빠져 말을 한다. 엘리사벳은 그녀의집에 나타나신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을 선포한다. 마리아는 축복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미 그녀를 그리스도 안에 망라되어 있는 모든 축복으로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태중에 거룩한 분을 모시고 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인 그 분은 모든 축복의 근원, 모든 기쁨의 구원, 새로운 예배의 중심이다. 메시아 시대의 구원의 기쁨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마리아는 믿음과 순명의 정신으로 동의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리아는 처녀인 그녀가 메시아를 낳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믿었다.
* 46-48절 : 마리아는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 있었고, 메시아 시대의 종말론적인 기쁨이 그녀의 마음과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엘리사벳이 시작한 마리아에 대한 찬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세대가 목소리를 드높여 마리아를 찬양할 것이다.
* 49-50절 : 전능, 거룩함, 자비 등은 구약의 하느님 상의 가장 뛰어난 특징들이다.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속하도록 만들려는 노력 가운데 드러난다. 거룩하신 하느님, 그 분은 또한 자비로우시다. 하느님께서 당신 권능으로 이룩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입증해 준다.
* 51-53절 : 자신의 부귀와 위대함을 자랑하던 자들은 멸망하였다. 주제넘게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행위는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을 닫아 버리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닫아 버린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열어 보이지 않으신다.
* 54-55절 : 마리아는 노래 서두에서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마련해 주신 축복들을 언급하였지만, 이제는 그녀의 백성에게 다가온 구원을 노래한다. 마리아에게 이루어진 것은 또한 하느님의 교회에도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을 표상한다. 마리아의 감사의 반향은 구약성서의 찬미가들의 언어로 표현된다. 그녀의 백성의 노래는 그녀의 노래가 되었고, 그녀의 노래는 하느님 백성의 노래가 된다.
* 56절 : 아마도 마리아는 요한이 태어나자 더 이상 그 곳에 머물지 않았던 것 같다. 요한은 아직 옛 시대에 속하였지만, 예수님은 새 시대에 속하셨다. 요한은 약속의 시대에 출생하였으며, 그의 출생은 그 시대의 모든 표징들에 에워싸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 복음 요약 :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임신한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만난다. 구원은 인간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과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엘리사벳은 태중의 예수님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며 마리아를 찬양한다. 마리아가 복된 이유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이유만이 아니다. 가능해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진정 복된 것이다. 엘리사벳의 인사에 응답하여 마리아는 은총에 감사하는 노래를 읊는다. 마리아 당신이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와 이스라엘에 내린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먼저 하느님께서 비천한 여종에 불과한 당신을 굽어보시어 복되게 해주셨음에 감사한다. 그 복됨은 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다. 그 큰일이란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받음과, 아들 예수님이 이룩할 세상 구원이다.
♠ 대화 방향 : ① 나도 성모님처럼 복된 신앙인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② 하느님께서 비천한 나에게 베푸신 큰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루카복음 <성요셉 출판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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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2010. 8. 22
루카 13, 22-30
♠ 복음 연구
* 22절 : 요한에 의하면 이 여행은 예수의 마지막 여행일 것이라고 생각되고 평안하고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어려운 발길을 내딛는 여행이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 23절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심각한 물음이다. 묵시문학계에서는 종말에 구원될 사람들의 수효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받을 자의 수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음을 아시고는 그보다 중요한 것에 대해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 하셨다.
* 24절 : 이 절의 전체적인 뜻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 해도 못 들어갈 것이니 그 곳에 들어갈 수 있게끔 지금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장차 회개하려 해도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회개를 뜻하며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 25절 :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잔칫집 문이 닫힌 다음에 도착할 위험이 있다. 그들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문이 좁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은총을 가지고 있다고 우쭐대면서 언제까지나 회개를 늦추는 사람들이다. 구원을 얻고자 할 경우 잔치에 초대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격만으로는 모자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 26-27절 : 집주인에게 그전의 우정과 친교를 호소해도 헛된 일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뜻을 실행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악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예수의 제자랄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 28-29절 : 악을 일삼는 자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잔치자리로 상징되는 하느님 나라 밖에서 한없이 통곡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제공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지 않았음을 통탄해하며, 더욱 후회하는 것은 지금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그와 동시에 조상들과 예언자들이 받은 행복을 바라보는데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였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오히려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들 대신 그들에게 멸시받았던 이방인들이 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 30절 :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성서에 대한 지식과 사회적 지위 때문에 누구보다도 먼저 그 잔치에 초청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꿈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셨다.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고 유대인들은 쫓겨난다. 유대인들은 구원사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지만 그들이 누린 특권만으로는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치 않았다. 구원은 예수의 구원의 시대에서, 하느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에 차별을 두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셨다.
♠ 복음 요약 : 오늘 복음의 상황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계속되는 상황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교회의 외부적 요소에 자신을 맡기고, 잘못된 안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께 마음을 열지 않고 있으며 마음속으로 계속 참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생애에 있어 다른 모든 결심은 이차적인 것이고 진정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마음의 의지를 굳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려 하느냐 하는 마음의 방향이다. 여기에 구원과 저주의 판결이 달려 있다.
♠ 대화 방향 : 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어깨에 명예, 탐욕, 질투, 부귀 등을 짊어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짐들을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어깨에는 포기해야 할 어떤 짐들이 있습니까?
②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고 하느님께로 방향 전환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생활, 적극적인 태도로 진리를, 신앙을 증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그러한 결단이 필요합니까? 나누어 봅시다.
♠ 참고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루가복음 <알로이스 스퇴거 / 성 요셉 출판사>
▪ 신약성서 주해집 루가복음서 <페데리꼬 바르바로 / 크리스챤 출판사>
▪ ․루가 복음 해설 <리챠드 굿츠빌러 / 성바오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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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2010. 8. 29
루카 14, 1. 7-14
♠ 복음 연구
- 루가 14, 1-14은 식탁담화로서 4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4장면은 “식사”라는 핵심단어로 연결되어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큰 잔치의 비유(14, 1-6), 식사 자리에서의 말씀 두 가지(14, 7-11 : 12-14), 큰 잔치의 비유(14, 14-24)가 그것이다. 오늘 복음은 가운데 부분으로서, 이 두 단락은 유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식사 규정에 대한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언급이 이어져서 나온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종말론적으로 관련지어져 있다.
* 1절 : 예수께서는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초대에도 응하셨다. 이 식사에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은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로서 회당장 아니면 예루살렘 최고의회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인 것 같다. 엄격히 준수되던 율법과 전통 관습에 의거해서 볼 때, 예수께서 들어가신 그 집은 가장 경건한 곳이었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다는 말은 신약성서를 통틀어 루가복음에서만 나온다. (7,36: 11,37: 14, 1)
* 7-11절 : 이 단락은 낮은 자리를 택하라는 훈계(8-10절) 및 종말론적 지위 전도에 관한 말씀(11절)으로 짜여있다. 낮은 자리를 택하라는 훈계는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도 흔히 있는 예로 잠언 25, 6-7을 들 수 있다. “임금 눈앞에서 잘난 체 하지 말고 높은 사람들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저명한 사람 앞에서 내려가는 것보다 ‘이리 올라 오십시요’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 예수께서는 율사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나무라신 바 있다. “여러분은 율사들을 조심하시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기다란 예복들 입고 돌아다니는 것,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 회당에서도 높은 좌석,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마르 12, 38-39 참조 루가 11, 43 마태 23, 6-7) 한결같이 겸손한 처신이 현명한 처세술이라는 말들이다.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의 지위가 종말에 뒤바뀐다는 말씀으로 말미암아(11절)8-10절의 현명한 처세술이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 12-14절 : 이 단락은 주고받는 대인관계,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대인관계를 넘어서라는 훈계이다. 그렇게 처신하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실은 종말에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14절). 비슷한 사상이 6, 27-36에도 있다. 예수님은 의인들보다 죄인들과, 잘난 이들보다 못난이들과 어울리셨다. 예수님은 이런 처신을 정당화하려고 큰 잔치의 비유를 발설하셨다. 그 뜻인 즉 의인들, 잘난 이들은 자기일(18-20절의 토지 노동, 결혼)에 얽매여 예수님의 초대(하느님나라 선포)에 응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죄인들, 못난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처신을 변호하신 사례는 마르 1, 17 : 루가 15장에도 분명히 있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의 “식탁자리에 관한 규칙”은 하느니 나라에 관한 진리를 표현해 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낮아져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의로운 체하는 그릇된 모든 주장을 피하여야 한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 간의 우위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러하신 것처럼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고 요구하셨다. 성찬례는 봉사와 겸손의 맥락에서 거행된다. 또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의 실천은 하늘나라의 한 몫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총애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 대화 방향 :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처세술에 관한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의 방식을 취하며 살아가는지 나누어 보자. 그리고 과연 나의 처세술은 그리스도인다운 것인가?
♠ 참고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루가복음 <알로이스 스퇴거 / 성 요셉 출판사>
▪ 200주년 신약성서 루가복음 <정양모 역주 / 분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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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2010년 6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