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 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59>
지리산 도인촌(道人村)
지리산 삼신봉(三神峰: 1,284m)의 동쪽 기슭 해발고도 800m에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 도인촌을 청학동이라 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벌떡거리장(橫川場)’에서 우장삿갓을 하고 50리를 올라가면 청학동을 볼 수 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10리쯤 들어가야 하는데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 있었던 백바위가 석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외석문(外石門)이며, 내석문(內石門)은 장재기 마을의 아래에 있는 계곡의 벼락바위로 60-70년 전 벼락에 깨어진 후 없어졌지만 청학동결 속에 나오는 뇌파석문(雷破石門)이 틀림없으며, 마을 뒤 능선의 석각삼봉(石角三峯=쇠통바위, 송정바위, 독바위)과 청학동도의 상중하대가 모두 일치한다는 것 등을 들어 이곳 주민들은 진짜 지리산 청학동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리산에 사는 사람들은 특정한 종교단체의 이주지일 뿐 이상향으로서의 청학동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이 청학동이라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 ‘현장 風水’란 책을 쓴 최어중 씨는 그의 저서에서 밝히기를, 현재의 도인촌을 청학동이라 부르게 된 시초는 진주에서 ‘산, 산, 산’이라는 산악장비점을 경영하는 민기훈 씨가 삼신봉 등산을 하다 우연히 이곳에 들리게 되었는데, 이 마을이야말로 청학동이 아니겠느냐고 떠들어 댄 것이 계기가 되었고 사실 확인도 없이 1972년경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라 합니다.
‘유불선합일갱정유도교(儒佛仙合一更正儒道敎)’의 교주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이 지리산에 들어온 처음에는 회문산에 금강암을 짓고 수도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 7월에 죽었다가 7일 후에 소생하여 도통(道通)하고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등을 예언하였으며, 그 후 진안군 운장산과 회문산 도령동(道嶺洞)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신봉자들이 따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49년 일종의 포교반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었고 그럴 즈음하여 옛 진주암(眞珠庵) 터를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한 후 도인을 자처하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곳을 정감록이 점지한 땅이라고 믿었습니다. 난리가 났을 때 마지막 피난처가 되며 거기에서 새로운 나라가 창건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적 주술이 담긴 정감록의 말을 믿고 6.25동란 이후 전북 부안과 순창, 전남 광양 등지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을 곳곳에 세운 돌비석에는 ‘天藏地秘處’, ‘仙區寧府天下勝地 桃源有仙靈’ 등의 글귀를 새겨 ‘하늘과 땅마저 아껴 숨겨 두었던 곳’ ‘무릉도원의 신령스런 기운 감도는 곳’ 이라 알리고 있으며, ‘一日淸閒 一日神仙’(하루라도 맑고 한가한 마음을 가지면 하루라도 신선이 된다)이라는 말로, 청학동이 신선의 세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봉하는 ‘유불선합일갱정유도’는 유교, 불교, 선교의 좋은 점만 발췌해 만든 것으로, 현대 문화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간 선성(善性)을 수양하여 인간 윤리를 실현한다는 것이 주된 교리입니다. 일명 일심교(一心敎)라고도 하는 이 신흥종교의 정식 이름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입니다. 매년 4월과 10월 천제당(天祭堂)에서 대제를 지내는데, 천제당 입구 천하제일 강륜문(綱倫門)에는 ‘때가 되면 동서양의 모든 종교가 하나의 유도(儒道)로 통합되고 인류를 한 마음이 되게 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습니다.
70년대 후반 외부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그때만 해도 그들은 19세기의 삶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외부의 속인들과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누에와 벌을 치고 약초를 캐며 잡곡 농사를 짓던 농경생활을 하였으며, 남녀 구분 없이 미혼자는 모두 머리를 땋았고, 결혼하면 남자는 상투를 틀어 갓을 쓰고, 여자는 머리를 말아 올렸습니다. 결혼도 마을 사람들끼리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옷은 자기들이 직접 짠 흰 무명을 지어 입었으며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부녀자들은 외부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것조차 싫어하는 등 남녀칠세부동석의 엄한 규율을 지켰으며, 무명 흰 옷에 등 뒤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한 총각들은 반가부좌로 앉아 음률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들며 사서삼경을 외었습니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현대문명을 완강히 거부했던 도인촌에 도시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그들의 생활 풍속도 물질문명에 젖어들었고 그들 나름의 운둔생활도 청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옛것에 대한 관심과 동경으로 한때는 이방인들에게 있어 꿈의 마을로 여겨졌던 지리산 도인촌도 이제는 완전히 현대문명에 점령당해 그 옛적의 신비롭던 풍경이나 풍속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십승지라 일컬을 만큼 외부와 격리될 수 있었던 지리산의 오지마을이 민속촌 비슷하게 개발되면서 천혜의 비경들이 훼손되었으며 도인촌 주민들의 의식도 크게 변모하고 만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현재 40가구 가까이 살고 있지만 도인을 자처하며 사는 주민들은 18세대 108명입니다. 그 외의 주민들은 27채의 산죽토담집을 집집마다 헐어버리고 기왓집이나 슬라브 양옥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 중 절반은 민박이나 식당을 차려 돈벌이에 열심입니다. 몇몇 주민들은 한때 소를 20-30마리씩 키우는 한우 전문단지를 조성해 운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두 그만 두었으며, 무쏘나 갤로퍼 등의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문명생활을 하는 도인들도 많아졌습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계속 변해가고 있습니다. 새벽 寅시(4시 경)에 일어나 해인경(海印經) 독경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며 물욕에 초탈했던 주민들의 생활도 이제는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고 있으며, 흰 무명옷은 비단 한복으로 바뀌었고, 외부인들에 대한 그들 특유의 인사법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두 손을 수평으로 뻗은 뒤 다시 가슴에 당겨 붙이면서 허리를 깊게 굽히고 두 손으로 발목을 잡으며 외부인을 맞이하던 옛 인사법 대신 허리만 굽히는 인사로 바뀐 것입니다.
성인 남자는 상투를 틀고 긴 콧수염을 아직도 기르고 있으나 2세들의 경우는 장남을 제외하고 거의 머리를 깎고 있습니다. 강대성 교주가 만든 총 365권의 성서(聖書)를 기성세대만 읽고 2-3세 자녀들은 한학 대신 한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것은 신앙심과 국기 사랑의 정신이라 합니다. 24절후 치성과 연 6회의 경신일(庚申日) 치성제를 올릴 때면 전 주민이 목욕재계한 후 천제당에 모여 치성을 드린다고 하며, 천제당 옆 국기게양대에서 국기를 게양하고 하강할 때는 전 주민이 법복으로 정장한 후 태극승가를 제창하고 큰절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외형적인 것은 변하더라도 내면적인 것은 지켜 나가고자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듯하지만, 이제 이곳 도인촌은 청학이 노닐던 길지(吉地)라는 느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도인촌 주민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당초부터 세상을 등지고 살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조선조 생활을 따르겠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저희들의 종교 대문에 의복이나 머리 모양 등은 옛것을 지키지만 문명의 이기는 다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런데도 마치 속세를 등진 사람들이 문명의 이기를 뒤늦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대개 알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에는 언론의 책임도 크지요,”
또,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란 제목의 에세이집을 펴낸 바 있는 청학동 서당 이정석(李定錫) 훈장은 말합니다. “우리 것을 이어가면서 밖으로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청학동의 정신’입니다. 조선시대의 옷을 입고 텔레비전 등 현대 과학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지만, 정신적으론 세상을 앞서 간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청학동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은둔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부족한 한국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입니다.”
전통문화와 도덕, 한국적인 것의 재발견을 강조하며, 물질적 쾌락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단순한 것치고 가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말을 전해 주고 싶다는 이정석 훈장은 도인촌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삼성궁(三聖宮)>
지리산 천혜의 비경 속에서 19세기적 삶을 살며 그들만의 풍속과 정신을 꿋꿋이 지켜 가던 도인촌 사람들의 유유롭고 소박했던 생활을 처음으로 본 산 등산객은 ‘꿈의 마을’ 이상향이야말로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환상의 마을 청학동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타락한 문명 이전의 순수한 삶을 동경했던 도시인들이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도인촌은 차츰차츰 속인촌으로 변해갔고, 청학동이란 이름을 세상에 널리 퍼지게 했던 그 등산객의 생각은 오늘에 와서 크나큰 착각이었음이 현실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꿈의 마을’ 이상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청학동이라 부르며, 인생의 부조리가 없는 곳,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간 선성(善性)만이 충일한 마을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러한 바람[願]이 끝내 무너져버리고 도인촌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실망할 즈음 도인촌의 명성에 버금갈 새 명소가 등장했고, 이를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도인촌 주민들이 신봉하는 유불선합일갱정유도교의 수련장 격인 청학선원(靑鶴仙苑) 삼성궁(三聖宮)이 그것으로, 환인과 환웅, 단군을 모시는 성전이며 신선도(神仙道)의 수행 도장입니다.
1984년부터 이곳 삼성궁을 일으킨 한풀선사(大氣仙師 · 본명 강민주)는 증산도의 창시자인 강증산의 후손으로 6세 때 부친(의사)과 절친하게 지내던 낙천선사(樂天仙師, 1902-1984) 문하에 출가하여 선도(仙道)의 가르침을 받고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을 비롯한 삼륜, 오계, 팔조, 구서(三倫, 五戒, 八條, 九誓)를 공부하였으며, 또한 우리 고유의 춤과 노래 그리고 선가(仙家)의 무예인 선무(仙武)와 본국검(本國劍)을 사사(사사)했다고 합니다. 검정고시로 초·중·고를 마치고 중앙대에 들어가 고고학과 경제학을 전공, 석사학위까지 받은 인텔리이기도 합니다.
한풀선사는 이 땅에 배달겨레의 혼을 일으키고 민족적 구심점을 형성하기 위한 배달겨레의 성전을 건립하고자 초목근피로 연명하면서 칡넝쿨과 다래넝쿨을 걷으며 몇몇 제자들과 함께 수많은 솟대(돌탑)를 쌓았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소도(蘇塗)를 복원하여 잃어버린 배달겨레의 선도문화(仙道文化)를 재조명하고 민족문화 활동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이곳의 솟대는 마이산의 돌탑과 그 모습이 비슷한데, 3333개가 될 때까지 계속 건립할 것이라 합니다. 삼신봉(三神峯) 기슭에 조성한 삼성궁(三聖宮) 그리고 3333개의 솟대. ‘3’은 완전한 합일(合一)을 의미하는 숫자라 합니다.
단군과 하늘을 모시는 곳으로 성역화한 삼성궁으로 들어가려면 엄격한 안내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입구에서 어느 정도의 인원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 징을 세 번 쳐서 안내하는 수행자를 불러낸 다음 주의사항을 들어야 하고 참배객의 대표 한 사람은 도복을 입어야 입장을 시킵니다. 경내에 들어가 우리나라 지도 모양으로 만든 큰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면 또 다른 안내자가 삼성궁의 조성 유래와 의의를 설명합니다. 단군전 앞에 서면 그곳의 안내자가 단군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단군은 모두 47명이었으며, 우리가 국조(國祖)로 일컫고 있는 단군왕검은 47대 단군이라 합니다. 단군시대 이전 환웅의 시대인 배달나라에는 18대에 걸쳐 다스려졌으며 또 그 이전 환인의 시대엔 8대에 걸쳐 다스려졌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단군전, 환웅전, 환인전을 차례로 참배한 후 신단수와 천제단이 있는 검달을 둘러보고 정해진 코스대로 따라가면 수많은 맷돌탑과 솟대들이 신비스럽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한없이 돌을 올려 기묘한 형상으로 쌓은 솟대, 맷돌을 수십 개 올려 쌓은 솟대, 항아리로 쌓은 솟대 등이 지리산 자락과 어울려 이국적인 풍취를 자아냅니다. 그 조형미가 아주 뛰어나 사진작가들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돌절구 위에나 돌무더기 위에 맷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맷돌탑은 솟대와 함께 이곳의 독특한 볼거리입니다.
또한, 마고할미의 전설을 본떠 만든 마고성 돌담도 이국적인 풍취를 자아내는데, 삼성궁 수행자들이 육체적 수련인 행선(行仙)을 통해 정성껏 쌓아 올린 것입니다. 마고성은 우주의 창조자이자 인류의 시원인 마고 할머니의 전설이 현존하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마고복본 · 原始反本을 통해 잃어가는 인간의 본성인 자연성을 회복하고 인류 화합과 평화, 생명존중 사상을 가르치는 민족 교육의 장입니다. 또 이 근처 넓은 공터에서 선무, 택견, 본국검 등의 무술을 익히는 수련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채로운 볼거리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고대의 소도를 복원시켜 하늘과 단군 등에 제를 지내는 천제의식인 개천대제(開天大祭)가 매년 10월 삼성궁 수행자들에 의해 거행되고 있습니다. 천제의식 중에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의 독경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조 숙종 2년(1675)에 북애(北崖)노인이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는 바, ‘소도제천에서는 환무하며 백회를 연출하는 영신종합놀이 같은 것이 행해지는데 반드시 먼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연한 후에 행사를 진행하고 이들 경을 창하였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천제는 개천대제 또는 소도제천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우리 민족이 지내던 이 제천의식을 중국에 빼앗겨 지내지 못하다가 조선 고종황제 때 다시 지내게 되었으나 이 의식의 맥이 제대로 이어져 오지 못하고 또 변질되어 이곳 삼성궁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배달겨레의 뿌리를 찾으려는 수행자들의 도량인 이곳 삼성궁을 찾으면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어 도인촌 마을과 연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또 삼성궁과 연계해 찾아볼 만한 곳으로 삼성궁 입구에 있는 ‘동이(東夷)주막’이 있습니다. 지리산 참대의 대나무 진이 배어 든 대통밥이 이 집의 별미입니다.
도인촌 마을의 토박이인 이 집 주인 강대주씨가 개발하여 특허까지 받은 대통밥은 죽염 굽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지는 별식입니다. 대나무 속껍질은 죽황(竹黃)이라 해서 옛날부터 약재로 쓰던 것입니다. 대나무 한마디씩 자른 대통 속에 쌀과 검은 쌀, 검은 콩, 수수, 차조, 더덕 한 뿌리를 넣고 죽염으로 간을 해서 닥종이 뚜껑을 덮고 압력솥 안에 넣어 중탕으로 지면 대나무 진(죽력)과 죽황이 녹아드는데, 40분쯤 익히면 새파란 대가 누렇게 변하며 속에 든 밥도 다 익습니다.
1박 2일의 여정이라면 동이주막이나 도인촌 마을에 숙박한 후 다음날 아침 도인촌과 삼성궁을 둘러보고 삼신봉(1284m) 등산까지 할 수 있습니다. 도인촌 마을에서 삼신봉 정상까지는 1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오르는 등산로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 없이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정상에 서면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까지의 주능선과 지리산의 남부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삼신봉 정상에서 세석평전을 향해 갈 수도 있고 내삼신봉(1355m)으로 오를 수도 있으며 단천골로 내려갈 수도 있으나 승용차를 가져갔을 경우 올라갔던 길 그대로 백 코스하면 총 산행시간 3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