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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종류와 그 사례
1. 수필의 종류
수필의 종류를 분류하는 방법이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철호는 수필의 형식, 손광성과 고동주는 수필의 종류, 정진권은 수필의 갈래, 이관희는 수필문학의 명칭이라 하였다.
1) 장백일---서정수필. 사경수필. 서사수필.
2) 이철호---서간문. 일기문. 기행문. 전기문.
3) 황송문---에세이(essay)와 미셀머니(miscellany). 중수필과 경수필.
4) 손광성
(1) 제재에 따라---추상수필. 구상수필. 자전수필. 비판수필.
(2) 형식에 따라---지적 수필. 소설적 수필. 극적 수필. 비평적 수필.
5) 이관희---에세이 문학. 산문 수필문학. 창작 문예수필.
2. 종류별 사례
1) 에세이 문학
카이로스의 삶 은 종 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이자‘기회의 신’(神)인 카이로스의 조각상(彫刻像)을 보면 사람의 모습과 짐승의 모습을 함께하고 있다. 무성한 앞머리에다 뒷머리는 대머리고, 저울과 날카로운 칼을 양 손에 들고 있으며, 양 발 뒤꿈치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있다.
앞에서는 누구나 쉽게 카이로스의 머리털을 움켜쥘 수 있지만 바람처럼 한 번 지나가면 대머리여서 뒤에서는 잡아챌 머리털이 없듯이 기회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다. 양 발 뒤축의 날개는 늘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다려야하고, 기회가 왔을 때 저울처럼 분별하고 칼 같이 결정을 내려야한다는 가르침이리라.
시간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란 의당 뒤로 흘러가는 속성만을 지녔다고 믿어서이다. ‘시간’이란 우리 언어에는 단일 단어뿐이지만 신약성경을 쓴 그리스어인 헬라어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뒤로 흘러가는 시간이고, 또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을 ‘기회의 신’에게서 따온 ‘카이로스’(kairos)라고 하였다.
‘크로노스’는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돌면서 낮밤을 만들어가고, 공전궤도면을 일 년 주기로 크게 돌면서 봄여름 가을 겨울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동식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다. 어떤 일이 수행되기 위한 특정한 시간 또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계획이 세워지고 그 계획이 실행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저마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영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계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항해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목표점까지의 특정한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카이로스 시간을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반추하며 역동적으로 미래를 향하여 살아간다.
사람이 왜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삶의 가치가 최선 가운데 드러나는 진리요, 카이로스 삶이 성공의 열쇠이자 행복으로의 길라잡이요, 존재의 이유여서이다.
당신의 삶은 크로노스입니까? 카이로스입니까?
2) 산문 수필문학
달팽이 손광성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싶어서이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깨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
달팽이는 뼈도 없다. 뼈가 없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무슨 고집이 있으며 무슨 주장 같은 것이 있으랴. 그대로 `무골호인`이다. 여리디 여린 살 대신에 굳게 쥔 주먹을 기대해 보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자극에도 몸을 움츠리고 이마를 스치는 바람에도 고개를 숙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다. 예민해서요 수줍어서이다. 동물이라기보다 식물에 가깝다.
누구를 찾고 있는 것일까? 달팽이는 늘 긴 목을 치켜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그의 이웃은 아무데도 없다. 소라, 고동, 우렁 그리고 다슬기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이웃이 아니다. 아득히 먼 물나라의 시민들이다.
모든 생물이 다 그러하듯 달팽이의 고향도 바다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먼 조상들 중 호기심이 많은 한 마리가 어느 날 처음 뭍으로 올라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물달팽이가 육지 달팽이로 바뀌는 기구한 역사가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육지에 사는 달팽이의 목과 눈은 물달팽이의 그것보다 훨씬 가늘고 슬픔도 내림이라,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상들의 슬픔으로부터 그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실향민의 후예, 달팽이는 늘 외로움을 탄다.
어디 좋은 친구 하나 없을까? 달팽이는 개구리에게 다가가 본다. 개구리도 습지를 좋아하는 벗이 되어 줄 법도 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크고 너무 빠르다. 도무지 따라 잡을 수가 없다. 벌이나 개미는 어떨까? 부지런한 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배타적인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제 동족이 아니면 자기들의 먹이로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시인이 죽으면 나비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비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 아니, 달팽이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
달팽이는 나비 곁으로 다가간다. 그냥 사귀기만이라도 했으면 싶다. 그러나 나비는 잠시도 한 곳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 설사 머문다 해도 걱정이다. 어떤 때는 환희에 넘쳐 춤을 추다가도 금세 침울해져서는 두 날개를 접은 채 마른 나뭇잎처럼 조용하다. 그 엄청난 감정의 기복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아, 배추벌레하고 놀아야지.
달팽이는 그들 옆에서 잠시 외로움을 달래 본다. 외모는 좀 그렇지만 벌처럼 시끄럽지도 않고 나비처럼 팔랑대지도 않아서 좋다. 한데 한 가지 안 된 것은 그들은 탐식가라는 사실이다. 옆에 가서 등을 대고 누워도 눈 한 번 거들떠보는 일이 없다.
"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이다. 달팽이는 풀이 죽어서 돌아온다.
달팽이는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그의 입은 먹기 위한 기관이라기보다 차라리 이목구비를 갖추기 위한 필요에서 생긴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뭐든 먹기는 먹는 모양인데 그런 순간을 거의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짝짓기를 하는 장면도 들키지 않으니 말이다. 귀여운 금욕주의자, 이 모든 쾌락보다 더 절실한 어떤 문제가 있다는 말일까.
달팽이는 언제나 긴 목을 치켜들고 길을 떠난다.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비밀의 문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방황하는 영혼, 고독한 산책자.
그러나 달팽이는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기쁨을 노래하지도 않고 슬픔을 울지도 않는다. 매미에게는 일곱 해 동안의 침묵과 극기를 보상하고도 남을 이레 동안의 찬란한 절정의 순간이 주어지지만 달팽이에게는 그런 눈부신 순간이 없다. 그렇다고 종달새 같은 황홀한 비상이 기회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시며 그루터기며 사금파리 같은 현실, 맨살로 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육체의 고통이 때로는 영혼의 해방을 가져온다고 믿는 어는 고행승과도 같은 그런 표정으로 그저 묵묵히 몸을 움직일 뿐이다.
오체투지의 말없는 순례. 지나간 자리마다 묻어나는 희고 끈끈한 자국들. 배설물일까. 낙서일까. 아니면 그들끼리만 통하는 상형문자일까. 끝내 판독되기를 거부하는 암호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긴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3) 창작 문예수필
곶 감 피귀자
옷을 벗었다. 호흡이 불규칙하고 맥박이 빨라진다. 알몸위로 지난날이 출렁인다. 천둥과 장대비를 맨몸으로 견뎌낸, 유년의 기억들이 또렷이 남아있는 집과 이제 이별이다. 내 자신이 내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무수히 많은 말을 몸으로 뱉으며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짜릿하다. 간택이 끝나고 주홍빛으로 밀려나오는 속살을 드러내는 수모, 새댁이 된다는 건 여린 살갗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 낯설게 다가오는 내 모습이 익숙해질 때까지 바람과 햇빛과 수시로 내통하리라. 이제 나의 시간은 바람과 햇빛이 좌우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때린다. 가느다란 신음 뒤에 가벼우나 날카로운 촉수들이 돋아난다. 온몸의 세포들을 깨우는 일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부드러운 미풍과 단물을 꿈꾸던 풋풋한 젊은 날의 꿈들은, 달콤한 또 다른 삶을 위해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치며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다보면 두루 뭉실한 아낙이 되리라. 그리고 적당히 그을린 결 고운 피부로 환생하리니.
가을이 익어가기를 기다린다. 등이 따뜻해져 갈수록 물기는 빠져나가고 모서리는 더욱 둥글어지리라. 내장까지 보일 것 같은 날씨 속에서 내 몸도 추억처럼 익어 간다. 오랜 시간 아픔을 묵묵히 감당해내며, 감칠맛과 향을 내던 할머니처럼 단아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으리라. 부드럽고 따뜻한 맛은 줄어들지만 굳은살이 깊어질수록 마침내 오묘한 단맛을 내며 삶이 완성되리라. 외로운 시간 자신과의 싸움만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가슴을 가리고 몸을 비틀어 보지만 구경꾼들의 시선은 끈적거린다.
이따금 어둠 속에 침잠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빈자리의 그늘만큼 눈 밑의 그림자도 짙어가고 사라지는 하루하루를 견디면 짜릿한 역전의 시간이 오리니. 긴장과 이완, 길들여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중용의 도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은 일. 덜 마르면 쉽게 변하고 너무 마르면 질겨서 먹지 못하는 법. 그런가 하면 내 몸은 사람의 손이 닿으면 딱지 앉은 상흔처럼 색깔이 검게 바뀌고 만다.
감으로 한 생을 살아내고 또 다른 삶을 이어가는 곶감의 생은 얼마나 혼곤한가. 인고의 세월이자 형벌과 같은 기다림의 세월이기도 하다. 세상과 통하는 지혜를 배우는 나의 일생은 여자의 길!
한숨 같은 흰빛이 희미하게 피어오른다.
3 자전 수필
작가의 자전적 내용을 다룬 수필이다. 자전수필이라 하여 전 생애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단편소설이 인생의 한 단면을 다룬다면 자전수필은 아주 짧은 일화이다. 소설이 풀롯이면 자전수필은 스토리이다.
1) 예문
인연 피천득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졌다. ---아사꼬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예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2) 자전 쓸 때 유의할 점
(1) 자전수필은 신변잡사로 떨어지기 쉽다. 작가는 문학성을 살려 독자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도록 하여야 한다.
(2) 내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
(3) 주위의 친지나 친구로부터 오해를 받을 글은 삼가자.
(4) 과장을 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말자.
(5) 독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자.
(6) 수필의 옷을 잘못 입히면 양복 입고 갓쓴 형상이 된다.
3. 맺는 말
1) 수필은 가치 있는 체험을 정제된 언어로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열린 형식의 문학이다.
2) 수필의 종류 중에서 에세이, 산문 수필문학, 창작 문예수필, 자전수필의 예문을 살펴보았다.
3) 에세이는 토의 형식의 글이다. 지적이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이다. 현재의 수필가들은 서정수필이나 체험수필에 공들이는 작가가 많다. 에세이를 시도하는 작가도 시작은 에세이로 결말은 체험으로 끝나는 편이라 한다.
4) 산문 수필문학은 종래의 서정수필이나 서사수필을 이르는 말로 신변잡기를 벗어난 수필을 이르는 말이다.
5) 창작 문예수필은 수필도 문학이므로 창작되어야 문학이라는 주장이다. 그 주장이 일리는 있으나 창작의 정의가 새로운 것이라는 주장에는 논의 있어야 한다고 본다.
6) 우리 수필가들 대부분이 자전수필을 쓰고 있다. 수필은 개성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고백 문학이요, 자조문학이기도 하다. 신변잡사가 아닌 문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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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 애 써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